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原 華城 옛 모습
▲ <엽서>수원 화성 팔달문
화성(華城)은 정조(正祖) 20년(1796)에 완성된 성으로 정조 임금의 효심과 개혁의 뜻이 담긴 성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것은 무엇보다도 축성의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남아 있어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20년대 팔달문(八達門) 앞 상점의 모습과 2층 누각의 뜯겨진 벽이 보인다.
▲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과 용연(龍淵)
동북각루(東北角樓)인 訪花隨柳亭과 그 아래 연못 위에 솟아오른 바위는 광교산의 일맥이 용머리가 되어 솟은 것이라고「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서는 말하고 있다. 韓國 亭子를 대표할 만큼 아름다운 이 각루는 평면구조가 아닌 다각화된 형상으로 四季節 變化의 美가 지금도 독특하다.
▲ 華弘門(화홍문)
光敎山(광교산)에서 흐르는 개천이 城內를 관통하는 곳에 北水門과 南水門을 설치하였다. 북수문은 풍광이 아름다운 東北角樓(訪花隨柳亭) 아래에 일곱 개의 아치형 석조 수문을 쌓고 그 위에 정면 3칸의 누각을 세웠다. 이것이 華虹門으로 訪花隨柳亭과 함께 화성(華城)내에서 가장 景觀이 아름다운 곳이다. 성벽은 장안문(長安門)과 연결되어 있다.
▲ 수원 지지대(遲遲臺)
정조(正祖)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잠들어 있는 현륭원(顯隆園)을 바라보며 더딘 발길을 재촉하던 이 긴 고개가 지지대 고개이다. 고개 마루에는 정조의 효심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순조7년(1807)에 호조판서 서영보(徐榮輔)가 짓고 윤사국(尹師國)이 쓴 비석을 세웠는데 이것이 비각 안에 있는 지지대비(遲遲臺碑)이다.
▲ 수원 신사(水原 神社)
日帝 植民地 治下 朝鮮抹殺政策의 하나로 日本 皇室과 그 功勞者들 追慕하는 곳으로 전국 곳곳에 세워졌다.
▲ 天道敎 月報
1910년8월15일부터 1937년5월까지 발행했던 天道敎의 월간 기관지이다. 창간호부터 한글로 글을 싣고 있는 이 월보는 민중을 계몽하고 교양을 보급하려는 뜻을 담고 있으며, 天道敎 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 京城地方法院水原支廳(경성지방법원수원지청)
일제 식민지 치하 조선인을 탄압하기 위해 설치한 재판소이다.
▲ 華城 창룡문(화성 蒼龍門)
현재는 다시 복원되었지만 이 엽서 사진은 6.25 동란 중 소실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얕은 언덕에 옹성을 두르고 연무대(鍊武臺)와 마주하고 있는 동쪽 성문으로 長安門이나 八達門에 비해 규모가 작다.
▲ 華城 화서문(화성 華西門)
사진처럼 예전에는 넓은 들판을 가로지르며 가파른 八達山으로 오르는 성벽과 연결되어 있는 서쪽 문이다. 한가로이 소가 풀을 뜯는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사람들은 직접 성문 안으로 드나들었으나, 지금은 주변이 도시화되어 그 면모를 잃었다. 그 규모는 蒼龍門과 비슷하다.
▲ 華城 연무대(華城鍊武臺)
군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성내를 조망할 수 있는 등성이에 건물과 조련장을 마련하였다. 앞에는 蒼龍門 옆으로는 東北空心墩과 연결되어 있다.
▲ 水原驛(수원역)
1930년대 朝鮮風物 案內帖에서 水原驛을 소개하는 사진이다. 傳統 官廳建築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오늘날 재건축을 추진하고 있는 水原驛舍 建築은 世界文化遺産인 水原華城과 더불어 이러한 面貌를 보여 주어야 한다.
▲ 長安門 근교
▲ 八達山에서 내려다 본 南門 前景
▲ 八達路 길이 新作路였다
▲ 南門(八達門)의 옛 모습
▲ 西湖 全景(갓 쓰신 할배가 무슨 생각을 하실까?)
