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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지 제4권하 / 경상도(慶尙道)
합천군(陜川郡)
동쪽으로 초계군(草溪郡) 경계까지 17리이다. 서쪽으로 거창현(居昌縣) 경계까지 50리이다. 남쪽으로 삼가현(三嘉縣) 경계까지 24리이다. 북쪽으로 고령현(高靈縣) 경계까지 26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732리이다.
한전(旱田)
수전(水田)
건치연혁(建置沿革)
본래 신라 대량주군(大良州郡)인데, 양(良)자는 ‘야(耶)’로도 쓰고, 또 ‘야(野)’로도 쓴다. 경덕왕 때 고쳐 강양군(江陽郡)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때 승격하여 합주(陜州)로 삼았다. 현종이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있다가 궐에 들어가 사위(嗣位)하니 외향(外鄕)이므로 다시 승격한 것이다. 본조 태종 때 고쳐 합천군으로 삼았다. 관장하는 면은 - 원문 2, 3자 결락 - 개이다.
관원
군수(郡守), 훈도(訓導) 각 1인이다.
군명(郡名)
대량(大良) : 강양(江陽), 합주(陜州)
형승(形勝)
북쪽으로 성산(星山 성주(星州))에 통하고, 남쪽으로 진산(晉山 진주(晉州))에 닿는다. 본조 안노생(安魯生)의 기문
안팎이 시내와 산이다. 본조 하륜(河崙)의〈징심루기(澄心樓記)〉에 “안팎이 시내와 산이라서 산에 올라 관망하는 아름다움을 갖추었다.” 하였다.
뭇 산들이 공읍(拱揖)하고 있다. 본조 강희맹(姜希孟)의 기문
풍속(風俗)
검소하고 소탈함을 숭상한다.
산천(山川)
북산(北山) : 군 북쪽 1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사두산(蛇頭山) : 군 서쪽 5리에 있다. 일명 송악(松嶽)이라고 한다.
옥산(玉山) 객관 : 서쪽 모퉁이에 있는 작은 산이다. 세속에서 현종이 거주했던 곳이므로 지금까지 궁터로 부른다고 한다.
가야산(伽倻山) : 일명 우두산(牛頭山)이라고 한다. 야로폐현(冶爐廢縣) 북쪽 30리에 있다. 서쪽으로 비스듬히 뻗어 월류봉(月留峯)이 된
다. 신라 말에 최치원(崔致遠)이 나라가 장차 망할 줄을 알고 가족을 이끌고 이 산에 은거하였다. 고려 이색(李穡)의 시에
“가야산은 경관이 천하에 빼어나고, 고운은 천년 세월에 짝할 이 드물다네.〔伽倻之山最奇特, 千載孤雲罕儔匹.〕”라고
하였다.
가점산(可岾山) : 군 북쪽 15리에 있다. 산 동쪽은 고령현 경계이다.
미숭산(美崇山) : 야로폐현 동쪽에 있다. 고령현에도 보인다.
두모산(豆毛山) : 오두산(烏頭山) 북쪽에 있다.
오두산(烏頭山) : 야로폐현 남쪽 18리에 있다.
지을현(知乙峴) : 군 동쪽 35리, 고령현과의 경계에 있다. 험하고 막혀 있다.
두리현(頭里峴) : 군 서북쪽 30리에 있다.
아현(阿峴) : 군 남쪽 25리, 삼가현과의 경계에 있다.
마현(馬峴) : 군 북쪽 26리에 있다.
갈점(葛岾) : 군 동쪽 27리에 있다.
홍류동(紅流洞) : 가야산 남쪽에 있다. 골짜기가 매우 깊고 암석이 기이하며 폭포수가 쏟아져 세차게 부딪치며 흐른다. 매년 봄철이면 바위
틈에 핀 꽃들이 물줄기를 따라 흘러나오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골 입구에 무릉교(武陵橋)가 있고 다리를 건너 5, 6리
를 가면 최치원이 시를 지어 써 놓은 바위가 있다. 또 - 원문 1, 2자 결락 - 리를 가면 해인사(海印寺)가 있다.
○ 본조 김종직(金宗直)의 시에,
아홉 굽이 폭포수가 성난 우레처럼 부딪치니 / 九曲飛流激怒雷
붉은 꽃잎 무수히 떨어져 물결 따라 오누나 / 落紅無數逐波來
반평생 동안 도원 가는 길 몰랐는데 / 半生不識桃源路
오늘에는 응당 시샘하는 경관 만나리 / 今日應遭物色猜
하였다.
