한국야구 역사상 최고의 게임을 선택하라면, 어떤 기준으로 선택을 해야 할까요?
각 사람들마다 자신의 기준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할 것이고 많은 주장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사상 최고의 게임 이라면 다음과 같은 조건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 우리팀이 있어야 한다
2. 우리팀이 이겨야만 한다
3. 상대팀이 죽도록 미워야 한다
4. 극적인 뒤집기 한판 승 이여야 한다
5. 우리팀이 객관적인 전력상 열세여야 한다
위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게임은 많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프로야구 개막전, 극적인 끝내기 홈런으로 막을 내린 원년 한국시리즈 6차전, 유두열의 한방과 최동원의 불을 뿜는 투구로 대반전을 이루어낸 84년 한국시리즈 7차전 등 프로야구 초창기의 명승부들만 해도 최고의 게임으로 뽑기에 아쉬움이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게는, 사상 최고의 게임은 프로야구 경기가 아니었습니다. 제 기준에서 사상 최고의 게임은 ..
82년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제27회 세계 야구선수권대회 한일전이었습니다.
대표팀
1976년 세계 아마 야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며 세계무대에 등장했던 한국은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5위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고 물러납니다. 하지만 다음해인 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에서는 김응룡 감독의 지휘아래 김재박과 이선희의 활약을 바탕으로 우승의 감격을 누리게 됩니다. 용기 백배한 한국팀은 실력을 갈고 닦아 78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고, 80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는 세계 최강인 쿠바에게만 뒤지며 홈팀 일본과 공동으로 준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점점 늘어가는 실력으로 칼을 갈던 한국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가 온 것은 82년 이었습니다. 82년 세계선수권 대회를 유치하여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마련한 한국이 넘기 힘든 벽은 쿠바였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문제로 쿠바가 세계선수권 대회 불참을 선언하고 나오자 한국에게도 서광이 비치게 된 것입니다. 정부에서는 “세계선수권 대회 우승시 병역 면제”라는 당근을 내밀며 선수들을 격려했고, 잠실 야구장이라는 당시로는 대단한 시설을 자랑하는 경기장을 지어 무대를 마련해 줍니다. 당시 사람들이 세계선수권에 걸었던 기대는 체신부가 기념우표를 발행했던 것 만으로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호사다마일까요, 호재가 연속되던 한국대표팀에게 가장 큰 문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프로야구의 출범이었습니다. 실업 팀에서 활약하던 선수들에게, 연고지 구단의 유니폼과 거액의 연봉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습니다. 아마야구에서는 애국심에 호소하며 선수들을 붙잡았으나, 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은 유혹에 넘어가 프로로 진출합니다.
프로로 진출한 선수들 중에서 대표팀에 가장 타격을 준 선수는 국제용 에이스였던 이선희였습니다. 니카라과 대륙간 컵 우승의 주역이자 당시 세계 최고 레벨의 좌완 투수였던 그는 대표팀의 에이스로 내정이 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거액의 배팅을 한 삼성에 입단을 하게 되자 대표팀은 좌완 투수가 단 한명도 없다는 딜레마에 빠졌고, 결국 당시 대학교 1학년이었던 박노준이 급하게 투입됩니다. 대신 에이스 몫을 해주리라 믿었던 최동원은 부상으로 제 활약을 하지 못했고 김시진 마저 저조한 성적을 보이자 대표팀은 막내였던 스무살의 선동열에게 에이스 자리를 맡겨야 할 만큼 다급했습니다.
대표팀의 4번 타자 홈런왕이자 붙박이 1루수 였던 김봉연의 공백도 컸습니다. 그의 공백은 동아대 김상훈과 원래 포수였던 인하대 김진우가 메워야 했고, 4번 자리는 영원한 3번 타자 장효조가 맡았습니다. 또 다른 파워히터 3루수 김용희마저 롯데로 가자 대표팀은 대회 내내 장타력 부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김용희의 자리는 한대화가 대신 하였으니, 전화위복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대표팀 최고의 파워히터는 팀 최다 홈런인 3홈런을 때린 이해창이 됩니다.
여기다가 마지막 순간까지 아마와 프로 사이에서 고민하다 오더가 나오기 직전에 프로로 도망가버린 대표팀의 1번 타자 김일권의 공백을 더하면 대표팀은 최고의 모습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었습니다. 김일권의 자리는 조성옥과 김재박이 대신해야 했지만, 선두에서 물꼬를 터줄 1번 타자의 부재는 여러모로 대표팀을 괴롭혔습니다.
