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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서쪽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교과서에서 등장할 만큼 유명한 시지만
이번 작품 전시회를 보면서 다시 생각나게 하는 구절이다.
작품에는 작가의 삶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들었을 때 비로소 진가가 나타난다.
나는 본디 예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러던 내가 "인생은 짧고 예술을 길다"라는 명언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다.
1996년 국내의 저명한 조각가 몇 분과 함께 유럽 테마여행을 떠났다.
주로 박물관과 성당을 다니면서 그곳에 있는 유명한 작품들만 찾아다니는 여행이었다.
첫번째 방문지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국립박물관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빛의 화가인 렘브란트와 비운의 화가 고호의 작품을 주로 감상하기로 했다.
고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는 화가이기에 나도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관람하기 시작했다.
그때 우리를 안내했던 가이드는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였다. 잠시 벨기에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있다가
우리 때문에 네덜란드까지 날아왔다.
나는 그분의 설명을 듣는 동안 하나의 작품 속에는 얼마나 애절한 삶의 질곡이 스며들어있는지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고호의 작품이 너무 유명해서 값으로 환산할 수 없지만 고호는 살아생전에 엄청난 정신적 고통 속에서
살아갔다. 자신의 삶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작품에 몰두했다. 동생 태호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고호가 없을 정도로 연약한 인간인 그였지만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작품에 투영해 냈다. 인생의 황금기에는
황금들판을.....정신병이 들었을 때는 어지러운 색채가 마구 칠해져 있기도 하고.....죽음의 그늘이 다가왔을 때는
검은 새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심지어 자신의 귀를 자르고 자화상을 그리기도 한다.
하나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작가의 삶의 여정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이후
나는 하다못해 어린 아들 놈의 만화영화 그림이라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더군다나 작품이라고 할 만한
어떤 것도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작품은 인생이니까!
전시회 기간 동안 하루 밤 묵었던 고향집
형님내외가 아버님을 모시고 살고 있는 집이다.
이집은 97년도에 예전의 집을 헐고 다시 지어졌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기엔 상당히 무리가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변해 버렸다.
조상 대대로 300년 이상 된 터이다.
(디카에 순서대로 있는 사진이어서 소개해 보았다)
다시 전시회의 풍경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 이쁜 동창 솔내음 미영의 여고동창들~
자칭 8공주라고.....
일 년에 두 번 모이는데 친한 친구가 작품을 출품했다고 하니 여기저기서 달려와서
조잘대며 축하하기에 바쁘다. 보기좋은 아름다운 모습들이다.
나는 이 친구들을 그냥 "강화댁"이라고 통칭하고 싶다.
강화댁! 얼마나 정겨운 명칭인가?
내가 인천으로 고등학교를 가니까 급우들이 놀려대기를
'강화도 뻔뻔이'란다. 어떤 때는 뻔뻔이가 아니라 뺀뺀이라고.....
나같이 착한 놈보고.....내가 덩치가 작으니 더 마음대로 놀려대니 패줄 수도 없구.....
정말 덩치가 작은 탓에 서러움도 많이 겪었다.
강화도 뻔뻔이의 유래는 이렇다고 하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정월보름이면 강화도에서 연날리기를 하는데 연싸움이 자주 벌어졌다. 사금파리를 깨서 풀을 발라서
연줄에 발라서 연싸움을 하는 것인데.....어느 하나는 반드시 줄이 끊어져 연이 하늘 높이 날아가 버린다.
그 연이 서울 인천 등지까지 날아가서 떨어지면 사람들이 주어서 보곤 네 살로 이루어져 있는 연을 보고
"넉살 좋은 연"이라고 했다. 그래서 강화도 사람보고 "넉살 좋다"고 하다가 나중에 뻔뻔하다고 했나 보다.
사실 강화도 사람들이 좀 넉살도 좋고 뻔뻔하기도 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강화도 색시들이 전국 어디를 가나 다 잘 산다고 하니.....
저 강화댁들도 분명 잘 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총동문회장(7회) 이유병 선배님
화분에 스프레이로 물을 뿌리고 있다. 초등학교 때 교정에서 얼굴만 먼 발치에서 본 이후 처음이다.
