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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대나무 또는 죽(竹)은 벼과, 대나무아과의 다년생식물, 상록 식물이다. 대나무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자라나는 나무류의 식물이기도 하다. 대나무의 성장속도는(하루 최대 60cm)는 지역의 토양과 기후에 따라 좌우된다. 싹이 난뒤 약 4~5년뒤에는 전부 자라게 되는데, 전부 자란 대나무의 길이는 평균 20m정도 이며, 어떤 대나무는 최고 40m까지 자라기도 한다.
대나무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관상용, 건축자재, 음식재료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대나무는 총 92개의 속과 5,000여 종이 있다. 대나무는 열대지역부터 추운 산악지방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서식한다. 북위 50도경의 사할린부근부터 남쪽으로는 북부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서식하며, 인도와 히말라야 산맥에서도 자란다.[1] 심지어 미국의 남동부에서도 볼 수 있으며[2]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도 볼 수 있다. 한국에는 4속 14종이 있다.
" 한국사 진실보기(19) / 대나무와 한민족 "
요즈음 세간에 유행하는 건강식품 중 죽통밥, 죽염 등에는 대나무가 빠질 수 없는 재료로 등장하고 있다. 전통사회에서 대나무는 사군자의 하나로 선비들의 시상과 정서를 표현하는 불변의 주제였다. 대나무에 지조와 절개를 나타내는 인간의 품성을 비견하기도 하고 대나무의 생장주기에 따라 시절을 점치기도 하였다. 회화에서 송죽도 죽석도로 보이는 것처럼 다른 자연물과 함께 의미를 부여하여 상징성을 가지고 다루고 있다. 상감청자 등 자기에 그려진 그림에는 奏樂仙人이 대나무와 함께 등장하고 있고 18세기 술병류에 대나무를 주제로 시문되고 있다. 대나무를 이용한 역사는 대단히 오래되어 활·화살·창 및 산울타리를 만들기도 하고 퉁소·대금·피리 등의 악기도 대나무로 만들었다. 늦은 봄에서 초여름에 나오는 죽순은 향기가 좋아 밥·단자·죽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약용으로도 사용한다. 합죽선 죽부인 죽침 등 다양한 용도에 사용하였다.
일반적으로 나무는 귀신과의 관계, 즉 영계와 교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식물이다. 심지어 세계수·우주목은 천지를 떠받치고 있는 세상의 근원과 존재의미에서 중요한 존재로 숭배의 대상이었다. 일본의 이소노가미 신궁에 보관되어 신체로 섬겨지고 있는 백제의 칠지도 같은 경우도 명칭은 칼이지만 그 모양은 나뭇가지이다. 신라가 남긴 금관 역시 나무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민족시조로 섬겨지고 있는 檀君의 이름도 박달나무귀신을 섬기는 무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던가? 하늘 높이 뻗은 나무는 허공 저 멀리 어느 곳 미지의 영계와 관련되어 많은 상징물을 남기고 있고 샤먼과 권력자의 필수품으로 사용되었다.
샤머니즘이 지배했던 우리 민족에게 대나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당의 무구로 사용되고 전통사회의 지배계급의 정신세계와 정서를 지배해왔다. 인간의 한계상황에서 문제해결의 방편으로 또한 영물로 등장하고 있다.
첫째, 대나무는 영물로 악을 물리치고 문제의 해결자로 의미가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미추왕의 죽엽군이 등장한다. 신라 14대 유리이사금 때 이서국 사람들이 금성을 공격해왔을 때 신라군이 위기에 처했다. 이 때 죽엽을 귀에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도왔는데 적이 물러나자 군사들은 간 곳이 없고 미추왕능 앞에 대나무 잎만 수북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만파식적' 설화에서는 낮에는 둘이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쳐지는 대나무로 만든 피리를 국가 위기 시에 불기만 하면 평온해졌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죽 향삼죽 등 대로 만든 악기가 있었다.
