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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 분석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大韓民國制憲國會總選)은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대한민국 제1대 국회의 국회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이다.
제1대 국회의원 선거일 : 1948년 5월 10일
제1대 국회의원 임기 : 1948년 5월 31일 - 1950년 5월 30일
1. 입후보와 선거 전
입후보자는 모두 948명으로 이승만이 이끄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235명, 동아일보 중심의 언론계 출신과 자본가 계급, 그리고 일본 및 미국 등에서 해외 유학을 하고 돌아온 지식인 계층 등이 조직한 보수 우익 정당인 한국 민주당이 91명, 대동 청년당이 87명, 조선 민족 청년단이 20명, 대한노동총연맹이 12명,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이 12명의 후보를 각각 냈다. 그리고 기타 43개 사회단체 및 정당이 86명을 후보자로 내세웠으며, 무소속은 무려 전체 입후보자의 44%인 417명이 출사표를 던졌다. 무소속이 이렇게 많은 이유는 한국 민주당의 비인기로 인해 당의 후보들이 무소속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정당 및 사회단체가 무려 48개나 되었지만, 7명 이하로 후보를 낸 정당이 42개나 되었고, 단 1명의 후보를 낸 정당 및 사회단체도 25개나 되었다. 해방후 정당과 사회단체의 난립현상과 함께 정치적 혼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추진했던 남북 협상파와 좌익계열은 이 선거에 불참하였다.
2. 선거
한국 최초의 선거로 기록된 제헌국회 총 선거는 미군정에 의하여 관리·집행된 가운데 국회의원 정수 200명을 선출하였다. 투표자는 선거인 총수의 95.5%로 역대 선거사상 최고의 투표율이다.
제헌국회의원 투표 결과 정당·단체별 당선자는 무소속이 의원정수 200명에 42.5%에 해당하는 85명이 당선되어 정당제에 대한 낮은 이해 속에 개인의 인기가 선거를 좌우하였고, 정당 및 단체별로는 이승만을 추종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총의석의 27.5%인 55석을 차지하여 가장 많은 당선자를 내어 제1세력으로 부각되었다. 선거전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한국민주당은 당 중진을 포함한 후보자들이 대거 탈락하여 총의석의 14.5%에 불과한 29명으로 그 뒤를 이었지만 상당수 무소속으로 출마하였기 실제 의석수는 이보다 많은 60-80석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3. 각 정당 개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에 가장 많은 수의 후보자를 입후보시켜 무소속 다음으로 많은 당선자를 내었다. 정식 정당이 아니었기 때문에 뚜렷한 정강·정책을 내세우지 않았고 후보들이 개인 자격으로 출마하기로 했으나, 실제 선거에서는 반탁 운동으로 쌓은 우익 진영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이승만의 후광을 얻기 위해 소속을 밝히는 경우가 많았다.
(1)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는 1946년 2월 8일 훗날의 대한민국 지역에서 결성된 우익 계열의 범정당 정치 단체이다. 약칭하여 독립촉성국민회, 독촉국민회, 독촉, 국민회, 대촉국 등으로도 불린다.
이승만 계열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 계열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중앙위원회가 신탁통치 반대 운동이라는 공통 분모 하에 통합 결성한 것이다.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에 가장 많은 수의 후보자를 입후보시켜 전체 의석의 27.5%인 55석을 확보함으로서 무소속 다음으로 많은 당선자를 내었다.
제헌국회 총선에서 정파 연합 성격의 독촉국민회는 정식 정당이 아니었기 때문에 뚜렷한 정강·정책을 내세우지 않았고 후보들이 개인 자격으로 출마하기로 했으나, 실제 선거에서는 반탁 운동으로 쌓은 우익 진영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이승만의 후광을 얻기 위해 소속을 밝히는 경우가 많았다.
당초 독촉국민회에 참가했던 김구와 김규식 등 남북협상파는 제헌국회 총선에 불참하였으므로, 독촉국민회는 제헌국회가 제헌헌법을 제정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단독 정부 수립, 대한민국 건국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이승만의 직계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2)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은 1945년 9월 16일에 고려민주당,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 등이 만든 보수정당으로 민주당계 한국 야당의 원류를 이루었다.(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참조)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조병옥, 윤보선 등이 참여하였다. 보통 한민당으로 불린다.
1945년 9월 4일 우익진영의 대표자 82명은 서울 종로국민학교에 모여 한국민주당(한민당) 준비위원회 발기총회를 개최했다. 한민당 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8일 성명을 내고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에 정권을 참칭하는 일체의 단체 및 그 행동을 단호히 배격한다"고 선언했다. 1945년 9월 10일 한민당을 대표한 조병옥, 윤보선 등은 미 군정장관 등을 만나 인공은 "일본과 협력한 한인집단"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여운형은 "한인들에게 잘 알려진 부일협력 정치인"이라고 주장하였다. 1945년 9월 16일, 이미 미군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한민당이 천도교 강당에서 일천육백여명의 발기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열었다. 한민당은 창당 선언을 통해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식 정부'로 맞이할 것을 다짐했다.[1]
한민당은 임정 간부와 항일 독립운동가들을 영수로 추대하였다. 이승만, 서재필, 김구, 이시영, 문창범, 권동진, 오세창 등이 그들이다. 5인은 아직 해외에 있었고 국내에 있던 권동진과 오세창은 영수직을 수락하지 않았다.
