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길 거부하는 수구반동 세력의 "테르미도르의 반동"인지 아니면 노무현 식 신자유주의의 순항을 위한 "올인" 계략인지 아직은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세상은 뒤집혔다. 당장 7만 명이 넘는 이들이 광화문에 모였고, 광주에서도 부산에서도 탄핵반대를 외치는 목소리가 온 나라를 뒤덮고 있다. 탄핵안이 가결된 그 날 더럽고 꿀꿀한 기분으로 한 나절을 어영부영 보내고 난 후 우리는 티비 앞에서 여론조사의 발표를 보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런데 불과 며칠 사이에 상황은 야릇하게 흘러가고 있다. 여론조작과 언론공세를 탓하며 제 분수를 모른 채 투덜대는 야당은 그렇다 치자. 그렇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폭거라는 둥 헌정 위기, 국정 문란이라는 둥 갖은 해괴한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질서유지당으로서의 본색을 유감 없이 드러내는 열린우리당의 방황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렵다. 급기야 정동영은 오늘 시위 자제를 호소하고 나섰다. 아직은 흐뭇하고 반갑기 짝이 없는 현상이겠지만 이 시위가 언제 어느 곳으로 튈지는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무현을 향한 여론과 탄핵을 향한 여론 사이에 놓은 간극은 바로 그런 불안의 원천이다. 헌법재판소의 무난한 판결로 사태를 수습하고 여세를 몰아 총선에서 대박을 터뜨리려는 열린우리당의 정략은 순조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유동적인 상황은 열린우리당이 그리 쉽게 헤게모니를 쥘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자발적인 시민들의 저항과 행동은 열린우리당이 어떤 오버를 하든 쉽게 그들의 의지대로 따라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스로 물어보자.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데 "탄핵무효 국민행동"의 행보 역시 시원찮은 것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인가 친노 대 반노인가라는 이상한 대비를 내세우며 열린우리당의 헤게모니를 조금은 따돌리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잘못 들어선 길이란 점을 덮어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미리 밝히자면 나는 민주노동당의 비판적 지지자이며, 권영길 후보를 지지하는 무슨 지식인이지 뭔지 하는데 참여했던 작자이다. 사태를 분명히 하자.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는 IMF의 신탁통치라는 금융위기를 발판으로 벤처 캐피탈리스트, 펀드 매니저, 닷컴 졸부 등과 함께 입성했다. 그것은 거의 해일처럼 들이닥친 구조조정의 태풍을 낳았고 실업과 비정규직 노동의 참담한 현실을 선물로 주었다. 국민의 정부는 서슬 푸른 군부통치의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겐 전에 없던 민주주의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들에겐 인간의 모습을 한 신시대형 개발 독재였다. 이것이 파시즘적인 개발독재와 다른 점은 국민적 합의를 동원하는 새로운 조합주의적인 통치체제라는 점 뿐이다. 그 어느 것이든 민중적 이해와 상관없는 정권임은 다르지 않다. 게다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는 노사정 위원회니 청소년보호위원회니 아니면 국가인권위원회니 하는 수많은 시민사회 참여형 위원회를 통해 참여의 환상을 심어주었다. 또한 통합된 정치적 개혁과 변화의 프로그램에 대한 상상은 질식시키고 사안마다 각 이해집단의 협의와 조정으로 풀어낸다는 새로운 위원회형 정치체제를 만들어 놓았다. 물론 시민사회단체는 총체적인 정치 변화란 낡은 사회주의정치의 유산일 뿐이라고 빈정대며 무수한 모모 연대와 위원회로 흩어져 열심히 신자유주의적인 퇴행에 "참여"했다.
