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타스님 자경문 - 시작하는 마음 제 22 강
身하면 으거든요. 사람 몸은 게을러서 자빠져있기를 좋아해요.
드러눕기를 좋아해요. 意하면 이거든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인데, 생각하는 것이 오똑하게 거 있어야 되는데, 생각이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좋았다가 나빴다가, 좋았다가 나빴다가 자꾸 변덕을 부린다는 뜻이지요. 아ㆍ어ㆍ오ㆍ우ㆍ으ㆍ이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
그래 六入(육입)이라고 그랬어요. 여섯 가지가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六入이 六塵(육진)을 상대 하거든요. 色聲香味觸法(색성향미촉법) 육진을 상대해서 나가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하는 건데, 塵을 境(경)이라고도 합니다. 여섯 가지 경계라 이 말입니다. 붉은빛ㆍ노란빛ㆍ예쁘고ㆍ밉고ㆍ이런 경계가 눈으로 보인다 이 말입니다. 眼根(안근)이 육경을 상대한다 이 말입니다. 境을 상대한다. 그러니까 귀도 좋은 소리ㆍ나쁜 소리 듣잖아요. 聲塵(성진)을 육진이라고도 하고 육경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는 塵이라고 했지요. 六根(육근)을 精(정)이라고 하듯이...
眼耳鼻舌身意(안이비설신의)가 色聲香味觸法을 상대할 때에, 상대하면 그것을 12處(처)라고 그래요. 합치면 12처잖아요. 열 두 곳이라 이 말입니다. 그 때에 거기에서 뭐가 생긴다 이 말입니다. 眼根(안근)이 色塵(색진)을 상대할 때에 = 色境(색경)을 상대할 때에 眼識(안식)이 생긴다 이 말입니다. 좋다ㆍ궂다ㆍ가져야되겠다ㆍ버려야되겠다 하는 이런 분별식이 생긴다 이 말입니다. 그렇지요? 귀로 들어서도 그렇고, 안이비설신의, 역시 6식이 생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內六根(내육근)ㆍ外六塵(외육진)ㆍ中六識(중육식). 그럽니다. 內六根 = 안으로 여섯 가지 뿌리. 外六塵 = 밖으로 여섯 가지 티끌, 먼지. 中六識 = 그 가운데에서 여섯 가지 분별식이 생긴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18계라고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6입ㆍ12처ㆍ18계. 그래서 乃至無意識界(내지무의식계) 그러잖아요. 乃至無意識界는 18계를 말합니다. 제일 처음에 무안이비설신의는 6입을 말하는 것이고, 무색성향미촉법은 6진을 말하는 것이고, 합치면 12처지요? 내지무의식계. 그럴 것 같으면 18계를 말하는 겁니다. 반야심경에 그렇게 얘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精과 塵(진). 그것뿐이 아니라, 내지 말하자면 18계까지가 다 조용히, 어쨌든지 지금 법문 듣는 찰라니까 딴 생각이 없다 이 말입니다. 딴 생각 했으면 무슨 소리 했는지 하나도 못 알아들을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딴 생각이 없이 오직법문만 골똘하게 들었기 때문에 肅情塵(숙정진)이 되는 것이거든요. 법문 들으면서 생각이 남대문 시장으로 그냥 동대문 시장으로 어디로 돌아다녀 보세요.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듣기는 들었어도 안 들은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골똘하게 耳目(이목)을 기울여서 그 법문을 들었기 때문에 정숙한 속에서 6정 6근이, 정숙한 그 가운데서 깊은 이치만을 맡았다는 겁니다. 致라는 것은 이치라는 치자입니다. 理자가 빠졌지만 賞幽理致(상유이치). 幽玄理致(유현이치) ←이렇게 해야 제대로 뜻이 됩니다. 幽자는 유현하다. 아주 깊고 깊다는 뜻이고, 심오하다는 뜻입니다. 致는 이치라는 뜻입니다. 유현한 이치ㆍ깊은 진리. 이치라는 것은 진리에 가까운 것이니까요. 그런 것을 다 감화되고 있었다가, 법회가 다 끝나고 난 뒤에, 법문이 끝나고 난 뒤에
下堂後(하당후)에 黙坐觀之(묵좌관지)호대
如有所疑(여유소의)어든 博問先覺(박문선각)하야
夕惕朝詢(석철조순)하야 不濫絲髮(불람사발)이어다.
