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두표와 압구정
인생2막을 향토사학자로 보내고 있다. 관심분야라서 오래전부터 한발 걸치고 있긴 했다.
농민운동의 전방에서 물러선 후 농사도 시들해졌을 때 내 앞에 다가온 것이 향토사연구였다.
현장답사 안내와 강연, 역사이야기들을 발표하며 공부하니 제자리에 들어선 것 같아 미쁘다.
그러던 차 평택지역에 대동법 시행기념비를 조사하면서 우연히 원두표를 만나게 되었다.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누군지 정확한 기억은 없는데...) 홍수가 난 한강을 헤엄쳐 압구정으로 도망쳐온 원두표 이야기다.
한 인물이 민중들에게 기억 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조선시대의 인물들이 민중들에게 실제 기억되는 방식은 그가 민중적이지 않더라도 영웅적 면모가 있다면 쉽게 기억되기도 한다.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이 원두표다. 원두표는 민중적인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리학적인 학자도 아니다.
원두표는 인조반정으로 출세한 사람이다. 효종 때 북벌의 책임자였다. 효종의 북벌정책은 효종에게도 백성들에게도 병자호란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오죽하면 송시열 까지도 북벌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럴 때 원두표는 북벌의 진두에 있었고 효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원두표는 효종으로부터 호피 갑옷을 하사받았고 어영대장 이완은 칼을 받았다. 행동대장 격인 이완을 앞세우고 북벌의 그날을 대비했것만 효종이 죽음으로서 막을 내리고 만다.
자 그러면 원두표는 어떻게 압구정과 인연을 맺었을까? 앞에서 말한 “불어난 강물에 뛰어들어 헤엄쳐 압구정으로 왔다.”이 기사가 원두표의 압구정 인연설의 다다. 내 기억으론....
원두표는 광해군의 정치가 점점 문란해지자 인조반정 모의에 협찬하였고, 반정이 성공한 뒤에는 그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전주부윤이 되고, 나주목사를 거쳐 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당시, 어영부사로서 남한산성을 지켰다. 1642년 형조판서로 승진되었으며, 뒤이어 강화부유수·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원두표는 서인 이었다. 조선이 붕당이후 오랫동안 서인, 남인, 노론으로 이어져 정권을 유지하면서 북인에게 30년 동안 정권을 넘겨준 바로 그시기에 북인들의 권력독점은 극심했다. 이후 북인들은 어디에도 명함을 내밀지 못했다. 나중에 반정의 동지이며 같은 서인인 김자점과의 정권다툼으로 분당하여 원당(原黨)의 영수가 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 호조판서로서 한때 파직 당하였고, 1651년에는 좌참찬·좌찬성을 지냈다. 1654년 병조판서가 되어 김육(金堉)이 적극 추진하려는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반대하였다.
이글의 빌미가 되는 부분이다. 대동법은 모든 세금을 쌀로 내는 법이다.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한 법인데 원두표는 극렬히 반대했다. 광해군때부터 만들어져 경기지역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던 터였다. 그것을 충청과 영호남으로 확대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민중적인 시각을 갖지 못했다.
이런 원두표가 압구정으로 헤엄을 쳐온 이유는 이렇다.
원두표의 아버지가 죽었다. 형제들이 의논하기를 유명한 풍수쟁이를 데려와야 하는데 가세가 기울어 돈이 없었다. 원두표가 꾀를 내었다. 힘이 장사인 원두표가 장안의 권력가를 들먹이며 풍수를 꾀어내었다. 산길로 접어들자 다짜고짜 상투를 틀어쥐고 나무에 매달아 놓고 죽인다며 협박했다. 그때 형과 아우가 나타나 원두표를 쫒아버리고 풍수를 구해준다. 그 보답으로 묫자리나 하나 알려주려고 하는데 두 사람의 관상이 정승은 안될 관상이라서 주저하다가 그냥 그 자리를 알려주었다. 장사를 치루는 날 풍수가 가서보니 자기를 나무에 매단 자가 거기 있는데 관상이 정승이 될 관상이라 무릅을 치며 기왕 이렇게 된 것 관상이나 봐주겠다고 나선다. 원두표는 이 자리에 묘를 쓰면 정승이 되기는 하나 여섯명을 죽이는 운명을 어길 수 없다고 한다.