그리고 노무현 정권이 들어섰다. 노무현 정권은 거의 공포에 질려있는 국민과 상대하고 있다. 전무후무한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고용은 줄어드는 시대에 대다수 사람들의 꿈은 오직 하나 변변한 일자리와 약간의 임금 소득이다. 탄핵 정국이라는 이름의 정세 역시 이같은 분위기를 판박이처럼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이 웃지 못할 상황에서도 여전히 국제신용평가기관의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성장과 발전이라는 근본적인 한계는 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맹위를 떨친다. 국민의 정부가 경제적 위기 관리를 위한 조합주의적 정치 체제를 효과적으로 만들어 놓았고, 그 최대의 수혜자는 노무현 정권이었다. 이제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적인 구조 개혁을 성공리에 마친 한국 자본주의의 두 번째 라운드의 위기를 관리하고 해결해야할 책임을 떠맡았다. 그것은 전무후무한 빈부격차와 실업, 공교육의 위기 그리고 이런 사회적 변화가 초래한 숱한 혼란이다. 신자유주의의 슬로건은 수도 없이 바뀌어왔다. 지식주도, 유연화, 혁신과 변화 등의 개념은 입사준비용 시사상식에나 등장하는 먼 옛날의 용어가 되었다. 우리는 이제 "배드 뱅크"와 "신불자", 생계형 자살, 이태백과 사오정, 웰빙족과 명품족같은 신조어들에 휩싸여 있다. 노무현 정권이 서있는 자리도 여기이다. 한국 자본주의는 세계화 시대의 경제에 연착륙하였고 IMF와 굴지의 신용평가사들과 초국적기업들로부터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들었다.
노무현 정권은 바로 그 변신한 한국 자본주의의 사회적 위기 관리의 책임을 떠맡았다. 다행히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변화의 흐름에 "유연하게" 정착한 신자유주의적 정권은 여러 가지 보호막에 싸여 있었다. 노빠부대는 바로 노무현 정권의 아이러니 그 자체이다. 그 어느 때보다 가진 자들의 정권으로 기능하는 노무현 정권이 그 어느 때보다 없는 자들의 희망의 역할을 떠맡은 것이다. 한국 보수정치의 구태에 염증 난 이들의 선량한 희망을 모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군부독재를 무너뜨리고 쟁취한 시민민주주의를 수호하여야 한다는 이들의 선의를 의심할 생각 역시 눈곱만큼도 없다. 그렇지만 넥타이부대의 전설은 이제 끝날 때도 되었다. 한나라당이나 민주당보다 열린우리당이 건전하고 신선하며 양호하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노무현 정권이 군부독재의 공포정치보다 훨씬 국민적인 정권이란 주장은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지만 노무현 정권이 변화된 한국 자본주의의 관리를 위해 전보다 더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정권이란 점은 인정할 수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약간의 지역주의와 악랄한 반공, 반북주의 그리고 옛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보수주의를 버무린,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데올로기 없는 헤게모니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대중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향한 반동 때문에 가까스로 살아남았고 또 버텼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고 있는 힘들은 바로 한국 자본주의가 변화하며 낙오를 강요당한 이들의 분노와 좌절감이 뒤섞여 있다. 임금 경쟁에서 밀려난 중소기업인들, 대형할인점에 쫓겨난 재래식 상가의 상인들, 자기관리와 취업을 강요당하는 중산층 이하의 여성들, 심지어 미래가 안 보이는 데도 끊임없이 능력과 창의성, 계발을 강요당하는 지친 20대들(이들이 반공단체를 능가하는 막가파 꼴통 보수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그들이 바로 그 지지세력 아닐까. 따라서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수구반동 대 민주의 이분법의 틀로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면 그렇게 입바른 소리 잘하는 진보는 뭐했냐고 물으면 할 말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진보진영은 지금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로 이어지는 변화의 와중에서 아주 넋을 잃고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들러리로 전락한 세력과 당장 절체절명의 삶의 순간에 사로잡힌 이들의 분노에 끌려 다니는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물론 압도적으로 성공하였으며 대세인 것은 전자이다. 이들은 사회책임경영, 상생의 기업문화 등을 내세우고, 주총을 쫓아다니고 공인회계사와 변호사를 동원해 투명 경영과 합리적인 착취를 강변한다. 사회운동은 이제 재단을 설립하고 변호사의 자문을 받고 공인회계사의 평가를 받는 프로페셔널한 비즈니스가 되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세력은?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노동자 혹은 빈민화한 제조업분야의 노동자들과 함께 주변화될 만큼 주변화되고 있다. 다들 자기고용과 기업가정신의 신경제의 이데올로기에 홀라당 넘어가 착취에 대한 반대는커녕 행여나 자기가 부족한 게 있을 새라 [아침형 인간]을 읽으며 자신을 혁신시키는 것이 신경제의 시대의 삶의 풍경이다. 따라서 저임금과 비정규직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절망적인 분노에서 계속 악순환을 거듭하는 전투적인 조합주의는 여간 심란하고 심지어 거리를 두고 싶은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민노총과 진보적인 사회운동은 계속 그런 빈민화된 민중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지난 토요일 오후 2시 서울역 앞에서 벌어진 초라한 민중운동 진영의 집회와 그리고 울산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의 쓸쓸한 분노는 아마 그런 진보진영이 직면하고 있는 답보의 단면이었을 것이다.