如是(여시)라야 乃可能生正信(내가능생정신)하야
以道爲懷者歟(이도위회자여)인저
下堂後(하당후)에, 설법당을 내려왔다 이 겁니다. 자기 방으로, 대중처소로, 어쨌든 평상거처로 내려온 후에, 堂은 설법 당 이거든요. 법당에서 내려온 뒤에, 堂 할 적에도 설법 당 이 있고, 불당 이 있고, 이것이 다 각각 달라요. 이것을 우리나라는 그냥 부처님 모신데는 다 법당이라고 그러는데, 사실은 잘못 된 겁니다. 부처님 모신데는 원래가 佛堂(불당)입니다. 부처님 모신데는 불당이라고도 하고, 佛殿(불전)이고, 大雄殿(대웅전). 부처님 모신 궁전입니다. 법당은 설법만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요새는 겸용해서 많이 쓰기 때문에... 겸용해서 많이 쓰기 때문에 그냥 법당ㆍ법당. 그러는데 그것을 원칙적으로는 분별할 줄 알아야지요.
그래서 송광사 같은데 가면 법당에 부처님 안 모셨습니다.
장경만 모셔놓고 부처님 없지요. 본래는 장경도 없어요. 장경 있는 그 자리가 바로 법상입니다. 큰스님 올라앉아 가지고... 보조스님 그 법상에 올라앉아 돌아가셨잖아요. 법상에서 떡~ 설법 하고 나서 주장자 짚고 돌아가셨잖아요. 그래 “나는 지금 열반하고자 하노라.” 법상에 앉아 떡~ 주장자를 짚고, “나는 지금 열반하고자 하노라. 물을 것이 있으면 물어라.” 한 중이 턱~ 나와서 절을 하고는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의 열반 하시는 일과 금일 불일보조가 열반 하시는 일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이렇게 물었거든요. “이 눔의 자식아, 너는 평생 같고 다른 것, 그것만 배웠느냐?” 그러니까 할 말이 없어서 돌아앉고 나니까 게송을 읊었거든요.
波亂에 月難現(파란월난현)이요. 파도가 어지러우면 달이 나타나기가 어렵고, 室深에 燈更光更(실심등갱광)이니라. 방이 깊으면 등불 빛은 더욱 밝으리라. 權君하노니 整心器(권군정심기)하야, 그대들에게 권하노니 마음 그릇을 잘 정돈하여 勿傾甘露漿(물경감로장)이어다. 감로의 장물을, 甘露漿이라는 것은 불생불멸하는 그런 보약입니다. 감로의 장물, 감로수 한잔만 마시면 죽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아무루타 = 不死水(불사수) = 죽지 않는 물이 감로수입니다.
勿傾甘露漿이어다. 감로의 장물을 쏟아버리지 말라. 잘 보존해서 감로의 장물을 먹고 생사를 초탈해라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열반이지요. 생사를 초탈해하라는 말입니다. 그 법문 끝에 주장자를 탁~ 짚고 그냥 열반하셨어요. 참 멋있지요? 평생 중노릇을 하면 회향을 그렇게 해야 되는데... 제가 그것이 큰 걱정입니다. 그래서 사람도 좀 안 만나고... 제가 살려면 10년 밖에 안 남았는데, 10년 동안을 어쨌든지 간에 부지런히 정진해서 그것하고 비슷하게 하고 가야 될 텐데, 계속 이렇게 살면서 분별하고 이렇게 갈아선 안 되겠다 말입니다.
법당에서 내려와 가지고 黙坐觀之(묵좌관지)호대, 묵묵히 앉아서 관해보거든요. 이 법문은 언어문자를 떠난 것이기 때문에, 언어문자라는 것은 매개체가 돼가지고, 언어문자가 매개가 되어서 내 마음 속으로 들어가야만 되는 것이거든요. 20강에서 얘기 했듯이 중생의 배움은, 범부 중생들의 배움은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나오는 것... 성자들의 배움은 귀로 들어가서 입으로 나오지 않고,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간답니다. 마음속으로 들어 가가지고 자기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서 그것이 말하자면 수행의 資糧(자량)이 된다는 겁니다. 양식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될 것 아닙니까? 그것이 법문 듣는 진짜 자세지요.
