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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제노바에서 직공으로 일하던 에스파냐인 아버지 도메니코 콜롬보와 에스파냐인계 유대인 어머니 수산나 폰타나로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현재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어렸을 때부터 선원이 된 것은 확실하다고 볼 수 있겠다.
1474과 75년 사이에 그리스 에게 해의 키오스 섬에 유향을 사러가는 항해에 참가하였고 1476년 5월 프랑스 플랑드르로 가기 위하여 상선에 올랐다.
그러나 항해 도중 산비센테 갑 앞의 바다에서 카스티야-포르투갈 간의 전쟁에 말려들어 그가 탄 배는 그만 불이 붙게 되었다.
그는 불이 배의 갑판 위에까지 올라오는 상황에서 배를 탈출하여 라고스 해변까지 수영을 하며 목숨을 건지기도 하였다.
그 다음해인 1477년 초에는 에스파냐인의 구조선에 다시 승선하여 영국까지 여행한 후 리스본으로 돌아갔다.
1478년에는 사탕을 구입하기 위하여 마데이라 섬을 방문하기도 하여 풍부한 여행 경험을 쌓았고 아마 이것 때문에 대서양 서쪽 바다에 관하여 커다란 매력을 느꼈으리라 생각이 들었으며 그 이후에도 해양에 대한 정보를 수입하면서 라틴어와 에스파냐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여러 지리학자들의 세계지리서를 섭렵하기도 하고 서쪽 바다를 횡단하여 지팡그(황금이 나는 땅이라는 뜻 : 현재 일본을 말함)와 카타이(고대 중국)에 도착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 피렌체의 천문학자 토스카넬리의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1482과 83년에는 아프리카 서해안 남쪽을 항해하는 여행에 나서 먼 바다를 항해하는 데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방문지인 엘미나 교외 성채에서 흑인 노예들이 실제 매매되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1483년 말에는 동쪽 인도로 가는 항해 계획안을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2세에게 제출하였으나 당시 아프리카 서남쪽 항해가 착실히 성공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인도항해에 대한 교섭은 잘 진척 되지가 않았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아들인 디에고를 데리고 이웃 나라인 카스티야로(스페인) 건너갔다.
1486년 1월 콜럼버스는 에스파냐 왕 페르난도와 아라곤의 여왕 이사벨을 만나 인도 항해계획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당시 페르난도 왕과 이사벨 여왕은 이슬람 세력의 최후 보루인 그라나다 공략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콜럼버스의 항해계획안에 대한 최종판단은 그 후 몇 년 뒤로 미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포르투갈 왕과 재교섭을 시도하기도 하였고 친동생인 바르돌로뮤 디아스를 이탈리아 왕에게 파견하여 의사 여부를 타진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1492년 1월 2일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던 그라나다가 에스파냐에 의해 함락되어 새로운 전망이 열리게 됨으로서 여러 성직자와 궁정 인사들의 협력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1492년 8월 3일, 산타마리아 호, 핀타 호, 니냐 호 등 3척에 120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마침내 그토록 바라고 꿈꾸었던 인도항해에 나서게 되었다.
9월 6일 에스파냐령 카나리아 제도 고메라 섬을 떠나 북위 28˚선상에서 계속 서쪽으로 항해하면서 처음으로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였던 기존의 이론을 뒤엎고 일부학자들이 주장한 지구 구형 설을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10월 12일에는 서인도제도의 ‘구아나 하니’라고 불리는 바하마 제도의 한 섬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자신이 인도의 어느 한 지역에 도착하였을 것이라 확신하고 신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섬을 산살바도르(성스러운 구제 자)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곧 원주민인 인디오들로부터 황금과 향료가 생산되는 땅에 대한 정보를 캐면서 쿠바 섬에서 히스파니올라 섬(지금의 아이티 섬)까지 항해하여 갔다.
그러나 1492년 크리스마스 밤, 산타마리아호가 좌초하여 난파당하였기 때문에 급히 나비다 거류 구를 설치하여 약 40여 명의 인원을 잔류시킨 뒤 본인은 본국으로 귀환 길에 올랐다.
