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다빈치 <Leonardo da Vinci>
(1452.4.15~1519.5.2)
천재는 역사의 산물이다. 르네상스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활기에 찬 시대의 인물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과학자·기술자·사상가이다. 1945년 피렌체 근교의 빈치라는 마을의 구가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공증인 세르 피에로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농사꾼의 딸 카테리나이다.바자르에 의하면 어릴 때 수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학문을 배웠고,음악에는 신동인양 재주가 뛰어났고 ,더불어 그림 그리기를 즐겨하여 그의 부친의 친국인 베로키오의 공방(工房)에서 사사하면서 자연히 입문하게 된다. 그 후 20세 때 피렌체의 화가조합에 가입하였고,그 후에도 계속 베로키오의 공방에 남아 수련하다가 1478년에 독립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일찍부터 투철한 자연관찰에 의한 엄격한 사실기법(寫實技法)을 습득하고 있었다. 이 점은 1473년경의《성고(聖告)》 (우피치미술관) 및 그의 스승과의 공동작인 《그리스도의 세례》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30세경에는 피렌체보다도 넓은 활동무대를 찾아 로도비코스포르차가 지배하는 밀라노로 이주했다. 이 최초의 밀라노 체재는 그의 일생중 가장 길었던 17년 간의 정착시기이며, 그 동안 축적된 다양한 재능이 충분히 발휘된 시기였다. 《최후의 만찬》 등을 그려, 객관적 사실성과 정신적 내용을 훌륭하게 접목시킴으로서 다음 세기의 고전양식을 이미 달성하였다.
1500년 2월 만토바에서 공비(公妃) 이사벨라 데스테의 초상을 그린 후, 피렌체로 돌아온 후 여러 가지 일에 몰두한다, 그 후 보르지아의 실각으로 03년 3월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모나리자》의 제작에 착수하였다. 기계공학·식물학·지질학·造兵學·水理學·토목공학 등)의 연구 및 예술론과 인생론이 기록된 것으로, 유언에 따라 멜치에게 보내졌으나 현재는 그 일부(약 5,000장)가 서구 각지에 분산 소장되어 있다.다빈치의 과학론은 그가 실증적 경험주의와 냉철한 관찰적 사고법의 결정체로, 과학사상(科學史上)에 미친 영향은 크다. 그는 전분야에 지칠 줄 모르는 연구와 광범위한 업적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된다.
작품 세계