黙坐觀之라. 묵묵히 앉아 관해보는 겁니다. 생각해본다 이 말입니다. 觀이라는 것은 이것은 見(견)이 아니고, 觀이거든요.
見이라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고 = 투시. 보는 것이고요.
觀이라는 것은 관세음보살ㆍ관자재보살이라는 뜻입니다. 관자재보살은 觀이 自在(자재)해버렸다 이 말입니다. 마음으로 생각해보면 그것이 제 마음대로 된다 이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 마음 내 마음 대로 된다 이 말입니다.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돼버리면 걱정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그것이 관지입니다.
黙坐觀之에는 원래 세 가지 내지 네 가지가 있는데, 제일 첫째는
親近善友(친근선우)하고, 선지식을 친근해야만 법문을 들을 수 있으니까, 좋은 스님을, 선지식을 만나야 되고, 다음에는
親聞正法(친문정법)하고, 부처님의 정법을 친히 들어야하고, 들었으면 思惟其意(사유기의)하고, 그 뜻을 잘 생각하고, 사유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생각해봐야 觀之입니다. 그래서 옳다고 생각했으면 그대로 실행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如說修行(여설수행)이라. 그 말씀과 같이 수행을 해야 된다 이 겁니다. 聞ㆍ思ㆍ修(문사수). 듣고 생각하고 닦고, ←이것을 三慧(삼혜)라고 하고, 親近善友까지 하면 四慧(사혜)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黙坐觀之입니다. 묵묵히 앉아서 생각해본다. 이 말인데
이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운동이든지ㆍ기술이든지ㆍ학교가서 공부하는 것이든지ㆍ뭐든지 복습을 잘 해야 될 것 아닙니까?
배웠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잖아요. 배워서 알기만 하고 복습을 하지 아니하면 90%가 없어져 버린대요. 왜 없어지느냐? 이 기억이라는 것이, 자꾸 망각이라는 먼지와 눈이 쌓이거든요. 망상 때문에요. 망상이 눈이고, 먼지인 것입니다. 땅 바닥에다 큰 大자를 써 놨다고 합시다. 눈이나 먼지가 와서 덮어버리면 금방 없어져 버리잖아요. 덮였지만 그 밑에 글자가 있기는 있어요. 눈이 오거나 말거나 또 쓰거든요. 또 쓰고ㆍ또 쓰고ㆍ또 쓰고ㆍ또 쓰고ㆍ또 쓰고 한 100번만 써 놓으면, 눈이 제법 많이 와도 그 위에 큰大자가 나타나잖아요.
완전히 내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내 것이 된 것이 안 것이지, 내 것이 되지 아니하면 안 것이 아닙니다. 안다는 것은 내 것이 된다는 뜻이거든요.
黙坐觀之(묵좌관지)라. 묵묵히 앉아서 생각해 관해본다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如有所疑(여유소의)어든, 그래도 의심되는 바가 있거든,
‘그것이 무슨 말씀이시던가? 그거 잘 모르겠네. 이해가 잘 안 되네.’ 의심되는 바가 있거든 博問先覺(박문선각)하야, 널리 선각들에게 물으라 이 말입니다.
그 법사스님한테 가서 물을 수 있으면 좋고, 그 스님한테 못 물을 형편이면, 우리 선배들한테, 나 보다 선배들한테 물으라 이 말입니다. 묻는 것이 하나도 부끄러울 것이 아닙니다. 不恥下問(불치하문)이라. 아랫사람들한테라도 물으라 이 겁니다. 아랫사람한테 묻는 것이 부끄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언제든지 많이 물을 줄 아는 사람, 이것이 학문하는 사람 자세다 이 말입니다.
學問(학문)이라고 그래서 문 門(문)가 아니고, 물을 問(문)자잖아요. 자꾸 물어봐야 되는 겁니다. 博問先覺하며, 널리 선각들에게 물을 것이며, 아는 사람들에게 물을 것이다.
夕惕朝詢(석철조순)하야 不濫絲髮(불람사발)이어다.
저녁에 두려워하고 아침에 물어서 絲髮도 넘치지 말게, 실 터럭만치도 넘치지 말라. 저녁에 두려워하라. ‘아, 오늘도 하루해가 지나갔구나.’ 이렇게 저녁때가 되거든 두려워하라는 말은, 옛날 사람 공부할 때, 하루해가 지나가면 다리 뻗고 울었거늘 나는 어이 방일하며 있나. 옛날 사람 공부할 때 하루해가 지나가면, 오늘 하루해도 지나가 버리고 내가 이룬 것은 없고, 내가 해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그야말로 흘러간 물은 다시 말하자면 떠먹을 수도 없고 諸行은 無常(제행무상)해서 이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이 겁니다.