충격의 역전패... 그리고 부활
1982년 9월 4일,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안고 기세등등 하게 출격한 대표팀의 첫 상대는 약체 이탈리아 였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상 하위권으로 분류된 이탈리아를 맞은 대표팀은 에이스 김시진을 내세워 필승을 다짐했지만, 약간은 느슨해진 상태였습니다. 4회 심재원의 우전안타로 1점을 먼저 얻은 대표팀이 더 이상 추가 득점을 내지 못하는 동안 이탈리아의 매서운 반격이 이어졌습니다. 5회까지 2안타로 완벽에 가깝게 막아주던 김시진은 6회부터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7회 이탈리아의 카롤리에게 역전 2타점 2루타를 허용해 2-1로 역전을 당하게 됩니다. 필사적인 반격도 실패로 돌아가 경기는 2-1로 끝나게 되고 대표팀은 충격의 1패를 당하게 됩니다. (주1)
이 패배는 약간은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던 대표팀을 흔들어 깨우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다음 경기인 미국 전에 등판한 선동열은 1회에 1실점을 한 것을 제외하면 환상적인 투구를 선보이며 공포의 미국 타선을 15 탈삼진으로 침묵시키며 2-1 역전승의 일등 공신이 됩니다. 당시 한국 최고의 투수였던 최동원을 스카우트 하러 한국에 들어왔던 메이져리그 스카우트들은 선동열의 투구를 보고 경악했고, 선동열이 해태에 입단하는 순간까지 선동열을 집요하게 따라다닙니다. 병역 문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박찬호보다 십 여년 이상 전에 한국인 메이저리거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선동열의 투구로 용기 백배한 대표팀은 파죽지세로 상대팀들을 연파하기 시작합니다. 선동열은 당시 전승을 기록하고 있던 대만과의 경기에 한번 더 등판하여 탈삼진 8개를 곁들인 완봉승을 거두며 대표팀의 구세주로 칭송 받게 됩니다.
9월 13일, 6승 1패를 기록하던 대표팀의 다음 상대는 약체 호주였습니다. 다음날인 14일 일본과의 대전을 준비하던 대표팀의 마음은 당면한 호주 전에서 이미 멀어진 상태였습니다. 선발 투수는 최동원. 초반 홈런 두개로 3-0으로 앞서나갈 때만 해도 쉽게 1승을 추가하고 일본과의 경기 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던 대표팀은 의외로 강하게 치고 나오는 호주의 타선에 당황하게 됩니다.
5회 갑작스러운 난조를 보인 최동원은 집중 안타를 맞으며 강판 되었고 구원 투수진들도 불을 끄기는커녕 기름을 끼얹어 8회까지 무려 6점이라는 점수를 헌납하게 됩니다.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린 대표팀은 8,9회에 무섭게 반격을 해 6대6 동점을 만들어 연장전에 들어갔으나 잠실 구장의 야간 조명 시설 부족으로 인해 승부는 다음날 오전으로 미루어 집니다. 연장전과 결승전에 대한 부담으로 잠을 설쳤을 대표팀은 14일 오전에 벌어진 연장전에서도 빈타에 시달렸지만 방어율 0를 자랑하던 철벽 마무리 임호균을 투입하여 호주 타선을 틀어막고 연장 15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유두열의 희생타로 힘겨운 승리를 거둡니다.
이틀에 걸친 혈전을 벌이느라 피로에 허덕이던 대표팀에게 주어진 것은 몇 시간의 휴식 뿐이었습니다. 토너먼트가 아니라 풀리그 방식이었지만, 똑같이 7승 1패를 기록하고 있던 한국과 일본의 경기는 사실상의 결승전이었습니다. 대회 최고의 카드였던 한일전은 14일 오후,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한일전 – 그 숙명의 무대
한일전은 언제나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카드입니다만, 이번 경기는 좀 특별했습니다. 일본 역사 교과서에 한국과 중국 등에 대한 침략사가 왜곡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시작된 교과서 왜곡 파동은, 2차 대전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내용의 역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겠다는 일본의 뻔뻔한 행위에 치를 떤 온 국민들의 반일 감정을 불태우게 만들었습니다. (주2) 전 국민이 한일전 만큼은 필승을 다짐했고, 대표팀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안겨졌습니다.