동문회가 결성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워낙 내 삶에 우여곡절이 많아서 동문회 뿐 아니라 동창회에도
작년 12월에 처음 문을 두드렸다. 어느덧 동문회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계기가 이번 전시회다.
이 전시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동문회장은 중년의 멋스러움과 여유 그리고 중후함을 풍기며
나를 맞이해 주었다. 관세사인 선배님은 전시회 기간 동안 전시장을 세심하게 살피며 챙기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화분의 꽃들이 시들까 노심초사 물을 뿌려주는 장면이다.
한 사람의 뛰어난 리더가 얼마나 조직을 역동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지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을 시골의 작은 초등학교 동문회장이 시도하였다는 것에 우리 동문들은
갈채의 박수를 치지 않을수 없으리라.
잠시 망중한을 즐기는 동문회 사무국장(9회) 이장근 후배
동문회장님을 도와 모든 기획과 추진을 하였다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
이 후배님의 노고와 땀방울이 없었다면 동문작가 전시회는 열리지 못했을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만났지만 금방 알아볼 만큼 잘 생긴 장근 후배
인물이 정말 멋지다. 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후배님 어깨에 별 두 개씩 달면
딱 어울리겠다고.....군대로 말하면 사단장 감이다.
얼른 보면 정말 그렇지 않은가? 서울 도곡동 재홍건설에 재직중이라는데 직급도 높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물이 좋으니 사주팔자도 좋고 ㅎㅎ 운세도 좋아서 무엇을 해도 잘 될 것이 틀림없다.
이 후배님은 내 작품 서각 옆에 서서 기념촬영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나중에 후배가 내 작품을
가지고 갔다. 절실한 불자이기도 한가 보다. 반야심경 서각~ 나도 그냥 집에다 보관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어느 분이 그러기를.....작품은 필요한 사람이 가지고 가야지 작가가 가지고 있는 게 아니란다.
장근 후배 같은 멋쟁이가 내 작품을 가지고 갔으니 더 기쁘기 그지없다.
이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번에 출품한 반야심경 서각 뒷이야기를 좀 더 하겠다.
이 글이 원문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시작한다고 하니까 미영 작가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써서 보내주었는데
대충은 그 내용은 들어보았지만 사실 처음 접하는 불경이다.
초딩 동창이 직접 써서 보내준 반야심경을 어떻게 보관해야 좋을지 고민하던 중 서각을 해야겠다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초대작가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7월 중순경부터 준비하기 시작했다.
글씨가 너무 작아 양각은 포기하고 음각으로 하려니 이번에 어느새 시작된 노안(老眼) 때문에
+1 돋보기를 사용해야 했다. 그러니 서각도 조금더 시력이 나빠지면 거의 불가능한 작업일 거 같다.
서각칼은 읍내 철물점에서 사온 목공용 줄(야스리)로 직접 여러 개를 만들어서 사용했다. 서각칼을 팔기도 하지만
직접 만들어 쓰는 것만 못하다. 관건은 서각칼을 얼마나 잘 연마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
그까이꺼~ 하루에 열자씩 각을 하면 250여자 밖에 안되는 거니 한 달 안에 충분히 끝날 것이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한가하게 보낼 계획이었던 8월에 갑자기 사람들의 교육 요청이 들어왔고
낮에는 소목과정 교육하느라 시간적 여유를 낼 수 없어서 저녁에만 작업하다 보니 출품기일이 점점 가까이
다가 오고 있었다. 큰 일 났다~
매일 저녁마다 서각하는 과정은 선수행(禪修行)과 흡사했다. 호흡이 거의 멈추어진 상태에서 양손에 서각 칼을
들고 파야한다. 거의 칼날 끝에 모든 기(氣)가 모아져 있어야 실수가 일어나지 않는다. 도중에 칼은 항상 연마해야 하고.....
힘들거 같지만 사실은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정신이 맑아진다. 모든 잡념도 물리치고.....나쁜 생각도 잠시 불경을 서각하고
있으니 절로 사라진다. 서각 와중에 참 좋은 일도 많이 일어났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이번에 각을 하며 나는 미영 작가의 글씨체의 매력에 푹 빠져서 지냈다. 다 아시다시피 원본 글씨를 있는 그대로 살리려고
무단히도 애를 쓰는 과정에서 글씨체가 엄청나게 이쁘기도 하거니와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의 내용상 없을 무(無) 자가
18 번 반복되는 데 한 자 한자가 전부 다르게 쓰여져 있었다. 한 점이나 획을 달리해서라도.....