‘벌써 가버렸구나’ 그리고 ‘내 공부는 진취가 없구나.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냐?’ 하고, 옛날 스님들은 땅을 치고 울었대요.
그래서 저녁이면 항상 세상이 무상한 것을 두려워하라 이 말입니다. 그리고 “밤새 안녕하십니까?” 있잖아요. 밤새 죽을런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저녁이면 항상 두려워하고, 아침에는 또 물으라 이 말입니다. 또 묻고 공부하라 이 말입니다. 공자님도 朝聞道면 夕死도 可而(조문도석사가이)라. 아침에 도를 듣고, 저녁에 죽어도 참 그야말로 가하다. 좋다. 도를 듣는다는 소리는 아침에 도를 깨친다는 소리입니다. 공자님도 다 깨쳤어요. 안회도 다 깨치고요. 공자님이 三月을 放味(삼월방미)라 그랬거든요. 석 달 동안을 맛을 잃어버린 적이 있어요. 단 맛인지 쓴 맛인지 맛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고 그래요. 그것이 無心三昧(무심삼매)에 들어갔다는 소리입니다.
無心三昧에 한 번 들어가지 아니 하면 도를 깨치지 못 하는 겁니다.
학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자가 한 번 되려면 삼매 속에 들어가 버려야 돼요. 자기 연구 논문에 대해서, 자기 연구 과정에 대해서 완전히 삼매에 들어가 가지고, 변소에 앉아서 하룻밤을 새워버린다든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ㆍ세상 물정 모르고ㆍ거기에 한 번 푹 빠져봐야 된다고요. 그런 삼매 속에 한 번 들어가야 돼요.
석남사 월하스님이라는 이는 반석에다 글씨를 쓰는데 쓰다가 보니까 배가 고프더랍니다. 반석에다 글씨를 어떻게 쓰느냐하면, 옛날에는 숯을 물통에 찧어서 숯 물을 만들어요. 칡으로 찧어서 붓을 만들어서 숯 물에 푹 찍어서 옥류동 하얀 반석위에 쓰거든요. 다 쓰고 나서 잘 됐나 못 됐나 감정해고서는 물로 싹 씻어버리면, 저쪽 마른데 가서 또 쓰고, 이쪽 마른데 와서 또 쓰고 글씨를 그렇게 쓰는 겁니다. 습작을 하는 겁니다. 익히는 겁니다. 쓰다가, 쓰다가 보니까, 그날은 참 신바람나게 잘 써 지거든요. 잘 써 지고 해서 잘 썼는데 쓰다보니 배가 고픈 생각이 슬~ 들어서 ‘이제 그만 쓸까? 그만 쓰고 가서 자야 되겠다.’날이 새버렸어요. 새벽 예불 시간이 지나가 버렸어요. 천지가 캄캄한 그 오밤중에 어떻게 썼는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筆端生光(필단생광)이라. 붓 끝에서 광명이 나가지고 그렇게 쓴 겁니다.
그것이 삼매의 경지입니다. 그런 불가사의한 일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렇게 착실하게 해서 그런 고비를 넘어가야지 이렇게 노력은 안 하고, 슬금슬쩍, 그냥 얼렁뚱땅해가지고, 엉터리로 절대 생각하지 말라 이 겁니다. 그래가지고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용상지덕이라는 말이... 龍象榜(용상방)이라고 하지요?
摩訶龍象德(마하용상덕)하라. 는 발심에 있는데, 龍象이라는 말은, 龍은 물속에서도 살고ㆍ땅에서도 살고ㆍ허공에서도 산다고 그러거든요. 용왕궁이 물속에 있지만, 땅에서도 걸어 다닐 수 있고 양서동물이잖아요. 양서동물이 아니라 삼서동물이지요. 허공에도 날아다닐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만큼 자유자재하다는 뜻이지요.
