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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면하고 성실한 것 외에는 특징이 없는 사람이다. 장악력은 그런대로 있어 보이지만, 범인(凡人)을 초월한 지혜나 매력을 찾아 볼 수 없다. 한마디로, 이상적인 과도기적 인물이다. 내정이나 외교문제에 기상천외한 조치를 취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장기간 집권할 수 있을지 의심된다. 머지않아, 더 능력 있고 강력한 지도자가 출현할 것이 분명하다. 화궈펑은 고지식한 사람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완수한 후, 구석에 있기를 자청할 중국 특유의 고전적 지혜는 갖췄다고 봐도 된다.”
5개월 후,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났다. 10월 18일, 중공 중앙은 “6일 저녁, 4인방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경축 행사가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한 외국 기자가 흥미 있는 기록을 남겼다.
“이해하기 힘든 민족이다. 거의 동시에, 전국의 대도시마다 흥분한 인파가 거리를 메웠다. 농촌에서도 꽹과리 치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4인방 매도 문구나 외쳐대는 구호도 거의 비슷했다. 다른 나라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크고 말 많은 나라에서 12일간 보안이 유지된 것도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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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내의 반응은 달랐다. 어느 누구도 마오쩌둥이 지정한 후계자이며 당 주석인 화궈펑에게 도전할 엄두를 못 냈다. 얼마 안 가 화궈펑도 마오쩌둥과 같은 권위를 확보하리라고 다들 믿었다. 덩샤오핑에게 후한 점수를 줬지만 “복직하면, 마오쩌둥 밑에서 혼신의 노력을 했던 저우언라이처럼 화궈펑 휘하에서 총리직을 수행할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화궈펑의 눈치만 보던 덩샤오핑도 왕둥싱을 통해 새로운 권력자에게 충성서약 비슷한 편지를 보냈다.
4인방 체포 후 화궈펑을 당 주석, 국무원 총리, 군사위원회 주석에 추대한 예젠잉은 덩샤오핑의 복직을 서둘렀다. 중앙 군사위원회 요양원에 머물던 덩샤오핑에게 일할 준비를 하라고 이를 정도였다. 단, 화궈펑의 수하에 둬야 한다는 생각은 남들과 같았다. 확실한 명분이 있었다. “앞으로 당 중앙은 정식 제도가 작용을 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 지도자의 성격에 의해 좌우되는 정당은 국민들에게 버림받는다.”
엉뚱한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4인방을 체포한 이유를 모르겠다. 과연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는 그런대로 봐줄 만했다. 체포를 주도한 화궈펑이나 예젠잉, 왕둥싱이 듣기에 거북한 소리가 당내에서 나왔다. “마오 주석이 화궈펑을 후계자로 선택한 것이 사실이라면 증거를 내놔라.” 그럴 만도 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화궈펑이 자신의 후계자라고 딱 부러지게 선포한 적이 없다.
수위가 점점 높아졌다. “마오쩌둥은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성격이다. 장칭(江靑·강청)은 마오 주석의 당당한 부인이다. 4인방의 행동이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제거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나 죽거든 장칭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했으면 했지 제거해 버리라고 했을 리가 없다.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예젠잉과 왕둥싱은 목이 탔다. 각 성(省)과 군구(軍區)의 중심 인물들을 베이징에 소집했다. “4인방 체포는 궁중 정변이 아니다. 화궈펑을 지지해달라”고 열을 올렸다. 겨우 “화궈펑·예젠잉·왕둥싱의 과감한 행동에 공감한다”는 답변을 얻어냈다.
왕둥싱과 예젠잉은 화궈펑에 대한 개인숭배를 전개했다. 화궈펑의 지도력을 찬양하는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온종일 화궈펑을 찬양하는 노래가 방송을 탔다. 대도시는 물론이고 시골 촌구석 어디를 가도 마오쩌둥과 나란히 걸린 화궈펑의 초상화를 볼 수 있었다. 개인 숭배가 습관이 된 국민들에겐 이 방법밖에 없었다.
노(老)혁명 간부들이 반발했다. “우리는 마오 주석 따라 전쟁터를 누볐다. 1938년 국공합작 이후 입당한 어린애를 숭배하라니 당치도 않다.” 왕둥싱도 힘들어했다. “마오 주석 생존 시에는 머리를 쓸 필요가 없었다. 머리 좋은 사람들 상대로 머리를 써야 하니 할 짓이 못된다.”
화궈펑은 고집이 셌다. 제 손으로 악수(惡手)를 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