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AFP 2011-11-25 (번역) 크메르의 세계
국제 법조계의 이단아, 캄보디아 국제재판에 등판
French lawyer takes centre stage in Cambodian co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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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AFP/ECCC, Mark Peters) 키우 삼판 피고인의 변호인인 자크 베르제스 변호사. |
기사작성 : Didier Lauras
(방콕) — 자크 베르제스(Jacques Verges) 변호사는 악명높은 테러리스트인 카를로스 더 자칼(Carlos the Jackal: 본명-일리치 라미레스 산체스[Ilich Ramírez Sánchez])에서 슬로보단 밀로세비치(Slobodan Milosevic) 전 유고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악명높은 인사들의 변론을 맡는 것으로 유명하다.
올해 86세인 베르제스 변호사는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의 학살용의자 한 사람을 자신의 이력서에 추가하고 있다. 이 늙은 프랑스인 변호사는 이번주에 진행된 '캄보디아 크메르루즈 국제법정'(ECCC)의 공판에서,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전직 크메르루주 정권 국가주석을 지낸 키우 삼판(Khieu Samphan, 80세) 피고인을 위해 변론을 맡았다.
키우 삼판 피고인은 유엔(UN)이 후원하는 이 재판의 '모두 진술'을 통해, 1975~1979년 사이의 크메르루주 정권기에 발생한 전쟁범죄, 반-인도주의 범죄, 학살 등 자신에게 적용된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검사들은 크메르루주 정권기에 고통을 받은 캄보디아의 악몽을 상세히 열거하는 데만도 이틀을 소모했다. 크메르루주 정권기에는 최대 200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기아와 고문, 처형 등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대한 베르제스 변호사의 변론은 짧고도 파격적이었고, 역사가 만들어지는 무대의 중앙을 아직도 그가 한껏 즐기고 있다는 점을 재확인시켜주었다. 그는 검사들의 주장을 "현실에 대한 환상적인 견해"라고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마치 캄보디아에서 발생한 일을 알렉산드르 뒤마(Alexandre Dumas)가 소설로 써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또 다른 반란자로서 나폴레옹(Napoleon)의 외무부장관이었던 탈레랑(Charles-Maurice de Talleyrand)은 '무엇이든 과도하면 헛된 것'이라고 했다. 당신(검사)이 말한 것은 과도하여, 따라서 헛된 것이다. 법정이 이 점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나는 여러분들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길 바란다. 감사하다." |
키가 작고 안경을 쓴 베르제스 변호사의 발언은 10분 정도였다. 그의 변론은 약간의 빈정댐과 실소를 억눌러야하는 것이지만, 아무도 변론을 원치 않는 의뢰인을 선택하기로 유명한 그에게는 전형적인 것이다.
베르제스는 1925년 태국에서 출생했고, 아버지는 프랑스령 레위니옹(Reunion: 아프리카 동부에 위치) 섬 출신이고 어머니는 베트남인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공산주의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이후에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알제리 민족해방전선'(Algerian National Liberation Front: FLN)을 지지했다. 이후 자신이 변호했던 알제리 독립투사 자밀라 부히레드(Djamila Bouhired: 1935년생)의 석방운동을 펼쳐, 그녀가 석방된 이후 두 사람은 결혼했다.
이후 베르제스는 명성을 얻는 변호사가 되었는데, 그가 유명해진 것은 동 시대의 가장 악명높은 인물들을 변호하면서 그의 이름이 신문에 헤드라인을 장식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나치 전범인 클라우스 바르비(Klaus Barbie), 베네수엘라의 혁명적인 테러리스트 카를로스 더 자칼, 이라크 부총리였던 타리크 아지즈(Tariq Aziz), 우고슬라비아 대통령이었던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등이 포함된다.
베르제스의 인생은 마치 한편의 소설같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 자신도 공개를 원치않는 숨겨진 장 하나가 있다. 그는 1970~1978년 사이에 아내와 아이들을 남겨두고 사라졌었다. 그는 이 시기를 자신의 삶의 '어두운 면'(the dark side: '달의 뒷편'이란 의미)이라 부른 적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추측들이 난무했다. 그러한 추측들 중 보다 유력한 설들로는 그가 콩고를 거쳐 팔레스타인 반군과 합류하여 그들을 도왔다는 것과, 그렇지 않다면 캄보디아에서 크메르루주들과 함께 했다는 것이다.
