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요리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과 함께 미식가와 요리의 발전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한다.
현재의 프랑스는 옛날 골 족이 살던 곳이다. 골 족의 입맛은 거칠었으며, 또 그 후에 골에 이동해온 프랑스 족은 그대로 골 인의 음식법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고대 로마 요리의 영향은 피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 땅의 산물로 고대 로마 문화의 기술을 빌어 만들어낸 것이 프랑스 요리의 출발점이었다. 전쟁과 역경과 기근이 계속된 중세에는 프랑스 요리의 원형이라고 할 만한 것은 수도원이나 승원의 피난처를 찾았다가 그 암흑시대가 사라지자 요리는 승려의 손을 떠나 그 지방 특유의 요리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카트린 메디치가 앙리 2세에게 출가할 당시 미개의 나라 프랑스로 솜씨가 뛰어난 조리사를 데리고 간 후부터 이탈리아 요리가 전해져, 프랑스 요리사의 르네상스가 되었다. 그 이탈리아의 조리사에게서 프랑스 궁중의 요리사가 배웠고, 다시 파리에 요리 학교가 생겨 많은 요리사가 양성되었다.
미각이 발달된 인종이었다는 것과 항상 더운 지역과 비교적 광대하고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재료와 해산물, 그리고 요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좋은 술이 많은 것과 경제적인 여유 등의 요인들이 겹쳐서 프랑스 요리가 세계 2대 요리로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이 요리도 궁중 귀족의 것으로서, 일반 서민은 감히 넘겨다볼 수도 없었던 것이었지만, 프랑스 혁명 후 궁중과 귀족들을 위하여 요리하던 전문 요리사들이 시중에 나와 먹고 살기 위해 처음에는 우리나라 포장마차와 비슷한 집을,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돈을 번 후에 레스토랑을 차린 것이 발달의 계기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17세기 프랑스의 식습관에는 형식, 내용 면에서 모두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 이유는 전 반세기에 앙리 4세의 요리장 라바렌이 출현하고, 후 반세기에 루이 14세가 탄생한 데 있다. 루이 14세는 섬세하고 맛있는 것보다 식욕을 만족시키는 요리를 좋아하여 섭정 시대에 이르러서 프랑스 요리는 완성기에 도달하고, 루이 15세의 친정 시대에도 미식을 좋아하여 왕이나 귀족들이 스스로 요리를 만들기도 하게 되자 요리에 귀족들의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그 다음 시대에 프랑스 요리의 진정한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A. Carem이 나타나 에스코피에가 현대 프랑스 요리의 규범으로 알려진 를 출판하여 요리를 근대화시켰다. Carem 이후 프랑스 요리는 간소화되었고, P. 옥타비에 의하여 현대화되었으며, F. 푸앙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1370년 샤를 5세의 요리사인 기욤 티렐에 의해 씌어진 는 사실 중세 요리의 충체이며, 단지 이 책은 고기 요리에 대한 내용 뿐만 아니라 이름이 뜻하는 대로 전통적인 요리, 식생활 습관에 대한 모든 것이 서술되어 있는 요즘의 요리 백과사전이다. 16세기 초까지 프랑스 요리는 영국의 요리와 마찬가지로 상상력이 없었다. 17세기에는 프랑수아 1세 치하에서 요리 기술이 더욱 발전하여갔으며, 르네상스의 세련미가 요리에까지 파급되어 예술의 경지에 이르기 시작했다.
프랑스 요리의 근대적 발달의 근본은 1553년 오를레앙 공작이 미디치가의 카트린과 결혼하면서부터다. 그때 그녀는 피렌체 출신의 요리사들과 함께 프랑스로 왔는데 메디치가는 향신료의 풍미로 유명했다. 프랑스 요리는 이탈리아로부터 수입된 것이다. 그 당시 대부분의 요리사들은 프랑스 욕리의 커다란 변혁에 접했으나 다른 일부 요리사들은 여전히 과거 전통의 계승만을 중시했다.
