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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에서 성전으로(요5:1~16)
먼저 오늘 본문은 그 배경을 알려주는 것으로 시작을 하는데, ‘유대인의 명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을 때’의 일입니다. 물론 그 명절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이견이 있지만, 이스라엘의 관습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지금 예수님께선 많은 무리들 사이에 끼여서 예루살렘을 찾으셨음을 알 수 있지요. 명절을 맞아 하나님을 예배하고 제사드리기 원하는 순례객들과 더불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종교적인 관습을 따라서든,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서든 간에 이처럼 순례의 여정을 따라 예루살렘을 방문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찾은 곳은 구체적으로 어디였을까요? 그렇습니다. 당연히 ‘성전’입니다. 잠시 일상을 멈추고 생존의 현장을 떠나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찾은 목적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렇듯 명절을 맞이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요? 대청소를 하고 새롭게 꾸미고 단장을 하였겠지요. 성전을 가득히 채우는 그윽한 향기와 사람들의 마음까지 경건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찬양소리가 울려퍼졌을 겁니다. 그리고 그곳을 찾은 사람들은 할 수 있는 대로 몸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씻고 예쁘게 화장을 하며, 가장 값지고 좋은 옷을 입었겠지요. 최소한 그 시간만큼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거룩하고 경건한 모습을 한 사람들로 가득하였겠지요.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로 북적대는 또 다른 곳이 있었는데, 다름아닌 ‘베데스다’입니다. 그렇다면 이곳 베데스다의 모습은 어떠하였을지 한번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찌든 때가 흘러내리는, 다 해어진 누더기를 걸친 사람들, 치장은커녕 연못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씻지 못하여 엉망이 된 몰골들. 상처난 곳이 곪고 썩으면서 들끓는 벌레와 날파리들, 그리고 곳곳에 쌓여있는 쓰레기더미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나는 코를 찌르는 메스꺼운 악취. 그리고 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신음소리만 가득하였겠지요.
그저 하루하루 연명해 나가는 이들에게 있어서 명절은 자신들과 전혀 무관한 딴 세상의 이야기였고, 오늘이 몇 월, 몇 일, 무슨 요일인지조차 알 바가 아니었지요. 갖가지 병으로 인한 고통의 깊이만으로도 버거운데, 이 모든 것이 또한 죄때문이라는 사회적인 편견 때문에 또다시 버림받고 소외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으니 말입니다.
같은 예루살렘 하늘 아래 있으나 이처럼 완전히 대조되는 성전과 베데스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 그런데 유대인의 명절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거룩한 성전을 찾은 지금,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아닌 베데스다를 찾으셨고 거기서 가장 소망이 없어 보이는 한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38년된 병자. 도대체 무슨 병이길래 38년 동안이나 앓아왔을까요? 그렇다면 지금 이 사람의 나이는 어떻게 될까요? 지나온 그의 삶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10대 때부터 앓았다고 한다면 5-60대 정도, 그리고 꽃보다 청춘이라고 하는 2-30대 때 병이 시작되었다면 족히 7-80대는 되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절망의 탄식밖에 나오지 않는 삶이랄 수밖에요.
물론 이 사람도 한 때는 사랑스런 아들로, 멋진 남편이자 든든한 아버지로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찾아온 병마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악화되었고,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다니고 좋다는 약은 물론 온갖 민간요법까지 다 해보았지만 허사였지요. 그러는 동안 가세는 기울어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병수발에 얽매인 삶을 살아가던 가족들은 마음과는 다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지쳐만 갑니다.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운 것은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들마저 ‘죄인’ 취급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아무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서 괴로워하던 그는 결국 가족들 몰래 집을 나오고야 말았고, 한동안 살아온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인근 산과 들로 배회하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발각되기도 하였겠지요. 성치 않은 몸으로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걱정하던 가족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나서기를 여러번, 마침내 그는 정든 고향을 뒤로한 채 먼 길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병든 몸으로 낯선 곳에서 그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구걸뿐이었고, 그러다보니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급기야 거동조차 어려워졌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요? 거리의 사람이 된 그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한 연못에 관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가끔씩 천사가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그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떠한 병에 걸렸든지 다 낫는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던 그에게 다시 사랑하는 가족을 만날 수도 있다는 소망이 생기는 순간이었지요. 