1945년 9월 16일 한민당은 정강과 정책을 발표하였다. 정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중공주의 경제정책 수립',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 관리',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등 경제조항은 사회주의 요소를 강하게 담고 있다.
한민당은 1945년 9월 21일 중앙부서를 확정하였는데, 당수제 또는 최고위원제를 채택하지 않고 총무제를 채택했다. 1도(道) 1총무의 원칙에 따라 함경도의 원세훈, 전북의 백관수, 경북의 서상일, 경기의 김도연, 경남의 허정, 충남의 조병옥, 황해의 백남훈, 평안도의 김동원 등 8명의 총무를 뽑았다. 송진우는 수석 총무, 김병로는 중앙감찰위원장, 이인은 당무부장, 장덕수는 외무부장, 김약수는 조직부장을 맡았다.
1945년 10월 20일 송진우의 주도로 환국지사영접위원회(일명 환국지사후원회)라는 외곽단체를 조직하여 해외에서 귀국하는 독립지사들, 사실상 임정 요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1945년 10월 23일 개최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개최 대회에 대표를 참석시켜 이승만의 의견에 동조하였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 참조)
1946년 6월 3일에 처음 나온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에 대해 한민당은 신속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한민당은 "일부에서는 무슨 역적질이나 한 것 같이 선전하니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며 이승만을 옹호하고 나섰다.
1947년 2월 5일, 미군정의 민정장관으로 안재홍이 임명되고 각 부처의 장 및 도지사를 한국인으로 바꾸고 미국인을 고문으로 임명했다. 미군정 기구에 중도파가 파고들어오는 것을 경계한 한민당은 민정장관 안재홍을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한민당의 공격은 너무 거셌으며, 1개월을 넘지 않는 동안 저 자를 쫓아내고야 말겠다고 공언하기까지 했다. 또한 각종 연설과 삐라 등으로 안재홍을 비방하였다. 한민당계 고위 관리들은 5월 하순 민정장관 안재홍이 내린 인사 발령까지 거부하였다.[2]
1947년 6월 19일 미소공위 문제를 놓고 이론이 있자,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3]
단독정부론에 찬성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가하였지만 이승만은 정부수립 후 한민당에 재무장관직 1석을 부여하였다. 이에 반발하여 한민당은 이후 야당의 길을 걷게 된다.
1949년 1월 26일 대한국민회, 대동청년단과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함으로써 흡수해체되었다. 이후 민주국민당은 민주당의 모태가 되었다.
(3) 대동청년단
대동청년단은 1947년 9월에 지청천을 중심으로 창설되었던 반공주의 우익 청년단체이다.
1947년 4월 광복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지청천이 귀국해, 청년단체의 대동단결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우익계열의 32개 단체를 통합, 결성하였다. 이후 우익 단체간에 헤게모니 싸움이 발생했다. 이후 서북청년단에서 선우기성 중심의 합류파는 이탈하여 대동청년단에 가입했으며, 문봉제 중심의 재건파는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하였다. 대동청년단은 김구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승만을 지지하는 단체들은 대동청년단을 견제하기 위해 48년 2월 5일 구국청년총연맹을 결성했다.
반공 및 단독정부 수립의 이승만과 민족통일 및 남북협상의 김구에게로 우익 진영이 갈라지자 주로 이승만 노선에 맞추어서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단이 5.10총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적극 참여하자 이에 반대하는 대동청년단의 일부는 1948년 7월 31일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산하로 들어가 자주통일청년단을 결성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기반 확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또 하나의 통합청년운동단체인 대한청년단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동청년단도 대통령의 명령에 의하여 대한청년단으로 통합, 흡수되어 그 중추 세력이 되었다. 해체 시점은 미상이다. 대한청년단에 흡수된 뒤에도 일부 독자적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경남 거창에서의 활동에 대한 증언이 있다. 1950년 5.30 총선거에도 개입했다는 증언도 있다.
(4) 조선민족청년단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약칭 족청)은 이범석을 중심으로 1946년 10월 9일 ‘국가지상, 민족지상’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창설한 반공주의적 우익 민족 청년 운동 단체이다.
이범석은 청년들을 광복된 새 나라의 역군으로 조직화하고 훈련하는 것이 제일 시급한 일이라 판단하고,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족청’을 창설했다.
미군정도 청년단체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1946년 중반 비밀리에 약 500만 달러와 미군 장비를 지원하고 훈련 고문이로 미군 대령 한사람 등을 특파하여 족청 결성을 지원하였다.
문제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자금은 군정청이 아닌 일본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나왔다. 맥아더 사령부는 차량 지원에서부터 제복까지 모두 지원해 주었다. 안호상은 족청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족청은 김활란, 백낙준, 최규동, 현상윤 등으로 이사회를 구성하였고 경기도 수원에 있는 구 일본군육군병원 건물에 족청 중앙본부를 설치하고 이곳에 훈련소를 마련하였다. 소련의 항의를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수원 훈련소에서 약 7만명이 훈련을 받았다. 교육 목적은 장래에 군대였으며 이중 상당수가 국군에 편입되어갔다.