둘째, 사군자에서는 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성질로 인하여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고 있는 군자의 기상을 말하고 있다. 대나무를 군자로 칭송한 최초의 기록은 '시경'이다. '시경' '위풍'에서는 위나라 무공의 높은 덕과 학문 인품을 대나무의 고고하고 우아한 모습에 비유하여 칭송한 시가 있다. 윤선도의 오우가에서는 대나무의 곧고 푸른 모습을 노래하며 친구로 인격화하고 있다. 정몽주가 자결한 곳이 선죽교로 명명되고 구한말 민영환이 자결한 곳에서 혈죽이 나왔다고 하는 것도 이러한 지조와 절개를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 시대변화의 시간표나 사건의 징조로 보기도 한다. 대나무가 꽃을 피우는 주기는 5년에서 60년까지 다양하다. 대나무에 꽃이 피면 모죽은 말라죽고 대밭은 망한다. 대밭이 망하면 전쟁이 일어날 징조라 하여 불길하게 생각하는 속설이 있다.
넷째, 현실도피를 의미하기도 한다. 전통사회의 선비들은 난세를 피하고 뜻을 펼칠 때를 기다리며 대나무 숲에 은거하였다. 중국 육조시대 죽림칠현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군자가 지조와 절개를 지키기 위해 대나무 숲을 은거지로 삼아 때를 기다렸다.
다섯째, 귀신과 관계를 맺는 도구가 된다. 무속인들이 깃발을 매달거나 점괘를 알아볼 때 대나무는 빠질 수 없는 도구이다. 하늘에서 신이 내려올 때 대나무를 타고 온다. 즉 고대이래 소도(蘇塗)의 어원적 변형으로 보는 솟대와 별신대는 신간(神竿)으로서 흔히 대로 만드는데, 귀신과의 교감(交感)을 바라는 영적 본능의 한 형태이다. 따라서 대는 신을 부르거나 내리게 하는 신대로 사용하고 신령의 집, 신령의 통로 등으로 무속인들의 필수품이다.
장례 때의 필수품으로 사용된 대지팡이는 사람을 대신하기도 한다. 무속신화에서 담금애기의 아들 3형제가 대나무 밑에서 아버지를 찾다가 대나무들이 아버지를 대신해 주겠다고 하여 이후 상주들이 대지팡이를 짚게 되었다고 전한다.
우리의 풍습에 새벽에 문 밖에서 대나무를 태워 요란하게 타는 소리로 잡귀를 쫓는 것은 중국의 폭죽 풍습과 맥을 같이 한다. 아울러 대나무는 번식력이 강하고 상록인 점에서 소나무와 비견되는 영생과 불변을 상징하기도 한다. 꿈에 죽순을 보면 자식이 많아진다는 속설도 이와 관련 있다.
조선시대에 도화서의 화원을 뽑을 때 시험과목 중 대나무 그림이 제일 점수를 많이 받을 수 있는 과목이라고 '경국대전'에 기록되어 있다. 이율곡은 용꿈을 꾸고 검은 대나무 집 오죽헌에서 태어났는데 특별한 의미를 두고 인물의 탄생과 관련짓기도 한다. 옛날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위해 마을 입구에 주홍색을 칠한 장대를 세우고, 끝에 청색을 칠한 용을 만들어 붙이는 경축을 의미하는 솟대를 세울 때도 사용했다.
설화와 신화세계에 등장하는 대나무는 귀신세계와 연결해주고 인간의 삶과 죽음 인간 본질적인 특성인 생령의 본질을 충족시키는 도구처럼 인식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대나무를 상징성, 고고함과 우아함 실용성으로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고 교훈적·길상적 의미를 간직한 주된 소재로 소중하게 다루어져 왔다. 특히 귀신세계와 관련성을 간과한 상태에서 대나무의 본질적 의미는 파악할 수 없다.
하늘에서 떨어진 사단과 그의 졸개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 형상 가진 인간을 장악하고 대나무라는 자연물을 이용하여 사람과 관계를 지속해왔던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난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신18:9-11)
21세기 민족·세계 문제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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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와 주식
대나무 잎을 삶은 물에 빚은 술, 또는 대나무 색을 띠는 청주를 죽엽주라고 한다.