굳이 이러한 사건을 제외하고라도, 안마당에서 벌어진 경기의 상대가 일본이라면, 결단코 질 수 없다는 것이 대표팀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고향 팀의 유니폼과 거액의 연봉을 거부하기까지 하며 이 대회를 준비했던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은 한일전을 앞두고 피곤한 몸을 다독거리며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한일전의 선발투수는 미국과 대만을 잡으며 대표팀의 에이스 자리를 굳힌 선동열 이외의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호주전에서 등판해 많은 이닝을 던진 최동원과 임호균은 제쳐놓고 라도, 시리즈 내내 부진했던 김시진은 이미 에이스의 자리에서 물러난 상태였고, 오영일, 박동수, 박노준 등은 선발 감으로는 무리였습니다.
타선을 놓고 고민하던 대표팀의 어우홍 감독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오더를 작성합니다. 1, 2번은 조성옥 (중), 김재박(유)이 맡았고 중심타선에는 이해창(지), 장효조(우), 그리고 한대화(3)가 들어갔습니다. 하위타선은 유두열(좌), 김진우(1), 심재원(포), 정구선(2)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전날까지 9번을 치던 한대화를 지켜보던 배성서 코치는 한대화의 뛰어난 타격감을 주목하여 감독에게 보고 했고 어우홍 감독은 대학생이던 그를 처음으로 5번에 투입합니다.
경기가 시작되자 일본의 선발투수 스즈키는 완벽한 변화구 코너웍을 자랑하며 한국 타자들을 요리해 버립니다. 연이은 삼진과 내야땅볼. 간간히 나온 내야 플라이들. 7회까지 노히트노런을 당하던 대표팀은 7회말에야 한대화의 안타로 망신을 모면할 정도로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대표팀의 유일한 희망은, 에이스 선동열이 버텨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초반 제구 난조를 보인 선동열은 2회에 3안타를 맞으며 2점을 내주는 불안한 출발을 보였으나, 일단 위기를 극복하자 제 실력을 발휘하며 경기가 끝날 때까지 일본 타선을 단 1안타만 내주며 막아냅니다. 2-0, 살 떨리는 투수전이 지속되고 관중들의 손바닥엔 땀이 맺혀가기 시작할 때 즈음, 경기는 운명의 8회말에 접어들게 됩니다.
운명의 8회말
8회말. 2점차로 지고있는 한국으로서는 한 점이라도 따라가야 하는 절체 절명인 상황이었으나 타선은 하위타선인 8번부터 시작했습니다. 더군다나 7회 한대화가 처음으로 안타를 치고 나가 맞은 기회를 무산 시켜 분위기는 다운된 상태. 팀 내 최고참 이던 심재원은 철옹성 같던 스즈키에게 악을 쓰고 덤벼들어 중전안타를 뽑아냅니다.
무사 1루. 타자는 이번 대회 내내 2안타에 그치며 극도로 부진한 타격을 보이던 2루수 정구선. 어우홍 감독은 망설임 없이 대타를 불렀고, 선동열의 고대 선배였던 김정수가 헬멧을 쓰고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후배의 호투를 무산시킬 수 없다는 듯, 김정수는 중견수 키를 넘기는 적시 2루타를 때려내서 심재원을 불러들입니다. 2-1, 타선은 상위타선으로 연결. 일본 선발 스즈키는 마침내 강판당합니다.
구원투수인 니시무라가 등판하고, 1번 타자 조성옥은 희생번트를 대서 김정수를 3루까지 보냅니다. 2-1, 1사 3루, 타석에는 그라운드의 여시, 실업 7관왕, 77 대륙간 컵의 영웅 등 화려한 수식어로 도배된 아마야구 최고타자 김재박. 3루 코치 박스에서 사인을 보내던 어우홍 감독의 손이 바쁘게 움직입니다. 감독을 주시하는 김재박의 눈에 어우홍 감독의 왼손이 모자를 거쳐 가슴으로 내려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김재박의 눈이 번뜩입니다. “스퀴즈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일지는 모르지만 이 역사에 남을 플레이는 사인 미스였습니다. 당시 대표팀의 스퀴즈 사인은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이었습니다. 어우홍 감독은 상대 배터리를 속이기 위하여 거짓 스퀴즈 사인을 낸 것입니다. (주3) 감독의 예상대로 일본 배터리는 속아주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타자까지 속아버린 것이었습니다. 볼카운트 1-1에서 반쯤 일어나다시피 하며 바깥쪽 높은 공을 요구한 포수. 회심의 표정으로 공을 뺀 투수. 눈이 수박만 해진 우리의 여시 김재박.