족청은 1946년 10월 9일 창설 당시 300명에 불과했으나, 1년 뒤인 1947년 11월에는 30만 명으로, 2년 후에는 8월 115만명, 그해 가을 120만 명으로 늘어났다. 1947년 4월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던 지청천이 귀국해 대동청년단을 결성하면서 족청에 대해서도 합류를 요청했지만, 이범석은 합류를 거부하고 대동청년단과 경쟁관계에 들어갔다.
국수적이고 심하게 전체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1948년 5월 10일의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에선 6명이 족청을 표방하여 당선되었으며, 나중엔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그러나, 1949년 모든 청년단체를 통합, 단일화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결국 대한청년단에 흡수, 해체되었다.
대한청년단과의 흡수 과정에서 이승만의 명령에 단계적인 합류안을 내놓는 등 저항을 하자, 이승만은 48년 1월 5일 담화문을 내 족청의 해산을 공식 촉구하였다. 49년 2월 족청은 해산되었고 이범석은 국방장관에서 해임되었다.
(5)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大韓獨立促成農民總聯盟)은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산하의 농민총국이 확대·발전되어 1947년 8월 31일 결성된 우익 농민운동 조직이다.
초대 총재는 이승만이었으며, 강령은 '농민대중의 복리와 사회적 지위 향상, 국민경제 재건과 만민공생의 균등사회 건설, 민주주의적 자주독립국가 건설로써 세계평화에 공헌함' 등이었다.
주요활동
- 대(對) 공산당투쟁:전국에서 좌익계의 농민운동조직인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의 파괴활동
- 소작쟁의 및 조정:전국에서 제기된 지주와 농민 사이의 소작쟁의, 미군정의 추곡수집과 관련한 분쟁, 신한공사(新韓公社)의 폐해를 둘러싼 갈등에 대한 조정과 해결
- 선거운동:각급 조직망을 통하여 5·10 총선거에 농민들을 동원하여 투표에 참가하게 하였는데, 경기, 충남, 전북, 전남, 경북에 10명의 후보를 내어서 그 중 2명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시킴
- 농지개혁의 추진:농지개혁에 대하여 좌익과 다른 대안의 제시 및 추진
- 농민계몽:순회강연회·농산품 품평회 등을 개최하여 농민계몽과 증산의욕 앙양에 노력
- 농학촌(農學村)건설 운동:농촌지도자를 양성할 계획으로 각종 농민교육기구를 조직하여 농촌청년들을 훈련
- 농업도서출판:기관지〈새농민〉을 비롯하여 〈영농법〉,〈이상농촌〉,〈감자농사〉,〈농민의 노래〉 등 15종의 출판물 간행·배포
- 초기 협동조합운동:농민후생조합을 조직하고 생산공장으로부터 고무신·낙면(落綿:솜을 틀 때 생기는 솜부스러기)·비누 등 생활필수품을 직접 구입하여 농촌에 싼값으로 배급
(6)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대한독립촉성전국노동총동맹(大韓獨立促成全國勞動總同盟), 줄여 대한노총(大韓勞總)은 좌파 노동조합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에 대항하여 등장한 대한민국 초기의 우파 노동조합으로,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의 전신이다.
대한민국에는 본래 1945년 10월 10일 허성택을 위원장으로 한 남로당 계열 좌파 노동조합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줄여 "전평"이 있었으나, 전평의 공산주의성격, 남·북한을 합한 인민공화국 수립 제창, 신탁통치 지지운동 등으로 민족주의 진영으로부터 반발을 사게 된다. 그래서 1946년 3월 10일 서울특별시 시천교회에서 우파계열 노동조합중 하나로 대한노총이 설립되게 되었다.
대한노총은 1946년 9월에 이르러 전평과의 전면적인 대결구도에 들어가게 되었다. 전평은 1946년 제1차 제네스트를 지령, 9월 23일 철도, 9월 24일 행정파업을 감행, 이를 저지하려는 대한노총과의 공방전이 벌어져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10월 1일을 고비로 파업이 일단락되고, 10월 7일 철도노조의 운행이 재개됨에 따라 전평이 약화되고 대한노총은 대한민국 주요도시를 장악하게 되었다.
전평은 이에 1947년 3월 22일 제2차 제네스트를 지령, 폭력을 불사하는 파괴적인 파업을 강행했다. 대한노총은 이에 전면대결로 들어가 유혈사태 끝에 전평을 저지하였고, 전평은 지하로 잠입하게 되었으나 곧 소멸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비합법화되었다. 대한노총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함께 반공조직의 성격을 버리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노총은 이승만 대통령과 제1공화국의 어용조직으로 전락, 1959년에 이르러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요구가 표면화되기 시작되었다. 대한노총은 자유당의 비호 아래 조직폭력배와 경찰을 투입, 노동자들의 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에 이르렀다. 1959년 10월, 대한노총의 비민주성에 반발한 민주화 세력들은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줄여 ‘전국노협’을 건설하였다. 대한노총은 1960년 4·19 혁명과 함께 소멸 위기에 처했다.