고려때 한림원의 여러 학자들이 지은 한림별곡(翰林別曲)에도 죽엽주가 등장한다. 대나무는 나무, 잎, 뿌리, 그리고 수액도 민간치료 약재로 사용되었다.
대나무수액은 생죽력(生竹瀝)이라고 불렀는데 몸속의 노폐물을 씻어내고 혈압을 조절하는 등의 효력이 있다고 하였다.
죽력은 푸른 대쪽을 불에 구울 때 나오는 진액으로 열이 나고 가래가 끓는데, 답답하고 갈증이 날 때 복용하는 한방치료제다.
죽력고(竹瀝膏)는 죽력을 섞어 만든 소주, 죽력죽(竹瀝粥)은 죽력과 멥쌀로 넣어 끓인 죽으로 갈증을 해소하고 열을 내리는 데 효험이 있다.
단단한 지표를 뚫고 나와 하루 최고 150cm까지 성장할 수 있는 죽순은 그 자체로 음식이 되나 다른 음식에 섞어 맛을 돋우는 재료로도 쓰인다.
죽실반(竹實飯)이란 대나무 열매를 까서 멥쌀을 섞어 지은 밥이다.
태종 10년에 강원도 관찰사의 보고를 살펴보면 대령산에서 대나무 열매가 열렸는데 백성들이 이것을 따서 끼니를 마련하고 술을 빚었다는 내용이 있어 오래전부터
이것이 식량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경종 3년 에 제주도 세 고을이 몹시 가물어 보리농사가 흉작이어서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던 차에 마침 한라산에
그동안 열리지 않던 대나무 열매가 열려 이것을 따서 진하게 죽을 만들어 먹고 살아난 자가 많았다고 한다.
대나무 의물 및 무기
각종 의례행사에서 사용되는 예기(禮器)나 기타 의물(儀物)들은 그 형태와 규격이 법전과 의궤(儀軌)에 명시되어 있다. 죽책(竹冊)은 세자빈책 봉문(世子嬪冊封文)을
새긴 간책(簡冊)으로 평평하게 깎은 대쪽 여러개를 이은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왕이 친히 제사지낼 때 태조묘에는 옥책 (玉冊)의 축문을, 다른묘에는 죽책의 축문을 사용하였는데 그 형태와 규격이 정해져 있었다. 임금의 장례를 국장(國葬), 또는 인산(因山)이라고 하는데 ‘죽산마(竹散馬)’와 ‘죽안마(竹鞍馬)’는 인산 행렬의 대여(大轝)앞에 배치된다. 죽산마는 굵은 대로 말을 만들고 여기에 종이를 발라 잿 빛 칠을 한 다음 말총으로 갈기와 꼬리를 붙이고 눈알을 박은 것이다. 이것을 두꺼운 널로 만든
길다란 우물 정자 틀에 두 바퀴를 단 거(車)에 올려놓고 끌게 하였다. 죽안마는 죽산마에 안장을 얹은 것으로 죽사마(竹駟馬)라고 하여 네 필을 만들어 두 필은 흰빛으로 나머지 두 필은 붉 은 빛으로 칠했다.
일반 사가의 혼례, 상례 및 제례에도 죽제품이 쓰였다.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사주단자를 보낼 때 구겨지지 않도록 사주봉투보다 약간 긴 대나 무나 싸리가지를 두 가닥
내어 그 사이에 사주봉투를 끼우고 청실홍실의 둥근 타래실로 매듭지지 않게 옭아 묶는다.혼인날 신부집에서 초례상 을 차릴 때 송죽, 즉 소나무와 대나무를 화병에 담아
상 양쪽에 배치했는데 푸른 댓잎이 달린 대나무는 변하지 않는 부부애를 상징한다. 상례때 상주가 대나무로 만든 둥근 상장(喪杖)을 짚고 있으면 부모상을 당했음을
의미한다. 상중(喪中)에는 방갓위에 흰색천을 씌운백립(白笠)을 쓰는 데 이것은 상중에 바깥출입을 해야 하는 상주(喪主)가 쓰는 모자로 삿갓보다 정교하게 만든 것이
방갓이다. 방갓은 가늘고 얇게 쪼갠 대오리를 삿갓모양으로 만들어 거죽으로 하고 왕골속을 엮어서 안을 받친 것이다. 상여 뒤를 따르는 만장은 대나무 장대에 매달았다.
