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 경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의 태국은 권위주의 정부가 통치하고 있었고, 이 정권은 관료 및 군부의 장교들로 이뤄진 집단이 주도했다. 당시 총리였던 빽 피분송캄은 "육군"의 장성 출신으로 파시즘(fascism)을 통해 국가적 선동을 해나가면서 그럴듯한 국가건설에 속도를 올리고 있던 중이었다.(주7) 피분송캄은 결국 군국주의와 민족주의를 개발하고 강화시키면서, 현대적인 선전선동술을 동원한 개인 우상화 작업에도 박차를 가해나갔다.
(사진) 독재자 빽 피분송캄 총리.
피분 정권은 "실지 회복주의"(irredentist) 이념도 부활시켜 반-프랑스 정서를 강화시키면서, 캄보디아와 라오스 지역의 과거 태국 영토 복원을 지원했다. 그는 반 프랑스적 움직임을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일본과의 관계를 강화해나갔다. 반 프랑스 정책이 미국과 영국의 반대에 직면하면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French Indochina)와의 대치국면에 일본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었다.(주8) 태국인들은 실지 회복 욕구에 있어서는 통일성을 보여줬지만, 일본에 대한 열정적 친화력 면에서는 피분송캄이 삐디 파놈용보다 훨씬 강했다. 또한 많은 구 보수파들도 피분송캄 총리의 외교정책에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1940년 10월, 태국의 동부 전선을 따라 태국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산발적 교전이 발생했고, 태국군이 1941년 1월에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침공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프랑스군은 육상에서 상당한 고통을 받았지만, 프랑스 해군이 꼬창(Koh Chang) 해전에서 가까스로 태국의 주력함대를 격파하면서, 일본으로 하여금 이 싸움의 중재에 나설 생각을 갖도록 만들어주었다.(주9)
일본은 당시 프랑스 비시 정권에 대해, 태국이 분쟁지역 영토를 획득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1941년 3월에 중재안을 받아들이고, 메콩 강(Mekong river) 서안의 라오스 영토와 캄보디아 밧덤벙(Battambang, 바탐방) 도 대부분 지역을 태국에 넘겨줬다. 이러한 실지의 회복은 유럽의 식민주의 열강에 대한 명백한 승리였고, 피분송캄의 명성을 엄청나게 강화시켜 주었다.
하지만 일본은 비시 프랑스 정부와 관계에서 현상을 유지하고자 했고, 태국에 대해서는 실지회복을 바라는 영토의 일부만으로 만족케 하면서도, 영토 할양에 대한 댓가로 프랑스에 대해 600만 피아스터(piastres: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공식 화폐)의 보상금까지 지불토록 강요했다.(주10)(주11) 이러한 일본의 태도로 인해 일본과 태국의 관계는 냉각됐고, 실망한 피분송캄은 자신이 "임박한 일본의 침략"이라 보았던 사태의 예방을 바라면서 영국과 미국에 호소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12)(13)(14)(15)
(주7) E. Bruce Reynolds. (1994) Thailand and Japan's Southern Advance 1940-1945. St. Martin's Press.
(주8) Richard J. Aldrich (1993) The Key to the South. Oxford University Press.
(주9) Martin Stuart-Fox (1997) A History of Laos. Cambridge University Press.
(주10) Richard J. Aldrich (1993) The Key to the South. Oxford University Press.
(주11) E. Bruce Reynolds. (1994) Thailand and Japan's Southern Advance 1940-1945. St. Martin's Press.
(주12) Richard J. Aldrich (1993) The Key to the South. Oxford University Press.
(주13) E. Bruce Reynolds. (1994) Thailand and Japan's Southern Advance 1940-1945. St. Martin's Press.
(주14) Charivat Santaputra (1985) Thai Foreign Policy 1932-1946. Thammasat University Press.
(주15) Judith A. Stowe. (1991) Siam becomes Thailand: A Story of Intrigue. Hurst & Company. |
2. 일본의 태국 침공
1941년 12월 8일, 일본은 태국을 침공했다. 불과 몇시간 동안의 전투와 대치가 있은 후, 태국은 버어마와 말라야 침공을 위한 기지로 사용하게 해달라는 일본의 요구를 수용했다. 피분송캄은 국내적으로, 일본의 행동이 친화적이었던 태국 정부와 사전에 조율된 것이었다고 설득했다.