대한노총이 이미 노조로서의 성격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노협 또한 노동운동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전국노협은 대한노총의 ‘대통합’ 요구에 맞춰 한국노동조합연맹, 줄여 ‘한국노련’이 세워졌다.
(7) 조선민주당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은 광복 후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와 평안남도인민정치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신망이 높던 조만식이 북한지역의 대표들과 함께 1945년 11월 3일 평양에서 결성하였다. 당기관지인 《조선민주보》를 주간으로 발행하였다.
조선민주당은 만장일치로 조만식을 당수로 선출하였으며, 부당수에 이윤영과 최용건을, 정치부장에 김책을 뽑았다.
이 밖에도 33명의 상무집행위원과 105명의 중앙집행위원, 그리고 8명의 감찰위원 등 중앙간부를 선출하였는데, 간부 중 최용건·김책 등은 김일성이 정치적인 복선을 가지고 잠입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45년 모스크바3상회의가 결정한 신탁통치문제에 대해 조선민주당은 반탁을 결의하였다. 이때 당수 조만식은 연금상태에 놓이게 된다. 부당수의 한 사람인 최용건이 조만식 당수를 파면하고 자신이 당수직에 취임하여 조선공산당과 보조를 맞추게 되어, 창당 취지가 변질되게 하였다.
더이상 북한지역에서 활동이 어렵게 되자, 부당수인 이윤영을 비롯하여 우익측 간부들이 월남하여 1946년 4월 25일 서울에 집결, 당재건에 나섬으로써 남한지역에서 조선민주당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당의 정신적 지주인 조만식을 계속 당수로 추대하였으며, 산하에 평안청년회를 조직, 월남한 청년들을 규합하였다.
1948년 5.10총선에서 조선민주당측에서 부당수인 이윤영을 비롯하여 5명이 출마하였으나 이윤영만이 서울 종로갑구에서 당선되었다. 정부 수립 후 조각과정에서 월남동포의 참여의식을 높이기 위한 의도로 이승만은 이윤영을 총리로 지명했으나, 한국민주당측의 비협조로 국회의 인준을 얻지 못하여 무임소장관(뒤에 사회부장관)으로 참여하였다.
1946년 조만식은 소련군정 또는 김일성에 의해서 연금되었으며, 이윤영, 한근조, 김병연 등이 월남함으로써, 북한의 조선민주당과 남한의 조선민주당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남한의 조선민주당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이윤영이 총리서리에 지목될 정도로 성장하였으나 이는 조만식 등과 월남 반공인사에 대한 형식적인 배려였지 그 이상 진전되지 못했다. 이윤영은 1948년 7월 총리서리에 지명되었으나 한민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사회당으로 정당으로서 발전을 모색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또한 평양청년회, 서북청년회 등으로 개칭하여 반공단체의 전위 역할을 하다가 1961년 5·16 군사 정변 때 해산하게 된다.
북한의 조선민주당은 부당수 최용건을 지도자로 받들고 그를 중심으로 운영되다가 1981년 조선사회민주당으로 개칭한 바 있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8) 대한청년단
대한청년단은 1948년 10월 4일 창립된 반공주의 우익 청년단체였다.
우익청년단체들 간의 암투가 치열해지고 다른 청년단체들도 계속 우후죽순 생겨나자 이승만은 청년단체들의 통합을 지시했다. 날이 갈수록 커지는 이범석의 족청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도 느꼈던 이승만의 그 지시의 결과로 탄생된 것이 이승만을 총재로 하는 준국가기구적 성격의 대한청년단이었다.
1948년 10월 4일에 창립되었으며 단장은 신성모였고, 감찰국장 겸 건설국장은 김두한이었다.
10개 도지부, 9개 서울 구지부, 17개 지방지부, 180개 시지부, 4천 230개의 군,읍지부로 구성되었다. 48년 12월 31일 회원수는 300만에 달하는 거대 조직으로 성장했다. 대한청년단은 소속 청년단원들을 훈련시켜 예비역 장교로 임명하여 정규 군조직과 청년단 조직이라는 이원체제로 운영했다. 그 후, 1949년 대한민국의 예비 군조직인 호국군이 폐지되면서 대한청년단을 청년방위대로 재편하여 예비군사조직으로 활용하였다. 후에, 한국전쟁 와중에 청년방위대는 국민방위군 창설의 바탕이 된다.
1948년 10월 대한청년단이 결성되자 안호상은 이는 족청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하였다.
(9) 한국독립당
지청천이 북만주에서 만든 한국독립당(1930~1933)도 있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은 1920년 상하이에서 결성된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이며,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일본과 맞써 싸운 단체로 조소앙, 홍진, 조시원이 중심이 되어 창립되었다. 해방후 1949년 이후 몰락하여 자유당, 공화당, 신민당, 민주국민당 등에 분열 흡수되었다.