인쇄된 글씨는 모두 똑같은데 비해서 서예가는 항상 다르게 쓴다는 것이다. 서각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절 경내에서 판매되는 반야심경 글씨체를 유심히 관찰해 보니 역시 우리 친구의 글씨는 달랐다. "아제아제 바라아제"라는 후렴구에서 반복되는 아(揭) 자 역시 그랬다.
또 하나의 기쁨이 있었는데.....가톨릭 신자인 내가 불법을 만났다는 점이다. 40세까지 철학과 신학을 연구공부하며 서양사상에
심취해서 살며 이론적으로만 동양사상을 접했었는데 내용을 알고자 한 자 한 자 공부하며 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불교의 핵심사상
을 알 수 있는 복을 받았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와 스님과 불법이라는 삼보(三寶)에 귀의한다고 신앙고백을 한다. 그 중에
불법을 만난 것이다. 흔히들 일체유심조(一切惟心造)라고 말하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이 안개 속이나 거친 풍랑
속에 있어서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안개를 걷어내고 거친 풍랑을 잔잔하게 가라 앉힌 그 마음을 가져야 비로소 일체유심조라는 원효대사의 가르침도 실천할 수 있는 법이다. 수행하지 않고 즉 마음 공부를 치열하게 하지 않는 속세에 찌든 마음으로 아무리 기도해도 그 기도가 잘 될 턱이 있을까?
이러다 보니 무슨 설법(說法)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무튼 그리스도교의 교리가 농축되어 있는 니케아 공의회(325년) 신경이나
사도신경과 같은 반야심경 속에는 불교의 핵심사상이 들어있음을 처음 알았다. 미영 작가는 반야심경은 "큰 지혜를 가르쳐주는 경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큰 지혜란 세상 살아가는 삶의 기술을 배우는 속가적인 지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는 지혜라는 뜻으로 보충설명하고 싶다.
그러나 작품은 작품인가? 역시 마감기일이 있어야 되는가 보다 지난 9월 10일경에서야 서각이 끝났다. 이제 다 끝났다는 기쁨도 잠시
칠을 해야하는 과제가 남았다. 강화도로 17일 아침까지는 보내야 하는데.....
미영 작가의 부군이신 송묵 이문훈 선생님과 어떻게 칠을 할 것인지 상의했다. 선생은 국전초대작가이자
심사위원으로 저명한 서예가의 반열에 오르셨다. 그 뒤에는 '내조의 여왕'인 우리 동창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동양화 물감으로 각을 한 글자에 하나 하나 색을 칠해야 된다는 것이다.
역시 나는 그까이꺼~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는데.....보통 일이 아니었다. 세필로 각을 서너 차례해야
깨끗하게 칠이 된다. 3일 동안 잠을 세 시간씩만 자는 강행군을 하여 겨우 마감기일 전에 강화도로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욕심은 끝이 없는 법!
판재에 새긴 글씨를 그냥 벽에 걸어두는 것으로 내 마음이 허전했다. 결국 소목장의 기술을 접목시켜
한옥에서 뜯어온 고재 소나무로 반야심경 전용 보관함을 만들었다.
전통한옥에서 사용되는 왕찌기법으로 되도록 단순하게 처리해서.....
후에 뜻하지 않게 송묵선생님으로부터 이렇게 한 점에 대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서각은 잘 못했다고 야단 맞고.....아무튼 감사합니다.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 틀에 고정시켜 택배로 보냈더니 저 아래 위에 고정시킨 나무핀이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해서
3일 동안은 임시로 전시했다가 미리 준비해간 장비로 다시 고정시켜 마지막 날에야 제대로 전시될 수 있었던
뒷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야 작품의 탄생과정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거 같아서
뒤늦게 장황하게 늘어놓았으니 동문님들의 양해를 바라며.....
이 분이 5회 노경춘 선배님이다.
그런데.....얼른 보면 40대처럼 보인다. 나보다다 세 살이나 많은데....