원두표는 이후 어느 주막에서 밥을 먹는데 주모의 서비스가 엉망이라서 기분이 상해있었다. 어느 중이 들어오자 반색을하며 대접이 좋은데 가만히 보니 연놈이 사기를 치려고 작당을 하는게 아닌가? 원두표의 욱하는 정의감은 이 둘을 죽이고 만다. 분노조절이 안되는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그 후로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도망을 친다. 팔자가 그런지 도망을 치다가 당숙모와 붙어먹은 자를 또 죽인다. 죄는 점점 커지는 상황이다. 그렇게 여섯명을 죽이게 된다. 이 후 원두표는 포도청군사들에게 잡히게 된다. 어찌어찌 붙잡힌 원두표가 동작진에 다다랐을 때 홍수로 한강물이 불어나 뱃사공이 나루를 건너기를 주저한다. 그러나 워낙 흉악무도한 연쇄살인범을 어서 빨리 의금부로 압송하지 않을 수 없는 포도청 군사들이었다. 사공을 재촉해서 배를 띄우게 됐다. 배가 강 한가운데 들어섰는데 한사람이라도 움직이면 배가 뒤집어져 황토물에 쓰려갈 판인데 원두표는 이 기회를 노렸다. 오랏줄에 묶인 몸을 한강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물밑을 기어서 압구정으로 들어와 마루밑에 숨었다는 것이다. 이것만 봐도 원두표는 엄청난 체력의 소유자였다. 물론 이 이야기는 구비전승이다. 압구정 분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다. 필원잡기나 한국구비문학대계 등에 기록되어있다.
왜 압구정일까?
당시 인조반정을 모의하던 자들이 있었다. 마침 능양군( 仁祖) 을 위시하여 신경진,최명길,장유,심명세 등이 압구정에 모여 반정모의를 하던 중 병조판서를 맡을 사람이 없어 의논이 분분했다. 이때 원두표가 병조판서 나간다고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며 나타나자 능양군이 기골이 장함을 보고 그를 병조판서로 삼았다고 한다. 반정 계획이 완성되어 광해군 1 5 년 3 월 1 2 일 밤 세검정에 모였다 가 병마를 이끌고 신무문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문이 굳게 닫 있고 내응군이 나타나지 않다.
모두가 어찌할줄을 모르는데, 두표가 도끼를 구하여 신무문을 때려부수고 들어가 반정의 큰 공신이 되다. 이들의 반정모의는 광해군의 패륜이라기보다는 북인들의 권력독점에 있었다는 것이 옳다. 얼마나 당했으면 이후 서인에 남인세력이 동조하고 노론으로 이어지는 일당권력독점이 이어 졌을까.
압구정은 당시 쓰러져가는 정자였을 것이다. 중종당시 한강변 정자가 호화로워져 그것을 막으려 한강변 정자에 압박을 가하였다. 게다가 한명회도 부관참시 당하고 그 재산이 몰수되었으니 누구도 정자를 보호하지 않았고 모의를 하기에 좋은 장소였다. 원두표는 반정의 주역들과 이곳에서 모의를 하고 출세의 동아줄을 잡은 것이다.다. 그래서 궁문을 부수고 들어갈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반정 시 도끼로 궁문을 부수고 들어가 광해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도끼대감이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물을 거슬로 강바닥을 기어 왔다는 것은 민중들이 만들어 낸 말이다. 동작진에서 물에 뛰어든 행위와 압구정에서 반정을 모의한 것이 연결돼 버린 것이다.
이렇게 어렸을 때 들었던 원두표의 이야기가 우연잖게 내게로 온 것은 역사의 우연이다.
원두표의 묘는 한강을 굽어보는 여주 북내면에 있다. 시간 내서 한번 다녀오려 한다. 끝 歸廬齋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