그래서 그는 남들보다 몇 배의 시간이 걸려서 어렵게 어렵게 베데스다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후 몇 차례 물이 동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연못을 향하였지만,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던 그는 번번이 1등을 남에게 내주고 말았지요. 그리고 오늘도 넋을 잃고 하염없이 연못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몇 가지를 생각해 볼까요? 먼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붙들고 있는 희망의 실상이란 것이 얼마나 미신적이고 불확실한지요. “물이 동할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지 낫는다”(?) 지난 주에 저희가 척사대회를 하였지만, 이는 마치 “정월 대보름에 가장 먼저 달을 보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하는 우리네 세시풍속과 별반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어떠한 이유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연못의 물이 가끔씩 동하였는데, 이것을 하늘의 천사들이 내려와서 물을 요동하게 하며 소위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것’처럼 생각을 하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주변에 몰려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물속으로 뛰어드는데, 가장 먼저 들어간 사람만 나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제일 먼저 뛰어들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얼마전 동계올림픽이 끝나고 지금 패럴림픽이 진행 중에 있지만, 1/100초까지 정밀하게 잡아내는 초고속 카메라로 찍어서 들이밀지 않는 이상 서로 먼저 들어갔다며 시비가 붙게 마련이지요. 그리고 분명 내가 가장 먼저 들어갔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며 하늘을 향한 불평과 원망의 소리들이 쌓이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어찌됐든 이것은 결과적으로 병이 나은 것을 통해서 입증이 될 수 있는 것이니 접어두고서, 그렇다면 실제로 누가 가장 먼저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권리금에 웃돈까지라도 올려주고서 연못 근처의 좋은 자리를 살 수 있는 사람? 혹은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그 중에선 그래도 가장 덜 아프고 건강한 사람? 이렇듯 현실은 정작 병자들을 위한 장소라고 하는 곳에서조차도 돈이 있거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자만 살아남게 됩니다. 그리고 정작 아픈 사람, 진짜 병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소외받고 외면당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 주인공도 물이 동할 때에 사람들 틈에 끼여서 사력을 다해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고서 여전히 그대로인 것을 발견하며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 무리들 중에서는 ‘북쪽 기둥 아래 누워있던 개똥이 아빠가 낳았다’고 하는 ‘카더라 식’ 소문이 돌게 마련이었지요.
어쩌면 정확히 콕 집어서 누가 나았는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나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더라도 아무개가 고침을 받았다고 하는 말은 만들어서라도 돌게 마련이었으니까요. 그것이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자, 마지막 삶의 보루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믿었고, 아쉬움에 돌아서면서도 ‘다음 번에는 꼭 내가 제일 먼저 들어가서 그 주인공이 되어야지’ 라며 입술을 깨물고서 굳은 의지를 다졌을 테니 말입니다.
이러한 베데스다를 예수님께서 찾으셨고, 거기서도 가장 병세가 심각한 38년된 병자를 찾아가 만나주셨습니다.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을 아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v6) 이에 대한 대답이 7절에 나오는데요.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자신이 낫지 못하는 이유를 다른 사람들 탓으로 돌리는, 불평과 원망이 가득한 부정적인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이 말은 ‘낫기를 원하냐구요? 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그동안 내가 얼마나 처절하게 살아왔는지 아십니까? 물이 동할 때마다 달리고 굴러서 죽을 힘을 다해 연못으로 치달았지요. 그런데 몸뚱이가 이 모양이라 말을 듣지 않으니 그새 다른 사람들이 먼저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나를 들어서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숨겨진 뜻은 “그러니, 그러니 제발 당신이 나를 좀 물에 넣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는 간절한 요청으로 들리지 않으십니까? 그는 낯선 젊은 남자가 다가와서 물었을 때, 비로소 자신을 물에 넣어줄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간절히 낫기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38년이라고 하는 그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포기하지 않고서 낫기를 원하는 그 간절함을 보셨음일까요? 예수님께서 그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v8).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동시에 그는 곧 나았고, 드디어 악취와 신음소리가 가득한, 이 지긋지긋한 ‘베데스다’를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자리를 들고 떠나는 본인조차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곳에서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게 되는데, 하필이면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책망하며(v10), 나아가 예수님을 핍박하게 된 것이지요(v16).