죽간자(竹竿子)는 당악정재(唐樂呈才)가 진행되는 동안 춤이 시작하고 끝날 때 선두에 서서 인도하는 구실을 하는 의물의 하나다. 봉죽간자 (奉竹竿子)라고도 한다.
서해안 어촌에서는 풍어제가 시작될 때 마을 입구 양쪽에 봉죽(奉)을 세워두기도 하며, 동해안에서는 죽은 영혼을 달래 어 천도하는 진오귀굿이 벌어지면 미리 대나무와
종이로 정교하게 만든 용선(龍船)이 제작된다. 임금이 과거 급제자에게 내리는 어사화나 각종 잔치에 꽂아놓는 지화(紙花)도 그 골격을 대나무로 만든다. 대나무로 만든
무기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도 매우 오래전의 일이며 대나무로 만든 활과 화살은 가장 중요한 무기였다. 왕건이 고려 태조로 추대되었을 때 견훤이 이를 축하하며 지리산
죽전(竹箭, 대화살)을 선물하였다. 죽전을 담는 전통(箭筒, 화살통)이나 대나무로 만든 죽창(竹槍), 죽도(竹刀)도 죽전과 함께 오래전부터 제작되고 사용되었다. 죽장창
(竹長槍)은 무예를 익히는데 쓰던 창이다. 죽패(竹牌)는 대나무 다발로 화살을 막기 위해 제작된 방어용 무기로 죽속(竹束)이라고도 한다. 대나무를 깃대로 사용하는
두레패의 농기(農旗 )도 군기(軍旗)의 성격을 갖는다.
세시풍속 및 민속놀이
음력 2월 초하루는 머슴날, 또는 노비일이라고 하여 정월 보름날 세워 두었던 볏가릿대를 쓰러뜨려 그 안에 넣어 두었던 벼이삭을 떨어서 흰떡을 만들어 먹는다.
볏가릿대를 세울 때 풍작을 상징하기 위해 길게 늘어뜨리는 곡식의 줄기는 가늘게 쪼갠 대오리로 만든다. 이것을 죽사(竹絲)라고 표기한다. 다음은 초파일 행사와
관련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내용이다.
초파일 행사를 위해 수 일 전부터 각 가정에서는 각기 등장대를 세우는데 대나무 장대 맨 위에 꿩장목을 세우고 색을 넣은 비단으로 만든 깃발을 매단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집에서는 장대 꼭대기에 대개 오래된 솔가지를 맨다. 각 집에서는 자녀 숫자대로 등을 달아 주위를 밝히면 길하다고 생각한다.
이 일은 9일이 되어서야 그만둔다. 사치를 부리는 집에서는 큰 대나무 수십개를 묶어 세우기도 하고 한강까지 가서 말짐으로 돛대를 실어다가 시렁(두개의 긴 나무를
가로질러 선반처럼 만든 것)을 만들어 놓기도 한다.
혹은 해와 달 모양을 한 일월권(日月圈)을 장대에 꽂아 바람을 받으면 현란하게 돌아가게하며 혹은 빙빙 도는 전등을 매달아 마치탄알이 날아가는 것처럼 불빛이
왔다 갔다 하게 한다. 상인들이 계산할 때 쓰는 산가지(算)의 재료도 대나무다. 지역에 따라 산대, 산가비, 수대, 수가지, 주대 등 다양하게 불린다. 산가지 놀이는
이 산가지로 문제를 내고 푸는 놀이다. 예컨대 움직일 수 있는 산가지 수를 정해 그 수 안에서 산가지를 떼거나 붙여 방향이 나 형태를 바꾸게 하는 것 등이다.