이번주 프놈펜의 법정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듬성듬성한 백발이 성성한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법률적 싸움을 위한 목소리를 가다듬기 전, 무언가 깊은 숙고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그는 법원 건물 바깥에서 법원 관리들과 함께 섞여 있었는데, 웃음을 띠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역시 크메르루주 외무부장관이었던 이엥 사리(Ieng Sary) 피고인의 변호인인 미카엘 카나바스(Michael Karnavas) 변호사는 베르제 변호사를 '거장'(virtuoso)이라고 부르면서, "86세인데도 그는 아직도 뱃속에 불길을 갖고 있었다. 그가 말한 바는 많은 것을 이끌어내기 위해 너무 많이 말해선 안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베르제스의 비판자들은 그를 과대망상병 환자라고 부른다. 그는 2008년에 자신이 쓴 프랑스 희곡 <연쇄 피고인>(Serial Defender) 에 주역으로 등장하여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베르제스는 피고인들이 어떤 혐의로 고발을 당했든 상관없이 자신의 의뢰인들을 대변했다. 베르제스는 자신의 연극 속에서 독일에 부역한 비시 프랑스 정권의 총리 삐에르 라발(Pierre Laval)을 변호했던 레지스탕스 출신의 알베르 노드(Albert Naud)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의 모든 의뢰인들을 우리는 변호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영문판 (번역) 크메르의 세계
[인물] 자크 베르제스 : '악마의 변호사'
Jacques Vergès
자크 베르제스(Jacques Vergès)는 1925년 3월 5일 시암(현재의 태국)의 우본 라차타니(Ubon Ratchathani) 도에서 태어난 프랑스-베트남 혼혈의 변호사이다.
그는 1950년대부터 처음에는 반-식민주의 공산주의자로 명성을 날렸고, 이후 1957~1962년 사이에 나중에 자신의 아내가 되는 알제리 독립투사 자밀라 부히레드(Djamila Bouhired: 1935년생)를 변호한 것을 비롯하여, 2008년에 크메르루주 국가주석을 역임한 키우 삼판의 변호를 맡기까지 다양한 유명 사건들의 변론을 맡아서 명성을 쌓았다.
그의 의뢰인 중에는 나치가 일으킨 홀로코스트 사건을 부인했던 로저 가라우디(Roger Garaudy), 나치 전범 클라우스 바르비(Klaus Barbie: 1987년),(주1) 카를로스 더 자칼(Carlos the Jackal)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국제적인 테러리스트 일리치 라미레스 산체스(Ilich Ramírez Sánchez: 1994년) 등, 좌파와 우파의 테러리스트, 전범, 군벌 등이 망라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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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25-03-05
시암의 우본 라차타니 도. |
거주지 |
프랑스 파리. |
국적 |
프랑스 |
학력 |
파리대학 법학사 |
직업 |
변호사 |
명성 |
유명 전범들의 변호 |
배우자 |
자밀라 부히레드 (Djamila Bouhired) |
부친 |
래이몽 베르제스 (Raymond Vergès) | |
베르제스는 2002년에 --- 비록 밀로세비치 자신은 어떤 정파로부터의 변론도 사양했지만, ---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세비치(Slobodan Milošević) 전 대통령의 변호인으로 나서기도 했다.
언론은 그에게 '악마의 변호사'(the Devil's advocate)란 별명을 붙여주었고, 그 스스로도 <눈부신 사생아>(The Brilliant Bastard)라는 자서전을 발표하거나 인터뷰를 통해 도발적인 답변을 하는 등 '악명높은' 대중적 이미지 형성에 기여하기도 했다. 베르제스는 만일 히틀러(Hitler)로부터 변론 의뢰가 들어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나는 심지어 부시(Bush: 전 미국 대통령)도 변론할 수 있다. 만일 그가 자신의 유죄를 호소하는 데 동의한다면 말이다"라고 대답했다.(주2)(주3)
(주1) BBC News, "1987: Nazi war criminal Klaus Barbie gets life", 1987-7-3.
(주2) Event occurs at 01:58:42 - Director : Barbet Schroeder, Interviewee:Jacques Vergès (2008-04-12) (Documentary). Avocat de la terreur, L' (DVD). Canal+ [fr]. http://www.imdb.com/title/tt1032854/. --- I can't stand a man being humiliated, even an enemy. For a lone man to be insulted by a lynch mob. I was asked: "Would you defend Hitler?" "I said I'd even defend Bush! "But only if he agrees to plead guilty."
(주3) Kenneth Turan, "Giving monsters a strong defense", Los Angeles Times, 2007-10-12. |
1. 인생 초년기
베르제스는 1925년 시암(태국)의 북동부 지방에서 태어났지만, 인도양의 레위니옹(Réunion) 섬에서 성장했다.(주4) 그의 아버지 래이몽 베르제(Raymond Vergès)는 프랑스의 외교관이었고, 어머니는 베트남인이었다.
