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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은 갚으라고 있는 것
시골의 밤은 늘 초저녁부터 한밤중이다.
근남면소재지라 해서 다르겠는가.
무심한 가로등빛만이 나그네길을 환하게 비췰 뿐이었다.
또 하나의 석류굴 입구, 노음교차로와 수산리간의 왕피천에 놓인
수산교는 참 많이 건넌 다리인데 두 발로 걷는 밤길이 새로웠다.
더구나, 2009울진친환경세계농업EXPO 장소로 요란하게 장식돼
있는 왕피천뚝 일대가 야경만으로는 대도시를 방불케 했다.
2005년에 개최했다는데, 4년만인 2009년에 또 열린다는 게 언뜻
납득되지 않았으나, 아무튼 바쁜 것 같다.
수산역(守山驛)이 있었던 수산리쪽 왕피천 뚝 일대는'친환경농업
엑스포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길가 집 담장들은 모두 주물 울타리로 대체되었다.
세계인들에게 잘 보이려고 군(郡) 당국이 부담해 일괄 개량했나
본데 어쨌던 주민들은 엑스포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그런데 천편일률이다.
건물, 주변 환경 등과 조화되도록 디자인과 색상 등에 다양성을
살렸더라면 동가홍상(同價紅裳)이련만.
시각적 효가가 월등하련만 아이디어의 한계인가.
촌이니까 촌스러워야 한다는 것인가.
숙고와 고민을 하지 않는 공무원들의 편의적 자세가 문제다.
그보다, 수산리는 '범죄없는 마을'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듯 한데
그렇다면 담장이 아예 없어야 하는 것 아닐까.
범죄없는 마을 수산리 표석
새벽에 친절하게 안내해 준 울진터미널 간이식당을 찾아갔다.
어차피 해야 할 저녁식사를 그 식당에서 하려는 것이다.
이미 새벽에 그리 마음먹고 떠났던 것.
온 종일의 중노동자에게는 미급한 메뉴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잔치국수를 먹었다.
보충용으로 그 집에서 달걀도 샀다.
국수 한 그릇 먹으려고 옛길 80리(찻길로 40여km)를 11시간이나
걸어서 온 셈인가.
그래도, 이 국수가 빚갚은 기분이게 한다면 꽤 값진 국수다.
역시 빚은 갚으라고 있는 것인가 보다.
국보가 묻혀 있다
대간과 정맥에서는 물론, 옛길에서도 항상 첫날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늘 와닿는다.
둘째날 새벽, 예정대로 찜질방을 나섬으로서 평해대로 역시 반은
완성한 셈인가.
남대천의 울진교 아치(arch)가 2005년엑스포때 세운 그대로다.
그러니, 그 행사를 2009년에 또 한다는 홍보가 괴이쩍을 수 밖에.
2005년세계농업엑스포 아치
읍내리를 관통중 두리번거렸으나 홍(洪)한약방이 보이지 않았다.
한의사 공부 한 적 없고(당시는한의사제도가없었다) 단지 선대의
한약방에서 어깨너머로 터득했을 뿐인 분의 약방이다.
그가 유명 병원에서 3개월로 못박은 시한생명을 살린, 선뜻 수긍
되지 않은 사실을 알기에 나는 밤을 돋우어 그를 만나러 갔던 것.
약방이 보이지 않은 까닭은 그리도 용하다는 그도 자기 명(命)을
다스리지는 못하고 갔기 때문이란다.
맹입직문(盲入直門: 장님 문고리잡기)격으로 어쩌다 꺼낸 처방에
죽게 된 사람이 살아났을 수도 있었겠다.
그런 생각이면서도 그런 경우가 또 있지 말라는 법 없잖은가.
그래서 달려갔던 그 곳이 바로 여기 울진이다.
이른 아침부터 더욱 간절해 오는 친구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라도 걸음을 재촉해야만 했다.
온양리 양정항(港)까지 나아갔다.
어제, 덕신~봉산리의 해안도로를 택하지 않았던 것처럼 울진읍~
온양리의 해안도로도 외면했다.
자전거로 구석구석 누볐던 해안길이라 그랬다.
