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상님, 오겼는디 술상 좀 근사허게 차려내와봐.
-여자의 어머니는 젊어서 퍽 정열적이었을 듯 말에 힘이 있고 능동적이었다.
-염려마시오. 내 다아 준비했으니께 좀 지두리시오.
-아! 이 배우 보니께 우리 딸 생각이 더 나네. 뭣허러 우리 딸 감시를 그리 심허게 하셨오? 그때는 미워 죽것둥만 그려. 영화니께 그렇치 진짜먼 사열나것둥만.
우리는 모두 웃었고 승미는 맞장구를 쳤다.
-아따 나 좀 때려보시오. 속으로 미워 마시고.
그때 누가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김 노인을 불렀다. 젖소 한 마리를 팔라는데 팔 의향이 있느냐? 김노인은 많은 젖소를 키우고 있었다. 손님이 오셨으니까 나중에 전화하겠다. 했다.
-돈은 암것도 아니여. 식구찌리 머리맞대고 사는 게 행복이지. 그 깐 돈 암것도 아니라니께.
노인은 거의 울고 있었다. 승미와 나는 난처해서 서로 눈빛만 교환할 뿐이었다.
-다 큰 자식 잃고 상심이 많으시겠지만 어쩝니까 운명이려니 해야죠. 신이 종을 치는데야 우리 인간이 어찌할 수 없잖아요. 진정하세요.
승미는 수심에 차서 다소곳이 앉아있고 여자의 어머니는 저놈의 영감이 사람 초대해놓고 감정 드러낸다고 군시렁거렸다.
이번에 그녀의 유품을 정리하여 집안에 작은 박물관을 하나 마련했다. 7-8평에 불과한 규모였으나 가족들의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오빠들이 기억하는 여동생, 그에 대한 글과 사진을 일일이 액자에 넣어 걸고 부모와의 애틋했던 한 때를 그린 그림과 사진들로 꾸민 방이었다. 그녀를 한 눈에 볼 수 있어서 새삼스러웠다. 어린 시절의 밝고 명랑한 그녀가 하늘을 바라보며 웃음을 날리는 모습이 봄처럼 해맑다. 초롱초롱한 저 눈 좀 봐. 승미가 옆에서 한 마디 했다. 영화를 만들기 전에 이렇듯 그녀에 대한 자료를 한 눈에 보았더라면 더욱더 여주인공의 캐릭터가 살지 않았나 싶었다. 허긴 이념의 슬픈 모습을 그리려 했을 뿐인데 이념을 뛰어넘는 건 상상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문제의 신발주머니는 문 열자 정면으로 보였다. 그리고 구두코도 있었다. 자기 안에 주머니 하나를 마련하여 마치 캥거루새끼 키우듯 그를 가두어 사랑한 여자가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둠 속에서 자기의 사랑을 키우며 통일을 꿈꾸던 그녀가 뜻을 펼치지 못하고 사라진 이 땅. 그녀와 그는 우리 모두가 죽인 것이었다.
아기의 앙징스런 신발이 생각났다. 구두코의 아내가 남으로 가는 남편에게 마스코트로 주었던 물건이었다. 남편의 안녕과 부디 가족을 잊지 말라는 염원을 신발 안에 담아 보낸 그의 아내, 그 당시 아기가 아팠다는데 아기의 병을 실어 보낸다는 주술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구두코를 사랑하기까지 참 많이도 갈등한 그녀였다. 간첩신고로 상금을 타는 문제에서도 갈등하나 조부의 고향이 이북이라는 부분에서 포기한다. 아니 더 큰 이유는 사랑이었다. 그 사이 간첩들끼리의 난타전이 몇 번인가 있었고 사랑 때문에 결국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다. 그리고 심장까지 도려 가는 엽기적인 사건이 있은 후 그녀 또한 같은 방법으로 죽었다. 그들의 심장은 그들의 신발 속에서 동백꽃보다도 더 븕은 꽃으로 피어난다. 나는 그 영화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념 때문에 사랑하는 남녀가 꽃잎 지 듯 하루아침에 사라진 슬픔을 고발한 것이다. 여인의 유혹처럼 은밀하고 감미로운 선율, 글루미 선데이가 흐르는 카페. 자보는 유태인이라는 죄목으로 끌려가서 바람처럼 사라진다. 사랑을 시기하는 이념이 눈알을 띠룩대다가 사랑을 삼켜버렸다.