1942년, 그는 아버지의 격려 속에서 영국의 리버풀(Liverpool)로 건너가 샤를르 드 골(Charles de Gaulle) 장군이 지휘하던 '자유 프랑스군'(Free French Forces)에 합류했고, 반-나치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가했다.(주5)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법학 공부를 위해 '파리대학'(University of Paris)에 진학했는데, 그의 쌍둥이 형인 뽈 베르제(Paul Vergès)는 '레위니옹 공산당'(Reunionese Communist Party) 지도자가 된 후 나중에 '유럽의회' 의원이 되었다.(주6)
1949년, 자크 베르제스는 '식민지 학생연합'(Association for Colonial Students: AEC) 회장이 되었고, 이 활동 중에 훗날 친구가 되는 폴 포트(Pol Pot)도 만났다.(주7) 1950년, 그의 공산당 멘토들의 요청으로 베르제는 체코의 프라하(Prague)로 가서 4년 동안 한 청년운동 조직을 이끌었다.(주8)
(주4) BBC News, "Jacques Verges: 'The Devil's advocate'", 2004-3-29.
(주5) Event occurs at 00:04:04 - Director:Barbet Schroeder, Interviewee:Jacques Vergès (2008-04-12) (Documentary). "Avocat de la terreur, L'" Avocat de la terreur, L' (DVD). --- "For France to disappear was intolerable to me. That's why I enlisted."[프랑스가 사라진다는 것은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등록했다.]
(주6) European Union, "MEP profile : Paul Vergès", 2007.
(주7) Daphne Merkin. "Speak No ‘Evil’". New York Times, 2007-10-21.
(주8) Boyd van Hoeij (2008). "review: L'avocat de la terreur (Terror's Advocate) (Rotterdam 2008)", european-films.net. --- "Not mentioned either are his controversial defence of Holocaust denier Roger Garaudy and his formative work in Prague in the 1950s – in the middle of the Cold War, though possible connections with secret services and many underground organisations in countries ranging from Germany to Israel and Algeria are hinted at and explored." |
2. 알제리 독립운동
베르제스는 프랑스로 돌아온 후 변호사가 되었고, 논란의 사건들을 수임하면서 빠르게 명성을 얻어나갔다. 알제리 독립운동 기간에, 그는 프랑스 정부가 테러리스트라고 기소한 많은 피고인들의 변론을 맡았다. 베르제는 프랑스에 대항하는 알제리의 무장 독립운동을, 1940년대에 나치 독일에 대항했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들에 비유했다.
베르제스는 알제리의 반-프랑스 독립운동 게릴라였던 자밀라 부히레드가 테러 혐의로 기소되자, 그녀의 변론을 맡으면서 국가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부히레드는 민간인들을 목표로 하여 한 카페를 날려버린 혐의였다.(주7) 이 사건은 그가 사용하는 여론전략의 선구적 사례에 속한다. 그는 기소행위 자체가 피고인을 동일하게 유린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주9) 부히레드는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비난을 받았지만, 베르제스의 노력으로 획득한 대중적인 여론의 압력 덕분에 사면을 받고 풀려났다.
부히레드가 베르제스와 결혼한지 여러 해가 지난 후, 베르제스는 이 무렵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두 사람은 두 자녀로 메리앙 베르제스(Meriem Vergès)와 리스 베르제스(Liess Vergès)를 두었다. 메리앙은 남편인 포우 하보우(Fouad Habboub)와 결혼하여 딸 파티마 누르 베르제-하보우(Fatima Nur Vergès-Habboub)를 두었다.(주10)
베르제스가 알제리인 의뢰인들을 변호하는 것을 막기 위한 시도가 진행되면서, 그는 '반정부 활동법' 위반으로 1960년에 징역 2개월에 처해지고 변호사 자격도 일시적으로 정지됐다.(주11)
3. 잃어버린 시간들
베르제스는 1970~1978년 사이에 어떠한 설명도 없이 대중들의 눈에서 사라졌다. 베르제스는 오늘날까지도 이 시기에 대한 논평을 거부하고 있는데, 독일 <스피겔>(Der Spiegel) 지와의 인터뷰에서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우리들의 현대적인 경찰 국가에서 거의 10년을 보낸 일은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고만 말했다.(주12)
베르제스는 1970년 2월 24일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였다. 이후 그의 유명한 아내인 자밀라는 물론 모든 인연을 잘라버린 채 사라졌는데, 가족들은 그가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주13)
이 시기의 그의 행방은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그의 여러 측근들은 베르제스가 이 시기에 캄보디아에서 크메르루주 정권과 함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폴 포트와 이엥 사리(주14)는 그같은 소문을 부인했다. 한편, 베르제스가 이 시기에 팔레스타인 단체의 일원들과 파리와 여러 아랍 국가들을 돌아다녔다는 주장도 존재했다.(주15)
(주12) "http://www.spiegel.de/international/world/0,1518,591943-2,00.html".
