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계단문화관 해설자료
Ⅰ. 40계단문화관과 기념관 개요.
1950년 한국전쟁 당시의 역사와 삶의 애환이 담겨 있는 40계단을 테마로 지역문화의 전통과 정체성을 살리는 복합역사문화공간으로 2003년 2월 12일 부산 중구청에 의해 동광동 주민센터 건물 상층부에 개관되었다.
이 곳은 일상 속에서 편안히 찾아와 휴식과 문화체험을 향유하며 삶의 활력과 창의력을 키워줄 문화공간인「중구문화의집(3층과 4층)」과 중장년층에게는 아련한 추억을 전하고 자라는 청소년에게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될「40계단기념관(5층과 6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5층 전시실은 1950년대 40계단을 중심으로 피난살이를 했던 피난민들의 힘겨웠던 생활상을 담은 사진과 생활용품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6층 특별 전시실에는 주기적으로 여러 가지 테마의 전시물을 전시하고 있다.
Ⅱ. 40계단기념관(5층 상설전시실)
1. 중구의 역사: 1876년 개항 이전부터 개항기를 거쳐 일제강점기, 광복, 6·25 등 부산중구의 형성과정과 역사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사진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가. 부산 중구 소개: 구봉산 줄기를 북쪽으로 이어받은 보수산이 주봉을 이루고 부산항이 앞에 펼쳐지고 있는 배산 임해를 이루고 있는 중구는 중앙동, 동광동, 보수동, 대청동, 부평동, 광복동, 남포동, 영주동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요 공공기관과 기업체, 대형 소비 시장 등이 밀집하여 있다.
나. 중구의 역사
- 1592: 임진왜란(동래성 전투)
- 1678: 초량왜관(1876년까지 198년간)
- 1876: 부산항개항(병자년 한일 수호조약)→ 부산항 매축은 산기슭이 바다에 근접하고 있어 평지 확보가 불리한 부산항의 입지여건 개선을 위해 일본인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대공사로 바다를 메워 부족한 평지를 확보하고자 한 공사이다. 이 매축공사로 부산의 항만기능 근대화와 시가지 확보가 이루어져 부산의 사회 변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1905: 을사조약(일제식민통치 시작)
- 1934: 영도다리 개통→ 항만기능의 확충과 도로 정비로 무역량이 증가하자 일본인 증가와 인구 집중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곳이 영도였다. 영도의 정착인구 증가로 영도와 연결되는 도개식 다리가 1934년에 개통되었다.
- 1945: 광복(미군정)→8·15 해방과 더불어 미군정이 시작되었으며 부산항(관부연락선)을 통하여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인과 일본으로부터 돌아오는 귀국행렬이 줄을 이었다.
- 1950: 한국전쟁→많은 군수물자가 부산항을 통하여 들어왔으며 전쟁으로 인한 많은 피난민이 부산항을 통하여 중구를 중심한 지역에 집중하였다.
- 1963: 부산직할시 승격→ 이렇게 많은 피난민들이 집중된 부산은 인구의 증가로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 1995: 부산광역시 승격→ 기장군과 강서구의 확충으로 광역시로 승격.
2. 아! 피난살이: 밥벌이, 물전쟁 등 삶의 애환이 구구절절 묻어나는 그 시절의 추억들의 사진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 전시물: 풀빵(붕어빵)틀, 바리캉, 엿장수가위, 똬리, 펌프, 물지게, 물동이, 꿀꿀이 죽 등 다수.
- 물전쟁: 당시의 물은 먹을 것만큼이나 귀하여 동네마다 식수난으로 아우성이었다. 우물마다 양동이가 줄을 이었으며, 급기야는 우물에 뚜껑이 설치되고 자물쇠가 채워지기도 하였다. 공동수도 앞에는 물이 나오기 몇 시간 전부터 수많은 물동이가 줄을 섰으며 한 가구 당 세 동이를 넘지 못하도록 제한하기도 하였다.
3. 오! 부산: 광복전후 부산의 사회상과 6·25로 인한 피난시절의 부산모습의 사진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당시의 각종 생활용구와 물품인 군용전화선으로 만든 시장바구니, 군용피복으로 만든 저고리와 앞치마, 탄피 등으로 만든 재떨이 등과 검정고무신, 주판, 당시의 화폐 등이 전시되어 있다.
