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기상대보다
내게 먼저 들른다
꾸역 꾸역
어김도 없다
오나보다
또 기어이 오나 보다
내 가을은
약도 없다................ '난치병' - 원태연
가을에는 詩가 생각난다.
구르몽의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릴케의 '주여..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등등..
화사한 봄에 비해
가을에 오히려 詩를 더 가까이 하게 되는 건
소생하고 생동하는 봄은 우리를 문밖으로 끌어내지만
조락과 소멸의 계절인 가을에는 가라앉고 쓸쓸해져
내면으로 파고들게끔 만들어서인가 보다.
근래에는 詩가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어서
TV에서도
수많은 CF에서도
지하철 역사 벽면에서도
은행이나 동사무소 대기석에서도
집으로 배달되는 수많은 잡지와 팸플릿에서도
인터넷의 수많은 사이트에서도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하루에 몇 줄의 詩를 듣거나 읽게 되는....
詩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오래 전 대학 입학 첫학기 교양 영어시간.
장왕록 교수님께서는 신입생들의 영어 말하기 실력도 가늠하고
학생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를 알기 위함이신지
수업 시작 전이면 몇 사람씩 특별한 주제 없이 자기 생각을 영어로 5분 정도 발표하게 했다.
"사람들은 흔히 취미를 독서나 음악 감상이라고 말하는데
독서는 절대로 취미가 아니고 삶에 어쩌구 저쩌구.....
교수님의 독서라면 어느 장르냐는 물음에 나는 詩라 대답했었는데
소설을 주로 번역하신 교수님께서 혹 섭섭지 않으셨을까....
오랜 세월을 지나며 그 생각을 하면 얼굴이 빨개진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고 자신있게 말했지만
하루하루가 바쁘고 힘든 생활에서
詩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도
또 詩를 찾아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스무 살 아가씨의 꿈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詩를 일상 가까이에 두고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선택하여 읽으며 만족을 느끼고 위로받을 때도 있으니
오래 전 내 생각이 틀렸다기 보다는
어쩌면 조금 앞서(?) 간 것은 아닐지......
장왕록 교수님과 장영희 교수님...
교수님께서 제자들과 교정을 걸어가실 때는
호리호리하고 큰키가 조금은 구부정해 보이시고
선한 눈매에 부드러운 미소가 친근한, 전형적인 신사풍의 모습이셨다.
그럼에도 우수가 느껴졌고 그 이유가 따님때문이었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았고
장영희 교수는 아버지가 계시지만 소아마비라는 장애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강대에 입학했다고 한다.
다음은 장영희 교수의 글(2002 ?)인데
詩에 대하여...
또 아버지 장왕록 교수에 대하여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 고향, 아직 가지 못한 길 >
가을이 되면 향수병이 더 깊어지시는 어머니가 뜰에 핀 국화꽃을 보시다가 말씀하신다.
“이맘때믄 우리 과수원에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리고 온 세상이 사과냄새로 진동했댔는데….”
20세기 미국의 대표적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1874∼1963)는 詩란
“고향을 그리워하거나 연인을 사모하는 목메임으로 시작한다”고 말했다.
프로스트는 뉴잉글랜드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미국 서부의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열 한 살 때 미국 동북부의 뉴햄프셔주로 이주하여
89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줄곧 그곳에서 농장을 경영하며 살았고,
그곳이 그의 詩에 등장하는 영원한 고향이 되었다.
동시대의 다른 시인들이 현학적 사고에 근거해서 암호같이 난해한 詩를 쓴 반면,
프로스트는 주로 잔잔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로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농부들의 건강하고 소박한 삶, 평범한 일상에서 문득 부딪치는
소중한 순간들을 진솔하게 묘사했다.
사과나무에 걸쳐놓은 사닥다리, ‘땅 위의 별’과 같은 반딧불, 자작나무 가지를 타고 오르는 소년,
펼쳐 놓은 책 위로 스치는 산들바람 등은 결국 그 속에 숨어 있는 보편적 진리로 연결된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 詩는 “기쁨으로 시작해서 지혜로 끝나는 것”이며
“잠시 삶의 혼돈을 피해 평화 속에 머물게 하는 것”이었다.