3. 태국-일본 동맹
1941년 12월 21일, 태국과 일본은 상호 방위조약(공격 및 방어 포함)을 체결했다.(주16) 이후 이 협정은 12월 30일에 개정되어, 일본군은 태국 내 철도, 도로, 비행장, 해군기지, 창고, 통신시설, 군사 기지 등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과의 경제적 협력도 강화하기 위해 삐디 파놈용이 내각에서 제거됐다. 삐디는 당시 국내에서 부재중이었던 아난타 마히돈(Ananda Mahidol: 라마 8세) 국왕을 위한 실권도 없던 "섭정위원회"(Regency Council) 보직 한 자리를 제안받았고, 이를 수락했다.(주17)(주18) 이후 일본의 압력을 받은 태국 정부는 1942년 1월 25일 영국과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주19)(주20)
피분송캄이 일본에 긴밀히 협력하자, 초기에는 보상을 받아 한때 방콕 세력의 통제권에 있던 과거의 영토들을 돌려받았다. 그곳들은 바로 말라야 공국들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4개 국가들이었다. 또한 일본의 승인 하에 태국의 "파얍 군"(Phayap Army: 지상군 주력은 4-5개 사단 규모)이 버어마 북동부에 있던 샨족(Shan) 국가들을 침략해서 병합토록 허락받았다.(주21)(주22)(주23) 그 사이 일본은 태국 영내에 15만명의 병력을 배치시키고, 아시아의 징용 노동자들과 연합국 포로들을 동원해서 버어마-태국 사이의 악명높은 "죽음의 철도"(Death Railway)를 건설했다.
(사진) "죽음의 철도" 건설현장. 방콕-양곤을 연결하는 415 km의 이 철도는 아시아인 징용 노동자 18만명과 연합국 포로 6만명이 동원되어 건설됐다. 그 중 노동자 9만명과 포로 16,000명이 사망했다. 유명한 "콰이 강의 다리"도 이 철도노선 상에 위치한다.
1942년 초 일본이 빛나는 승리를 이어가자 태국 국민 다수는 처음에 "도취"했다. 하지만 그해 말에 이르면, 일본의 오만한 태도와 전쟁으로 인한 불황으로 분노가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주24) 심지어는 개전 초기에도 여러 종류의 마찰들은 존재했다. 그러한 사안들에는 연합국 관련 부동산의 몰수, 경제 및 통화 문제, 태국의 화교 공동체에 대한 위협 등이 포함됐다.
영국 기업들의 제재업과 티크 목재 벌목에 관한 악성 경쟁은 초기부터 분출되어 나왔고, 이후 태국 내 적성자본에 의한 에너지 산업과 해운물류에 관한 논란이 이어졌다. 여타 문제들은 더욱 심각했다. 당시 독일은 태국의 생산물들에 대한 구매를 계속했지만, 일단 해운 운송이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면서 일본이 태국의 유일한 교역 파트너가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태국은 이전에 유럽과 미국에서 수입하던 소비재도 일본에서 수입했다. 하지만 전황이 악화되면서 일본은 점차 재화를 공급하지 못하게 되었다. 생필품 부족현상이 빠르게 나타났고, 물가인상률이 급격히 치솟으면서 삶의 질도 악화됐다. 더욱이 일본은 수입 재화에 대한 무관세 권리를 공세적으로 주장했고, 이에 따라 태국 정부의 세입도 상당한 규모로 줄었다.(주25)
결국 1942년 12월에 사태는 곪아터졌다. 라차부리(Ratchaburi) 도에서 일본군과 태국 주민들 및 경찰들 사이에 무장충돌이 고조되어 총격전으로 이어졌다. 반뽕(Ban Pong) 군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신속하고도 평화적으로 해결됐지만, 이 사건은 도쿄 당국에 대해 "태국 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게 해주는 하나의 경고신호"가 되었다.(주26) 그리하여 새로 설치된 "시암 주둔군"(Thailand Garrison Army, 第18方面軍) 사령관으로 나카무라 아케토(Aketo Nakamura, 中村明人) 중장을 파견했다. 나카무라 중장은 태국인의 관점을 이해할 줄 알았고 인간됨도 붙임성이 있었다. 이러한 그의 개인적 역량이 태국-일본 관계를 개선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주27)(주28)(주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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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영화 <쿠캄>(คู่กรรม, 1988년작)의 타이틀 곡. 