▲ 北門(長安門)밖 商店들 모습
邑에서 市로 昇格된 지 60년 水原市의 底力
▲ 1950년대 華西門
우리나라 部族國家 時代 牟水國(모수국) 이것이 문헌에 나타난 水原市의 첫 이름이다. 이후 高句麗 時代 買忽(매홀), 統一新羅시대 守城軍(수성군), 高麗時代 水州(수주)라 불렸으며1413년 朝鮮 태종시대에는 水原都護府(수원도호부), 1793년 정조 시대에는 水原留守府(수원유수부)를 거쳐1895년 고종시대 水原郡이 되었다. 이후 1914년 水原郡 水原面, 1931년 水原郡 水原邑을 거쳐 1949년8월15일 水原市로 昇格되었다.
1967년에는 서울 중구 세종로에 있던 京畿道廳이 수원으로 이전하여 수원이 수도권의 行政中心都市로 역할을 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韓半島의 중심부인 동경 127도와 북위 37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地形은 동북에서 서남 방면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市街地 中央에 143m의 八達山이 솟아 있고 북쪽에는 웅대한 光敎山, 서쪽에는 七寶山이 병풍처럼 이어져 내려오며 남부는 평야를 이루고 있다. 氣候는 온대성에 속하며 연평균 기온은 섭씨 13도 강수량은 1,370㎜ 내외이며, 첫 서리는 10월 20일을 전후해 내리는 전형적인 중부지방 특성을 갖고 있다.
水原은 평범한 도시가 아니다. 水原은 우리나라 최초의 計劃都市이자 世界文化遺産 ‘華城’을 중심으로 傳統과 尖端이 共存하는 文化觀光都市이고 世界最高 水準의 半導體 産業과 知識基盤의 高附加價値 尖端産業이 集積化된 産業經濟의 核心都市로 설명할 수 있으며, 덧붙이자면 首都圈 南部 廣域交通의 要衝地이자 廣域行政業務敎育 등의 中樞機能을 先導하는 複合據點都市라 할 수 있다.
▲ 1950년대 蒼龍門
1949년 水原市의 인구는 5만2천명이었으나 2009년7월1일 현재 인구가 109만6천여명으로 21배 이상 늘었으며 행정구역은 4개과 27개 동이였던 것이 현재 본청 8국 2담당관 34과, 직속기관 5소 1과, 사업소 9소 1담당관 5과 4관, 구청 4구 32과 39개동으로 확대되었다. 수원시 공무원 수도 1956년 253명 이었으나 2009년 현재 2,490명으로 약 10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초대 시의회는 1952년 市議會議員 선거를 거쳐 20명이 선출되었으며 의장에 유기설, 부의장에 차인순을 선출했다. 제1대 水原市長으로 이진영 시장이 임명되었고 제3대이자 民選 초대 수원시장에는 김한복 시장이 間接選擧를 통해 당선되었다.
▶ 수원은 농업, 상업의 중심지 이며 최첨단 산업도시로 성장 수원은 농업의 역사를 이어온 도시로 조선정조19년에 쌓은 만석거, 정조23년에 쌓은 축만제, 순조 25년에 쌓은 남제와 만년제가 수축되어 농업이 안정적으로 성장했으며 1960년대 수원의 16만여명 중 2만5천 여명이 농업에 종사해 약 15%를 차지했다. 현실적으로는 농촌진흥청과 그 산하기관이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와 수원 농업생명과학고등학교 등과 함께 명실공히 우리나라 농업의 중심지로 수원의 발전을 주도해 왔다.
또한 수원은 한양을 연결하는 교통요지에 위치하고 있어 상업이 발달한 도시다. 1920년대는 수원지방의 상권은 성곽내외 내수시장이 31%를 차지해 수원지역 행상인은 1926년에 1,698명이었으며 그중 30%인 515명이 수원성내 시장에 모였다. 1940년대에는 수원화성 4대문(창룡문. 화서문. 팔달문. 장안문)안에서 시장이 발달 하였고 그 당시 중심 저잣거리인 팔달문 안쪽은 수원 상권의 중심지였다. 영화동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큰 규모의 우시장인 쇠전이었고 50년대 수원시장으로는 영동시장, 매산시장, 가축시장, 매교시장과 제1수원시장, 제2수원시장이 설립되었으며 이후 상권은 남문을 중심으로 북문과 역전지역에서 발달했다.
80년대 수원지역의 경제적 특성으로는 종래 주력해온 섬유산업과 전자전기 관련 산업이 발달하여 고용면에서 고도성장을 이룩해 수원 경제권은 전국과 경기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을 보였다. 그러나 소매업에서는 서울과 가까운 위치에 있어 서울집중화에 따른 문제점으로 인해 대형쇼핑타운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으로 수원시에서는 유통구조개선과 유통 전문 인력 육성을 통해 유통업체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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