프로스트의 詩 중에 ‘고용인의 죽음’이라는 165행의 서술시가 있다.
농번기에는 돈을 더 준다는 꼬임에 빠져 다른 데로 갔다가, 농한기가 되어 일자리 없고 갈 데 없으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늙은 고용인 사일러스에 대한 부부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 일손이 귀해지면 또 다른 데로 갈 테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남편에게
부인 메리는 늙고 쇠약해져 갈 곳 없는 사일러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서 묵게 하자고 한다.
“여보, 사일러스는 죽음을 맞으러 고향에 온 거에요.
아마 다시 떠나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에요.’
‘고향은 무슨 고향,’ 남편이 조금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향이 아니고 뭐겠어요?
물론 우리 피붙이가 아니고, 길가다 지쳐서 숲에서 나온 나그네에 불과하지요.
하지만 고향이란 가고 싶을 때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고,
무슨 자격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부부의 따뜻한 마음과 함께
“고향이란 가고 싶을 때 언제든 갈 수 있고 아무런 자격 없이도 갈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이
내 가슴에 박히는 이유는 이북이 고향이신 부모님 때문이다.
2년 전인가, 서울에서 남북이산 가족이 만났을 때 100살 난 남한의 어머니 앞에서
신발 벗고 마지막으로 절을 올린 북한의 아들이 한 말이 생각난다.
“오마니, 통일되어 아들 다시 보기 전에 눈을 감으면 안돼요. 알갔시요? 그거이 오마니가 해야 할 일이야요.”
어머니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을 ‘오마니가 해야 할 일’이라고 자꾸 우기며 아들은 울면서 떠났다.
친구분들이 산소자리를 마련할 때마다 당신은
통일되면 고향에 묻히실 거라시던 나의 아버지(고 장왕록박사)도
결국 “아버지가 해야 할 일”도 잊으시고 이제 그만 타향에 묻히시고 말았다.
8년 전, 떠나시기 얼마 전에 한 영자신문에 기고하신 글에서
아버지는 프로스트의 유명한 시 ‘가지 못한 길’을 인용하셨다.
“숲으로 난 두 갈래 길에서
나는 인적이 뜸한 길을 택했지요.
그것이 모든 것을 변하게 했습니다.”
창작의 꿈을 가지셨으나 교수 월급으로는 여섯 자식 부양하기가 어려워 번역의 길을 택하셨다는,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 그러나 일평생 걸어오신 그 길도 너무나 아름다웠고,
이제 통일이 되어 고향 용강에 가는 길을 꿈꾸신다고 글을 맺으셨다.
여우는 고향을 떠나 죽을 때면 어김없이 머리를 고향 쪽으로 향하고 눕는다고 한다.
한낱 미물인 여우가 그럴진대 하물며 사람이야….
수마에 할퀴어 빈터만 남은 고향일지라도 명절에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기다리다 지쳐 머리를 북쪽으로 향하고 눕고 마는 실향민들이 자꾸 늘고 있기 때문이다.
(장영희-서강대 영문과 교수)
'Golden Gate Bridge 10.6.99, 5:23pm' - Richard Misrach(American)
가을의 속삭임
첫댓글 저하늘 끝단곳엔 내 故鄕이 있으련만/ 가다려 기다려도 갈수없어 애타는데/저구름 마음대로 저혼자서 날아가네/....어느 실향민의 시 한 구절입니다. 기다리다 지친 실향민의 글이 애수의 노래처럼 들여 옵니다 하루 빨리 고향에 갈 날이 오길 기원합니다
지난 세월동안 실향민의 아픔은 우리 모두가 느낄 수 있었지요.. 요즘 젊은 사람들의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아무래도 그때 그 시절의 그리움만큼 절박하지도 않을것이고요... 혹, 선배님께서도 실향민이신가 생각됩니다...
저는 고향을 이북에 두지는 않았습니다 실향의 그리움에 지친 분들을 옆에서 보면서 그들의 절규를 접하곤 합니다
아니시군요..선배님..^^ 오늘 날씨가 꽤 변덕스럽더니 그나마 어둠이 모두 덮어버렸네요..휴일 밤 즐거우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태양이 또 다시 떠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