Self Portrait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자화상' 1512년경, 트리노도서관 소장)
소묘단계에서 끝난 조각 《트리푸르치오장군 기마상》 등을 추가해도 그의 예술상의 유작(遺作)은 많지 않으나, 미술역사상에 남긴 발자취는 매우 크다. 즉, 회화역사상에서는 원근법 및 해부학(解剖學)의 연구로 콰트로첸토(15세기)의 정밀한 자연묘사를 다시금 추진시켜, 화면의 통일구성 및 윤곽소실묘법(輪郭消失描法)에 의한 입체표현·명암법(明暗法)을 안출해 냄으로써 우미(優美)의 표현을 의도했으며, 조각에서는 남겨 놓은 많은 소묘 작품으로 판단컨대 상(像)은 정지상(靜止像)이 아니고 인마(人馬)의 약동하는 모습을 추구했고, 거대한 브론즈(동상)작품은 역학적으로 만들기 어려워서 2점 모두 미완으로 끝냈다. 건축의 일에서도, 역시 그의 설계에 의한 건조물은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집중식(集中式)교회 건축에 특수한 흥미를 품고 있어서, 세부(細部)의 역학적 구조를 보여주는 습작(習作)을 많이 남겼다.
The Last Supper
그의 특색인 깊은 정신적 내용의 객관적 표현은, 그의 놀라운 사실적 표현기교의 구사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사실상 15세기 르네상스 화가들의 사실기법을 집대성하여, 명암에 의한 입체감과 공간의 표현에 성공하였다. 점차 15세기적인 요소를 극복하고, 이 주관과 객관의 조화의 고전적 예술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Virgin of the Rocks (`암굴의 성모' 1483 ~ 86년, 파리 루브르미술관 소장)
그는 만년에 이르러 과학적 관심을 갖고, 수많은 소묘를 남겼다. 인체해부를 묘사한 그림들은 인체묘사와 의학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과학적 연구는 수학·물리·천문·식물·해부·지리·토목·기계 등 다방면에 이르며, 이들에 관한 수기(手記)나 인생론·회화론·과학론 등이 많이 남아 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과학으로 분류하는 해부학,기체역학,동물학 등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연구결과는 19세기 말에 들어서 주목을 받으면서, 다시 그의 과학적인 천재성으로서 조명되고 있다. 현재 그의 기록이 23권의 책으로 남아 있다.
Study for Adoration of the Magi
르네상스의 가장 휼륭한 업적, 즉 원근법과 자연에의 과학적인 접근, 인간신체의 해부학적 구조, 이에 따른 수학적 비율 등이 그에 의해 완벽한 완성에 이르게 되었다. 그의 명성은 몇 점의 뛰어난 작품들에서 비롯하는데,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동굴의 성모〉 〈동방박사의 예배〉 등이 그러하다. 그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지구상에 생존했던 가장 경이로운 천재 중 하나다. 1517년 프랑수아 1세의 초빙으로 프랑스의 보아주에 가서 건축·운하 공사에 종사하다가 죽었다.
Study for The Virgin of the Rocks
14세 때 화가·조각가의 공방(工房)에 도제(徒弟)로 들어가 미술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30세 때 밀라노의 지배자에게 자천장(自薦狀)을 제출하고 밀라노로 나갔다. 자천장에는, 모든 종류의 토목공사·축성(築城)·병기의 설계 및 제조에 관해 스스로의 다방면의 재능을 열거한 뒤, 평화로운 때에는 회화(繪畵)·석조조각(石造彫刻)·주조조각(鑄造彫刻)의 기술에 능란함을 첨가하였다.
The Battle of Anghiari (`안기아리의 전투' 1503년, 파리 루브르미술관 소장)
근 20년간의 밀라노체재 뒤, 프랑스군의 밀라노침공을 기회로 밀라노를 떠나 만토바에서 공비(公妃)의 초상을 그렸고, 베네치아에 들렀다가 피렌체로 되돌아갔다. 1502년의 여름 동안, 체자레보르지아의 군사토목기사로서 로마냐지방에서 일했다. 보르지아의 실각 뒤 피렌체로 되돌아갔는데, 1506년 밀라노 주재의 프랑스총독 샤를당부아즈의 초빙으로 다시 밀라노로 출동, 루이 12세의 궁정화가 겸 기술자로서 6년간 일했다. 그리고 13년, 교황 레오 10세의 아우의 초청으로 로마로 옮겼는데, 16년에는 프랑수아 1세의 초빙으로 향발, 17년에는 앙부아즈왕성 근교 크루성관(城館)에 입주한 뒤, 갖가지 연구를 했는데, 그는 여기서 67세로 죽을 때까지 평생을 보냈다.
Study of the Heads of an Old Man & a Youth
회화작품 중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것은 많지 않다. 어렸을 때 있던 공방시절(제 1 차피렌체시절)에는 스승 및 동문과의 합동작품인 《그리스도의 세례(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 소장)》 《지네브라데벤치의 초상(워싱턴의 내셔널갤러리 소장)》 《수태고지(受胎苦知;우피치와 루브르미술관 소장)》와, 미완품인 《3박사(三博士)의 예배(우피치 소장)》 《성(聖)히에로니무스(바티칸미술관 소장)》가 있다.
The Madonna of the Carnation
제 1 차밀라노 시절에는 산타마리아델레그라체성당 식당의 《최후의 만찬》 외에 성프란체스코교회 무원죄회태예배당(無原罪懷胎禮拜堂)을 위한 제단화 《암굴(岩窟)의 성모(루브르미술관 소장)》와, 소묘만이 현존(現存)하는 조각 《스폴차기마상(騎馬像)》이 만들어졌다. 제 2 차피렌체 체재중에는 미켈란젤로와 경쟁적으로 만들게 되는 판이었던 팔라초베쿄 내의 대벽화 《안기아리의 전투》를 그렸고, 그 뒤는 밀라노·피렌체·로마 등을 돌아다니는 동안에 《모나리자(루브르 소장)》를 그렸고, 제자 프레디스의 《암굴의 성모(런던 내셔널갤러리)》를 지도했고, 그 뒤 《성안나와 성모자》 《세례자 요한(모두 루브르 소장)》을 그렸다.
Adoration of the Magi (`3왕예배' 1481 ~ 82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소장)`
에스키스는 200매나 되는 해부도(解剖圖) 외에, 기계공학·수력학·축성·비상(飛翔;비행기) 등에 관한 고안·연구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늘 손수 만든 소책자를 가지고 다니며 가끔씩 일어나는 단상(斷想)이나 관찰을 기록했고, 그림과 문절(文節)을 혼합해 기록했다. 왼손잡이였던 그는, 그런 수첩에 기록할 때는 문자를 전부 뒤집어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해서 배열했다.
Benois Madonna
그래서 거울에 비침으로써 비로소 정상적(正常的)인 글씨체가 되었으므로 경자(鏡字)라 불렸는데, 이는 연구의 비밀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가 왼손잡이였기 때문이다. 이런 수고류(手稿類) 중에서 회화의 이론과 실기에 관한 부분을 꺼내서 제자가 레오나르도의 《회화론(繪畵論)》 1권을 편집한 일은 유명하며, 그 원본은 바티칸의 교황청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레오나르도와 같은 시대 사람에 의한 전기(傳記)에는 단편적(斷片的)인 것과, 조르조 바자리에 의한 것의 2종류가 있다.
Drawing of an Assault Chariot with Scythes
