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은 이름이 ‘대박의 씨앗’
제품 성패·회사 수명 ‘브랜드’가 좌우…기업들, 돈·시간 아낌없이 투자
2000년까지만 해도 빙그레는 아이스크림 콘 시장에 명함도 못 내밀었다. 롯데의 ‘월드콘’과 해태의 ‘브라보콘’이 수십 년 동안 정상 자리를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빙그레는 해마다 신제품을 내면서 월드콘과 브라보콘의 아성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졌다.
그러나 빙그레는 지난해 ‘메타콘’을 출시함으로써 아이스크림 콘 시장을 단숨에 석권했다. 딸기와 바나나 맛 아이스크림을 함께 맛볼 수 있는 ‘두 가지 맛 메타콘’이라는 유행어를 낳으면서 아이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것이다. 촌스런 이미지를 고수하던 종래의 콘에서 벗어나 ‘메타’라는 현대적 이름으로 포장한 덕이 컸다.
물론 이 제품이 성공한 것은 이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빙그레는 냉동고 속 수많은 아이스크림 가운데서 도드라져 보일 컬러와 디자인을 찾기 위해 냉동고에서 콘을 찾아내는 실험을 수백 번 했다. 제품 사진 한 컷을 찍기 위해 하룻밤에 콘을 천 개 넘게 녹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있었다 해도 아이스크림 콘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큼 현대적이고 발음하기 쉬운 이름을 짓지 못했다면, 제품이 없어서 못 팔 정도까지 성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브랜딩 전문가들은 말한다. 잘 지은 이름 하나가 ‘만년 꼴찌’를 일약 ‘일등’으로 만든 것이다.
‘렉스턴’과 ‘렉스톤’ 놓고 여러 달 고민
이처럼 잘 지은 이름 덕분에 ‘대박’을 터뜨린 사례는 수없이 많다. ‘메타콘’ 외에도 ‘산소주’ ‘메가패스’ ‘경희궁의 아침’ 등 지난해 히트한 상품 대부분은 좋은 이름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래서 기업들은 신제품 이름을 짓는 데 수천만원이 들어도 아까워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름을 다 지어놓고도 한글 표기와 영문 표기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못해 오랫동안 씨름하기도 한다. 디자인은 마음에 안 들면 바꿀 수 있지만, 이름은 ‘성형’이 불가능하므로 처음부터 제대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쌍용자동차는 렉스턴 이름을 지을 때, 한글 표기를 놓고 ‘렉스톤’으로 할 것인지 ‘렉스턴’으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만 몇 달을 고민했다. 메타브랜딩 김희수 팀장은 “한글 표기를 렉스톤으로 했다면, 오늘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톤’이 주는 어감으로 인해 이미지가 화물차 급으로 추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1999년 워크아웃에 들어갔던 쌍용자동차는 렉스턴 판매가 호조를 보여 지난해 10년 만에 처음으로 흑자를 내면서 경영 정상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튼튼하면서 고급스러운 차라는 이미지를 담은 이름이 ‘대한민국 1%’라는 광고 카피와 조화를 이루면서 지난 3월까지 약 3만2천여 대가 팔린 것이다.
기업들이 제품 이름을 짓는 데 힘을 쏟는 이유는 당장의 매출 때문만이 아니다. 브랜드 메이저 정지원 팀장에 따르면, 이름은 한 제품이 시장에서 살아 남느냐 마느냐를 가늠할 뿐 아니라, 기업 이미지를 높여 그 회사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는 효과도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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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우정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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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부터 소주 시장에서 ‘녹차 돌풍’을 일으킨 ‘산소주’는 두산주류BG가 소주 시장에서 재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산소주는 지난해 출시되자마자 한 달 만에 천만 병 판매 기록을 돌파하고, 1년 만에 1억6천만 병을 판매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그 비결은 경쟁 상품의 이미지를 등에 업고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할 수 있는 이름을 찾아낸 데 있다. ‘산소주’는 ‘참진이슬로’나 ‘참나무통 맑은 소주’가 가진 자연 친화적인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산’이라는 단어가 주는 ‘자연·호연지기’의 이미지로 확장되어 애주가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거기에 ‘산소가 담긴 술’ ‘살아 있는 술’ 등 다양한 의미로 풀이되고, 한 폭의 동양화와 풍류를 느끼게 하는 디자인이 효과적으로 결합했다. 두산주류BG는 지난해 성공에 힘입어 올해 소주 시장을 본격 공략할 계획이다.
