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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21:15-17 예수님의 3대 질문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한문 시험에 공부를 뜻하는 ‘학문’ 이라는 단어를 한문으로 쓰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학생들의 답안지에는 세 가지 유형의 답들이 나왔습니다. 첫째는, 학문(學文)으로 쓴 사람, 둘째는, 학문(學問)으로 쓴 사람, 셋째는, 학문(學聞)이라고 쓴 사람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첫 번째의 학문(學文)을 선택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두 번째 학문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아주 적게는 세 번째 학문을 쓴 학생들도 있었는데 그 학생들이 그렇게 쓴 것은 문(門)이라는 글자 안에 뭔가 있기는 있는데 그것이 ‘입 구(口)’ ‘귀 이(耳)’인지 알쏭달쏭한데 학문은 귀로 듣고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세 번째 학문이라는 글을 썼다고 합니다. 정답은 두 번째입니다. 학문(學問)이라는 말을 “묻는 것을 배운다.” 내지는 “배운 것을 묻는다.”로 뜻을 새길 수 있는데 학(學)/문(問) 이 두 글자에서 그 의미가 도드라지는 것은 역시 ‘문(問)’- ‘묻는다’입니다. 기원전에는 배움과 가르침이 거의 제자들이 스승을 따라다니면서 제자가 물으면 스승이 답하고, 스승이 물으면 제자가 답하는 형태로 배움이 이루어졌었습니다. 물음은 학문의 시작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철학이 나오고, ‘우주에는 무엇이 있으며 어떻게 생겼는가?라는 질문에서 천체학이 나오고, 신에 대한 질문에서 신학이 나오고, 물질의 분자 구조에 대한 질문에서 화학이 나오고, 물질의 운동과 그 변화에 대한 질문에서 물리학이 나오는 것처럼, 어떤 사실과 현상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학문이 시작됩니다. 롬10:17절에서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라고 설파했는데, 들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믿음의 세계라고 한다면, 앎의 세계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에 대해서는 믿는 것과 아는 것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쓴 편지에 이르기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엡4:1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부분의 궁금한 부분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질문을 하기도 하고, 질문을 받기도 하면서, 몰랐던 부분들을 알아가고 배워가고 익혀갑니다. 오늘은 신약성경 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율법사에게 물어보았던 중요한 질문 세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질문들은 예수님께서 몰라서 물어 보았다기 보다는 제자들과 의문을 가지고 다가온 사람에게 좀 더 정확한 이해를 시키기 위해서 물어 보았던 질문입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많은 질문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질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16:15) 이 질문은 기독교의 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가 나의 신앙이 바른 신앙인가 아니면 바르지 못한 신앙인가를 측정할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들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신다면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에 대한 바른 대답이 바른 신앙을 세워주는 힘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시고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에 가셨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팔레스틴의 최북단에 위치한 매우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요단강 상류지류가 시작되는 곳으로 2,400m 가 넘는 헤르몬 산기슭의 웅장한 봉우리들과 풍부한 물과 각종 식물들이 넘치는 곳으로 팔레스틴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역의 하나였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주변 환경 때문에 구약시대부터 일찍이 개발되었는데 구약시대에는 ‘바알갓’(수11:17) 또는 ‘바알 헤르몬’(삿 3:3)로 불리웠습니다. 이런 명칭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바알을 섬기는 곳으로 유명했던 우상의 도시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곳이 나중에 로마령이 되었는데 그때 아우구스투스가 이곳을 헤롯 빌립 2세에게 주었고, 후에 빌립은 로마 황제인 디베리우스 카이사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라고 했는데 지중해 연안의 유명한 가이사랴와 구별하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인 빌립을 뒤에 덧 붙여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곳은 바알이 신으로 예배를 받은 우상숭배의 중심지이며, 또한 로마 황제가 우리의 주가 되신다는 고백이 강요되던 현장입니다. 그런 곳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먼저 물어 보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사람들에게서 들은 대로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예수님께서 물어보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베드로는 아주 중요하고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크게 칭찬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이 어떤 신앙을 고백해도 아무런 제약과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벳세다 언덕이나, 겟세마네의 동산에서 물을 것이 아닙니다. “바알이 주이십니다.” “황제가 주이십니다.”를 강요하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곳에서 물어 보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주가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실로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다가 죽을 수도 있고, 백성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을 수도 있는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은 정말 대단한 믿음이 아니고는 불가능 한 것입니다. 밀양에 있을 때 우즈베키스탄에 체육 선교로 가 있는 이상준 선교사라는 분을 알고 있습니다. 태권도를 통해 우즈베키스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 있는데 우즈베키스탄은 국교는 없지만 국민의 90%가 이스람교도입니다. 동방정교회가 8%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국민의 전부가 이스람교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곳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게다가 정부가 개입해서 기독교 전파를 강력하게 제재하고 있어서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은 숨어서 몰래 몰래 예배를 드리고 찬송도 기도한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하다가 공안당국에게 적발되면 외국인들은 추방 당하고, 본국 사람들은 감옥에 가고 심지어 동포들로 부터서 철저하게 따돌림을 당한다고 합니다. 이런 곳에 주는 나의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이 바로 우즈베키스탄과 같은 그런 환경에서 제자들에게 물어본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담대하게 또렷하게 주저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내가 어떤 환경과 조건에 놓여 있다 할찌라도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셔야 합니다. 평안하고 어려움이 없는 곳에서는 얼마든지 쉽게 고백하지만 목숨이 왔다 갔다 하고, 많은 핍박과 어려움이 눈에 훤히 보이는 데서는 이 고백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들이 어떤 형편 어떤 상황에서든지 동일한 고백을 들으시기를 원하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하는 고백을 주님은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2.