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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선교공동체 모라비안 교도
모라비안 교도들의 등장은 선교에 있어서 획기적인 역사를 만들어 낸다. 18세기 유럽의 모든 교회가 자체내 문제에 얽매어 있을 때, 모라비안 교회는 전 세계 복음화를 교회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실천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의 교회였다. 그들은 투철한 복음신앙과 뜨거운 선교열정으로 18세기에 이미 세계 6대륙을 개척했으며, 모라비안 교회를 19세기 선교열풍의 근원지가 되게 하였다. 그들의 삶과 선교의 헌신을 통하여 선교의 새벽지기로 살았던 이들의 삶을 살펴보자
역사적 배경
1. 유럽의 영적 분위기
종교개혁이 일어난 뒤, 130년이 넘은 유럽엔 기득권자였던 카톨릭과의 긴장이 계속되었고, 개혁파 주창자들의 개혁 열정이 식어지거나 왜곡되어 정통주의의 신앙고백 시대로 이어지는 등, 경직되고 이데올로기화되는 신앙으로 전락되었다. 또한 구교와 신교의 긴장이 폭발되어 나타난 결과가 30년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원인은 독일의 루돌프 황제가 신교의 자유를 허락하자, 카톨릭파인 페르디난드 황제가 즉위한 후, 신교를 박해했다. 이러한 30년 전쟁의 결과로 유럽 인구의 1/2이 감소하였고, 교역자 620명이 죽었고, 교육, 정치 문화가 황폐되는 등, 종교적인 면에서는 분열시키는 것이었고, 도덕적, 경제적인 면에서는 파괴적인 것이었으며, 사회적으로는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또한 그 전쟁은 독일을 제후(諸侯), 시 및 공국(公國)으로 분활시켜 놓았고, 이것은 주민들에게 통치자의 신앙고백(카톨릭, 루터교, 개혁파)을 따라야 되었다. 신앙고백의 반대자에게는 핍박이 기다리고 있었고, 일부 군주들은 그들의 영토중 인구가 감소된 지역에, 정착민들을 유치하기 위하여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였다. 한마디로 근대의 교회사인 17세기의 전반적인 경향은 이성이 중심되는 시대로 접어들면서 종교개혁의 절대 사상인,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오직 은혜 (Sola Gratis)"의 고백이 낡은 구호로만 남게 되었다.
2. 경건주의 운동
17세기 후반부터 이러한 유럽의 영적 분위기에 반하는 운동이 경건주의(Pietism) 이름으로 루터파에서 일어나게 된다. 이 경건주의 운동을 촉진시킨 것은, 경건주의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슈페너의 "경건의 소원(Pia Desideria)"이라는 서문을 1675년에 출판하면서 직접적인 경건주의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경건주의 운동은 단순히 루터교에만 뿌리를 두지 않는다, 그것은 루터교와 칼빈주의 그리고 신비주의적인 운동에 영향을 받고 있다. 경건주의 운동의 핵심은,
첫째로 성경으로 돌아가서 구체적 교리의 원천이며 생활의 규범으로 삼았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절대 권위와 축자 영감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는 "성령의 조명, 증거 및 인침에의해서 성경을 통해 일깨우는 참된 신앙을 강조하였다. 셋째는 중생의 삶에 대한 실제적 적용으로서, 성화되는 삶의 방법을 강조하므로, 지속적인 영적 생활의 발전,과 거룩의 삶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3. 모라비안 교도의 등장
모라비안이 형성된 배경에는 그리 멀지 않은 경건주의 운동에 그 뿌리를 둔다. 30년 전쟁 이후에 로마교회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모라비아. 보헤미아에서 피난 온 장 후스 일파의 형제단(The United Brethren)에게 진젠 돌프백작이 자기 영토 내에 거주하게 하고, 헤른후트(Herrnhut:주님의 망대)라는 피난촌을 세우고 진젠돌프의 지도로 1727년 8월 13일 모라비안 교회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경건주의가 모라비안주의(Moravianism)이다.
1) 형제단의 핍박생활
형제단의 생활은 영적으로 갈증을 느끼던 경건 신자들에게 도전을 주었고, 리쯔성에 모이거나 이와 유사한 모임이 모라비안과 보헤미아 여러 지역에서도 생겨났다. 1467년 그들 자체내에 목사를 세워 카톨릭과 완전히 분리된 예배를 드리게 되므로 구교로부터 맹렬한 핍박을 받았다.