루이 13세 시대에는 요리에서 그다지 발전한 것은 없으나 요리의 법칙과 조리법을 체계적으로 기술해놓은 책이 1651년에 바렌에 의해 간행되었는데 이것이 다. 이 책을 기본으로 하여 많은 비약적 발전을 하게 되었다. 1654년에 니콜라드 본 퐁스는 를 썼다. 그는 음식의 맛은 복잡한 조리로 인해 가려져서는 안 되는 아주 단순한 자연적 조리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여전히 생각으로만 그쳤으나, 17세기 말에 차, 커피, 코코아, 아이스크림 등의 출현과 더불어 커다란 변혁이 이루어졌다.
특히 포도주의 영역에서 커다란 변혁이 이루어졌는데, 동 페리뇽이 샴페인을 발명한 것이 그것이다. 17세기 생각들이 실제로 실천된 것은 18세기였다.
조리는 단순성을 지향했는데, 말하자면 요즘 우리가 말하는 누벨 퀴진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이 시기에 최초로 음식을 만드는 여자 요리사와, 무엇인가를 발명할 수 있는 남자 전문 요리사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는데 요리 역사에서 볼 때 큰 변혁임에 틀림없다.
1691년에는 마시알로가 펴낸 가 있었다. 17세기 중기 요리의 유행은 단순해졌고 과도하게 낭비되었던 데코레이션보다도 맛에 치중하게 되었다. 혁명 동안의 반체제 기간이 지나 나폴레옹 시대와 더불어 풍요가 돌아왔다. 탈레랑에 보존되어 있는 테이블에는 그 사치스러움과 배열들의 예술성과 모여 앉았던 사람들로 유명하다.
1755년에 태어난 브릴라사바랭은 조리 변혁에 대해 느끼고 그 변혁을 인정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판사이고 유명한 미식가였는데, 이란 저서를 냈다. 마리 앙투안 카렘은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무지했던 사람이었으나, 그는 여러 맛들의 조화로운 배합을 할 줄 알았으며 불필요한 내용물에 대한 조리를 없애는 데 노력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가난한 석공의 16번째 아들로 태어나 10살 때 부친으로부터 파리 근교의 작은 요리점에서 마지막 저녁 식사를 얻어먹은 뒤 길거리에 버려졌다. 그 후 그는 작은 요리점을 전전하다가 멘이라는 성문 근처의 한 조리사로부터 조리의 기초를 배워 16세에 파리의 유명한 제과업자들 중 하나인 비엔 가에 있는 바일리 가게로부터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도움을 받았으며, 특히 왕립 도서관 판화실에 들어가 건축 모형 사본을 뜰 수 있게 허락을 받았고, 그가 만들어낸 모형들 중 어떤 것들은 바일리 가게의 중요한 고객인 나폴레옹 1세로부터 찬탄과 경이에 찬 평을 받았는데, 그것은 피에스 몽테라 불리는 웨딩 케이크 위의 장식용 과자로 당시 연회의 인기 품목으로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유명한 의사인 장 알리스를 만나고 그로부터 조언과 격려를 받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의 재능과 근면함으로 그는 단시간에 두각을 나타냈고 그의 유능함을 듣고 있던 바일리 가게의 단골 손님이었던 당시 프랑스 외무대신인 탈레랑으로부터 시중을 들어줄 것을 제안받아, 탈레랑의 조리장을 20년간 지도했는데, 탈레랑은 그가 제공하는 요리의 형태와 호사스러움을 느끼는 감각과 재능으로 외교관들을 위한 식도락을 훌륭하게 만들어냈다. 후에 그는 조지 4세가 된 영국 섭정 왕자와 비엔 궁전, 영국 대사, 베그라시옹 공주, 스튜어트 경을 위해서도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주었다. 그는 조리사, 제과사일 뿐만 아니라 이론가이기도 했으며 역사에 대한 일가견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말년을 로트시 남작가에서 보냈으며 로랑 타일라트로부터 숯과 고기 굽는 기구로 천재성의 불꽃을 발휘하는 조리장이라는 평판을 들었다.