국회의원과 상원의원을 지내기도 한 태국의 여류작가 위몬 찌얌짜른(Wimon Chiamcharoen, วิมล เจียมเจริญ)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장교(고볼리)와 태국 여인(앙수마린) 사이의 애절한 사랑을 다룬 소설 <쿠캄>(운명의 상대)을 발표했다. 여기서 고볼리는 친절하고 연약한 인품을 지니고 있고, 앙수마린은 반일 감정을 가졌으면서도 그를 사랑하게 되는 운명을 지녔다. 작품 속 고볼리의 모델이 바로 일본의 "시암주둔군" 사령관이었던 나카무라 아케토 중장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위몬 찌얌짜른의 소설 <쿠캄>은 1973년과 1988년에 각각 2번이나 영화로 제작되었고, 뮤지컬로도 공연됐다. 또한 이 영화의 주제가는 태국인들이 즐겨 애창하는 히트곡이기도 하다. <쿠캄>은 TV 연속극으로도 2차례나 제작됐는데, 그 중 1996년에 <짜오파야 강의 황혼>(Sunset at Chaopraya)이란 타이틀로 제작된 26회분의 시리즈에는 태국 최정상 연예인인 통차이 멧은따이(Thongchai "Bird" McIntyre)가 고볼리 역을 맡기도 했다. |
이러한 화합적 분위기는 반일의 흐름이 일어나기 시작하던 무렵에 발생했는데, 반일의 기운은 태국 정부에서도 감지하고 있던 것이었다. 피분송캄은 전쟁의 주도권이 연합국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닫고, 도쿄 당국과 자신 사이의 곤란한 관계를 자각하고 서서히 일본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주30) 1943년 1월, 피분송캄은 "파얍 군" 예하 사단장 2명으로 하여금 중국군 전쟁포로들의 귀환을 준비케 했다. 이는 국공합작 중이던 중국 정부에 대한 유화책이었다.(주31)
하지만 상황의 전개는 피분송캄 총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됐다. 연합군의 공습이 그 강도를 높여가자 방콕의 시민들이 가졌던 피분송캄에 대한 확신을 위협했고, 기묘한 국내정책으로 약화되어 있던 그의 신뢰도는 더욱 빠른 속도로 약화되어 가고 있었다. 피분송캄이 방콕을 비우는 일이 잦아지자 그 도덕성도 실추됐다. 게다가 수도 시민들로 하여금 말라리아가 만연한 수도권 북부의 페차분(Phetchabun)으로 피난하라고 갑작스런 발표가 나가자 어리둥절함과 불만은 거의 보편적인 것으로 변해갔다.(주32) 이러한 현상은 대중들에게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태국 지배 엘리트 계층 역시 점차로 피분송캄에 대한 염증을 느껴가고 있었다. 피분송캄이 불평불만을 가진 이들을 위협하거나 좌천시키자, 아이러니하게도 정적들은 단합하게 되었고, 그들이 삐디 파놈용 주변으로 모여들게 되었다.(주33)
심지어는 일본조차 피분송캄을 못마땅하게 보았다. 하지만 피분송캄은 정부의 인사권을 재배치하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일본에 빼앗기지 않았고, 이러한 권한은 그의 군사적 도식을 형성하는 데 배경이 되었다.(주34) 피분송캄의 군사적인 주력 자산이었던 페차분 도는 철도가 지나는 피사눌록(Phitsanulok)과 바로 인접해 있었고 방콕에서 자동차로 12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산악형 지형을 가진 천혜의 요새였다. 또한 이곳의 주변으로는 태국 육군의 다수가 주둔하는 곳이기도 했다.(주35)(주36)(주37)
피분송캄이 페차분 도로 자주 장기출장을 떠나면서 일본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하는 시기에, 이태리에서는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가 몰락했다. 무솔리니의 몰락은 비상 국무회의에 모여 유럽전선의 상황을 논의하던 태국 엘리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주38) 얼마 안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태리와 태국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무솔리니에 이어 총리에 오른] "바돌리오"(Badoglio)의 이름은 태국 정치에서 대중적인 관용구로 변했고, 헤르만 괴링(Hermann Goring) 원수는 베를린 주재 일본 대사에게, 태국이 "동양의 이태리"가 되지 않도록 태국인들을 잘 살피라는 조언을 듣기도 했다.(주39)
하지만 국내의 불만이 증가하고 일본의 불신을 받고 있었지만, 피분송캄의 실각은 그 이듬해에나 이뤄질 일이었다.