죽변 한하고 해변으로 이어지는, 경치와 걷기가 함께 좋은 구7번
국도 따라 봉평(鳳坪)해수욕장 앞 봉황정(鳳凰亭)까지 갔다.
첫날 강행군했는데도 예까지 쉬지 않고 걸을 만큼 양호했으니까.
봉황정과 동해
간밤의 잔치국수가 워낙 부실했던 까닭일까.
'봉황생고기식육식당'의 분위기가 식욕을 불러온 것일까.
식육점식당의 메뉴중 김치찌개가 성공률이 가장 높은 경험측이
적중했을 뿐 아니라 매너도 일품이었다.
주인(남순덕)의 몸에 밴듯한 친절 이미지의 영향인지 종업원들도
하나같이 그런 느낌이었다.
따라나오며 배낭에 넣어준 쌍화탕 1병의 관심도 매너일 것이다.
이름 없는 해변마을 봉평2리에 국보가 등장했다.
기나긴 세월 땅속에 묻혀있다가 1988년 객토 작업중인 한 농부의
논에서 발견됐다는 신라비(新羅碑)다.
건립해가 신라23대 법흥왕(法興王) 11년(524)으로 추정된다니까
참으로 오랜 세월 버림받다가 햇볕을 보게 됐다.
그리고 그 해에 바로 국보(242호)로 대접받기 시작한 것이다.
비문의 일부가 마멸되어 판독이 어려우나 신라의 정치사 연구에
커다란 활력을 불어넣고 있단다.
봉화대로의 '고구려비'(충주)에 이어 평해대로의 '신라비'라.
옛길 덕에 이처럼 오래된 국보들을 만나게 되는구나.
내 집 옆정원에도 신라비(국보 제3호 진흥왕순수비)가 있다.
진흥왕이 영토를 확장한 뒤 척경(拓境)과 순행(巡行)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4개의 비석중 하나다.(국보제33호 창녕척경비, 마운령
순수비, 황초령순수비 등)
포항지역에서도(신광면냉수리에서 밭갈다가, 흥해읍중성리에서
도로공사중) 발견되었다.
전국을 망라해서, 각종 공사중 눈여겨 보고 조심스럽게 파헤쳐야
할 일이다.
국보가 곳곳에 묻혀 있지 않은가.
옛길과 원자력발전소
봉평에서 죽변항을 거치지 않고 우회로인 비상활주로를 탔다.
구7번국도가 죽변항을 관통하던 때, 통과 차량들을 우회시키라고
데모해서 개설된 도로다.
그런데, 우회로 개설 이후 상권이 죽어갔다.
이제는 우회로를 막으려 하는 형국이 전국적인 현상이다.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는 지역이기주의 탓이다.
죽변의 경우는 신7번국도가 멀찌막이 직선화됨으로서 우회도로
마저 차량냄새 맡기가 어렵게 되었다.
죽변면 이후, 원래의 옛길은 후정교를 건넌 후 북면 덕천리에서
직진하여 해안을 끼고 부구리로 넘어갔다.
그런데, 부구리의 울진원자력발전소로 인해 덕천리에서 고목리~
신화리로 돌아가는 지금의 구7번국도를 새로 만들었다.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석당 김상정(石堂 金相定), 만은 전선
(晩隱田銑)을 모시는 고목1리 노변의 옥계서원 유허비(玉溪書院
遺墟碑)도 이사를 거듭하다가 2005년에 현 위치로 옮겨왔단다.
1980년대가 열리면서 북면 면소재지인 부구리의 조용한 해변이
중장비의 굉음으로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원자력발전소 건립의 직간접 요원들을 위한 각종 시설과 상업용
시설들이 들어섰고 후조처럼 몰려드는 인구로 북적대게 되었다.
활발한 현금 유통에 힘입어 상업지역으로 급성장했다.
고용효과가 인근지역으로 확대되었고, 덕구온천을 비롯해 주변
관광지도 덩달아서 날로 업그레이드 되어갔다.
그러나, 이같은 긍정적 상승효과는 오래 가지 못했다.
방사능 누출사고가 도처에서 터지고, 피해 공포가 급속하게 확산
되면서 님비(Not In My Back Yard)현상이 빠르게 찾아왔다.