1930년 1월 조소앙 등에 의하여 임시정부 산하 정당으로 창당되었다. 1935년 5월 해체를 선언한 뒤 7월에 신한독립당, 의열단, 조선혁명당, 대한독립당과 함께 민족혁명당으로 합병되었다. 하지만 민족혁명당이 사회주의 계열의 김원봉과 의열단계에 의해 주도되어가자 조소앙 등은 7월 15일에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한편 민족혁명당에 참가하는 데 반대했던 김구는 1935년 11월에 한국국민당을 창당했으며, 지청천 역시 1937년에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조선혁명당을 창당했다. 한국독립당은 위의 두 당과 합당을 논의하여 1937년 8월 1일에 우익계열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다. 1939년에는 한국독립당을 포함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산하 단체들과 좌익계열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 단체들 간의 통합 논의가 진행되어 좌우익을 아우르는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전국연합진선협회가 결성되었다.
이후 중일전쟁 도중인 1940년 5월 충칭으로 옮겨온 뒤 우익 3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간의 통합을 이루어 김구를 중심으로 한 한국독립당으로 개편되면서 임시정부의 여당이 되었다. 1941년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참가한 이후로는 좌익계열과도 협력하였다.
한국민주당과 함께 양대 보수정당이었으며 1946년 4월 18일 국민당 등을 흡수 통합하였다. 그러나 1947년 6월초 김규식 및 여운형과 노선을 같이하던 한독당 내의 안재홍,박용희,조헌식,이의식,이승복,장지필,엄우룡 등 구 국민당 세력은 김구 등의 반탁 노선에 반기를 들고 미소공위의 성사를 위해 한독당을 탈당하였다. 이들은 '우리 민족의 총의인 자주독립을 쟁취키 위해서는 기동성 있는 총명 과감한 발전적 투쟁을 요한다' 면서 미소공위에 지지를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1947년 6월 미소 공위의 참석에 찬성하는 혁신파와 민주파는 한독당을 이탈하여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하였다.
5·10총선거 당시 김구 중심의 한국독립당이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여 불참하자, 제헌국회에서는 5·10총선거를 추진하던 이승만계열과 호남의 지주들이 중심이 되었던 한국민주당이 대다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1949년 신익희 등이 탈당하여 민주국민당으로 갔고, 조소앙이 탈당하여 사회당을 창당하였으며 이시영, 이범석 등은 이승만 진영으로 가면서 와해되었다.
김구의 사망 후 조완구가 한독당의 당위원장으로 추대되었지만, 한독당은 김구와 함께 사멸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이승만 정권의 노골적인 탄압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민심이 지지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1962년 10월 한국독립당을 지키고 있던 김홍일을 중심으로 한 일파에 의해 구국일념의 야당을 선언하면서 재건되었으나, 1962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였고, 1965년 보궐선거에서 김두한이 당선되어 원내의석을 가진 정당이 되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 선거에 전진한을 후보로 지명하였지만 낙선하고,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도 모두 낙선하였다. 1969년 김학규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고, 자유당 등 보수정당으로 흡수되지 않은 나머지 재건파는 1970년 1월 25일 제7대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두고 야당통합 움직임에 따라 신민당,민주국민당 등에 흡수되었다.
(10) 교육협회
(11) 단민당
(12) 대성회
(13) 전도회
(14) 민족통일본부
(15) 조선공화당
(16) 부산1.5구락부
4. 선거 정보
총유권자수 : 7,840,871명 (총유권자수는 선거인명부등록자로 집계. 실제 총유권자수는 8,132,517명임.)
의석정수 : 200의석
선거제도 : 소선거구제
입후보자수 : 942명
투표일 : 1948년 5월 10일
5. 선거 결과
투표자수: 7,487,649명
투표율: 95.5%
6. 정당별 획득 의석수
정당/단체 | 의석수 | 득표수 | 득표율 |
---|---|---|---|
55 |
1,775,543 |
24.6 % | |
29 |
916,322 |
12.7 % | |
12 |
655,653 |
9.1 % | |
6 |
151,043 |
2.1 % | |
2 |
52,512 |
0.7 % | |
1 |
106,629 |
1.5 % | |
1 |
? |
? | |
1 |
? |
? | |
1 |
? |
? | |
1 |
? |
? | |
1 |
? |
? | |
1 |
? |
? | |
1 |
? |
? | |
1 |
? |
? | |
1 |
? |
? | |
1 |
? |
? | |
무소속 |
85 |
2,745,483 |
38.0 % |
합계 |
200석 |
