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생각이 점점 커지게 된 계기는 종교 문제가 제공했다. 본래 영국이라는 나라는 종교 때문에 나라가 뒤흔들린 경험이 많았다. 헨리 8세 시절 영국 국교회가 세워지고 가톨릭 교회가 탄압을 받다가, 메리 1세 시절에는 거꾸로 신교도들이 숱하게 학살되었으며, 다시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는 가톨릭이 수세로 몰려 영국 왕위가 가톨릭교도에게 돌아갈 가능성이 메리 스튜어트 여왕의 최후를 재촉하기도 했다. 이렇게 백 년 사이에 심각한 종교 갈등이 최소한 세 차례나 일어났고, 이제는 국교회가 주도권을 잡은 가운데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회가 세력을 확장하고 잉글랜드에서는 새로 청교도가 나타남으로써 또 다른 피바람을 예고하고 있었다.
여기에 엘리자베스 1세가 직계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음으로써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가가 왕위를 잇게 된다. 스튜어트가의 제임스 1세는 가톨릭과 청교도를 탄압하며 국교회의 지배권을 확인했지만 그 뒤를 이은 찰스 1세는 즉위한 그 해에 프랑스 출신인 헨리에타 마리아를 왕비로 맞는다. 그녀는 부르봉 왕가의 핏줄이었고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기에, 찰스 1세가 메리 1세나 메리 스튜어트처럼 영국을 가톨릭화하려 할 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여기에 찰스 1세가 윌리엄 로드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면서 분쟁의 소지는 더 커졌다. 윌리엄 로드는 이른바 ‘고교회파’로서, 영국 국교회의 틀을 지키되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일부 회복하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로드는 매우 완고하고 전투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국교회의 세력권에 침투해 들어오는 청교도를 막기 위해 그들의 귀나 코를 자르는 악형을 남발했다. 하지만 결과는 청교도 과격파들의 목소리만 키워 준 데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윌리엄 로드는 1639년, 장로교가 세력을 떨치는 스코틀랜드에서 국교회의 힘을 늘리려 여러 가지 무리수를 둔다. 여기에 반발하여 스코틀랜드의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찰스 1세는 전쟁 준비를 위해 오랫동안 닫아 두었던 의회의 문을 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종교에 이어 정치와 경제적 이권의 문제가 걸려 있었다. 튜더 왕조 시절 비교적 왕실에 고분고분했던 귀족과 지방 호족들은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며 점차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통합함은 물론 아일랜드까지 하나로 묶어 ‘대영제국’을 건설할 꿈을 꾸었다. 그러자면 먼저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고 본 그는 왕권은 신이 내린 것으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의회의 관습적 권한을 넘어 독자적으로 세금을 걷고 상비군을 건설하려 들었다. 의회의 반발은 심해졌고, 제임스 1세가 죽었을 때는 암살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뒤를 이은 찰스 1세가 아버지의 방침을 계승해 계속해서 왕권 강화를 꾀하자, 의회는 1628년에 <권리청원>을 내놓는다. 의회의 승인 없는 과세는 불가하다는 원칙을 비롯해서 왕권도 건드릴 수 없는 일련의 ‘자유권’을 승인해 달라는 요구였다. 찰스 1세는 일단 이를 수용한다고 밝혔지만, 몇 개월 후 의회를 해산하고는 이후 11년 간 한 차례도 의회를 열지 않으며 유력한 신하들과의 소통을 단절한다. 의회를 열고 닫는 것이 왕의 고유권한이었기에 의회파는 어쩔 수가 없었지만, 그만큼 분노와 불만이 점점 쌓이고 있었다. 그 동안 찰스 1세는 의회의 승인을 피하기 위해 각종 명목으로 특별세를 거두며 재정을 충당했다. 하지만 마침내 스코틀랜드 정벌을 위해 정식으로 세금 징수 승인이 필요했으므로, 할 수 없이 의회 대문에 박았던 대못을 뽑아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