나도 놀라고 그 곳에 있던 모든 동문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대산리 소산부락에서 사셨던 것으로 기억되는데.....여러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화가로서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서 이제는 많은 작품활동을 하고 있으시다.
이번 작품 전시회를 통해서 강화에서도 발을 넓혀서 강화지역의 문화예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생각이란다. 전시회에 참석했던 강화군수도 예술활동에 더 많은 지원계획을 밝혔다는데.....
그 기폭제가 바로 대월초등학교 동문회 작가 전시회 때문이란다.
이제 우리 동창들(8회) 차례다.
서로 반갑게 악수를 나누며.....
왼쪽의 박일수 동창은 대산리 돌머루 부락에서 학교를 다녔고 지금도 고향집이 그대로 있다.
지금은 기상청에 근무하는데 은퇴하고 나면 고향집으로 다시 가서 살겠단다. 큰 아들인가?
이번 작품 전시회의 인기 작가였던 박미영 동창의 5촌 아저씨다. 난 그 사실을 올 해 처음 알았다.
일수 동창이 선익 동창과 결혼했는데 선익은 8공주에도 사진이 있는데.....친구끼리 뭐가 되는 것이지 ㅎㅎ
가운데 황현숙 동창은 나에겐 증조할머니 뻘 아지매다. 월곳리 고성동 부락에서 살았는데 현숙의
오빠는 장사였다. 80키로 쌀 두 가마씩 등에 지고 다녔던 장사.....현숙 어머니도 건강에 대해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그 할머니는 92세까지 사시다가 3년 전 동문체육대회날 돌아가셨다.
오른쪽은 김용란 동창이다. 나에겐 어릴적 추억을 가장 많이 공유한 소꼽친구다. 옆집에서 태어난 용란은
신랑 각시 놀이를 하며 코흘리게 시절을 보냈다. 용란의 형제들과 우리 형제들은 줄줄이 친구다.
형님들끼리 친구고.....나와 용란이 친구고.....밑에 동생도 친구다.
지금 생각하면 출산조절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3 명씩이나 옆집에서 함께 아이들이 태어났을까
신기할 정도다.
우리가 태어난 세대를 베이비 붐 세대라고 한다. 1955년부터 1965년 까지 약 10년 동안 자그만치 700여만명 이상 태어났다.
전쟁후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난 다음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나라를 되살리는 일은 인가증가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래서 한 집에 5명 이상 아이들이 태어났으니.....피임이란 게 없으니 생기는대로 낳다 보니 그 터울이 두 집에서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대개 3년에서 2년 마다 새로 아기들이 태어났으니....
요즘 농촌에서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끊어진지 오래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사라진 지금 농촌은 거의 죽은 사회처럼
느껴진다. 가난하지만 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함께 살며 오손도손 이웃들과 마실을 가며 살았던 농촌풍경은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 죽음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노인들만이 지키는 농촌의 현주소~~정말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다.
동창들과 영례의 종이접기 병풍과 내 서각 앞에서 기념 촬영 한 컷~~
친구들아 반갑고 고맙다.
첫댓글 _()_...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모지사바아 _()_ 하늘재 친구님 저는 이 글을 읽어 내려 가면서... 정말로 눈시울이 글썽거릴 정도의 감읍을 하였답니다. _()_ 글 한 자 한 자에... 따스함..온화함의 아름다운 당신의 멋이 평화가 고스란이 농축되어 있음을 알기에..._()_ 이렇게 사려깊고,,작은것 하나도 잊지 않고 알아주는 이... 어디에 또 있을까나.. 정말 우리 친구님이란것이 영광입니다. 친구님 우리는 도반 ^^ ^^ ^^
솔내음 미영의 작품 세계를 감히 평가할 수 없지만.....이렇게 있는 그대로 받아주니 고맙기 그지 없답니다^^ 고난의 세월을 묵묵히 감내하며 한 송이 을 피우기 위해 애쓰며 살았던 친구님의 삶에 경의를 표하며
우리 자랑스런 친구야 수고했다^*^ 멋지다
고맙다 친구 이렇게 기나긴 글을 읽어주는 것만 해도.....^*어쩌면 나 자신의 삶을 이제서야 되찾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주절주절 늘어놓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읽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