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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학 - 아버지학교 아버지 1942년 12월 임오년생 종심소욕불유구 七十從心所欲不踰矩라 2015년 설 명절 아무 것도 걸리지 않는 아버지 나이에 형제와 함께 찾은 아버지 학교 공자의 위패를 모신 고산향교 맞은편 고산국민학교입니다. 어릴 적 아버지의 학력이 고작 中퇴란 사실에 숨기고 감추고 싶기까지 했는데 동화 속의 주인공이나 전설 같은 이야기에 전사 같이 살아오신 아버지의 학업이 한없이 위대해집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해방과 전쟁의 전후시대 모두가 먹고 사는 문제에 넋을 잃고 살 무렵 완주군 비봉면 백도리 두메 산골마을 아버지 여의시고 어머니 밑에서 어쩔 수 없는 곤궁한 삶 속에서 아버지는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이 고산초등학교를 무작정 따라나섭니다. 기성회비를 낼 수 없는 딱 한 처지 국민학교 때부터 청강생으로 교실에 들어선 아버지 선생님 가라사대 "너는 누구냐, 왜 왔느냐?" "공부하고 싶어서 그냥 여기 왔습니다." 다행이 선생님은 아버지를 내쫒지 않으시고 할머니를 모시고 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청강생으로 시작한 학업 마치 한석봉의 어머니가 아들을 이끄셨던 것처럼 그렇게 조모님은 고산 험산준령을 마다하지 않고 도라지, 더덕, 창출 등 약초를 캐어 내다 팔아 아버지 기성회비를 대고 도우셨다는데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그 마저 완주중학교 마저 중퇴할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
고산국민학교 뒷편에는 바로 공자의 위패를 모신 향교가 있는데 우리가 아는 공자 역시 소시적에 무척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를 딛고 열다섯에 志于學 지우학이라 학문에 뜻을 두고 자신을 갈고 닦아 위대한 사상가요 교육자가 된 것입니다. 춘추전국시대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자 나이 세살때 당시 노나라 무장이었던던 아버 숙량흘이 죽고 공자를 돌보던 어머니 안징재 역시 15세때 돌아가시는 비참한 현실에 직면합니다. 오늘날처럼 8살이 되어 무상으로 학교가서 공부하는 것은 고사하고 고아처럼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하루살이가 되어 자신이 땀흘려 먹고 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어쩌면 당시 대부분의 젊은이가 그러했듯이 그분의 현실도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도적이나 강도, 용병이나 농부로 살 처지였는지 모르는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바꿔 논어 위정편에 언명하듯이 능력과 처세 아니고서는 살아남기 힘든 시대적 상황에서 나는 열다섯살이 되어 학문에 뜻을 두었다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고 하니 운명의 개척자로서 성인의 도를 깨친 공자의 위패를 모신향교 앞에 고산국민학교를 세워지고 아버지의 학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조금은 이해하게 됩니다.
한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명리를 좆아 가다 낭패를 보면 걸핏 현실과 사람과 운명을 탓하게 되는데 논어 9장 자한子罕편 첫장에서도 언급하건데
"子罕言利與命與仁 자한언이여명여인 스승은 이익과 운명과 인에 대해서는 말씀이 드무셨다." 그것은 利 이익이 그분의 삶의 가치가 아니었으며, 사람이 하늘이 어떠한 운명 命을 부여하더라도 이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고 하늘의 뜻을 겸손히 받들어야 한다는 것과 사랑 仁이란 겉모양과 언어가 아니라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할 최고의 덕목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 자한편 노나라 관리 태재가 공자의 재주가 남다른 이유를 묻자 그 분은 타고날 때부터 재주가 많은 것이 아니라 牢曰 子云 吾不試故 藝 오불시고 예 "세상이 나를 써주지 않았기 때문에 재주가 많아졌다. 吾少也賤, 故多能鄙事 오소야천 다기능비사 나도 소시적에 천한일을 했다 그렇게 때문에 먹고살기 위하여 여러 기능을 갖출 수 밖에 없었다고 솔직히 말합니다. 子曰 苗而不秀者 有矣夫며 秀而不實者 有矣夫
"자왈 묘이불수자 유의부며 수이불실자 유의부 싹이 났어도 꽃피지 않는 것도 있으며, 꽃은 피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설령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운명과 세상을 탓하지 않았고 끝까지 희망을 보았으며, 제자들을 통해서라도 뜻을 펴려했습니다. "세상이 나를 써주지 않았기 때문에 재주가 많아졌다."한 말씀처럼 산만큼 학문의 봉우리를 맺고 우직하리만큼 자신의 길을 간 한 존재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시대정신의 최고봉이 되어 그 뜻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처럼 가난과 운명을 탓하지 아니하고 공부에 뜻을 두신 아버지의 학업과 무시무시한 열정에 옷깃을 여미고 경애와 무한한 존경을 보냅니다.
한편 부국강병과 약육강식의 시대 공자의 철저하고 완벽한 자세와 원칙과 인의를 중시하는 태도가 당시 왕과 공경대부의 심기를 거스리거나 견재의 대상이 되었고 끝내는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다시 귀국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으로 전개된 점과 아버지 역시 형편상 중학교 자퇴 이후 더이상 학문으로부터 멀어진 점은 큰 아쉬움을 남습니다.
그러나 두분 다 뜻을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시대와 제왕과 운명의 그릇됨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두분의 태도는 후세에게 용기와 커다란 감명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산을 쌓는데 한 삼태기를 채우지 못해 중간에 그치는 것도 내가 그치는 것이며, 땅을 고르게 다지는데 한 삼태기만 덮더라도 내가 한 것이다."
이제 옛 것은 시대의 뒷편으로 지나고 새건물로 멋지게 들어선 고산초등학교 여전히 고산 향교앞에 들어선 학교터와 학교 인근 안수산 오도재에 다섯분의 성인이 나온다는 구전설화, 고사목이 되어가는 구정문 아름드리 은행나무 만이 한 시대의 아픔과 그 속에서도 길찾아 간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를 외로이 전해주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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