육 해 공군을 다 겸했으니까요. 물속에서도 살고ㆍ뭍에서도 살고ㆍ허공에서도 날아다니니까 자유자재잖아요. 지금 아무리 좋은 병기라도 그런 것 없지요? 물로 가고 육지로 가는 것은 있지요. 지금 세 가지 다 하는 것은 없잖아요. 용은 그렇게 세 가지를 다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유자재 할 뿐만이 아니라, 허공에서 구름을 일으켜서 조화를 부려서 여의주를 가지고 비를 뿌리거든요. 대지의 애타는 모든 생물들을 흐뭇하게 윤택하게 물을 적셔준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대선지식의 설법감화로 말미암아서 모든 중생의 마음 밭에다가, 心田(심전)에다가 아무루타 = 감로의 법 비를 내려서, 法雨(법우)를 내려서 모든 중생의 심전을 윤택하게 해준다는 뜻입니다. 선지식을 말하는 것이고,
象. 코끼리는 강을 건너갈 때, 얍삭하게 不濫絲髮(불람사발)입니다. 얍삭하게 휘딱 가지를 않아요. 보통 여우ㆍ너구리ㆍ토끼등 이런 조그마한 짐승들은 강물에 허부적ㆍ허부적ㆍ허부적ㆍ허부적해가지고 개헤엄으로 건너가는데, 큰 강물에는 못 건너가요. 가다가 중간에 가서 다 빠져 죽어버립니다. 조그마한 물이나 건너가지, 큰 강물은 건너가지 못하고 다 빠져 죽거든요. 그런데 코끼리는 그렇게 들어가는 일이 없어요. 등치가 커서도 그렇지만, 함부로 그렇게 들어갈 생각도 없고... 여우란 놈은 도망가면서 뒤를 열두 번도 더 쳐다본다거든요. 흘끔흘끔 돌아다는데, 코끼리는 목이 없으니까 돌아다보지도 않아요. 앞만 보고 그냥 꾸준히 갈 뿐입니다. 앞만 보고 갈 뿐입니다. 뒤 돌아다보는 일도 없고, 옆 돌아다보는 일도 없고 가기만 가요.
가는데 강이 닥치면 함부로 들어가지를 않아요. 들어가지를 않고, 코로 쭉~ 재어보는 겁니다. 바닥에 안 닿으면 함부로 들어갈 생각을 않아요. 상류를 향해서 자꾸 올라가요. 올라가서 낮은데 가서 코를 또 대보고, ‘건너가도 되겠는가?’ 작은 눈으로 딱~ 살펴보고서는 발 세 개는 딱 버티고 한 발만 디뎌봅니다. 그 밑에 수렁인가 아닌가 하고요. 수렁이면 빠지잖아요. 단단히 딱딱하면 그때 발을 옮겨놓는 겁니다. 그렇게 상류를 찾아서 강을 건너간다는 겁니다. 코끼리가 강을 건너 가는듯 實踐實探(실천실탐)을 한다 이 겁니다. 실력으로, 실천 수행으로 말미암아 가지고 實踐參悟(실천참오)라. 실다이 참구해서 실다이 깨닫는 것이지, 실다이 참구도 아니하고 얼렁뚱땅 다 아는 것 같이 그렇게 처리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코끼리는 아주 성실한 학자. 성실한 학인들이 착실하게 공부해가지고 그 공부의 깊이를 다져들어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용은 선지식. 코끼리는 실다운 학인. 이것은 큰스님과 작은스님. 아주 실다운 스님들. 이런 것이 구도자의 자세를 龍象之德(용상지덕)이라고 그래요. 용상의 덕이라. 이것이 不濫絲髮(불람사발)이라. 絲髮이라고 할 적에는 실이고 털인데, 실이나 털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러니까 絲髮이라는 것은 숙어입니다. 실과 털이라는 것은, 실터럭 만큼도 넘치지 말라는 이 말입니다. 그냥 딱 밀착시켜야지 공중에 띄우지 말라는 말입니다.
如是(여시)라야, 이와 같이 해야사, 이렇게 해야만
乃可能生正信(내가능생정신)하야 以道爲懷者歟(이도위회자여)인저, 이에 가히 정신이 생긴다 이 말입니다. 이래야 참 올바른 신심이 생겨요. 다른 종교는 다 신앙이지만, 불교는 신앙이 아니고 신심이거든요. 불교는, 신앙은 入門(입문)이고, 불교의 문에 들어오기 위해서 신앙이고, 이를테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아이들 약 먹이기 위해서 사탕 먹이는 겁니다. 그와 같이 기도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소원성취가 돼야 불문에 들어오기 시작하니까요. 그래서 불문에 들어오면 신앙에 있지 않고, 신심에 있다 이 말입니다.