김재박은 여기서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한국야구 사상 최고의 번트를 보여줍니다. 그의 눈이 번쩍인 그 순간, 어느새 그는 개구리점프로 땅을 박차고 타석에서 뛰어올랐습니다. 포수가 일어나서 받을 정도로 바깥쪽으로 완전히 빠지는 공을 향해 배트를 내민 김재박. 말도 안되는 우연인지, 정말 대단한 실력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공은 배트에 정확하게 맞고 3루 라이 페어지역으로 굴러갔습니다. 미친 듯이 1루로 뛰어가는 김재박. 당황한 포수가 잔디에서 볼을 더듬는 사이 뒤늦게 출발한 김정수는 홈인. 정말로 여시같은 김재박은 1루에서 세이프. 관중들은 탄성을 지르며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2-2 동점, 1사 1루. 더군다나 1루 주자는 발 빠르고 주루 플레이 잘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김재박. 타석에는 3번 타자인 이해창이 들어섰고, 큰 경기에 강하기로 유명한 그답게 멋진 중전안타로 1,3루를 만들며 투수를 강판시킵니다. 2-2, 1사 1,3루. 주자는 최고 준족들인 김재박과 이해창. 짧은 외야플라이 하나만으로도 역전이 가능한 순간. 관중들이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타석에는 영원한 3할 타자 장효조가 들어섰습니다. 바뀐 일본 투수는 세키네. 좌타자인 장효조는 정석답게 우측으로 당겨 쳤지만 세키네의 변화구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타구는 1-2루간 내야 땅볼이 됩니다. 황금의 찬스가 병살로 날아가려는 듯한 순간, 일본 2루수는 발 빠른 이해창을 의식해서 였는지, 노아웃으로 착각해서 였는지, 4-6-3 병살을 포기하고 공을 잡자마자 홈으로 송구합니다. 워낙 송구가 정확해서 필사적으로 달려오던 여시 김재박도 도리 없이 홈에서 태그 아웃 되었으나 이 판단 미스 하나가 경기의 승패를 결정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2사 1,2루. 타자는 5번, 한대화. 7회까지 유일하게 안타를 때렸던 그였기에, 관중들은 흥분하며 기대하기 시작합니다. 스트라이크, 볼, 볼, 스트라이크. 2-2 상황에서 몸쪽을 찌르는 회심의 직구.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주심의 손이 올라가지 않아 2-3 풀카운트. 8회말, 2-2 동점, 2사 1,2루, 2-3 풀카운트. 정말로 영화에나 나올만한 장면. 고뇌하던 세키네가 선택한공은 슬라이더. 그러나 긴장 탓이었는지 너무 변화 없이 회전만 걸린 밋밋한 공. 한대화가 제일로 좋아하는 구질. 주저 없이 돌아간 배트.
당겨친 공은 왼쪽 담장을 향해 아름답게 뻗어나갔습니다. 파울이냐, 홈런이냐.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흐른 후 공은 왼쪽 폴대를 때려버렸습니다. 전원 기립하여 열광하는 관중들. 메아리치는 함성소리. 숫제 울부짖는 MBC 김용 아나운서와 허구연 해설자. 승부에 쐐기를 박은 쓰리런 홈런. 이제 점수는 5-2.
9회초에 등판한 에이스 선동렬은 열광하는 관중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9회초를 범타로 끝내 2실점 완투승으로 경기를 마무리합니다. 일본을, 숙적 일본을 꺾은 것입니다.
한국은 우승을 차지했고, 3승의 선동열은 MVP와 다승왕, 방어율 0의 임호균은 방어율 왕에 등극합니다. 포지션 별로 뽑는 대회 올스타에는 선동열과 김재박이 우완투수와 유격수에 뽑히게 됩니다.
결말
세계 야구선수권대회 우승으로 한국은 국제대회 규모로는 두번째 우승의 기쁨을 누렸고, 1938년 세계 야구선수권대회가 생긴 이래 아시아권 국가로는 처음으로 우승을 하게 됩니다. 일본마저도 쿠바의 벽을 넘지 못해 항상 준우승에 머무르던 대회를, 비록 쿠바가 불참 했다 하더라도 우승했다는 것은 대표팀과 국민들의 마음에 큰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제가 이 경기를 감히 사상 최고의 게임으로 부르는 이유는 이경기가 한국 야구를 부흥시킨 주원인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반일감정이 팽배해 있던 국민들에게 이 게임은 성전(聖戰) 이었고 대표팀은 영웅이었습니다. 이 경기를 경기장에서, 집에서, 술집에서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야구라는 운동을 흥미를 가지게 됩니다.