다시 탄핵정국으로 돌아가자. 맘에 들지 않지만 그것이 사회적인 위기관리를 떠맡은 노무현 정권의 순조로운 통치를 위한 호기라는 점은 분명하다. 노무현 정권은 어쩌면 다수 여당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인지 모른다. 나아가 국민의 정부 시절 순조롭게 완수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뼈대 위에 정책과 제도의 살을 붙여 무슨 걸작품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지금껏 참여정부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장벽은 놀랍게도 민중 진영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를 달리하는 보수정당이었다. 그러나 판은 새롭게 짜일 것이다. 노무현 정권이 노빠부대와 참여형 경선 그리고 대선을 통해 확보한 국민적 헤게모니를 사사건건 무너뜨리려 했던 반동적인 보수 야당은, 이제 몰락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에서 우리가 진정 우려하는 것은 열린우리당과 현 정권이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향한 비판을 보수반동에 대한 저항이란 이름으로 흡수해버리는 것이다. 이는 더없이 나쁜 시나리오이다. 항간에서 들려오는 총선 연기와 개헌 음모의 시나리오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설령 그 시나리오가 현실화된다 해도 그것은 제2의 탄핵이 될 것이고 또 한번 들불같은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궁지에 몰렸어도 사양길에 접어든 보수적인 당파들이 그런 무모한 모험을 하리라고 생각하긴 어렵다. 그런다면 아마 그들은 아마 가장 추악하고 참담한 파멸에 이를 것이다. 따라서 몰락을 자초한 보수적인 당파들에 관하여 심판을 내리는 일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다.
그렇지만 노무현 정권이 이후의 상황에서 발휘할 바람직하지 못한 효과를 어떻게 저지할 수 있을지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국민의 힘으로 재기에 성공한 참여정부는 이제 제대로 국민의 살림과 이해를 살피는 정권으로 거듭 날까. 물론 그것은 전연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정반대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참여 정부를 위해 국민에게 남겨진 것은 노동운동이 아니라 성장과 발전을 위한 사회적 협의에 참여하는 것이고, 부안 거리에서 떼지어 시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자세로 대책 협의회에 참여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신불자가 되어, 불안한 미래에 몸서리치는 반실업자가 되어, 이 미증유의 변화에 입도 벙긋 못한 채 끌려다닐 것이다. 결국 탄핵 정국을 돌파하는 옳은 대안은 질서유지당이 되어버린 열린우리당의 개입을 물리치고 국민적인 저항의 진정한 방향을 가늠하는 길이다. 무엇보다 관건은 화염병을 던지고 육탄전을 벌이며 시내 전역을 숨바꼭질했던 울산의 노동자대회와 10만개의 촛불을 밝히고 아름답고 성숙한 축제를 벌인 광화문의 행사장 사이에 놓인 거리에 있다. 그 거리는 곧 참여정부가 수구세력의 정치적 반동의 피해자라는 연민과 분노 그리고 신자유주의적인 개혁이 초래한 불안하고 참담한 삶을 향한 분노 사이에 놓여있다. 이 거리가 참여정부형 신자유주의적 정권이 성공적으로 데뷔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줄지 아니면 군사독재의 유령에 짓눌린 채 민주주의만을 되뇌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민중적인 개입의 출발점이 되어줄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이렇게 신자유주의적 질서 수호의 이데올로기로 둔갑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그 무엇으로도 완성될 수 없고 완성되어선 안되는 명령이다. 우리는 이미 실현된 민주주의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부족한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