(주16) E. Bruce Reynolds. (1994) Thailand and Japan's Southern Advance 1940-1945. St. Martin's Press.
(주17) Judith A. Stowe. (1991) Siam becomes Thailand: A Story of Intrigue. Hurst & Company.
(주18) E. Bruce Reynolds. 앞의 책.
(주19) E. Bruce Reynolds. 앞의 책.
(주20) Judith A. Stowe. 앞의 책.
(주21) E. Bruce Reynolds. 앞의 책.
(주22) Judith A. Stowe. 앞의 책.
(주23) Young, Edward M. (1995) Aerial Nationalism: A History of Aviation in Thailand. Smithsonian Institution Press.
(주24) E. Bruce Reynolds. 앞의 책.
(주25) E. Bruce Reynolds. 앞의 책.
(주26) E. Bruce Reynolds. 앞의 책.
(주27) Direk Jayanama. (2007) Thailand and WWII. Silkworm Books.
(주28) E. Bruce Reynolds. 앞의 책.
(주29) Judith A. Stowe. 앞의 책.
(주30) E. Bruce Reynolds. 앞의 책.
(주31) E. Bruce Reynolds. 앞의 책.
(주32) Judith A. Stowe. 앞의 책.
(주33) E. Bruce Reynolds. 앞의 책.
(주34) E. Bruce Reynolds. 앞의 책.
(주35) John B. Haseman. (2002) The Thai Resistance Movement during World War II. Silkworm Books.
(주36) E. Bruce Reynolds. 앞의 책.
(주37) Judith A. Stowe. 앞의 책.
(주38) E. Bruce Reynolds. 앞의 책.
(주39) E. Bruce Reynolds. 앞의 책. |
4. 반일 저항운동
런던 주재 태국대사는 영국 정부에 대해 본국의 선전포고를 즉각 전달했지만, 워싱턴 주재 대사였던 세니 빠못(Seni Pramoj)은 그렇게 하길 거부했다. 따라서 미국도 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길 저어했다.
세니 빠못은 보수적 관료였고 반일 태도에 투철한 인물이었는데, 미국의 지원을 받아 "프리 타이"(Free Thai: 세리 타이) 운동을 조직했다. "프리 타이"는 미국에 유학 중인 태국인 학생들을 규합하여 "미국 전략정보사무국"(OSS: CIA의 전신)과 함께 일하도록 했다. 세니 빠못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국무부"가 세니 빠못이 여전히 태국을 대표하고 있는 것처럼 해주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이 결정은 세니가 미국 내에 동결되어 있던 태국계 자산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주40)
태국의 선전포고에 대해 영국이 비록 호혜적 입장의 선전포고를 하긴 했지만, 영국 내 태국인들도 "세리 타이" 운동과 마찬가지인 항일운동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유학생이었던 스노 땀부옌(Snoh Tambuyen)과 쁘워이 응빠꼰(Puey Ungphakorn)었고, 망명 중이던 왕족들이 지원을 했다. 이러한 왕족 중에는 빠차티뽁(Prajadhipok: 라마 7세) 국왕의 미망인 람파이판니(Ramphaiphanni) 왕후와, 그녀의 남동생이었던 수파사왓웡사닛 사왓디왓(Suphasawatwongsanit Sawatdiwat) 왕자도 포함된다.(주41)
(사진) 태국 보수정치의 지도자였던 삐디 파놈용. 전후에 잠시 총리를 맡기도 했다.