(주13) Event occurs at 00:50:29 - Director : Barbet Schroeder (2008-04-12) (Documentary). Avocat de la terreur, L' (DVD). --- "He was last seen on 24 February 1970, at an anti-colonial rally in Paris. He made a speech and vanished. After 3 months, Djamila Bouhired and his friends, were sure he was dead."
(주14) Event occurs at 00:52:56 - Director : Barbet Schroeder, Interviewee: Ieng Sary (2008-04-12) (Documentary). Avocat de la terreur, L' (DVD). --- "The Brilliant Bastard In that book are two passages I remember. It says ... that Jacques Vergès could have been in Cambodia. I remember that Pol Pot wrote in the margin: No."
(주15) Event occurs at 00:55:44 - Director : Barbet Schroeder, Interviewee:Pascal (2008-04-12) (Documentary). Avocat de la terreur, L' (DVD). --- "It was in May 1973, ... several politicians ... were meeting at Arafat's HQ. ... Arafat suddenly looked at [Abou Hassan Salameh PLO security chief] and asked: "Who is this Vergès? What is he?" Abou Hassan Salameh answered literally: "He's an important lawyer who defends the Palestinian cause." Arafat smiled and said: "Keep working with him." My codename was "Pascal". And Vergès? "Mansour"." |
4. 변론활동
베르제스는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로 복귀한 후, 레바논 출신의 테러리스트 게오르게스 이브라힘 압달라(Georges Ibrahim Abdallah)와 나치 전범인 클라우스 바르비에 대한 변론을 맡으면서 법률적 경력을 다시금 재개했다. 특히 바르비 사건에 대해 베르제스가 강력한 공세를 취하자, 프랑스는 바르비 사건만을 골라서 집중하면서, 반-인도주의 범죄 혐의로 지목된 다른 사건들은 편의상 기소유예를 시켰다.(주1)
1999년, 베르제스는 토고(Togo) 정부를 대신하여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주16)
2001년에는 차드(Chad)의 이드리스 데비(Idriss Déby) 대통령, 가봉(Gabon)의 오마르 봉고(Omar Bongo) 대통령, 콩고 공화국의 드니 사수-응게소(Denis Sassou-Nguesso) 국가수반을 대신하여 프랑소와-자비에르 베르샤프(François-Xavier Verschave)를 '외국 지도자에 대한 공격' 혐의로 고소했다. 베르샤프는 자신의 저서 <검은 침묵>(Noir silence)에서 '프라사프릭'(Françafrique: [역주] 프랑스의 대-아프리카 외교정책을 의미하는 전문용어)을 비난한 바 있다.(주17) 검찰청장은 이 사안이 어떻게 '불경죄'(lese majesty)에 해당하는지를 검토했다. 그렇지만 법원은 베르샤프에 대한 고발이 <유럽 인권협약>(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에 모순되는 것으로 보았고, 그에 따라 베르샤프는 무죄를 선고받았다.(주17)
2003년 3월 미국이 이끄는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정권은 붕괴했고, 사담 정권의 여러 지도자들도 체포됐다. 이 정권의 외무부장관이었던 타리크 아지즈(Tariq Aziz)는 베르제를 포함하여 이탈리아인 4명과 프랑스계 레바논 변호사 1명 등으로 변호인단을 구성했다.(주18) 2003년 말에 미국이 사담 후세인을 체포하자, 베르제스는 사담이 원한다면 변호를 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사담의 가족들은 베르제스를 변호인단에 선임하지 않았고, 그 대신에 최초에 고용했던 요르단계 변호인단을 선택하면서 칼리 알 둘레이미(Khalil al-Duleimi)를 단독 법률자문으로 선정했다.(주19)
2008년 4월, 전직 크메르루주 정권 국가수반이었던 키우 삼판은 캄보디아 국제법정(ECCC)에 최초로 출두했다. 베르제스가 그의 변론을 맡았는데, 키우 삼판은 캄보디아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결코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고 말했다.(주20)
(참고 기사) 크메르루주 키우 삼판의 변호인, '악마의 변호사' 자크 베르제스 사망 (BBC 2013-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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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주.. 복잡한 인물이네요...
대단합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셨습니까..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