그렇다면 앞서도 잠깐 이야기했듯이, 이 사람이야 오늘이 몇 월, 몇 일이고 무슨 요일인지 알 바 아니었다지만, 분명 예수님께서는 아셨을 텐데 왜 굳이 안식일에 이 일을 행하심으로 화를 자초하셨을까요? 38년입니다. 자그마치 13,870일인데, 하루를 앞당기거나 혹은 미룬다고 한들 크게 문제될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많은 날들 중에서 바로 이 날에, 이 사람을 만나, 이 일을 행하셨다면 어쩌다보니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의도적으로 그 날을 택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유대인들은 눈앞에 이루어진 명백한 사실을 보고서도 믿지 못한 채, 율법에 얽매여서 그 사람을 억압할 뿐 아니라 예수님까지 판단하고 제한하며, 창조주 하나님을 인간의 달력에 가두려고 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처럼 오늘 본문에서도 주인공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어떤 것도 알 수가 없지요. 다만 그는 예수님께서 찾아가 만나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고침을 받았을 뿐입니다. 심지어 13절을 보면 그는 자기를 고쳐준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지요.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한 번 더 만나게 되는데, 그곳은 어디였습니까? 14절에 나온 것처럼 다름아닌 성전입니다. 바로 ‘베데스다에서 성전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질병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서두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너무나도 대조되었기에 어울리지 못하고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었던 두 장소인 베데스다와 성전. 그런데 오늘 주인공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더러운 베데스다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옮겨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어떠한 자격이나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께서 찾아가 만나주시는 은혜로 말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이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사랑을 받은 자로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베데스다에서 성전으로 옮겨주시는, 너무나도 큰 은혜와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악취와 신음소리가 가득한, 소망없는 베데스다로 다시 내려가 허덕이는 삶을 살아갈 때가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옛 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한 채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며,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여서 마치 애굽을 추억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그렇게 행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진정 우리 주님께서 찾아와 만나주시는 은혜가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그를 다시 만나신 예수님께서는 뜬금없이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v14)고 하십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지난 38년이란 긴긴 세월동안 육체적인 질병으로 고통 받고, 종교적으로 죄인 취급당하며, 사랑하는 가족들과도 생이별하는 등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단절된 채 소외되고 외면당하였던, 그리하여 차마 죽지 못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이 사람의 비참한 삶보다 ‘더 심한 것’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하지만 답은 너무도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영원한 멸망; 죽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죽음 뿐만 아니라 살아 있으나 진정한 생명, 참된 생명이 없이 사는 삶,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생명의 근원되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무관하게 사는 삶이라 할 수 있지요.
나아가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저 피상적인 지식에 머물 뿐, 그리스도를 삶의 전 영역의 주인으로 모셔들이지 못한 채 그야말로 ‘종교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여기에 포함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러한 사람들을 본문에서 만나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나음을 받아 몸서리치도록 비참한 삶을 청산하고 온전케 된 것을 함께 기뻐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기준으로 진리를 판단하며 예수님을 핍박하고자 하였던 유대인들이지요.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유대인들이야말로 38년된 병자보다 더 비참하고 불행한 사람들임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진리 앞에서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내 생각과 판단이 기준이 되어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라며 진리되신 주님까지 제한하려 한다면, 우리 또한 유대인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음을 기억하며, 늘 깨어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 넷째주간을 맞이하는 지금,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사역의 방식’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고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들, 소위 준비되고 예비된 사람들로 가득한 거룩한 성전에 가셔서 대중설교를 하는 것이 보다 전략적이고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십니까? 유대인의 명절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끗하고 좋은 옷을 차려입고서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하여 거룩한 성전을 찾은 지금, 우리 주님께서 서신 곳은 어디이며, 찾아가 만난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온갖 병자들로 가득한, 더러운 날파리들과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는 베데스다를 찾으셨고, 이제 살 날도 얼마남지 않은,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났겠다 싶을 정도로 비참한 38년된 병자를 만나셨고, 오히려 이것 때문에 안식일을 어겼다며 박해를 당하셨습니다.
전 인류를 구원하라는 위대한 사명을 망각한 채 가장 미천하고 쓸모없는 한 사람 때문에 목숨을 건 위험을 자초하는, 정말 어리석고 바보같은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여야 할까요? 2000년 전, 이스라엘에 살았던 주님께나 통하는 방식일 뿐, ‘무한경쟁시대’ 라고 하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무시하며, 그와 상관없는 삶을 살아도 될까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우리가 찾고 선호하며 만나려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지향하는 곳은 어디인가요? 혹 예수님을 영접하여 내 삶의 주인으로 고백한다고 하면서도 “더 높이, 더 빨리, 더 많이” 라고 하는 세상적인 삶의 방식을 여전히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심지어 신앙생활에 있어서조차 거룩한 욕심(?)으로 포장하여 자기 신앙에 유익이 되는 것은 부지런히 좇아다니고 자신의 이름을 내는 데는 열심이면서, 정작 섬김과 희생과 헌신과 포기가 요구될 때에는 살며시 발을 빼고 있지는 않은지요?
예수님처럼 우리 또한 낮은 곳을 지향하고, 겸손을 추구하며,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주관하고 다스리며 군림하고자 하는 이 세상의 풍조와 방식을 거스르며, 오직 주님께서 걸어가신 나눔과 섬김의 길을 따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귀한 사랑을 받은 우리 또한 소망없는 탄식 가운데 있는 세상을 향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가지고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삶의 현장인 베데스다로 나아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말과 혀로만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주의 사랑과 복음을 증거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눌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베데스다와 같은 소망없는 세상에서 방황하고 헤매이는 영혼들을 인도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성전으로 삶의 자리를 옮길 수 있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가교로 서는 일산호수교회와 사랑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80311. 주일 오후 헌신예배.
임승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