1493년 3월 15일 에스파냐에 도착하한 콜럼버스는 관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서인도제도 대한 항해는 완전한 성공이었다.
첫 번째 항해 덕분에 2번째 항해(1493. 9. 25 출발) 때는 17척의 배에 1,500명의 승무원을 경쟁적으로 승선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히스파니올라 섬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의 희망과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금광채굴에 징발되었던 원주민들의 반란이 빈번하여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황금과 향료 대신 반란을 일으킨 원주민들을 실고 에스파냐에 귀환하였으나(1495) 이사벨 여왕의 분노만 사고 말았다.
이 같은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3번째 항해를 시도하였으나 그의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콜럼버스의 시대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으며 1502년 니콜라스 데 오반도가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된 뒤 마지막 4번째 항해를 추진하였으나 태평양을 끝내 발견하지 못하고 아무런 수확도 없이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급속히 건강이 나빠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506년 5월 21일 자신이 발견한 섬들이 아시아의 일부일 것이라는 신념을 버리지 못한 채 바야돌리드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미국
그러나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그러한 빈민가는 보이지 않았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이탈리아의 탐험가였다.
이탈리아 피렌체 태생인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1494년에서 1496까지 메디치 가문의 사무원으로 에스파냐에 파견되었다.
거기서 세르비아의 주오나토 베라르디 상사에 들어갔는데 이 상사는 콜럼버스가 1차·2차 인도항해를 준비한 곳이었다.
1497년 첫 탐험에 나선 그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콜롬비아에 도착하였다.
오늘날 아메리카라는 명칭은 그의 이름 '아메리고'에서 따온 것이며 세비야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하였다.
콜럼버스는 어떻게 보면 불운한 일면이 많았던 것 같다.
자신이 발견한 서인도제도가 죽음에 임박할 때까지도 인도의 일부 지역으로만 믿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출발할 때 인도와 동방에 대하여 관심이 특히 컸던 것은 운이 닿는다면 인도의 향신료를 수입하여 일확천금을 손에 쥘 수도 있을 것이고 중국의 비단과 차를 수입하여 유럽에 판매한다면 항해하는 동안의 경비를 제외하고도 많은 돈을 수중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미국
망망대해로의 항해는 신대륙 발견이라는 꿈이 아닌 자신의 부와 직결되어 있었다.
산타마리아호를 직접 이끌고 지휘하면서 파도를 가르고 앞으로 나갈 때는 초심이 변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였을 것이고 끝없는 바다와 파도를 바라보며 사투를 벌였을 때는 고독하고 외롭기도 하였을 것이다.
태양이 동쪽 바다위에서 떠올라 서쪽 바다로 사라지는 날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는지 헤아릴 수조차도 없었을 것이고 나침판이라는 새로운 계기판이 발명되어서 직선방향으로 항해할 수는 있었지만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섬이나 지표가 없어서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자신도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뱃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끝도 보이지 않는 대양 가운데서는 무력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별자리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배의 항로를 추적하여 보기도 하고 지금까지 경험하였던 항해 관련 상식을 총동원하여 항해에 접목시켜 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동안 천문학자들로부터 어깨 너머로 습득한 지식들이 실전에서는 많은 도움이 되었겠으나 육안으로 바라보았던 바다에서의 측정거리는 실제 거리하고 많은 차이가 있었다.
대충 어림잡아 측량하여 거리를 계산하고 나침판으로 방향을 설정하여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는 있었겠으나 콜럼버스 자신이 계획하였던 목표가 실제대로 이행되어 가는지는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점심을 먹기 위하여 걸어갔던 곳
감각이 점점 무뎌지고 눈앞이 캄캄해져서 피로도가 점점 상승되어 가는 데도 산타마리아호의 키를 잡고 어렸을 때부터 키워온 대양에 대한 꿈과 열정을 불태워가고 있었다.
수평선 위에서는 갑자기 신기루의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무엇인가 실물이 왔다 갔다 하는 착란현상이 점점 늘어가기도 하였으며 헛것을 보고서도 실제 상황인양 혼란에 빠지기도 하여 미래의 불확실성은 점점 늘어만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중누각에 불과하였다.
배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데도 점점 의혹이 증폭되면서 현실성이 의심되기도 하였다.