지난해 쌍용건설이 서울 내수동에서 분양한 주상 복합 아파트인 ‘경희궁의 아침’ 역시 쌍용건설의 이미지를 바꾸었고, 그 덕분에 이 회사가 다른 지역에서 지은 아파트까지 큰 호응을 얻었다. 쌍용건설은 대부분 건설사가 어느 지역에서나 ‘쉐르빌’ ‘래미안’과 같은 동일한 이름으로 분양하는 것과는 다른 전략을 썼다. 쌍용건설도 ‘스윗닷홈’이라는 아파트 브랜드가 있었지만, 서울 4대문 안에 짓는 내수동에서 만큼은 지역 특성을 반영한 브랜드가 소구력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궁궐 터의 지기(地氣)와 경희궁의 자연 정취를 느끼게 하는 문구 형태의 독특한 이름으로 승부를 걸었다. ‘경희궁의 아침’은 차별화한 브랜드 덕분에 당시 금싸라기 땅인 서울 강남 삼풍백화점 자리에 들어서는 다른 주상 복합 아파트가 고전하는 상황에서도 단기간에 분양을 마쳤다. 뿐만 아니라 그 뒤로 ‘용비어천가’ ‘노블레스의 아침’ ‘광화문 시대’와 같은 아파트 브랜드가 유행했다.
한 브랜드가 기업 이미지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아, 브랜드 하나가 성공하면 그 기업의 또 다른 브랜드 역시 시장에 진입하기가 쉽다. 청정원은 ‘간장 하면 샘표’를 떠올리는 소비자들에게 ‘햇살 담은 간장’의 위력을 보여준 뒤, ‘햇살 담은 조선된장’ 등 장류 제품 전반에 확대해 시장 정착에 성공했다.
브랜드 가치가 워낙 높아지다 보니, 회사 이름을 바꾸는 기업도 적지 않다. 주방용 소형 가전 제품을 빌트인으로 판매하는 ‘하츠’는 회사 이름을 바꾸어 성공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지난해 1월부터 한강상사에서 하츠로 회사 이름을 바꾼 이 회사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풍기는 이름 덕분에 주부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주방용 소형 가전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회사 이름 바꾸었다가 낭패 보기도
그러나 회사 이름을 섣불리 바꾸어 기업 이미지에 먹칠을 한 경우도 적지 않다. 인피니트 문행천 팀장은 “오래되었으니까, 남들이 바꾸니까 나도 해야지 하는 심정으로 회사 이름까지 쉽게 바꿔서는 안된다”라고 말했다. 문팀장은 ‘닷컴’이 유행하던 몇 년 전 수십 년 동안 다져왔던 멀쩡한 회사 브랜드를 버리고, ‘쭛쭛닷컴’으로 바꾼 것을 대표적인 실패 사례로 꼽았다. 그는 최근 브랜드 마케팅이 뜨면서 일부 기업이 너무 쉽게 새 브랜드를 만들고, 또 너무 쉽게 죽여버리는 현상을 우려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좋은 이름일까. 브랜드앤컴퍼니 이상민 사장은 “처음 들었을 때 머리를 탁 칠 정도로 인상적이어야 하고, 발음했을 때 긴장감을 느낄 정도로 여운이 있어야 좋은 이름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런 관점에서 ‘소니’만한 브랜드는 없다고 이사장은 덧붙였다. 소니는 어느 언어권에서든 쉽게 발음할 수 있고, 단 두 자로 되어 있어 쉽게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1년 사이 국내에서 나온 이름 가운데 전문가들이 수작으로 꼽는 것은 ‘드림론패스’이다. 현대캐피탈의 대출 전용 카드인 드림론패스는 ‘지갑 속의 든든한 금고’라는 카피와 붙어 다니면서, 현금처럼 언제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다는 범용성과 편리성을 부각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가장 자연스럽게 대출해 드림’ ‘고객이 원하는 꿈(드림)을 드린다’는 컨셉을 명확하게 드러내,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라는 것이다.
안은주 anjoo@sisa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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