죽마놀이는 어린이들이 대나무로 말을 만들어 타고 노는 놀이로 대막대기를 말로 삼아 두 다리로 걸터타고 다닌다. 오광대놀이 등 탈놀이 때 죽간(竹竿) 위에서 버나
(사발, 대접 등을 막대기로 돌리는 것)를 돌리는 등 재주를 부린다. 어른들의 놀이인 투전도 그 패는 대나무로 만들었다. 또 투호놀이는 항아리에 대나무를 만든 살을
던지는 놀이로 당나라에서 성행되었던 놀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에 전해져 양반이나 귀족들의 유희로서 놀이할 때 예를 갖추어 행하여졌다.
중국의 세시풍속 중에 음력 5월13일과 8월8일을 죽취일(竹醉日)이라 하는데, 중국 속설에 이 날 대나무를 옮겨 심으면 뿌리가 잘 자란다고 한다. 죽미일(竹迷日),
혹은 죽술일(竹述日)이라고도 한다. 음력 정월에는 폭죽을 터뜨리는데 그때 나는 소리가 귀신을 쫓고 평안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담양의 대나무 민속놀이로는 운수대통놀이와 대도롱테 던지기 놀이가 있다. 운수대통놀이는 대나무에 뚫린 구멍에 동전을 던져들가면 그 날 운수가 좋다는 설이
전해져 오는데, 이를 민간에서 민속놀이삼아 명절이나 마을행사때 대나무묶음에 여러개 구멍을 뚫고 그 곳을 향해 동전을 던지는 풍습이 생겨났다.
이런 풍습을 재현시킨 이 운수대통 놀이는 운수대통(運數大通) 또는 운수죽통 (運數竹通)이라고 하는데 동전을 던져 점괘를 보면서 자신의 운수를 가늠해 보는
즐거운 놀이이다. 대도롱테 던지기도 담양만이 가지고 있는 민속놀이로서 놀이방법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대도롱테를 부표를 향해 던지는 놀이이다.
대나무와 관련된 민간신앙
꿈에 울창한 대나무나 갑자기 크게 자란 죽순을 보면 만사가 잘 이루어진다고 하고, 그 반대면 집안에 좋지 않는 일이 생긴다고 한다. 대나무 숲을 헤매거나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려 요란한 소리가 나면 흉몽에 해당한다. 무속에서 대나무는 신을 부르거나 내리게 하는 신장대로 사용된다. 무당들은 굿을 하기전에
신을 불러들이는데 산에 가서 대나무를 꺾어오기도 하고 미리 마련된 신장대를 이용한다. 대잡이는 무당이 하기도 하고 마을주민들 중에 지정하기도 하는데 잡고 있던
대가 흔들리면 신이 내린 증표로 삼는다무당의 제석 본풀이 가사 중에는 상주가 대지팡이를 짚는 이유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화적인 내용이 있다.
당금애기는 승려와 정을 통하여 아들 3형제를 낳아 기르다가 아들들이 성장하여 아버지를 찾자 대밭에서 오줌을 눈 후에 태어난 것이라고 궁색하게 설명하였다.
3형제가 이 말을 믿고 대밭에서 아버지를 찾으니 대들이 자기들은 아버지가 아니지만 우리를 베어 다가 상주 막대로 삼으면 3년 동안 아버지가 되어 주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대를 상주 지팡이로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교적 상례에서의 지팡이는 부모상을 당하여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심신이 지쳐있는 상주의 상태를 나타내기 위한
상징물이다.