내가 만든 영화 ‘한 벽’은 제법 고급스런 조크와 위트를 깔고 있었다. 거기다가 뜨거운 사랑으로 칼라풀하게 도배했다. 스파이들의 박진감 넘치는 플레이와 바닷가에서의 질펀한 에로스로 성욕냄새 가득한 화면이 오히려 얌전한 관객들을 놀래켰다. 는 평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그에게 띄우려다 만 연서도 있었다.
승무씨, 비가 오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당신이 사준 호피무늬 구두를 신고 싶다. 그래서 말인데 나는 지금 호피구두를 신고 당신한테 가려고 한다. 내가 당신한테 가는 날에는 당신이 위험할텐데 그런 걸 알면서도 당장 달려 가야할 만큼 당신이 그립다. 지금 신발을 신으면서도 내 안의 이성을 모두 동원시켜서 견뎌보려고 해. 어쩌자고 당신같은 사람을 사랑하게 됐을까? 이념이란 괴물이 가로 놓여서 나 한 번 깨물고 당신 한 번 깨물면서 우리를 괴롭히네.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아무래도 내일 아침에 당신한테 가려고 해 나는 호피구두를 꺼내서 머리맡에 놓고 잘 계획이야. 한 켤레의 신발에 당신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조금은 위안이 돼. 당신은 내게 있어서 행복의 근원이지만 괴로움의 원천이기도 해. 하지만 사랑해. 그럼 안녕. 내 사랑. 대학노트를 북 찢어서 갈겨쓴 편지가 그녀를 잘 대변하고 있었다.
붉게 타는 노을은 강한 애욕덩어리였다. 호박넝쿨 너머로 길게 누운 석양이 그랬다. 승미가 눈가에 자잘한 주름을 달고 부엌에서 음식을 날라 왔다. 우리가 왔다고 씨암탉을 잡았다는데 꽃 그림이 그려진 알미늄 쟁반위의 백숙이 푸짐했다. 우리가 왔다고 봉식이라는 사내가 시끌벅쩍하게 분위기를 몰아갔다. 아랫동네에 산다는 봉식은 말했다.
-오늘 면에 갔더니 새로 부임한 면장이 나와서 고개를 깊이 꺽으며 인사하더라. 나 참 오래 살고 볼일이야. 면장한테 우리가 깊이 고개를 숙이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겠더라고. 허허. 그리고 그 면장의 연장길이가 장안에 파다해서 걱정이야.
-허어 사람도 원. 그래 그 사람의 연장 길이가 얼마래?
좌중은 일제히 폭소를 터트렸고 모두 한 마디씩 하는 바람에 시끄벅쩍했다.
-글쎄, 뭐 두 뼘 반이라는 소문이야.
- 뭐라고? 애끼 이사람
또 다시 폭소가 터졌다. 그녀의 아버지는 부엌쪽을 힐긋거리면서 봉식이 말하는 새 면장을 보기 위해서 수일내로 면에 한 번 들려야겠다며 껄껄댔다. 그런가하면 봉식은 머지 않아 허리낭창한 여자 하나 구어 삶아서 면장과의 밤을 주선해야겠다며 익살을 떨었다. 그때 김이 오르는 씨암탉 백숙이 또 나왔다.
-아유 엄청 큰 닭이네요.
-우리 집에서 제일 큰 씨암탉인디 고기 맛도 좋아요.