4. 전란속의 학구열: 노천교실에서도 수업 열의는 뜨거웠다.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배움의 꿈을 키워왔던 천막교실의 사진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 피난민들의 집중으로 학교마다 교실이 부족하여 야외에서 노천수업을 많이 하게 되었다. 당시 경남여고의 노천 수업 사진과 이를 재현한 전시물을 보면 여학생들은 얼굴이 햇볕에 그을리지 않도록 모자를 쓰거나 스카프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5. 피난시절의 상징 40계단: 피난시절의 애환과 설움을 상징하는 40계단, 대중가요에까지 등장한 40계단 이야기의 사진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가. '40계단이 널리 알려지게 내력': 6·25 한국전쟁 당시의 피난민들 때문이었다. '40계단' 일대에 피난민들이 판자촌을 이루고 밀집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곳에서 시중에 흘러나온 구호물자를 파는 난장을 벌이기도 했다. '40계단' 일대의 구호물자 장터는 국제시장과 더불어 이름난 '돗데기시장'이 되기도 했으며 '40계단'은 고향을 등지고 피난온 사람들의 이산가족 상봉의 장소로도 유명하였다.
나. 암달러상으로 유명한 '40계단': 6·25 한국전쟁과 더불어 40계단은 암달러상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1953년 11월 바로 앞의 부산역전 대화재로 주변 주택들이 불타 없어지자 이곳을 이용한 구호물품 시장과 암달러 시장은 더욱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다. 본래의 40계단
- 40계단은 차츰 주거지로 잠식되어 처음 4미터 정도의 폭이었던 40계단은 1미터 정도의 좁은 계단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40계단은 본래의 계단에서 남쪽으로 10여 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새로이 만든 것이다.
라. 40계단과 노래 '경상도 아가씨'
- 옛날 모습의 40계단과 가수 박재홍이 부른 노래 "경상도 아가씨"와 관련된 사진과 물품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에는 경상도 아가씨의 노래도 들려주고 있는데 가사를 눈여겨보면 40계단에 앉아 우는 사람은 경상도 아가씨가 아니고 피난 온 나그네이며 '애처로워 우는구나'로 흔히 알고 있는 가사는 '우는구나가 아니고 '애처로워 묻는구나'임을 알 수 있다.
- 이 노래로 40계단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 노랫말 내용은 전쟁당시의 피난민들이 40계단에 기대앉아 낮에는 영도다리를 바라보며 피난살이의 고달픔을 달래고 밤에는 부산 북항에 정박해 있는 많은 배를 내려다보며 향수를 달래던 피난살이의 애환을 잘 표현하고 있다.
Ⅲ. 40계단기념관 6층 특별전시실
1.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
6층 특별전시실은 개관 이후 15세기 이후의 부산 중구를 중심으로 한 초량왜관과 1900년대 부산영화관의 발자취 및 1950년대를 테마로 한 다양한 특별전시를 하여 왔으며 지금은 제10차 조선통신사(조선 영조24년 1748년)를 수행하였던 도화서 화원인 이성린(李聖麟: 1718-1777)이 그린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 30점이 현재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함께 2009년 12월 말까지의 기한으로 전시되고 있다.
2.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조선통신사는 1607년 제1차가 출발한 이후 1811년 제12차까지 204년간 12차례 계속되었다. 이러한 조선통신사가 주목받고 있는 것은 몇 가지의 이유가 있다.
그 첫째는 풍신수길 등에 의해 대의명분 없이 감행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전후처리와 국교회복을 위한 조치로 조선의 사절 파견이 이루어진 것이다. 토쿠가와 막부의 요청에 따라 사절을 파견한 조선으로부터 제3차(1624년)까지를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이름으로 끌려간 포로들의 반환을 요청하였으며 이는 이름이 통신사(通信使)로 바뀐 후에도 계속되었다.
다음으로는 조선통신사의 질과 양이다. 통신사 일행은 약400명에서 500명에 이르는 문화사절단이었으며 정치가, 군인, 학자, 의사, 화가 외에도 가무와 음악의 전문가 등도 참여한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통신사는 한일간의 문화교류의 사절역할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