특히 대지팡이는 부친상을 당한 자만이 짚는 것으로 둥근 대나무는 하늘과 같은 부친을 비유한 것이다. 고려말에 절개를 굽히지 않았던 정몽주가 죽은 돌다리를 선죽교(善竹橋)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나 ‘심지가 대쪽같다’는 등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대나무는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정직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있다.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이러한 것들이 죽물을 선호하는 정서로까지 퍼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절개와 지조의 상징
각종 의례행사에서 사용되는 예기(禮器)나 기타 의물(儀物)들은 그 형태와 규격이 법전과 의궤(儀軌)에 명시되어 있다. 죽책(竹冊)은 세자빈책 봉문(世子嬪冊封文)을 새긴 간책(簡冊)으로 평평하게 깎은 대쪽 여러개를 이은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왕이 친히 제사지낼 때 태조묘에는 옥책 (玉冊)의 축문을, 다른묘에는 죽책의 축문을 사용하였는데 그 형태와 규격이 정해져 있었다. 임금의 장례를 국장(國葬), 또는 인산(因山)이라고 하는데 ‘죽산마(竹散馬)’와 ‘죽안마(竹鞍馬)’는 인산 행렬의 대여(大轝) 앞에 배치된다. 죽산마는 굵은 대로 말을 만들고 여기에 종이를 발라 잿 빛 칠을 한 다음 말총으로 갈기와 꼬리를 붙이고 눈알을 박은 것이다. 이것을 두꺼운 널로 만든 길다란 우물 정자 틀에 두 바퀴를 단 거(車)에 올려놓고 끌게 하였다. 죽안마는 죽산마에 안장을 얹은 것으로 죽사마(竹駟馬)라고 하여 네 필을 만들어 두 필은 흰빛으로 나머지 두 필은 붉은 빛으로 칠했다.
일반 사가의 혼례, 상례 및 제례에도 죽제품이 쓰였다.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사주단자를 보낼 때 구겨지지 않도록 사주봉투보다 약간 긴 대나 무나 싸리가지를 두 가닥 내어 그 사이에 사주봉투를 끼우고 청실홍실의 둥근 타래실로 매듭지지 않게 옭아 묶는다. 혼인날 신부집에서 초례상 을 차릴 때 송죽, 즉 소나무와 대나무를 화병에 담아 상 양쪽에 배치했는데 푸른 댓잎이 달린 대나무는 변하지 않는 부부애를 상징한다. 상례때 상주가 대나무로 만든 둥근 상장(喪杖)을 짚고 있으면 부모상을 당했음을 의미한다. 상중(喪中)에는 방갓위에 흰색천을 씌운백립(白笠)을 쓰는 데 이것은 상중에 바깥출입을 해야 하는 상주(喪主)가 쓰는 모자로 삿갓보다 정교하게 만든 것이 방갓이다. 방갓은 가늘고 얇게 쪼갠 대오리를 삿갓모양으로 만들어 거죽으로 하고 왕골속을 엮어서 안을 받친 것이다. 상여 뒤를 따르는 만장은 대나무 장대에 매달았다.
죽간자(竹竿子)는 당악정재(唐樂呈才)가 진행되는 동안 춤이 시작하고 끝날 때 선두에 서서 인도하는 구실을 하는 의물의 하나다. 봉죽간자 (奉竹竿子)라고도 한다. 서해안 어촌에서는 풍어제가 시작될 때 마을 입구 양쪽에 봉죽(奉)을 세워두기도 하며, 동해안에서는 죽은 영혼을 달래 어 천도하는 진오귀굿이 벌어지면 미리 대나무와 종이로 정교하게 만든 용선(龍船)이 제작된다. 임금이 과거 급제자에게 내리는 어사화나 각종 잔치에 꽂아놓는 지화(紙花)도 그 골격을 대나무로 만든다. 대나무로 만든 무기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도 매우 오래전의 일이며 대나무로 만든 활과 화살은 가장 중요한 무기였다. 왕건이 고려 태조로 추대되었을 때 견훤이 이를 축하하며 지리산 죽전(竹箭, 대화살)을 선물하였다. 죽전을 담는 전통(箭筒, 화살통)이나 대나무로 만든 죽창(竹槍), 죽도(竹刀)도 죽전과 함께 오래전부터 제작되고 사용되었다.
죽장창(竹長槍)은 무예를 익히는데 쓰던 창이다. 죽패(竹牌)는 대나무 다발로 화살을 막기 위해 제작된 방어용 무기로 죽속(竹束)이라고도 한다. 대나무를 깃대로 사용하는 두레패의 농기(農旗)도 군기(軍旗)의 성격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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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의 유래 ?