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6) 베다니 동네에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와 그들의 오라비 나사로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주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기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사로의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오라비가 지금 죽을병에 들었으니 빨리 와서 고쳐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던 장면은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장차 무너질 것을 내다보면서 눈물을 흘리셨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사로의 죽음을 통분히 여기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나사로의 가정을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이 들어 누웠다는 소식을 들으면 일반적으로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가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48시간이나 지체하시다가 나사로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었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평소 즉시 행동하는 행동파입니다. 그런데 다른 모든 사람들은 다 도와주면서 왜 이 위급할 때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을병에 걸렸는데 늦장을 부리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이틀이 지나서 제자들에게 유다로 가자 하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말리면서 “방금도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을 뻔 하였는데 또 가시겠다는 것입니까?”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께서 미적거리는 것을 유대인들의 위험을 피하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지체는 그런 얕은 차원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기다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이 굵어지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이란 기다림입니다. 죽어가는 오빠를 앞에 두고 기적의 주인공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틀은 기나긴 시간입니다. 신경질 나고 화가 나고 욕이 터져 나올 시간들입니다. 이럴 수 있나 싶어서 예수님을 만나면 따지고 싶은 맘입니다. 그러가다 결국 오빠는 죽고 말았고 마리아와 마르다의 기대는 무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이제 모든 소망이 다 사라지고 악만 남고 원망만 남은 그런 시간에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마리아는 화가 단단히 나서 예수님을 마중 나가지도 않았고, 마르다가 달려가서 원망 섞인 투로 “주께서 계셨더면 내 오라비는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라고 쏘아 붙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말씀하십니다. 마르다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어서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압니다.”라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러자 마르다는 말합니다.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는 베드로와 똑같은 고백을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부활의 신앙에 대해서 물으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바로 부활 신앙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부활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들의 부활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부활의 신앙을 빼버리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빼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요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라고 고전15장17-19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분명한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살아서 믿는 자는 비록 몸은 썩어 흙이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됨을 믿으시고 천국을 바라보며 고난도 참고, 어려움도 감수하고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17)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는 안식 후 첫날 저녁 제자들이 문을 닫고 모인 자리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시면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또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 하시면서 직접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마침 도마가 없었는데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자 도마는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고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다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8일이 지난 후 제자들과 도마가 함께 있는 자리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하실 때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베드로와 마르다와 같은 고백을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두 번씩이나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부활의 사실성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도마와 나다나엘 야고보와 다른 제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나서니 다른 제자들도 따라 나섰습니다. 오랜만에 그들은 다시 배를 타고 익숙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였습니다. 3년 만에 다시 하는 고기잡이라 그물질이 서툴기도 했을 수도 있겠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하셨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153마리의 고기를 잡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먹을 아침까지 준비 해 두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 경상도 말로 하면 “밥 묵자.” 아침을 먹고 난 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똑같은 질문을 연거푸 두 번 더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신앙생활의 가장 깊은 맛은 주님을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행복한 때는 주님을 사랑할 때 찾아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고난과 어려움이 와도 주님을 위해 생명까지 바쳐가면서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는 힘은 주님을 사랑할 때 생깁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힘들고 괴롭고 하기 싫은 일이 됩니다. 하지만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을 위해 손해보는 일이 오히려 즐겁고, 주님을 위해 땀 흘리고 고생하면 그보다 더 가치있는 일이 없어집니다. 왜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무기력하고 작은 일에도 힘들어 합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힘은 자발적으로 하게 합니다. 사랑의 힘은 희생을 기쁨으로 하게 합니다. 사랑의 힘은 자신을 죽기까지 내어 주더라도 찬송하면서 그것을 감수하게 합니다. 주님은 이 시간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들의 입으로 주님 사랑한다는 고백이 터져 나오기를 기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은 우리들의 바른 신앙고백을 요구하는 질문입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는 질문은 우리들의 분명한 부활의 믿음을 요구하는 질문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지금 현재 나의 신앙생활을 결단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세 가지 질문에 우리들은 예수님의 마음에 합한 대답을 함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며 더, 나아가서 흔들림 없는 신앙의 모습으로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출처: 나무처럼 숲처럼 원문보기 글쓴이: 백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