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림산방은 첨찰산을 깃봉으로 수많은 봉우리가 어우러져 있는 깊은 산골에 아침 저녁으로 연무가 운림(雲林)을 이루었을 것이니 그 의미를 찾기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이곳에서 소치(小痴)는 미산(米山) 허형을 낳았고 미산이 이곳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의제 허백련이 미산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익힌 곳이기도 하다. 이와같이 유서깊은 운림산방은 소치(小痴) - 미산(米山) - 남농(南農) - 임전(林田) 등 4대에 걸쳐 전통 남화를 이어준 한국 남화의 본거지이기도 하다는 말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운림지 한가운데는 조그마한 섬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토종 백일홍을 심어두었다 한다. 소치가 직접 심은 것이니 150년은 된 백일홍이라고 한다. 그냥 백일홍이 아니고 토종 백일홍이란다.
운림산방은 백일홍뿐만 아니라 이곳 저곳에 소치가 직접 심은 꽃과 나무로 뒤덮여 있어서 이곳이 정녕 별천지의 산방(山房)임을 실감케 한다. 그 곳에는 아직도 꽃망울을 간직하고 있는 동백, 나무 줄기는 첫해에 녹색이며 이듬해부터 자흑색 이라는 오죽, 줄기는 지팡이나 화살 재료로 쓰인다는 화살나무, 은행나무, 심산해당화, 자목련, 백목련, 백매화, 크리스마스 때 장식용으로 쓰인다는 호랑가시나무, 후박나무, 팽나무, 수양버들, 맥문동, 단풍나무가 운림산방에 널려 있었다. 정원에 잘 어울리는 나무와 꽃들이어서 과히 풍경과 잘 어울리는 정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였다.
운림삼방을 떠나서 우리들이 가고자 하는 곳은 신비의 바닷길이었는데 언덕을 오르는 길이 장난이 아니었다. 작은 대관령이라고 표현을 하면 될 것 같았다. 교장 선생님께서 언덕의 정점에서 보면 바다가 가슴속으로 들어온다고 했는데 산안개가 우리들의 시야를 가로막아 볼 수 없어서 아쉬움이 남았다.
우리들은 바닷가를 달려 드디어 신비의 바닷길에 닿았다. 현대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이곳 신비의 바닷길은 1975년 주한 프랑스 대사 "피에르 랑디" 씨가 진도로 관광을 왔다가 이 현상을 목격하고 프랑스 신문에 소개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1996년에는 일본의 인기가수 덴도요시미씨가 신비의 바닷길을 주제로 한 "진도이야기(珍島物語)"노래를 불러 히트를 하면서 일본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아쉬운 것은 우리들이 간 날에 바다가 갈러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다른 아쉬움은 비가 많이 와서 잠시동안 바다가에서 머물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이었다. 신비의 바닷길은 진도군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 약 2.8km가 조수간만의 차이로 수심이 낮아질 때 드러나는 현상이지만 40여m의 폭으로 똑같은 너비의 길이 바닷 속에 만들어진다는데 신비로움이 있어 갑자기 애굽의 군대가 쫓아 올 때 모세가 기도를 했을 때 바닷길이 열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사하게 건널 수 있었던 영화 '십계'에서 보았던 모세의 기적이 생각났다. 바닷길 입구에는 2000년 4월 제작된 뽕할머니 상징 조형물이 설치돼 있었고 비에 젖은 모습이 애처롭게 다가왔다. 우리들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숙소를 향해서 출발했다. 답사를 왔을 때 보다 시간이 덜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한번 눈에 익은 지역에 대한 낯설움이 벗겨진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숙소에 돌아온 아이들은 저녁식사를 한 후 학급별 시간을 가졌고 식사를 할 때 미리 봐 두었던 노래방 기기가 설치되어있는 방에서 학년별로 시간을 가지도록 해 주었다. 그런데 좁은 공간에 50 - 70여명의 아이들이 모여 있으니 사우나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숨겨놓았던 노래를 마이크로 뱉어내었다. 노래를 하는 과정에서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보다 노래를 하는 횟수가 빈번하지 못한 것은 여학생들의 극성스러움과 남학생들의 적극적이지 못한 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씩 즐거움 시간을 보내고 나오는 아이들 중 땀으로 목욕을 한 듯한 모습을 한 아이들도 있었으나 짧은 시간이라 아쉬운 듯 했으나 우리들이 아이들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캠프파이어나 학급별 장기 자랑을 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함에 미안할 뿐이었다. 아이들의 시간이 지나자 교사들도 자신들의 시간을 가졌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우리들의 놀이문화가 한정적이라는 것이었다. 전날 밤 가요주점에서 늦게까지 시간을 보냈기에 일부는 방에서 나름대로의 놀이문화에 열심이었고 일부는 상가의 선술집에서 죽순무침과 도토리묵 무침으로 그들의 몸 속에 맑은 이물질을 잔에 담아 넘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