그녀의 아버지가 외설스런 포즈로 놓여있는 닭다리를 한쪽 뜯더니 승미에게 내밀었다.
-우리 집에 배우가 직접 오시다니 영광이구먼요.
그는 조금 멋쩍은 표정을 돌려서 나머지 한 쪽 다리를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 날개를 뜯어서는 봉식에게 다른 날개는 아내에게 주었다.
-날개를 먹으면 바람난데야. 그래서 자네를 주는 것이여!
-그러먼 내가 바람나라는 것이여.
좌중에 모인 사람들이 웃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붉게 익어가는 감나무를 지나서 파아란 하
늘로 흩어졌다. 바람이 불었다. 낙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붉은 감이 노을빛을 받아서 아름다웠다. 그림을 그리 듯 한 컷 딱 잘라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부분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승미가 내 눈을 따라갔고 뒤이어 누렁이가 짖었다. 승미가 닭뼈를 던졌다. 토방에 바짝 다가선 누렁이가 하마트면 신문지에 널어놓은 붉은 팥을 밟을 뻔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어머니가 누렁이를 호되게 야단치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멀어져 갔다. 그리고봉식이가 다시 조금 전의 화제를 꺼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러시아 미녀들이 진출했다는 소식인데 아무래도 사업할려면 뇌물을 받쳐야겠어.
-애끼 이 사람, 공연히 이지방 물 흐려 놓치 마소.
-물을 흐려 놓다뇨. 이미 흐려진 물, 가라앉기 전에 한번 휘저어서 고기 한 마리 잡자는 거죠.
- 그 고기라는 게 누구여?
-아, 몰라서 묻는 거예요?
-그래, 몰라서 그러네.
-영감님도 참, 모르시겠으면 그대로 계세요.
-이상하게 따돌림받은 기분이네.
-허참, 그 정도면 알아들을 만 한데 그러시네. 어떻게 일일이 먹여줘요.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그녀에 대한 소문을 모았었다. 어떤 사람은 말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는 대부분 그녀에게 신발을 선물한 뒤 행방불명된다고. 허나 나는 믿지 않았다. 그녀는 예술가이다. 개성이 강하고 때가 묻지 않아서 문제가 있다면 모를까.
사진에서 본 그녀는 퍽이나 영민해보이고 매력적이었다. 꼭 다문입이 인상적이었던 그녀, 약간 통통한 느낌을 주는 몸매의 그녀는 정열적인 여자였으며 소문에 의하면 약간 조울증세가 있는 여자였다. 그런 흠이 있어야 영화가 되잖은가. 본시 악하고 비틀어진 마음이 인간 본성 중의 하나라는데 영화는 그런 부분을 잡고 늘어지기 마련이다. 승미는 그녀가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뚱했다. 무엇이 이상하다는 것일까? 신발을 들고 다녔던 건 뭐가 씌워서였을까 그러니까 전생에 이미 점지된 인연이라서 신발 가방을 열심히 들고 다닌 걸까? 가장 적절한 시기에 신발을 꺼내 주어 인연을 맺은 그들. 이념이 먹어치운 사랑하는 남녀는 그녀의 박물관 안에서 또 한 번 망령처럼 되살아났다. 신발을 넣었던 가방 속에서 사진이 쏟아졌다. 바닷가에서 혹은 외국의 야자수 밑에서 한 장은 쇼핑몰의 화려한 불빛 아래에서였다.
사진들을 다시 주머니에 넣어서 그녀의 어머니에게 주고는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 그곳을 나와 변산을 거쳐서 서울로 왔다
- 끝 -
2007년 1월호 월간문학 발표
첫댓글 우리가 왔다고 씨암탉을 잡았다는데
그림이 그려진 알미늄 쟁반위의 백숙이 푸짐했다.
많이 듣던 
그러나 쉽지 않은 
이념을 먹어치운 사랑의 굴레
아름답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