지역 주민들이 제백사(除百事)하고 도로를 점거했다.
데모대로 인해 교통이 차단되어 애먹기도 했다.
덜거덕길을 달리다가 머플러(muffler)가 터져 소음(騷音)에 난감
하기도 했던 1960년대 말부터 많이 오가던 길인데.
우리 국도중 최고의 경치(해안)라는 이 구7번국도는 이미 옛길로
강등되었지만 차량뿐 아니라 자전거로도 달렸던 길이다.
그 길 대부분을 이번에는 걸어서 문제의 발전소 앞에 도착했다.
원자력발전소는 최선은 아니다.
하지만, 필요불가결의 전기를 확보하는데 대안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차선인가 필요악인가.
옛길에 들어선 원자력발전소!
옛 선인들은 걷는 동안 이같은 고민 하지 않아서 좋았겠다.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 잠시에 40여년이 파노라마되어 스쳐갔다.
원자력발전소 앞 원자력공원
평해대로 스케치2 (당산목은 알고 있을까?)
999m응봉산 온정골(덕구온천원탕)에서 발원,덕구제(堤)에 들른
후 동해로 뛰어드는 부구천을 건너면 옛 흥부역(興富驛)이다.
울진과 30리길로 흥부장이 서던 곳이다.
내 고향 '칠보'를 상호로 한 마트에 들러 이름의 내력을 물었다.
원자력발전소로 인해 팔도 사투리의 집합지이므로 혹시나 해서.
그러나, 엿듣던 촌로는 어이없게도 뒷산이 칠보산(七寶)이란다.
그리고 흥부역, 흥부장터 등 일대를 소상히 안내해 주었다.
여기, 흥부장터는 원남면 매화장터와 더불어 동해안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이란다.
4월 11일 매화장날에 이어 40리 상거인 흥부장에서 4월 13일(장
날)에 독립을 외치는 함성으로 일대가 진동했다는 것.
흥부장터기미만세기념비(상)와 당산목(하)
도로변 입지 좋은 곳에 들어선 원자력본부 사원아파트들이 아담
하고 협력업체들의 필요한 생활시들도 당연히 들어서 있다.
각종 편의시설과 신.구 기독교회까지 갖춰있어 불편함이 없겠다.
1970년대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변화다.
500여년에 걸쳐 무수한 길손을 주시(注視?)중인 붙박이 느티나무
당산목(사원아파트 앞 나곡1리 노변)은 알고 있을까.
바람직한 격세지감인지?
걷기 알맞은 고저와 굴곡의 길이 이어지고 나곡교 건너 완만하게
오른 고개마루에 고포하늘휴게소가 있다.
자전거 일주때엔 없었는데.
휴게소 바로 뒤 언덕은 망양정 못지 않은 관망지이며 산과 바다를
아우르는 경치좋은 위치다.
울진군의 경북 편입으로 도계(道界)가 된 고포는 두 쪽은 났으나
수라상에 오르던 미역 산지로 지금도 울진삼척 미역의 중심지다.
고포리해수욕장과 어촌이 그림같고 내륙은 응봉산 뒤로 낙동정맥
까지 아물아물한다.
이같은 지리적 여건을 이용해 120명의 북한 무장공비가 고포리에
상륙하기도 했다.(1968년 11월 2일).
사회 기강을 혼란케 할 목적으로 위조지폐를 뿌렸고, 갖은 만행을
부리며 내륙 산간을 따라 북상하다가 일망타진되었지만.
한데, 들어선지 오래지 않은 이 집이 흉가처럼 썰렁히 비어있다.
고포터널이 뚫리고 삼척~울진간을 달리는 신7번국도의 등장으로
차량의 통행이 끊겼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가피한 일희일비(One man's meat is another man's
poison: Up corn, down horn) 현상은 전국적이다.
공생하는 길이 과연 없을까.
도화동산과 신7번국도
언덕에는 글씨 대부분이 마멸된 비석이 철책 보호를 받고 있다.
아무 설명이 없어 내력을 알 길 없으나 觀察使라는 글자가 흐릿이
나마 보이는 것으로 보아 어느 관찰사의 공덕비 정도가 아닐까.