몸은 점점 나른해지고 쇠약해져서 체력과 정신력은 원초적 한계점까지 내려가고 있었을 것이고 바다에서 파도와의 사투보다는 인도로 가려고한 애초의 목표를 과연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기도 하였다.
산타마리아호가 파도에 휩쓸려 심하게 움직일 때는 나침반의 N침이 진동하기 시작하여 한동안 움직이질 않았다.
한참 후에야 제자리에 돌아와 북쪽을 가리키고 있는 것에 안도하며 희망을 가지려 노력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산타마리아호가 자신이 생각하였던 방향으로 나아가가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부를 얻기 위하여 희망과 꿈을 안고 인도가 아닌 서인도 제도로 산타마리아호를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나는 신대륙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기 위하여 미국 동부와 캐나다여행 계획을 추진하였다.
성공회 건물이 바로 옆에 있었다.
영국의 이주민들은 차츰 세력범위를 넓혀 1733년까지 대서양 연안 아메리카에 13개의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유럽의 7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이긴 영국은 바닥난 재정난을 확보하기 위하여 아메리카 13개 식민지들로부터 가혹한 세금을 징수하려하였다.
식민지는 스스로 선출한 대표를 영국 의회에 진출시켜보려 하였으나 원천적으로 봉쇄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화가 난 13개 식민지 대표들은 “대표 없이 과세란 있을 수 없다”란 구호를 내걸고 영국 정부에 저항하였다.
영국 본국의 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통제가 점점 강화되자 13개 식민지 대표들은 조지 워싱턴을 중심으로 결속하고, 프랑스의 원조를 받아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국가를 수립한 것이 오늘날 미국의 시초였다.
미국은 1774년 7월, 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프랑스의 지원에 힘입어 1783년 독립을 승인받았으나 미국의 역사는 겨우 238년에 불과하였다.
우리의 5천년 역사에 비교한다면 햇병아리에 가까운 처지라 할 수도 있었으나 이러한 짧은 역사를 극복하고 세계를 아우르는 경찰국가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남북전쟁의 고통을 극복하고 넓은 영토를 확보하여 인적 물적 자원의 풍요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미국의 결속력을 강화시킨 것은 자유분방함 속에서 질서를 찾고 민주주의 국가를 수호하려는 높은 이상과 헌법을 준수하려는 국민정신이 저변에 깔려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기저에는 높은 교육열과 끊임없이 탐구하고 개척하려는 창조정신이 근간하고 있었을 것이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국민의 단합된 결과가 오늘의 미국을 이끌어나가는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강력한 미국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고 있었을까 하는 것이 평소 궁금하여 오래전부터 미국 여행을 갈망하여 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에서야 비로소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어 마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로 진출하였던 때와 마찬가지로 가슴이 쿵쾅쿵쾅 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하였다.
미국 동부와 캐나다여행을 추진하기 위하여 많은 여행사들의 상품을 조사하여 살펴보았으나 롯데 광광여행사가 그동안 미국과 캐나다 여행 상품 개척에 심혈을 기울여 축적된 노아우를 무시할 수 없었고 대한항공 A380 에어버스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6개월 전에 롯데 관광여행사에 미리 예약을 하여두었는데 이것이 여행 상품 가격 하락에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은 본래 6명만 예약하였다.
그러나 추가로 인천공항에서 합류한 롯데관광 인원은 10명이었다.
합계 16명이 인천공항에서 대한항공 A380 K·E081편에 탑승하여 출발하면 2014. 10. 10일 날 아침 뉴저지 세라톤 이튼타운 호텔에서 다른 롯데관광여행 팀 18명과 조우하여 34명이 54인승 대형버스를 타고 여행할 수 있도록 계획이 수립되어있었다.
인천공항에서 대한항공 A380 K·E081편 출발일자와 시간은 2014. 10. 8(수)일 오전 10:05분이어서 강남구 매봉역 삼성아파트 SK리더스뷰에서 05:45분 인천공항 행 6009번 버스를 승차하기로 친구와 미리 약속하여 두었다.
미국 뉴욕주 맨해튼에 있는 도시 중심부의 공원이다.