7,216,942 |
|
7. 지역구별 당선자 현황
(1) 서울시
중구(제1선거구) 윤치영(尹致暎) 무소속
종로구 갑(제2선거구) 이윤영(李允榮) 조선민주당
종로구 을(제3선거구) 장면(張勉) 무소속(1949년 2월 경에 사임한 것으로 추정)
이인(李仁) 무소속(1949년 3월 30일 보궐선거에서 당선)
동대문구 갑(제4선거구) 이승만(李承晩) 무소속(1948년 7월 20일 제헌 국회의 대통령으로 선출됨에 따라 제헌 헌법 제53조에 따라 국회의원직을 상실)
홍성하(洪性夏) 한국민주당(1949년 10월 30일 보궐선거에서 당선)
동대문구 을(제5선거구) 이영준(李榮俊) 무소속
성동구(제6선거구) 이청천(李靑天) 무소속
서대문구(제7선거구) 김도연(金度演) 무소속
마포구(제8선거구) 김상돈(金相敦) 무소속
용산구(제9선거구) 김동원(金東元) 무소속
영등포구(제10선거구) 윤재욱(尹在旭) 무소속
(2) 경기도
인천부 갑(제1선거구) 곽상훈(郭尙勳) 무소속
인천부 을(제2선거구) 조봉암(曺奉岩) 무소속
개성부(제3선거구) 이성득(李聖得) 무소속
고양군 갑(제4선거구) 서성달(徐成達) 무소속
고양군 을(제5선거구) 최국현(崔國鉉) 무소속
광주군(제6선거구) 신익희(申翼熙) 무소속
양주군 갑(제7선거구) 김덕열(金德烈) 무소속
양주군 을(제8선거구) 이진수(李鎭洙) 무소속
포천군(제9선거구) 서정희(徐廷禧) 무소속
시흥군(제10선거구) 이재형(李載灐) 무소속
부천군(제11선거구) 이유선(李裕善) 무소속
김포군(제12선거구) 정준(鄭濬) 무소속
강화군(제13선거구) 윤재근(尹在根) 무소속
파주군(제14선거구) 김웅권(金雄權) 무소속
장단군(제15선거구) 조중현(趙重顯) 무소속
개풍군(제16선거구) 신광균(申光均) 무소속
연백군 갑(제17선거구) 김경배(金庚培) 무소속
연백군 을(제18선거구) 신현모(申鉉謨) 무소속
가평군(제19선거구) 홍익표(洪翼杓) 무소속
양평군(제20선거구) 유래완(柳來琬) 무소속
여주군(제21선거구) 원용한(元容漢) 무소속
이천군(제22선거구) 송창식(宋昌植) 무소속
용인군(제23선거구) 민경식(閔庚植) 무소속
안성군(제24선거구) 김영기(金英基) 무소속
평택군(제25선거구) 최석화(崔錫和) 무소속
수원군 갑(제26선거구) 홍길선(洪吉善) 대동청년단
수원군 을(제27선거구) 김웅진(金雄鎭) 무소속
옹진군 갑(제28선거구) 오택관(吳澤寬) 한국독립당
옹진군 을(제29선거구) 김인식(金仁湜) 무소속
(3) 충청북도
청주부(제1선거구) 박기운(朴己云) 무소속
청원군 갑(제2선거구) 홍순옥(洪淳玉) 무소속
청원군 을(제3선거구) 이만근(李萬根) 무소속
보은군(제4선거구) 김교현(金敎賢) 무소속
옥천군(제5선거구) 정구삼(鄭求參)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영동군(제6선거구) 박우경(朴愚京) 무소속
진천군(제7선거구) 송필만(宋必滿) 한국민주당
괴산군(제8선거구) 연병호(延秉昊) 무소속
음성군(제9선거구) 이의상(李宜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주군(제10선거구) 김기철(金基喆) 대동청년단
제천군(제11선거구) 유홍렬(柳鴻烈)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단양군(제12선거구) 조종승(趙鐘勝) 무소속
(4) 충청남도
대전부(제1선거구) 성낙서(成樂緖)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덕군(제2선거구) 송진백(宋鎭百)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연기군(제3선거구) 진헌식(陳憲植)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공주군 갑(제4선거구) 김명동(金明東) 무소속
공주군 을(제5선거구) 신방현(申邦鉉) 무소속
논산군 갑(제6선거구) 유진홍(兪鎭洪)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논산군 을(제7선거구) 최운교(崔雲敎) 무소속
부여군 갑(제8선거구) 남궁현(南宮炫)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여군 을(제9선거구) 김철수(金銕洙)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서천군(제10선거구) 이훈구(李勳求) 무소속
보령군(제11선거구) 임석규(林奭奎) 대동청년단
청양군(제12선거구) 이종근(李鍾根)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홍성군(제13선거구) 손재학(孫在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예산군(제14선거구) 윤병구(尹炳求) 무소속
서산군 갑(제15선거구) 이종린(李鍾麟) 무소속
서산군 을(제16선거구) 김동준(金東準) 무소속
당진군(제17선거구) 김용재(金用在)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아산군(제18선거구) 서용길(徐容吉) 무소속 아산군 일원
천안군(제19선거구) 이병국(李炳國) 대한독립촉성국민회(1949년 4월 8일 사망)
김용화(金鏞化) 무소속(1949년 6월 10일 보궐선거에서 당선/6월 23일 당선무효)
이상돈(李相敦) 민주국민당(1949년 7월 23일 보궐선거에서 당선)
(5) 전라북도
전주부(제1선거구) 신성균(申性均) 무소속
군산부(제2선거구) 윤석구(尹錫龜) 무소속
이리부(제3선거구) 배헌(裴憲) 무소속
정읍군 갑(제4선거구) 나용균(羅容均) 한국민주당
정읍군 을(제5선거구) 김종문(金鍾文) 한국민주당
고창군 갑(제6선거구) 김영동(金永東) 무소속
고창군 을(제7선거구) 백관수(白寬洙) 한국민주당
부안군(제8선거구) 조재면(趙在勉)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익산군 갑(제9선거구) 백형남(白亨南) 대동청년단