대표팀 멤버들이 프로야구에 뛰어들자,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프로야구로 쏠리게 됩니다. 당시만 해도 국내 최고의 스포츠는 프로복싱과 고교야구 였으나 이 경기를 기점으로 해 갓 태어난 프로야구가 인기를 구사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래리버드-매직잔슨이 뛴 대학농구 결승전을 지켜본 팬들이 이 두 선수를 따라 NBA 팬이 된 것 처럼 말입니다. 대표팀 선수들은 초창기 한국 프로야구의 기틀을 잡은 것입니다.
뽀레
대표팀 멤버
이 름 |
포지션 |
나 이 |
소 속 |
김시진 |
투수 |
23 |
경리단 |
최동원 |
투수 |
25 |
한전 |
임호균 |
투수 |
26 |
한전 |
선동열 |
투수 |
20 |
고려대 |
오영일 |
투수 |
22 |
인하대 |
박동수 |
투수 |
22 |
동아대 |
박노준 |
투수 |
21 |
고려대 |
심재원 |
포수 |
29 |
한국화장품 |
김진우 |
포수 |
25 |
인하대 |
한문연 |
포수 |
22 |
동아대 |
김상훈 |
내야수 |
23 |
동아대 |
이진규 |
내야수 |
24 |
경리단 |
정구선 |
내야수 |
25 |
경리단 |
한대화 |
내야수 |
21 |
동국대 |
김재박 |
내야수 |
28 |
한국화장품 |
박영효 |
내야수 |
24 |
동아대 |
이선웅 |
내야수 |
22 |
인하대 |
조성옥 |
외야수 |
23 |
상업은행 |
박종훈 |
외야수 |
22 |
동아대 |
장효조 |
외야수 |
25 |
경리단 |
유두열 |
외야수 |
27 |
한전 |
김정수 |
외야수 |
23 |
고려대 |
이해창 |
지명타자 |
29 |
한국화장품 |
(주1)
이탈리아는 6일 벌어진 일본과의 경기에서도 충격의 3-2승을 거두며 대회 최대의 다크호스로 떠올랐지만 그 후 벌어진 7게임에서 전패하며 10개국 중 꼴지를 기록합니다.
(주2)
일본 문부성이 지난 82년 7월 검정을 마치고 공개한 1983학년도용 역사 교과서에 한국과 중국 등에 대한 침략사가 왜곡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시작된 교과서 왜곡 파동은 특히 2차 대전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역사 왜곡이 일본 정부의 주도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각료들의 망언이 이어지면서 교과서 왜곡은 일본과 한국, 중국 등의 외교적 마찰로 비화되었습니다.
일본 고교 교과서 중 16종에서 24개 항목, 167군데가 왜곡 또는 부적당하게 표현된 것으로 드러났고, 이들 교과서는 8.15 해방을 "일본이...지배권을 상실했다"로 기술하고 `침략'이라는 단어를 모두 삭제했으며 침략 관련 단어도 `탄압'을 `진압', `출병'을 `파견',`억압'을 `배제', `수탈'을 `양도' 등으로 바꾸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거센 반발의 부딪친 일본 정부는 몇 차례의 발표 끝에 11월 24일 근-현대의 역사적 사실 기술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의 의견을 적극 배려하겠다는 새 `교과서 검정기준'을 발표하며 파동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주3)
현대의 김재박 감독은 아직까지도 당시 그의 번트가 사인 미스가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분위기상 기습번트를 노린 것이었고, 그 도박성 짙은 선택이 성공한 것이었다고 말입니다. 물론 기습번트의 명수인 김재박 감독의 명성을 생각해 볼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지만, 동점상황에서 1사 3루, 자칫 잘못하면 3루 주자까지 협살당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을 고려할 때, 3루 주자와 약속없이 기습번트는 좀 무리일 듯 싶습니다. 3루 주자였고 어우홍 감독의 사인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김정수 선수가 스타트를 일찍 끊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사인 미스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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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여간 기분 조오~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