해마다 2,500만 명의 관광객이 이곳을 찾으며 미국 전역을 통틀어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공원으로 꼽힌다.
디자이너 프레드릭 로 옴스테드와 건축가 칼베르트 바우스가 디자인하였다.
미국 동부와 캐나다의 현지날씨가 우리나라 가을 날씨와 거의 비슷하고 전형적인 가을 날씨를 보여주고 있다는 여행사측의 전갈을 듣고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즐거운 여행이 될 것이라 생각하면서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리라 마음먹었다.
20014. 10. 8(수)일 05:45분 6009번 인천 국제공항 행 버스를 승차하기 위하여 05:20분에 집에서 출발하려 하였으나 아직 출발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05:30분이 넘어서고 있었다.
친구와 약속한 시간을 지키지 못할까봐 마음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현관문을 잠그고 계단을 내려와 택시를 잡기 위하여 걸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안경이 생각이 났다.
귀에 걸쳐져 있어야할 안경이 없었던 것이다.
깜짝 놀란 나는 다시 집으로 달려가 안경을 가지고 나와야 하였다.
허겁지겁 달려가 안경을 가지고 나온 나는 시간이 촉박할 것이라 생각하고 시계를 들여다보았더니 시간은 이미 05:40분이 넘어서고 있어서 공항버스를 탈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하면서 서초구 양재동 구 삼호물산 앞에서 택시를 타고 매봉역 삼성아파트 SK리더스뷰 공항버스 승강장에 가까스로 도착할 수 있었다.
친구는 이미 공항버스 승강장에 나와 버스 기사와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센트럴 파크
남여 불문하고 달리기는 물론 자전거와 체조 등 각종
운도을 즐기고 있었다.
버스가 강남역을 지나고 신사역을 거쳐 88고속도로에 진입하자 그 때서야 생각을 추스를 수가 있어서 한강에 설치되어 있는 빨간 조명 불빛들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한강수를 바라보니 갑자기 조선왕조 인조 때 청나라에 볼모로 붙잡혀갔던 김상헌이 생각났다.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는 동북아시아를 재패하고 중국 대륙까지도 넘보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야망과 꿈을 펼치는데 가장 장애가 되고 방해가 되었던 국가는 조선이었다.
중국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대륙에서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소위 소 중화라 일컫는 동방의 횃불 조선을 미리 손볼 필요가 있었다.
조선과 중국 명나라하고는 임진왜란 이후 혈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가 조선을 돌아보기 전에 청 태종 홍타이지는 속전속결의 방법으로 조선과의 관계를 마무리 지어야 하였다.
그래서 생각하여 낸 것이 병자호란이라고 하는 무력 시위였는데 청나라가 자랑하는 8기병은 몽고 기병을 능가할 만큼 기민하고 민첩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청나라의 기병은 10여일 만에 양철 평(현 서울 녹번동)까지 진격하여 인조를 놀라게 하였다.
센트럴 파크내에서 눈을 끄는 나무 신기하기만 하였다.
청나라 군대가 조선으로 침략해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봉림대군과 왕족들은 미리 강화도로 피신하였으나 인조는 청나라 기병이 이렇게 빨리 한성으로 진격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강화도로 몽진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이거하여 잠시 숨을 돌려 대처하려 하였으나 청나라 기병의 종횡무진 기동성으로 조선의 근왕군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군량미가 고갈되어 제대로 끼니를 잇지 못한 군인들은 사기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야만인들과는 소통할 수 없다던 당시 조선 정치인들은 현실을 무시할 수 없어 열띤 토론을 하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가 청나라가 주장하는 인조의 항복과 두 왕자의 인질을 수용하는 선에서 정치적 타결을 보려 하였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시종 호종하였던 김상헌은 한양을 떠나면서 과연 고국의 산천과 한강수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착잡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우리 일행이 걸어가는 모습
김상헌이 1636년 예조판서로 재임할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면서 청나라 침략에 대한 분노와 울분을 삼킬 수 없었다.
최명길이 주장한 주화론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을 펴다가 대세가 기울어져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어버리고 통곡하기도 하였다.