익산군 을(제10선거구) 이문원(李文源) 무소속(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1950년 2월 10일 의원직을 상실)
김제군 갑(제11선거구) 조한백(趙漢栢) 무소속
김제군 을(제12선거구) 홍희종(洪憘種) 조선민족청년단
옥구군(제13선거구) 이요한(李要漢)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완주군 갑(제14선거구) 유준상(柳俊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완주군 을(제15선거구) 이석주(李錫柱) 대독촉농민
진안군(제16선거구) 오기열(吳基烈) 무소속
금산군(제17선거구) 정해준(鄭海駿)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무주군(제18선거구) 신현돈(申鉉燉) 대한독립촉성국민회(전북도지사에 임명되어 1948년 10월 19일 의원직에서 퇴직)
김교중(金敎中) 대동청년단(1949년 1월 13일 보궐선거에서 당선)
장수군(제19선거구) 김봉두(金奉斗) 무소속
임실군(제20선거구) 진직현(晋直鉉)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남원군(제21선거구) 이정기(李程器) 조선민족청년단
순창군(제22선거구) 노일환(盧鎰煥) 한국민주당
(6) 전라남도
광주부(제1선거구) 정광호(鄭光好) 한국민주당
목포부(제2선거구) 이남규(李南圭) 대한독립촉성국민회(전남도지사에 임명되어 1948년 10월 19일 의원직에서 퇴직)
강선명(姜善明) 무소속(1949년 1월 13일 보궐선거에서 당선)
광산군(제3선거구) 박종남(朴鍾南) 무소속
담양군(제4선거구) 정균식(鄭均植) 조선민족청년단
곡성군(제5선거구) 서우석(徐禹錫) 한국민주당
구례군(제6선거구) 김종선(金鐘善) 한국민주당
광양군(제7선거구) 김옥주(金沃周) 무소속(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1950년 2월 10일 의원직을 상실)
여수군 갑(제8선거구) 김문평(金汶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여수군 을(제9선거구) 황병규(黃炳珪) 무소속
순천군 갑(제10선거구) 황두연(黃斗淵) 대독촉농민
순천군 을(제11선거구) 조옥현(趙玉鉉)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고흥군 갑(제12선거구) 오석주(吳錫柱)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고흥군 을(제13선거구) 유성갑(柳聖甲) 단민당
보성군(제14선거구) 이정래(李晶來) 한국민주당
화순군(제15선거구) 조국현(曺國鉉) 대성회
장흥군(제16선거구) 김중기(金仲基) 무소속
강진군(제17선거구) 차경모(車庚模) 무소속
해남군 갑(제18선거구) 송봉해(宋鳳海)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해남군 을(제19선거구) 이성학(李聖學) 대동청년단
영암군(제20선거구) 김준연(金俊淵) 한국민주당
무안군 갑(제21선거구) 김용현(金用鉉) 한국민주당
무안군 을(제22선거구) 장홍염(張洪琰) 한국민주당
나주군 갑(제23선거구) 이항발(李恒發) 무소속
나주군 을(제24선거구) 김상호(金尙浩) 한국민주당
함평군(제25선거구) 이성우(李成佑) 무소속
영광군(제26선거구) 조영규(曺泳珪) 한국민주당
장성군(제27선거구) 김상순(金相舜) 한국민주당
완도군(제28선거구) 김장열(金長烈) 무소속
진도군(제29선거구) 김병회(金秉會) 무소속(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1950년 2월 10일 의원직을 상실)
(7) 경상북도
대구부 갑(제1선거구) 최윤동(崔允東) 한국민주당
대구부 을(제2선거구) 서상일(徐相日) 한국민주당
대구부 병(제3선거구) 백남채(白南採) 한국민주당
달성군(제4선거구) 김우식(金禹埴) 전도회
군위군(제5선거구) 박준(朴竣) 무소속
의성군 갑(제6선거구) 정우일(丁又一) 무소속
의성군 을(제7선거구) 권병노(權炳魯)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안동군 갑(제8선거구) 김익기(金翼基) 무소속
안동군 을(제9선거구) 정현모(鄭顯模) 대한독립촉성국민회(경북도지사에 임명되어 1948년 10월 19일 의원직에서 퇴직)
임영신(任永信) 조선여자국민당(1949년 1월 13일 보궐선거에서 당선)
청송군(제10선거구) 김봉조(金鳳祚) 교육협회
영양군(제11선거구) 조헌영(趙憲泳) 한국민주당
영덕군(제12선거구) 오택열(吳宅烈)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영일군 갑(제13선거구) 박순석(朴順碩) 무소속
영일군 을(제14선거구) 김익노(金益魯) 무소속
경주군 갑(제15선거구) 김철(金喆)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주군 을(제16선거구) 이석(李錫)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영천군 갑(제17선거구) 정도영(鄭島榮)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영천군 을(제18선거구) 이범교(李範敎)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산군(제19선거구) 박해정(朴海楨) 무소속
청도군(제20선거구) 박종환(朴鍾煥)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고령군(제21선거구) 김상덕(金商德) 민족통일본부
성주군(제22선거구) 이호석(李浩錫) 무소속