후에 알렉산드 1세는 탈레랑에게 카렘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먹던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만들었다고 술회했으며 그를 일컬어 왕들의 요리사요 요리사 중의 왕이라고 했다.
그는 (1681), (1815), (1815), (1828) 등 요리책, 페스트리책, 요리 이론책을 통해서 요리업계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 요리의 깊이와 그 예술성에 이르기까지 요리를 통해 그 시대의 분위기에 적합한 화려한 구성, 중심부 장식, 그리고 시간적 연출에 대해 기술했다. 오늘날 그는 고전 프랑스 요리의 창시자로도 추대받고 있다.
그밖에 제일의 미식가 퀴롱스키 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17세기 말경에는 고전 요리가 유명한데, 고전 프랑스 요리에는 신선하고 우수한 음식 재료, 재능 있는 요리사, 간단하고 예술적이며 완전한 표현 양식, 미묘하고도 균형 있는 맛, 감상할 줄 아는 고객 등 완벽하게 짜인 메뉴들로 이루어졌다. 그 후 여러 사람들의 노력이 19세기까지 이어지고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오귀스트 에스코피에의 출현으로 지금까지의 프랑스 요리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주방 시스템 창시자도 그였고, 프랑스 식당의 운영이 부분화되어 있었던 것을 통합 조정 운영을 시도하여 성공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다. 뒤부아의 러시아 음식 서비스 방법을 도입하여 현재의 음식 서브 순서를 창안한 사람도 그였다. 고객으로부터 주문을 받은 전표를 3장으로 만들어 한 장은 주방, 한 장은 접객원, 또 한 장은 캐셔에게 돌아가도록 하고, 특별히 전표에 고객의 성명을 적어 그 고객이 재차 방문했을 때 그가 선호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미리 알아타리는 고품위 음식 서비스의 틀음 마련한 것도 그였다.
그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1920년 레지옹 돈뇌르 훈장을 수여받았고, 후에 귀족 단체의 정회원이 되어 모든 조리사의 사회적인 지위와 명예를 높이는 데도 큰 공헌을 했다. 1966년에는 마침내 그가 태어난 집이 조리 예술 박물관으로 개조되기까지 했다. 오늘널 저명한 요리 전문가 및 요리 연구가, 요리책을 쓰는 사람, 그리고 요리를 직접 만드는 조리사까지 그가 만들어낸 조리법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에스코피에가 죽은 후에는 요리장의 개인 명함에 표기하는 것 중 가장 권위가 있는 상을 수상하고 표창받거나 훈장을 받았다는 것보다 에스코피에 밑에서 수업을 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오늘날 요리는 점점 더 간편성, 즉 자연적이며 가벼운 음식(비만 방지)을 향해 치닫고 있으며 이 가볍고 자연적이란 말은 알랭 샤펠과 같은 유명한 요리사와 함께 누벨 퀴진이라는 말을 낳았다. 그러나 진정한 요리사는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경험과 비법, 전통과 함께 지나간 옛 시대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늘날 요리는 인문, 사회, 과학, 기술, 예술의 진보가 가져다준 혜택의 선물이다. 모든 요리는 요리사가 정성을 갖고, 먹는 사람을 위해 진정한 마음으로 만들어야 한다. 요즘은 알약 하나로도 모든 영양이 섭취될 수 있지만, 맛의 세계에 질서와 미를 추구하면서 미각에 역점을 두어 맛을 창조하는 진정한 지휘자는 요리사들이다. 금방 잡은 생선을 주방에서 더운 요리로 만들어 제공하고 저녁에 예술적인 감각에 가득찬 요리를 전통적인 요리법으로 생산하는 것을 공장에서 기계적으로 대량 생상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다. 과학이 발전하고 스피드 시대가 와도 예술의 요리를 감식할 미식가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