"아리랑”은 한국민족의 상징적인 대표적 민요로서 아득한 옛날부터 한국 민족의 사랑을 받으며 널리 불러온 노래일 뿐 아니라, 오늘 날처럼 남북이 분단되어 올림픽 단일팀이 하나의 國歌를 부르기 어려울 때에는 “아리랑"을 국가처럼 합창하여 한 민족임을 확인한다.
그러면서도 우리국민 거의다가 “아리랑”이 무슨 뜻인가? 를 모르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이라는 노래의 유래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뜻을 풀이하는 데 학설이 많기도 하다.
일단 아리랑이라는 노래에서 우리가 느끼는 바는, 기뻐서 부르는 노래는 아니며 나를 버리고 그냥 가버릴 지도 모르는 님에게 나도 함께 꼭 데리고 가 달라는 뜻이 담겨져 있고 또한 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가고 싶어하는 심정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민요 가운데 아리랑은 가장 상징적인 노래다. 우리나라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를 가더라도 아리랑이 없는 곳이 없다. 또 누구나 한 곡쯤 부를 수 있는 노래도 아리랑이다.
옛날부터 아리랑은 식견 높은 양반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가 아니라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지어 부르고 어깨 너머로 배워 부르고 했던 백성들의 노래, 즉 민요(民謠)인 것이다.
아리랑은 어느 시대에 생겨났는지 확실하지 않다. 일부에서 수천 년 전부터 불려지기 시작했다고 하나 추측에 불과할 뿐 문헌에 등장하기 시작 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부터다.
아리랑이 처음 기록된 문헌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후기 천주교 신자였던 이승훈의 『만천유고(蔓川遺稿)』에 있는 ‘농부사(農夫詞)’의 한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啞魯聾 啞魯聾 於戱也...
(아로롱 아로롱 어희야)
물론 이 말이 지금 불리고 있는 민요 아리랑의 모태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지금의 아리랑과 비슷한 후렴구가 조선 후기에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리랑이 불려지기 시작한 보다 구체적인 시기는 1865년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복궁 중수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역을 하던 사람들이 원납전(願納錢)을 강요받고 부녀자까지 부역에 동원시키라고 하자 불만이 커갔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던지 “차라리 귀가 먹었으 면 좋겠다”고 탄식하며 읊조린 ‘아이롱(我耳聾)’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아리랑으로 변해 전국적인 민 요에 붙어 아리랑으로 확산되어 갔다고 한다. 이때부터 아리랑이 전국적인 민요가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아리랑을 처음으로 서양 식 기보법으로 기록한 것은 1896년 당시 선교사 로 활동하던 미국인 헐버트 (Homer B Hulbert : 1863~1949)박사에 의해서였다.
헐버트는 『Korea Repository』라는 잡지에 ‘ Korea Vocal Music'이란 제목으로 아리랑의 영문 가사를 싣고 있다. 이 악보의 끝에 아리랑이 1883년부터 대중적인 애호를 받게 되었으며, 제각각 다른 내용이지만 후렴은 변하지 않고 쓰인다고 해설과 함께 조선사람들에게 “아리랑은 쌀이다.”라는 의미 있는 말을 덧붙여 놓았다.
또 황현(黃玹)이 1900년에 펴낸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아리랑이 궁궐 안에서까지 불려졌다는 재미있는 기록이 나온다.
“고종은 밤만 되면 전등을 켜 놓고 배우들을 불러 새로운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이번 곳은 ‘아리랑타령(阿里娘打令)’이라고 했다. 이 타령이란 말은 곡조를 길게 빼는 것을 세속에서 일컫는 말이다. 민영주(閔泳柱)는 배우들을 거느리고 오직 아리랑타령만 전담하고 있으면서 그 우열을 논하여… 금·은으로 상을 주었다. 이 놀이는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대궐을 침범한 후에 중지되었다.”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대궐을 침범한 때는 갑오개혁 바로 전인 1893년이다. 이 사실에 비춰볼 때 아리랑은 헐버트의 기록에 따라 1883년부터 1894년까지 서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민요였음을 알 수 있다. 이때부터 아리랑은 서서히 성장하기 시작했고, 19세기말에 이르러서는 고종과 명성황후까지도 아악(雅樂)보다는 진솔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아리랑 듣고 즐거워하기에 이르렀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멋과 얼이 담겨있는 상징적인 어휘다. 이렇게 오랜 세월 구전된 아리랑의 뜻은 무엇인가. 아리랑을 제 아무리 잘 부른다는 사람도 이런 질문에는 설왕설래한다. 아리랑을 한민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노래로 여기면서도 그 뜻조차 알지 못하기에 '아리랑'은 매혹적인 연구 대상이 되어왔다.
