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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만으로 남서풍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이 지역 특성상 풍속은 2노트. 약한 바람인데도 서해와는 다르게 느껴진다. 10월23일 현재 위치는 포항 북부 해수욕장. 울릉도를 거쳐 동경 130도53분4.66초, 북위 37도27분40.33초의 독도로 2박3일간 포항~울릉도 간 141마일과 독도~울릉도 간 47.2마일, 총 188마일을 바람을 타고 파도를 넘어야 한다.
우리 팀은 어제 포항요트대회(스폰서 레이서)에서 어설픈 실력으로 오픈(OPEN)급 3위를 차지했지만, 오늘 스키퍼(skipperㆍ선장)인 박광섭씨의 눈빛이 사뭇 날카롭다. 우리 팀의 크루(crewㆍ선원)는 박광섭 선장을 비롯해 정신적인 지주인 박완진 선배, 첫 국제대회에 참가하고자 학교의 양해를 얻고 동참한 대학생 신동학, 김영랑, 김남욱, 조신영씨, 그리고 여성 크루인 남은선양, 그리고 취재 겸 크루로 참가한 기자까지 8명이다.
어제까지 부슬비가 내리더니 하늘은 검은 구름을 벗는다. 예정 보다 늦은 오후 2시. 출발부터 32척의 요트는 자리다툼이 치열하다. 선체 길이 34ft인 우리 미스틱X호의 선원들은 날카로운 박 선장의 지시에 따라 좌우 세일시트를 당기느라 바쁘다. 아직 연습이 부족한 우리 팀은 박 선장의 주문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 촬영해야 할지, 아니면 배의 컨디션을 100% 올리기 위해 선수들을 도와줘야 할지 나도 갈팡질팡한다.
저녁 5시경 뒷바람을 몇 시간째 등지고 있었는지 신경이 예민하다. 뒷바람이 오히려 앞바람을 받고 갈 때보다 더 위험한 경우가 많다. 배의 뒷부분이 들리기 때문이다. 동해의 파도가 삼킬듯이 덤벼든다. 박 선장이 스피네커 세일(풍선 같은 모양의 세일)을 거두라는 지시를 내린다. 멀리 영일만의 등대가 어둠속으로 가라앉는다. 날씨가 흐리고 어두워서인지 동해는 무서울 정도로 푸르다 못해 검다. 하얀 포말을 머리에 인 파도가 우리의 뒷꽁무니를 수도 없이 내리친다. <이상 허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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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를 뒤로 하고 아쉬워하며 울릉도로 돌아가고 있는 미스틱X호 선원들.
- 육교만한 파도가 다가온다고 상상해보라
밤 9시를 넘어서니 풍속이 18~21노트, 파고는 4~5.5m다. 서해에서 비바람 좀 부는 날이 동해의 일반적인 날씨일 거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광섭형은 동해 파도가 상상 이상이란 점만 알아두라고 했다. 4m짜리 파도라니,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상상이나 할까? 그런 파도는 영화에서나 보던 것이다. 육교만한 파도가 요트로 다가온다고 상상해보라. 정말 끔찍하다.
기회란 건 쉽게 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것도 기회라 할 수 있는지. 광섭형 권유로 좋은 기회를 잡았구나 생각했는데, ‘내가 미쳤지. 왜 내가 이런 결정을 내렸지? 아…’하는 후회가 물밀듯 몰려온다. 밤 늦은 시간으로 갈수록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 패닉 상태-. 바다의 위대함에 내 몸은 얼어붙었고, 머리 속은 새하얘졌다.
그래도 내 포지션은 바우맨(bow manㆍ선수부분을 담당하는 선원)이 아닌가! 배의 앞부분으로 나가 무언가 하려는데 스키퍼인 광섭형은 조용히 “바우쪽에 나가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어라”(사실 호통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하네스를 착용하라는 것이다(우리 배에 여성 크루도 한 명 타고 있었는데 대회가 끝 날때까지 절대 하네스를 착용하지 않았다). 순간 자존심이 심하게 구겨졌다. 앉아 있으란 말도 굴욕인데 하네스까지 착용하란 말인가. 스키퍼인 광섭형의 명령을 거스를 순 없어서 형님에게 조용히 다가가서 대화를 시도했다.
“형님.”
“왜?”
“하네스 좀 풀께요.”
“왜?”
“막 말로 쪽 팔리잖아요.”
“지금 그걸 창피해 할 이유가 없다.”
“여자인 은선 누나도 하네스 안 찼잖아요.”
“너는 바우쪽에 가야 되고 많이 움직여야 해. 그런데 넌 여기서 마음대로 움직일 실력이 안 되잖아. 그러면 네가 위험할 수 있어. 그러니까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일단 지금은 들어가서 자. 새벽에 깨울 테니깐.”
지금에 와서야 광섭형이 그때 했던 말에 깊은 뜻이 있었음을 알았지만, 당시엔 야속했다.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오기가 발동하자, 그 때까지 내 몸을 얼어붙게 만든 파도가 무섭지 않았고 물에 빠져도 좋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상 신동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