재산 몰수, 감옥에 갇혀 고문 당함, 화형등의 핍박속에서도 이때부터 300년 동안 형제회는, 오히려 강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 갔다. 이러한 형제회의 선구적이고 복음적인 교리와 교회 생활은, 16세기 루터와 칼빈에게 격려와 모본이 되었다.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간의 30년 전쟁은 형제회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이때 3만 6천여 가정이 보헤미아를 떠나 삭소니(Saxony), 살레지아, 브란데버그, 폴란드, 헝가리, 네델란드로 피신하게 된다. 이 시련의 시기에 코메니우스를 위대한 지도자로 세워 1627년 핍박의 절정 때, 고국을 뒤로하고 망명 생활을 하는데, 그는 자이언트산에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나님, 모리바, 보헤미아로부터 복음의 씨를 없애지 마시고, 하나님 당신을 위하여 씨를 남겨 주십시오." 이 거룩한 씨가 1722년 크리스찬 데이빗이란 목수의 지휘하에 일단의 형제들이 한 가정교사의 소개로 진젠돌프(Zinzendorf)백작의 영지인 베를셀스도르프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은 '주님의 집'이란 헤른 후르트를 짓고, 2세기에 걸켜 세계선교본부센타 역할을 하게 된다.
2) 진젠도르프(Nicholas Ludwig Von Zinzendorf)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과 뜨거운 사랑의 마음이 그의 가슴속에 가득 채워져 있는 사람중에 하나이다. 그의 그리스도에 대한 열망을 담은 한 모토가 있다. "나에게 한가지 열정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시다, 바로 오직 예수이시다" 그에게 이러한 열정을 갖게 된 것은, 멀리 경건주의 창시자였던 슈페너와의 만남이였다.
10세때 프랑케에 의하여 설립된 페다기움에서 공부하던 중, 외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귀국한 선교사들의 해외선교 강연에 큰 감명을 받고, 자기도 그들과 같은 인생을 살고자 결단하였다. 1722년에 결혼한 그는 신혼여행에 돌아와보니, 모라비안교도들이 크리스챤 데이빗의 인솔하에 진젠돌프의 영지에 정착해 있었다.
그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생활을 도와주다가, 그들의 경건 생활에 큰 감동을 받았고, 자신의 집을 헤른후르트로 옮겨서 같이 생활하였고, 후에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흩어진 모라비안인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로 뭉쳤고, 그리스도의 왕국을 위하여 어디든지 준비된 일꾼을 보내기 위하여, 청년 남녀들을 부모와 떠나 엄격한 신앙훈련을 시켰고, 아이들은 할레의 고아원을 본받아 부모에게서 떠나 자립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1731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덴마크의 크리스챤 4세의 대관식에 참여하였다가, 서인도에서 온 흑인(Anthony Ulrich) 과 그린랜드 출신인 두 에스키모인을 만나, 그들의 선교사를 요청하는 것에 감동을 받아 두명의 헌신자를 보냈는데, 한 명은 서인도 제도의 흑인을 복음화 하기 위하여, 자신도 기꺼이 노예가 될 각오를 하고 토기장이가 헌신을 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목수였다.
이때부터 소극적인 경건생활에서, 적극적인 세계선교로 방향을 전환 하였고, 진젠돌프는 세계선교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일꾼을 양성하여 해외로 파송하기 시작하였다. 진젠돌프 자신의 구체적인 헌신은, 모라비안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진젠돌프는 많은 능력과 재물,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바쳤다.
3) 모라비안 교도의 삶의 원칙
모라비안교도들의 생활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형제단과 진젠돌프와의 관계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들과의 연계 속에서 바른 모라비안인의 정신이 나오게 되었다. 이들의 삶과 생활은, 모라비안의 생활신조에서 보면 알 수 있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그들의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원칙에 대한 기본적인 확신과 자세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신자들과의 교제의 부르심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며, 그리스도의 지체의 구성원으로서, 교회는 복음을 말과 행동으로 신자의 믿음을 증거하면서, 함께 복음을 선포함으로,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와 신자의 부르심에 목적이라고 모라비안 교도들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세계 선교를 위한 증인에 있어서 철칙으로 여긴 것 중에, 첫째는 어떤 사람이라도 모욕하거나, 비방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것이였다. 우리 이웃과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그들이 주의 자녀가 될 때까지, 친절과 정직과 양심을 드러내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야 한다. 모든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필요를 찾아 섬기며, 헌신하는 것이여야 한다고 하였다.
4)동원과 헌신
모라비안 교도들의 선교에 대한 헌신과 업적은 지대한 것이었다. 1930년까지 세계 14개국에 3,000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였고, 뜨거운 선교 열정으로, 19세기에는 15개의 선교기관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들이 개척한 6대륙의 사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서인도 제도 선교
서인도 제도의 개척은, 레오나드 도버라는 토기장이와, 데이비 니치만이라는 목수의 자원에 의하여, 1732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이곳 섬 토마스와 크르와섬들은 사탕수수와 코코아 농장을 위해, 매년 10만명의 노예를 수입해 왔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이들이 선교의 대상이였다.
대농장 주인들은 노예들이 크리스챤이 되,면 일에 방해가 될까 봐, 선교사역을 방해하고, 감옥에 가두고, 주님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선교사들은 노예와 같이 일하고, 밤에는 성경을 가르쳤다. 그들의 희생적인 사랑은 흑인에게 감동을 주어, 선교한지 17만에 2천명의 신자를 갖게 되었고, 1879년에 41개 지부와 78명의 선교사가 36,698명의 신자를 갖게 되었다. 1876년에는 흑인목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 남아메리카 수리남 선교
모라비안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855명의 인디언과 59명의 부쉬 니그로, 그리고 731명의 노예들이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런 열매를 통하여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야만인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 그린랜드 선교
이 땅에는 처음에 평신도 선교사인 크리스챤 데이빗을 지도자로 해서, 세명의 개척자가 에스키모인들에게로 갔다. 1881년까지 19명의 순교자들이 나왔지만, 이들의 순교로 1545명의 에스키모인들이 구원을 받았다.