1930년대부터 미미하게나마 연구되기 시작한 아리랑의 뜻을 찾기 위해 최근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다양 한 접근을 시도해왔다.
고어(古語)에 의한 유추 방법, 전설에 의한 유추 방법, 문헌을 근거로 한 유추 방법 등 온갖 노력을 하며 아리랑의 뜻을 끄집어내려고 했으나 어느 것 하나 설득력 있는 정설(定說)로 평가받지 못했다.
오히려 아리랑의 뜻에 너무 집착을 하다보니 아리랑과 비슷한 어휘들을 아리랑에 결부시켜 구구한 설만 나오게 했다. 그러나 ‘아리랑’이라는 낱말이 뜻을 나타낸다고 하기보다는 음악적으로 리듬을 이루고 흥을 돋구 는 무의미한 사설(nonsense verse)에 가깝다.
지금까지 논의된 아리랑의 어원 가운데 대표적인 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기원기원아리랑의 기원설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체로 여음인 `아리랑`서 그 바탕을 찾고 있다. 아리랑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시기는 1930년대를 전후한 시기이다. 이런 이유로 어원설은 대체로 아리랑의 최초의 형태가 1930에 정착된 아리랑과 유사할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아리랑`이라는 말을 실사(實詞)로 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① 아리랑설:`나는 사랑하는 님을 떠난다`는 뜻을 갖고 있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
② 아이농설: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때 고생하던 민중들이 반가운 말은 못듣고 괴로운 말만 듣게 되니 "차라리 귀가 먹었으면 좋겠다."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는 설.
③ 아랑전설:밀양 영남루의 아랑낭자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한 노래에서 나왔다는 설.
④ 알영설:신라의 박혁거세의 아내 알영부인을 찬미한 말에서 변했다는 설 등이 있다.
⑤ 아이롱설 : 한일 합방 후 노골적으로 심해져 가는 일제의 착취에 대해 감히 맞서지 말고 못 본 척 하라는 '아이롱'이 아리랑으로 되었다는 설이다.
⑥ 아미일영(俄美日英)섪 : 구한말에 널리 유포되었던 “일본아 일어난다 미국은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 말라….”는 풍요(風謠)의 내용과 뜻이 통하는 설로 아미일영(俄美日英)을 경계해야 한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이밖에도 여진어의 ‘아린’(고향)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아리고 쓰리다'에서 연유되었다는 설, 인도의 신(神)인 '아리람 쓰리람' 신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생겨났다는 설 등 무려 40여 가지 설에 이른다.
'아리랑'이란 매혹적인 용어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백인백색의 다양한 주장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는 아리랑에 대한 애정이 그만큼 각별하다는 반증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아리랑의 정확 한 어원에 대한 규명 없이도 그 가락과 그 노래에 무한한 포근함을 느낀다.
역사적 상징
역사적 상징아리랑은 다른 민요와 마찬가지로 본래 노동요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때의 주로 두레노래로 불렸으며, 따라서 구술과 암기에 의한 전승 또는 자연적 습득이라는 민속성 이외에 지역공동체 집단의 소산이라는 민속성을 가지게 되었고, 그 집단성은 시대성과 사회성을 내포하게 되었다. 비록 그 노랫말이 개인적인 넋두리의 비중이 컸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근세의 민족사가 반영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진용선, 『함께하는 아리랑』, 정선아리랑학교, 1999.
진용선, 『중국 조선족의 아리랑』, 수문출판사, 2001.
정선 아리랑 학교 http://www.arirangschool.or.kr/arirang.html
문화 콘텐즈 닷컴 http://www.culturecontent.com/main.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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