내용도 모른채 적잖은 비용을 들여 전망좋은 곳에 옮겨 세웠는가.
예나 지금이나 하찮은 적선, 공덕도 과장해 비(碑)들을 하도 남입
(濫立)해 진짜 공적까지도 묻히거나 저평가받기 일쑤다.
진정한 선행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거라는데.
이름모를 고비(古碑)
울진군은 북면과 삼척시 원덕읍의 경계인 갈령(葛嶺)직전에 도화
동산(道花)을 크게 조성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차량이 구도로를 가로지르는 신7번국도 고가를
타고 고포터널을 오가느라 봐주는 이 없는 한적한 길이건만.
예전에는 고개마루 직전 노변에 목백일홍(道花)과 잔디,그늘막과
벤치 등의 소공원이 조성되어 길손을 쉬고 가게 했다.
나는 회갑날인 1995년 추석 전날, 포항발 동해안일주 자전거여행
중에 이 곳에서 30여분의 오수로 피로를 풀고 간 적이 있다.
배낭을 벗어논채 10여km 이상 달려간 임원항에서 비로소 배낭이
없음을 알고 허겁지겁 되돌아 달려갔다.
그 자리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배낭이 어찌나 고맙고 반가웠던지.
그 때, 주인 올 때까지 내버려두는 선진국으로 업그레이드됐다는
자긍심이 긴장과 피로를 깡그리 몰아내는 듯 했다.
그런데, 대규모 도화동산이 조성된 내력이 돌비에 적혀 있다.
2000년 4월에 있었던 동해안의 초대형 화재사건으로 소급된다.
나와 인연 관계인 원덕읍 어촌(노실)의 보트 피플(Boat People)
영상이 TV뉴스를 통해 알려져 발을 구르게 했던 화재다.
"23.794ha의 피해를 입은 사상 최대의 동해안 산불이 2000년 4월
12일 강원도에서 울진군으로 넘어오자 민. 관. 군이 합심하여 22
시간만인 4월 13일 11에 진화하고 산불 피해지인 이곳에 도화(백
일홍)동산을 조성하다"
도화(道花)동산(상.하)
강원 북쪽 고성발 산불이 강력한 바람을 타고 실로 요원의 불길이
되어 남하를 거듭해 원덕읍 월천리 가곡천 앞에 당도했다.
상당히 넓은 가곡천이 방화벽이 될 줄 기대했으나 거센 바람을 탄
도깨비불이 되어 울진땅으로 월경했다.
지척의 원자력발전소를 보호하는 일이 어찌 울진군만의 일인가.
국가적 비상사태가 아닐 수 없지 않은가.
한데, 거국적 진화작전에도 좀처럼 기세를 꺾지 않던 화마가 벽에
부딛힌 것은 아이로니하게도 신7번국도 공사장이었다.
화마는 자기 우군인 바람의 협조가 없어 자연 파괴라는 비판중에
산을 깎아 길고 넓게 펼쳐논 공터를 뛰어넘지 못해 소멸된 것.
돌비에 올린 울진군수의 말과는 다른 지역민의 증언이다.
갈령고개마루의 자유수호탑이 외롭기 짝이 없다.
수시로 차를 세우던 검문소는 흔적만 희미하고, 성시를 이루었던
동해휴게소와 주유소도 앙상한 흉물로 남아있다.
모두 신7번국도 때문이다.
도깨비불에 무력했던 가곡천 월천교를 건너 태백길 416번지방도
삼거리에 올라섰다.
오가며 들리던 기사님식당도 서리맞긴 매일반인 듯 차가 없다.
삼척시 원덕읍 소재지 호산을 향해 막 내려가는데 울진 불영사의
수선혜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낮에 부구리(흥부역터)에서 내가 통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는데
그녀는 이 사실을 모르고 한 것이다.
자기 근무지인 불영사(寺)에서 동지팥죽 공양받고 울진길을 나와
함께 하루 걸으려는 것이 당초의 계획이었다.
내가 앞당김으로 인해 그 계획은 깨졌으나 내 현황을 궁금해 하던
그녀는 곧바로 호산까지 달려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