■ 아프리카 선교
아프리카 최초의 선교,는 1736년에 모라비안 죠지 슈미트 선교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는 지식과 지위가 높은 사람은 아니지만,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고, 불요불굴의 용기와 열정을 가진 사람이였다. 그는 헤른 허르트로부터 아프리카로 가라는 명령을 받은지, 7일만에 네델란드를 거쳐 선교지인 아프리카 최남단으로 갔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가능하다. 하나님이 나를 선교사로 보내셨으므로, 어떤 악 조건 가운데서도 복음이 전파될 것이다' 라는 확신을 가졌다. 목숨을 건 사역 속에 1882년 동부와 서부 지역에만 25개의 학교와 250명 학자, 14개 지부, 11,704명의 세례교인을 얻기에 이르렀다.
■ 호주 선교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아프리가 흑인들 보다 미개하다고 하는 호주 원주민들에게 가서, 라마훅에 학교를 만들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옷 입을 것, 곡식을 경작하는 것 등을 일일이 인격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나병 병원도 만들어, 호주인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는 등, 사랑을 베풀자, 원주민들의 마음이 점차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4.모라비안 선교를 통하여 배울 점
1) 모라비안의 선교 열정은 본국에 있는 신자와 선교사의 비율이 12:1일 정도로 대단하였고, 선교하는 공동체로 생활이 이루어졌다. 더구나 당시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5000:1이라는 비율밖에 안되었다. 지난 87년 한국의 통계도 13,600명당 1명이, 선교사로 가는 것에 비하면 대단한 것이었다. 이렇게 헤른 후르트 지역에, 인구가 600명밖에 안되었는데도, 선교사역을 시작한지 10년만에, 호주를 제외한 전 대륙을 개척하였다.
2) 평신도 선교사로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한 놀라운 사역이었다.
서인도 제도에 간 선교사는 토기장이였고, 그린랜드개척자는 묘지 관리인이 였으며, 목수와 그 외 거의 모두가 평신도 출신 선교사였던 것이다. 그들은 정규 신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아니였지만, 성경을 사랑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열성이 있는 사람들이였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통해서 역사하셨다.
3) 자립 선교를 통하여 선교현지에 깊이 뿌리를 내리며 함께 삶을 살았던 자립선교였다.
이들은 다 한가지씩 자기 기술과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떨어져도 먹고 살며, 선교하는 정책을 펼쳤다. 의료사업 이나 교육선교사업 또는 꼭 필요한 것을 위해서는, 각 교회별로 선교기금을 모아 은행에 예금해 두고, 그 이자로 선교지원을 하였다고 한다. 선교사로 파송하는데, 많은 돈이 들지 않았기에 그들이 필요한 곳에, 적절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할 수 있었다.
그 동안 살펴본 것처럼, 모라비안 교도들은 17세기의 경건주의 운동에 깊이 뿌리를 두고, 성경 중심과 성령의 실제 사역을 경험하고 적용하는 가운데, 영혼 구원의 열정을 실천적으로 살아 던 신앙인이였다. 이것은 형제단으로 이어져오면서 박해 가운데 얻은, 깊은 신앙의 유산이 끼친 업적이 크리라 본다.
그러나 1760년 진젠도르프가 죽은 뒤, 슈팡엔버그(Spangenburg) 감독이 그를 계승하였고, 그의 생존 때까지도, 세계선교가 활발해 졌지만, 모라비아 교회는 예전과 같이 핍박이 없어졌기에, 신앙의 순수성을 잃고, 지도층은 영적이라기 보다는 민주적이 되어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그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하는 아쉬움을 보였다.
'기독교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는 말을 기억한다. 8000여 미전도된 종족과 우리의 영적침체와 안일함, 교회의 동결된 선교자산이 방치된 채로, 21세기를 기다리는 현재에서, 모라비아 교도들이 끼친 선교의 새벽지기로서의 열정과 업적이 우리에게 주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유상길 선교사 (K국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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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모라비안 교도들에 있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원칙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원칙은, 결코 분리 될 수 없는 것임을 발견합니다. 서인도 제도의 흑인들을 복음화 하기 위하여, 스스로 노예의 신분으로 들어가, 자신의 전부를 헌신하며, 실천적인 섬김의 자리로 들어간 그들의 삶이, 이 시대 우리들에게도 매우 필요한 일이라 믿습니다. 다 한 가지씩 자기기술을 가지고, 언제 어디에 떨어지더라도 먹고 살며, 자립할 수 있었던, 자립선교야말로 이 시대에 매우 중요한 실천적 과제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