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의 향기
강유일
네팔 여행 때의 일이다. 블루다이아몬드 호텔에 여장을 풀었을 때 카트만두 시는 문자 그대로 청보석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히말라야가 주는 푸른 그늘 때문일까. 황혼 속에서도 네팔은 이상하게 밤이 올 것 같지 않은 마력적인 푸르름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 날 오후, 난 자칭 대중가요 작곡가라는 청년의 안내로 카트만두 시내에 있는 우체국에 갔다. 말이 우체국이지 더러운 석조건물을 개조해 만든 그곳은 마치 로마의 지하 기도실인 '카타콤'이나 발굴되지 않은 고대왕조의 우수에 찬 묘실을 생각나게 했다. 우체국 창구에 다가섰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누군가 던져둔 고무도장과 네팔의 국화인 석남화였다. 그날 난 그곳에서, 호텔 방에서 써두었던 내 두 장의 엽서 위에 푸른 소인이 찍히고 서울로 날아가기 위해 낡은 나무통 속으로 떨어져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기침소리가 컹컹 울리던 그 낡고 드높은 석조건물 동쪽에 차려져 있던 잡화가게 같은 네팔의 늙은 우체국이 생각난다.
우체국을 나설 때 난 세바스찬을 생각했었다. 세바스찬은 미국 최고의 서정을 지닌 작가 테네시 윌리암즈의 희곡 <지난 여름 갑자기> 속에 등장하는 신비한 청년의 이름이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인 베나블 부인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어머니, 우리 인간은 모두 틀린 알파벳으로 신의 이름을 쓰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아닙니까.'
이십 세기의 모퉁이에서 바라다보면 편지도 이젠 평가절하된 산물 중 하나이다. 아무도 이젠 편지 같은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란 인간으로 하여금 문을 닫아 걸게 하고, 책상 앞에도 앉게 하고, 기적적이게도 혼자 남아 있게 하는 불가사의한 힘을 지니고 있어 좋다. 이따금 황망한 삶을 유보하고 잠시 자신의 존재를 고독 속에 임대해 줄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이 허덕이며 달려온 삶의 질을 되돌아 볼 수 있어 아름답다.
그러나, 이런 철학적 타산이 아니더라도 편지는 오랫동안 인류의 지혜를 실어나르는 인력거 노릇을 해 왔다. 고전적이고 장엄한 시대일수록, 물질보다 영혼이 더 제값을 인정받았던 시절일수록, 편지는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지혜를 전하는 영혼의 혈관 구실을 해 냈던 것이다. 문학을 가리키는 'Literature'라는 명사가 편지를 가리키는 라틴어 'Letter'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편지가 얼마나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깨닫게 한다.
몇 해 전 사망한 인도의 여걸 '인디라 간디'를 양육한 것은 그의 부친 네루가 옥중에서 보낸 9백여 통의 편지였다. 독립운동으로 온 가족이 투옥되고 어린 소녀였던 딸, 간디만 혼자 남겨졌을 때, 네루가 그 딸을 양육하기 위해 어두운 감방에서 했던 최초의 작업은 바로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네루는 가장 고통스런 시절 편지를 통해 간디를 길러냈고 그 편지들은 나중에 '세계사 편력'이라는 방대한 저서로 출간되기도 했었다.
편지로 자녀를 키운 것은 네루뿐만이 아니었다. 중세 시절, 우리나라의 여성 문학이었던 '내방문학'은 수많은 서간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삶의 본질과 법도를 적은 어머니의 편지는 시집가는 딸의 비밀스런 혼수품목 중 하나였다. 그것은 며느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결혼 후 가장 먼저 받는 선물이 바로 그 가문의 신념과 법도와 소망을 적은 시어머니의 편지였던 것이다.
프랑소아즈 사강의 소설 제목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젊은 예비 변호사인 청년 시몽이 아름다운 실내 장식가인 뽈르에게 보낸 편지의 한 귀절이다. 시몽은 뽈르의 아파트로 보낸 편지 속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여섯 시에 플레이 홀에서 음악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이 지치도록 탐미적인 한 장의 편지로 인해 뽈르는 절망 속에서 다시금 살아갈 용기와 이유를 얻게 된다.
그리하여 미국 작가 솔벨로는 그의 서간체 소설인 《허어조그》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내 생애 중 불멸의 축복이 있다면 그것은 일생 동안 편지를 쓸 수 있는 오른팔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절대 절망 속에서 네루가 딸 인디라 간디를 편지로 양육했듯이 우리도 올해엔 자녀와 가족들에게 편지쓰는 일을 시작함으로써 '삶의 지혜'를 회복시켰으면 하는 바램이다. 황혼 중인 창가에 선 채 방금 도착한 아들의 편지 속에서 이런 귀절을 읽을 수 있는 저녁이란 얼마나 황홀한가 말이다.
'아아! 어머니, 우리 인간은 모두 틀린 알파벳으로 신의 이름을 쓰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아닙니까.'
강유일 에세이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에서
첫댓글 독일 뮌헨의 강유일 작가의 작품이군요~굉장히 문학에 대한 열정이 있는분입니다. 좋은작품 감명깊게 받아들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