1638년 사헌부 장령 유석 등으로부터 "김상헌이 혼자만 깨끗한 척하며 임금을 팔아 명예를 구한다."라는 내용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곧 조정에 다시 들어오라는 명을 내렸으나,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 청이 명을 치는 것을 돕는다는 말을 듣고 의연히 반대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 선양으로 압송되어 4년 뒤에야 풀려났다.
중국 선양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청나라 관리들이 수시로 김상헌을 회유하였으나 그는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청나라 관리들의 타협 요구를 거절하고 끝내 굽히지 않았다.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하였으나 그를 탐탁하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벼슬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 말동하여라.
— 《청구영언》 ―
새벽을 알리는 수 닭의 힘찬 외침이 귀에 들리는 듯 느껴져 주위를 두리번거려보았더니 단잠을 설치고 새벽과 같이 일어나 일터를 찾는 수많은 승용차 행렬을 맞은편 도로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가족과 사랑하는 부인을 남겨두고 꼭두새벽같이 일터를 찾아야하는 운명적인 사명감이 힘든 역경일 것이라 생각을 하면서도 지난 과거 나의 공직생활을 연상하게 하였다.
어느덧 동쪽 하늘에서 횃불과 같은 태양이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솟아오르고 있었다.
화창한 햇살아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자매님들
행복하기만 하다.
경외심과 두려움마저 드는 신비로운 태양이 우리에게 축복을 내리는 듯 빛을 밝히고 있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은 채 버스의 차창을 내려다보았더니 어느덧 버스는 인천공항 승강장에 도착하였다.
나는 롯데관광 여행사로부터 출국서류를 넘겨받은 후 마일리지를 정리하고 곧바로 출국 심사를 마치기 위하여 보안 검색대 게이트로 이동하려하였으나 깜짝 놀라고 말았다.
출국하려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500m를 훨씬 넘게 열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 지긋한 퇴직자들이 눈에 많이 띄기도 하였는데 한꺼번에 단풍의 절경을 찾아 해외로 이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항공기가 이륙하는 시간이 10:05분이어서 출국을 할 수나 있을 런지가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가 타려는 항공기는 A-380 에어버스여서 좌석 수나 쾌적함이 기존의 747항공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실재 A-380 에어버스 객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전 어느 항공기보다 더 안락하고 폭이 넓어보였다.
인천공항에서 이륙한지 14시간이 이미 넘어섰기 때문에 지루한 느낌이 들었으나 신대륙을 밟아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충만하여 피곤함과 지루함을 극복할 수 있었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들고
추억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뉴욕 현지 시간으로 오전 12:00시가 넘어서서야 존F케네디 국제공항 활주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존F케네디 국제공항은 약간 어두운 감이 들었다.
다른 항공사에 비하여 대한항공이 입출항하는 곳은 변두리로 보였으며 약소국의 홀대 감 같은 것을 은근히 느낄 수 있었다.
어두운 감이 느껴지는 공항 분위기 속에서 입국 심사를 하였다.
지문을 찍고 여권을 세심하게 검사하는 가운데서도 직원의 따뜻한 배려의 말 한마디가 긴장되어있는 나의 심금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여행사가 어느 곳이냐는 질문은 직원의 관례적인 물음일 수도 있었으나 롯데관광여행사라고 말하였더니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환영한다는 따뜻함을 보였을 때 두렵고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들 듯 하였다.
가이드의 따뜻한 안내를 받으며 우림 팀 16명은 존F케네디 국제공항에서 뉴욕 맨해튼으로 이동하였다.
국제적인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뉴욕의 도로는 차량정체가 극심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의외로 소통이 원활하였다.
존F케네디 국제공항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678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495번 도로로 갈아탔다.
뉴욕 외곽에서 서서히 맨해튼 도심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아주 생소하고 생활 패턴이 우리네들과는 전혀 다르리라 생각을 하였으나 뉴욕 도심의 활기 넘치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자본주의 적 생활방식은 우리나라 서울과도 별 차이가 없어보였다.
뉴욕 도심의 생활에 어느 사이 익숙해 보이는 나의 태도가 의아스럽기도 하였으나 평상시 미국 문화가 우리들 일상생활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스며들고 있었나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듯 점심을 해결하여야 하였다.