부처에 의지하지 말고, 자기 부처를ㆍ중생을 위한다기 보다도 자성중생을ㆍ자성불도를ㆍ자성법문을, 四弘誓願(사홍서원)이 있잖아요.
自道自修(자도자수)하여야 他度他受(타도타수)를 할 수가 있는 것이니까요. 이것이 더 중요한 겁니다. 이것이 正信(정신)이거든요. 바른 신심입니다. 안 그러면, 여간 신심가지고 중생 제도한다고 해가지고, 중생 교화가 아니라 중생 동화되기가 쉬운 것이니까요. 자칫 잘못하면 동화되기가 쉬우니까 먼저 正信부터 해야 된다 그랬거든요. 이렇게 해서 되는 사람은 以道爲懷者歟인저, 도로써 회포 가 돼버린다 이 말입니다. 완전히 그냥 속 알맹이가, 도로써 속이 꽉 차는 사람이 돼 버린다 이 겁니다. 껍데기만 도가 아니고 속 까지 그냥... 껍데기만 출가가 아니라 속 까지 출가가 돼버린다 이 말입니다. 心出家身出家(심출가신출가). 그러니까 心身이 俱出家(심신구출가)지요?
身出家心不出家(신출가심불출가). 몸은 출가했어도 마음이 출가하지 못하는 것이 있고, 그 반대로 心出家身不出家(심출가신불출가)도 있지요. 몸은 출가 못 했지만, 마음은 벌써 출가했다고요. 그리고 心身이 俱出家. 몸과 마음이 함께 다 같이 출가한 사람도 있고요. 心身俱不出家(심신구불출가). 몸과 마음이 다 출가 못한 중생들도 있고요. 그러니까 출재속가, 그것보다도 出煩惱家(출번뇌가)하야, 번뇌의 집을 나와서 出三界家(출삼계가)라. 삼계의 화택을 벗어나야 爾是眞出家(이시진출가)라. 이것이 진짜 출가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以道爲懷者(이도위회자)라. 도로써 회포를 하는 자. 懷抱(회포). 懷抱라는 건 가슴속에 품고 있는 것. 완전히 가슴속에 품고 있고, 버릴 수도 없고 꿈에도 그냥...
以道로 爲懷者歟(이도위회자여)인댄, 도로써 회포 하는 자가 될 것 인댄, 세상 사람들은 도로써 회포 할 수가 없거든요. 돈으로 회포하지 도로써 회포 할 수가 없거든요. 돈 벌어야 살기 때문에 “이돈으로 위회자여인저” 돈으로써 회포 하는 자가 될 것 인저, 어떻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겠나? “이돈으로 위회자여인저” 돈으로써 회포 하는 자니라. 어쨌든 간에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이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는 취해야 돼요. 그런데 우리 출가한 사람, 머리 깎은 사람은 의당히 도가 앞서가는, 돈은 뒤따라와요. 돈이 많이 뒤따라오지는 않지만, 내 도 있는 것만큼 따라와요.
어떤 스님이, 돈을 몇 백억 가진 신도가 있는데, 수도원을 만들어서 다 해준다고 해놓고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와서 궁시렁, 궁시렁해요. 저의 도반 스님인데요. “내 도하고, 그 사람 몇 백억 돈하고 어떤 것이 긴가 짧은가 비교를 해 보라. 내 도가 더 높으면 그 돈이 흡수 될 것이고, 내 도가 작고 그 사람 돈이 많으면 내 도가 그냥 거기에 흡수돼서 지배를 받을 테니까 함부로 가까이 아니 하는 것이 더 좋지. 창피 당하지 말고 도를 더 키우는 것이 안 맞나?”이랬더니, 가만히 듣더니 “그 말도 일리가 있네.” 以道로 爲懷者歟인저,
|
첫댓글 _()()()_
_()()()_
以道로 爲懷者歟인저..._()()()_
黙坐觀之...釋대원성 님! 수고하셨습니다.._()()()_
_()()()_
黙坐觀之하고 如有所疑어든 博問先覺하며...
불교는 신앙이 아니라 신심이다... _()()()_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감사합니다..._()_
夕愓朝詢하야
不濫絲髮이어다
대원성님,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