칠곡군(제23선거구) 장병만(張炳晩)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김천군 갑(제24선거구) 권태희(權泰義) 무소속
김천군 을(제25선거구) 이병관(李秉瓘) 무소속
선산군(제26선거구) 육홍균(陸洪均)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상주군 갑(제27선거구) 한암회(韓嚴回)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상주군 을(제28선거구) 전진한(錢鎭漢) 대한노동총연맹
문경군(제29선거구) 조병한(調炳漢) 무소속
예천군(제30선거구) 박상영(朴湘永) 한국민주당
영주군(제31선거구) 최석홍(崔錫洪) 대동청년단
봉화군(제32선거구) 배중혁(裵重赫) 대동청년단(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1950년 2월 10일 의원직을 상실)
울릉도(제33선거구) 서이환(徐二煥) 무소속
(8) 경상남도
부산부 갑(제1선거구) 문시환(文時煥) 조선민족청년단(경남도지사에 임명되어 1948년 10월 19일 의원직에서 퇴직)
허영호(許永鎬) 무소속(1949년 1월 13일 보궐선거에서 당선)
부산부 을(제2선거구) 허정(許政) 한국민주당
부산부 병(제3선거구) 한석범(韓錫範) 한국민주당
부산부 정(제4선거구) 박찬현(朴璨鉉) 무소속
마산부(제5선거구) 권태욱(權泰郁) 무소속
진주부(제6선거구) 이강우(李康雨) 무소속
진양군(제7선거구) 황윤호(黃潤鎬) 무소속
의령군(제8선거구) 안준상(安駿相) 조선민족청년단
함안군(제9선거구) 강욱중(姜旭中) 조선민족청년단(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1950년 2월 10일 의원직을 상실)
창녕군(제10선거구) 구중회(具中會) 무소속 창녕군
밀양군 갑(제11선거구) 이주형(李周衡)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밀양군 을(제12선거구) 박해극(朴海克) 무소속
양산군(제13선거구) 정진근(鄭鎭瑾) 무소속
울산군 갑(제14선거구) 최봉식(崔奉植) 무소속
울산군 을(제15선거구) 김수선(金壽善) 무소속
동래군(제16선거구) 김약수(金若水) 조선공화당(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1950년 2월 10일 의원직을 상실)
김해군 갑(제17선거구) 신상학(辛相學) 무소속
김해군 을(제18선거구) 조규갑(曺奎甲) 무소속
창원군 갑(제19선거구) 김태수 (金泰洙)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창원군 을(제20선거구) 주기용(朱基鎔) 무소속
통영군 갑(제21선거구) 김재학(金載學) 한국민주당
통영군 을(제22선거구) 서순영(徐淳永) 무소속
고성군(제23선거구) 이구수(李龜洙) 무소속(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1950년 2월 10일 의원직을 상실)
사천군(제24선거구) 최범술(崔凡述) 무소속
남해군(제25선거구) 박윤원(朴允源) 무소속(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1950년 2월 10일 의원직을 상실)
하동군(제26선거구) 강달수(姜達秀) 부산15구락부
산청군(제27선거구) 강기문(姜己文) 무소속
함양군(제28선거구) 김경도(金景道)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거창군(제29선거구) 표현태(表鉉台)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합천군 갑(제30선거구) 이원홍(李源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합천군 을(제31선거구) 김효석(金孝錫) 대한독립촉성국민회(내무부차관에 임명되어 1949년 1월 5일 의원직에서 퇴직)
최창섭(崔昌燮) 무소속(1949년 3월 30일 보궐선거에서 당선)
(9) 강원도
춘천부(제1선거구) 최규옥(崔圭鈺)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강원도지사에 임명되어 1949년 12월 21일 의원직에서 퇴직)
춘성군(제2선거구) 이종순(李鍾淳)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홍천군(제3선거구} 이재학(李在鶴) 무소속
횡성군(제4선거구) 원용균(元容均)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원주군(제5선거구) 홍범희(洪範憙) 무소속
영월군(제6선거구) 장기영(張基永) 무소속
평창군(제7선거구) 황호현(黃虎鉉)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정선군(제8선거구) 최태규(崔泰奎) 무소속(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1950년 2월 10일 의원직을 상실)
강릉군 갑(제9선거구) 원장길(元長吉) 대동청년단
강릉군 을(제10선거구) 최헌길(崔獻吉)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삼척군(제11선거구) 김진구(金振九)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울진군(제12선거구) 김광준(金光俊) 무소속
(10) 제주도
북제주군 갑(제1선거구) 홍순녕(洪淳寧)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북제주군 을(제2선거구) 양병직(梁秉直) 대동청년단
남제주군(제3선거구) 오용국(吳龍國) 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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