점심은 Miss Korea라고 하는 아담하고 깔끔한 한식집에서 먹게 되었다.
메뉴를 바라본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국의 보통 음식점에서나 볼 수 있는 메뉴들이 버젓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국제화된 한국의 대표음식 김치찌개를 뉴욕에서 먹어보고 싶었다.
조선 중종 때 개성의 기생이었던 황진이의 시구가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유독 눈길이 갔으며 서울의 어느 음식점에 식사를 하는 것처럼 안락하고 포근하였는데 김치찌개의 맛은 아주 일품이었다.
여행 중에서의 가장 선결문제는 방료였다.
방료는 스스로가 해결하여야 하였는데 화장실 문화는 단연 우리나라가 세계를 선도하고 있구나하는 것을 이곳 뉴욕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서 자긍심을 느끼기도 하였으며 대한민국의 위상을 보는 듯하였다.
소위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계를 선도한다는 맨해튼의 거리를 걸어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콜럼버스적 기적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느낀 감정을 소상히 바구니에 담아보리라 생각하였다.
대한민국에서 미국 여행을 출발하기 전부터 기대한 것만큼의 소득과 결실을 꼭 주어 담아가리라 생각하고 센트럴파크와 할렘가 등 한인촌을 두루 둘러보았는데 내가 갈망하였던 갈증들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센트럴파크에 들어가기 전 존 레논이 살았다는 호화 아파트를 쳐다보고 Imagine이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존 레논의 본명은 John Winston Ono Lennon이며 1940. 10. 9 영국 잉글랜드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그룹 비틀스의 대표를 맡아 이끌어갔으며 작가, 그래픽 아티스트, 솔로 가수로도 활동하였다.
노동자 신분으로 외향적이면서 삶의 재미를 추구하며 살았던 레논의 부모는 짧은 결혼생활 후 이혼하였다.
5세 때 부모의 이혼으로 떨어져 살며 정신적 충격을 안게 된 레논은 리버풀 외곽지역 울턴에서 이모 미미 스미스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이모부는 레논의 생모와 마찬가지로 레논이 청소년이었을 때 세상을 떠났다.
이모는 레논에게 밴조 연주법을 가르쳐주었다.
21세 때 레논은 내조를 잘하고 전통을 중시하는 성향의 신시아 파웰과 결혼했으나 1968년에 이혼하였다.
그리고 28세에 독립적이면서 인습에 얽매이지 않았던 독특한 성격의 오노 요코와 결혼하였다.
연극을 하는 젊은이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깜짝 쇼를 연출하는 모습에 박수갈채를 보내고
파안대소하며 웃는 관객들
레논은 16세 때 이미, 20세기 중반에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 그룹이 된 비틀스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스키플 음악 그룹을 결성하였다.
기본적으로 비틀스는 실용 대중음악의 고수였던 폴 매카트니와 비사교적인 성격의 로큰롤 반항아였던 레논이 결합해서 만든 그룹이었다.
문화적으로 레논은 선동가적 태도를 취하였다.
비틀스 멤버 4명 모두는 재치가 있고, 또 불손하였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예수보다 더 유명하다."라고 발언하거나, 청년 문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미국에는 십대가 있었고 그 외 모든 곳에는 사람들만 있었다."라고 단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레논이었다.
레논의 사상은 명문가 출신 일본인 전위 예술가이고 7년 연상인 오노 요코의 예술 철학과 아주 잘 맞았다.
앨범 “더블 판타지”에 이르기까지 오노와 함께 작업한 대부분의 영화와 음반은 대중적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과는 차이가 극명한 앨범 “플라스틱 오노 밴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았다.
후속 앨범 “Imagine”은 오노 요코로부터 개념을 가져온 희망찬가로 최고의 인기를 얻고 있었다.
존 레논의 피살을 아쉬워하는 많은 사람들
매일 인산인해를 이룬단다.