레오나르도의 수고에는 회화·조각·건축·천문·기상·물리·수학·지리·지질·수력·해부·생리·식물·동물·토목공사·하천운하화(河川運河化) 등을 비롯하여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이동시키는 장치, 관개용(灌漑用) 배수장치, 병기, 자동인형, 비행을 위한 장치 등 많은 분야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
Virgin & Child with St. Anne & St. John the Baptist
그리고 이 과정은 충분한 인식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라고 쓰고 있다. 이것이 그의 사물에 대한 자세이다. 또 그림의 수법을 수련하는 과정에서는 수학이 필요해졌고, 새가 나는 방법에 관한 연구에서는 무게와 밀도의 관계, 풍압이 날개에 미치는 힘의 영향에 관해 실험했으며, 낙하산 같은 것까지도 고안해냈다.
Litta Madonna
그는 또 <그저 상상만으로써 자연과 인간 사이의 통역자(通譯者)가 되려고 한 예술가들을 믿지 말라>고 했고, <실험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로써 이론을 검증(檢證)하는 일>이야말로 일반법칙을 세우기 위해서는 중요하다고 갈파했다.
`두개골의 해부학적 습작' 1489년경, 윈저성 주립도서관 소장
Portrait of a Musician
그는 수고에 씌어 있는 사항의 전체에 걸쳐서 실험을 하였거나 실제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나,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위와 같은 점을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세례' 1472 ~ 75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소장
[The Annunciation]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지네브라 벤치의 초상
(Portrait of Ginerva de'Benci)]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74-76년. 목판, 유채, 워싱턴, 국립화랑
이 그림은 1474년경 그려진 것으로 지네브라 벤치가
1474년 1월 15일 17세 나이로 결혼하였을 때 그 기념으로 그린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의 만년의 여성 그림에 나타난 미소가 보이지 않고,
딱딱한 표정으로 있으나, 레오나르도의 젊은 시절의 필치에 의해서
대상 인물에 깊은 감정이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구도가 가슴부터 윗부분을 잡았기 때문에
약간 단조로운 느낌을 주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그림의 뒤에는 종려와 월계수, 그리고 소나무가 그려져 있고
[아름다움은 덕을 장식한다.]라는 글씨가 작품 뒤쪽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지네브라가 덕을 갖추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Portrait of Cecilia Gallarani]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모나리자(The Mona Lisa)]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53*77cm
1503-06년. 목판, 유채
파리, 루브르 미술관
루브르 미술관의 수많은 걸작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모델의 이름은 1479년생의'모나리자 게라르디'이며
지오콘도의 아내가 된후 지오콘다라고 불렸으며
음악을 아주 좋아했던 관계로 레오나르도가 그녀의
초상화를 제작할 동안 가수와 연주자를 동원하여
그녀의 미묘한 미소를 항상 유지시켰다고 한다. 미완성이다.
[세레자 요한
(Saint John the Baptist)]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513-1516년, 목판 유채
파리, 루브르 미술관
제작 연대는 1510년부터 1516년 사이로
이미 레오나르도가 화가로서의 일을 포기하고 해부학이나 지질학 등
과학적인 일에 몰두하였을 때이다.
성요한의 얼굴에는 어느 의미의, 성적(性的) 의미를 내포한 미소를 담고 있다.
반은 남성이고 반은 여성이며,
신적도 아니고 동물적도 아닌 미소가 담겨있는 것은
교묘한 레오나르도 자신의 의도를 잘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 상이 천사상에서 유래하는 것은 그 성격이 잘 설명하고 있다.
즉 천사는 중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Leda]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이 작품은 화고(畵稿)의 형식으로 존재하여 원화는 분실되었다고 생각된다.
제작 연대는 1498년부터 1499년 사이이다.
레오나르도의 <레다>에 라파엘로의 모사 스케치가 있지만,
그것은 1503년 이후에 피렌체에서 그린 것으로서
적어도 그 이전에 그려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레오나르도의 머리 형태에 대한 추구는 독특한 것이 있어서
밀라노 시대의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 <레다> 화고를 밀라노 함락 후 피렌체에 가지고 갈 때
죠르죠네에게도 보일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 때문에 죠르죠네의 같은 주제의 그림이 제작되었으리라 추측된다.
따라서 이 그림은 '아쎄의 방'을 그렸을 무렵,
밀라노 시대 최후 시기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성안나와 마리아와 아기예수
(Virgin and Child with St Anne)]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29*160cm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의 몇 점 안되는 완성작품의 하나이다.
구석구석까지 여유있는 레오나르도의 필치가 느껴 진다.
1501년부터 1591년까지 단속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성 안나와 성모자의 그림은 거의 대부분의 이탈리아 화가들이 그린 주제로서
그의 표현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마사치오 형과 같이 성 안나가 성모의 뒤쪽에 앉아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오소리의 그림과 같이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이 그림은 전자의 예이지만 제작과 정에서는
여러가지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성 안나의 신앙은 15세기에 이루어져
마리아의 어머니로서 모든 이에게 사랑을 받았다.

동방박사의 경배, 1481-82

리타의 성모자, 1490-1

암굴의 성모, 1508

바커스 신

말의 연구, 14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