한편 삐디 파놈용은 태국의 "섭정 위원회"에서 은밀한 운동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 점령에 항거하는 5만명 이상의 태국인 무장조직으로서, 전쟁 말기에 연합국을 돕기 위한 행동을 취했다. 1945년 초, 일본 점령자들에 대항하는 움직임은 적극성을 띠기 시작했다. 한 경찰 특수부대가 일본군의 본부를 신속하게 공격하는 계획이 항일 투쟁 게획의 중심에 놓였다. 일본군 고위 장교들의 거주지와 일본군의 통신시설에 대한 정찰도 이뤄지고 있었다. 방콕에서 경찰 부대의 공격은 부분적으로 중화기로 무장한 "태국 제1군" 병력과 협조 속에 진행됐다. 방공호로 위장한 참호들이 시내 주요 교차로들에 건설됐고, 차가 병력들도 소규모 단위로 나누어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잠입해들어왔다. "세리 타이" 반군은 여타 지역에서 통신선을 끊고 비행장을 장악하여 방콕 사령부를 강화하려는 일본군을 괴롭히려고도 했다.
삐디 파놈용은 일본이 태국에서 자국 군대를 강화할 것인지에 대해 검토하고 있었다. 태국은 가까운 장래에 최전선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태국 주둔 일본군은 대부분 지원업무 병력이었다. 하지만 1944년 12월이 되자, 일본군의 "태국 주둔군 사령부"가 "야전군 사령부"로 승격되었다. 일본군은 방콕에서 북동쪽으로 약 100 km 떨어진 나콘나욕(Nakhon Nayok)에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병참 물자들을 비축하고 참호도 구축했다.
(주40) E Bruce Reynolds. (2005) Thailand's Secret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주41) 앞의 책. |
5. 점령의 종식
1944년 8월 1일, 쿠웡 아파이웡(Khuang Aphaiwongse) 총리의 새로운 내각이 출범했다. 쿠웡은 세니 빠못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는 보수적 성향의 법조인 출신이었다. 새로운 정부는 범 "세리 타이" 세력이 비밀리에 조직한 정치적 공작을 통해 탄생했지만, 외형적으로는 일본과의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이 정권에서 가장 영향력을 가졌던 사람은 삐디 파놈용이었다. 삐디의 반일 자세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전쟁의 마지막 해에는 연합국 요원들이 암묵적으로 자유롭게 잠입하여 방콕과 접촉했다. 전쟁이 말기로 접어들자 태국은 전쟁기간 중에 일본과 체결한 협정들의 이행을 거부했다.
(사진) 태국 왕족으로 "세리 타이" 운동을 이끌었던 세니 빠못.
그러나 민간인 출신 지도자들은 단합을 하지 못했다. 쿠웡 아파이웡이 삐디 파놈용과 마찰을 빚다 사임하자, 삐디가 지명한 세니 빠못이 1945년 9월 총리에 취임했다. 당시 세니 빠못은 워싱턴 주재 대사직을 마치고 태국으로 돌아와 있었다. 1945년 후반에 민간정부 내에서 권력갈등이 벌어지면서 지도자들 사이엔 분열이 발생했다. 이러한 분열은 전후에 군사정권이 다시금 흥기하는 일을 막을 공통의 잠재적 기반을 파괴했다. 게다가 전후에 연합국들과의 관계 역시도 민간정부를 약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전쟁 동안 "세리 타이" 운동이 연합국의 전쟁 수행에 공헌한 결과, 공식적으로 태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일이 없는 미국은 전후 협상에서 태국을 적성국으로 취급하길 꺼려했다. 하지만 영국은 평화조약 체결에 앞서서 전쟁 보상금을 요구했고, 그 형식은 말라야로 쌀을 실어 보내는 것이었다. 또한 프랑스는 전쟁 기간 중에 태국이 차지한 영토를 반환하기 전에는 태국의 유엔(UN) 가입을 거부하는 입장을 보였다. 소련은 태국의 반공 관련 법률들의 폐기를 주장했다.
첫댓글 그나저나
일본이 태국과 말레이반도를 침공한 1941년 12월 8일이
하와이 시각으로는 1941년 12월 7일이 되는데..
결국 진주만 공격과 태국 및 말레이 침공을 거의 동시에 한 것이 되네요...
일본이 안따먹은 나라가 없군요 ... 합병만 안했다 뿐이지 ... 우리나라는 완전히 따먹히고 ....
일본에서 저도 근무해 봤습니다만,,, 일본 참 답답하면서 대단하면서 그래요 ...
크세의 귀염둥이 보아즈 올림
좋은 역사공부하고 잇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