전쟁과 폭력이 없는 사회, 사람을 서로 죽이는 국가도 없는 사회, 소유가 없어서 탐욕을 부릴 필요도 없고, 모든 사람이 굶주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그래서 종교도 필요 없는 사회 그런 사회를 Imagine에서 꿈꾸고 노래하였던 가수 존 레논은 당시 미국이 베트남과의 전쟁을 이끌어가는 상황을 의식하지 않고 여과 없이 반전론을 펴서 젊은이들을 선동하는 듯한 태도가 미국 정부로서는 못마땅하였을 것이다.
당시는 재임 중이었던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지 맥거번에게 승리를 거둔 해였다.
닉슨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 항의하고 단호히 반대 의사를 밝혔던 반전론자 이주민 존 레논에 대해 미국정부는 거부감을 느꼈을 것이다.
강제 추방이라도 불사하겠다는 미국정부의 강압적인 태도가 존 레논의 의지를 꺾게 만들었고 실의를 안겨준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존 레논이 살았던 초 호화 아파트 지금은 전설이 되어 사라지고 없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1973년 가을 오노와 헤어진 후 레논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술을 마시고 평범하지 않은 음악들을 만들며 1년 이상 허송세월을 보냈다.
두 사람은 다시 재결합하여 1975년 레논의 생일에 아들 숀을 낳았다.
레논은 오노에게 자신의 일을 모두 맡기고 은둔자적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예술품처럼 두 사람의 결혼은 두 사람이 지닌 정치적 행동주의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레논이 1980년 12월 8일 맨해튼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정신이상자 열혈 팬이었던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에게 피살되면서 모든 것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레논의 피살은 전설의 일부가 되어 갔다.
여전히 계속되어가고 있는 전설의 현장을 센트럴파크에서 목격할 수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Strowberry fields에 앉아 그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이메진을 부르는 제 2의 존 레논들
아쉬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인기를 먹고 살았던 존 레논은 팬이 엄청 많았던 것 같았다.
열혈 팬이었던 정신이상자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 존 레논에게 만나주기를 요구하였으나 바쁜 일정을 소화시킬 수 없어서 차일피일 기회를 미루고 있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나타난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에게 아파트 입구에서 권총으로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의 부인이었던 요꼬가 남편 레논을 기리기 위한 방법을 백방으로 찾다가 뉴욕시청에 소청하여 센트럴파크 입구에 Strowberry fields를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컬럼비아 대학 교정에서 독서 삼매에 빠져있는 여학생
생각하는 로댕과 너무 흡사하였다.
미국은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단일민족 문화권과는 달리 세계 각처로부터 이주해온 다민족이 정착하여 세워진 나라였다.
America를 떠받치고 있는 힘은 과연 어디로부터 나오고 있을까하고 컬럼비아 대학을 방문하였다.
운동장이라고 해보아야 서울 어느 고등학교 운동만도 못하였다.
그러나 학구적인 분위기는 중세 어느 수도원처럼 깊이가 감돌았고 우리네들 대학 문화하고는 사뭇 달라보였다.
속세하고는 담을 쌓고 학문에만 매진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미국의 힘은 바로 이러한 것에서 나올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미국 뉴욕 주 뉴욕시 맨해튼에 있는 사립대학이며 아이비리그에 속한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메인 캠퍼스는 뉴욕 시 맨해튼 모닝사이드 하이츠에 있다.
1754년 영국왕 조지 2세의 칙허장에 의해 킹스 칼리지로 설립되었으며 그런 허가를 받은 세곳의 미국 대학 중의 하나이다.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오래된 고등교육기관이며 뉴욕 주에서는 제일 오래된 고등교육기관이다
학문의 전당에서는 자유분방하였으나 나름 질서가 있었으며 교수의 무궁한 지식을 토대로 진지하게 토론에 임하는 학생들의 자세는 건방지게 보이지 않았다.
아시아계, 남미계, 아프리카계 등 학생들이 미국의 학생들과 둘러앉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미국의 힘은 이러한 다양성 속에서 잉태한 연구의 결과일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저녁식사는 스테이크 정식이었다.
기대하였던 것만큼은 아니었으나 미국식 스테이크 문화에 젖어보기 위하여 맥주 한잔을 곁들어 보려하였다.
그러나 장시간의 비행시간으로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들 숙소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따뜻하고 포근한 뉴저지의 Sheraton eatontown Hotel로 이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