견천(犬遷) : 군 동쪽 13리에 있다. 벼랑을 따라 잔도(棧道)를 냈는데, 위로는 절벽을 지고 있고 아래로는 깊은 못을 굽어보며, 꾸불꾸불 굽
이진 길이 2, 3리쯤 된다.
영수(瀯水) : 일명 남강(南江)이라고 한다. 군 남쪽 5리에 있다. 원류는 덕유산(德裕山)에서 나오니, 바로 거창현 영수의 하류로 군 서쪽 지
경에 들어간다. 또 거창 가조천(加祚川)과 합하고 모여서 부자연(父子淵)이 되고, 군 남쪽을 지나 초계군 경계에 이르러 황둔
진(黃芚津)이 되고,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洛東江)에 들어간다.
징심천(澄心川) : 징심루(澄心樓) 앞에 있다. 원류는 둘인데, 하나는 군 북쪽 상상곡(上上谷)에서 나오고 하나는 두리현에서 나와 군 서쪽
10리에서 합해진 다음 군 서남쪽을 감싸고 동쪽으로 흘러 영수에 들어간다.
야천(倻川) : 야로폐현에 있다. 원류는 둘인데, 하나는 바로 홍류동 물이고 하나는 거창현 우두산(牛頭山) 동쪽에서 나와 야로현(冶爐縣 야
로폐현) 북쪽 5리에서 합해진 다음 동쪽으로 흘러 고령현 경계에 들어가 용담천(龍潭川)이 된다.
부자연(父子淵) : 군 서쪽 45리에 있다. 영수가 여기에 이르러 깊이 고여 못이 되었다. 세속에서 전하기를 “신라 때 장성(長城)을 쌓는 역사
에 동원된 한 군졸이 오랜 부역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그 아버지와 못가에서 마주쳐 서로 부여잡고 슬프게 울부짖다가 함
께물에 빠져 죽었으므로 그대로 부자연이라고 불렀다.”라고 한다.
둔덕탄(屯德灘) : 군 서쪽 15리에 있으니, 바로 영수 여울이다.
음풍뢰(吟風瀨) : 자필암(泚筆巖) 모두 홍류동에 있다. 이 지역은 많은 산봉우리가 사방으로 솟아 있고 세찬 물살이 바람을 뿜어 대어 그 소
리가 마치 전쟁터에서 말달리는 소리 같다. 큰 바위가 시냇가에 있는데 이끼가 끼지 않고 숫돌에 간 것처럼 매끄러워 붓으
로 글씨를 써도 될 듯하다. 본조 강희맹이 일찍이 남쪽을 유람하다가 이곳에 이르러 말하기를 “이러한 승지(勝地)에 아직
까지 그 이름이 없는가.” 하고, 그 물 이름을 음풍뢰, 바위 이름을 자필암이라고 하였다.
황계폭포(黃溪瀑布) 군 서쪽 30리에 있다. 아래에 깊은 못이 있다.
토산(土産)
철(鐵), 야로현 심묘리(深妙里)에서 난다. 석회(石灰), 종이〔紙〕, 먹〔墨〕, 옻〔漆〕, 꿀〔蜂蜜〕, 황랍(黃蠟), 감〔柹〕, 잣〔海松
子〕, 오미자(五味子), 인삼(人蔘), 복령(茯苓), 송이버섯〔松蕈〕, 석이버섯〔石蕈〕, 산무애뱀〔白花蛇〕, 은구어(銀口魚 은
어)
학교(學校)
향교(鄕校) : 진산(鎭山) 북산(北山) 기슭 1리쯤에 있다. 예전에는 군 북쪽 3리에 있었는데, 군수 황린(黃璘)이 이곳에 옮겨 지었다.
궁실(宮室)
객관(客館)
징심루(澄心樓) : 객관 남쪽에 있다. 본조 초에 지군사(知郡事) 윤목(尹穆)이 세우고 하륜이 명명하였다. 연을 심은 못이 있으니 군자지
郡子池)라고 이름하였다. 안노생의 기문이 있다.
함벽루(涵碧樓) : 군 남쪽 4리, 영수(瀯水) 위에 있다. 절벽에 의지하여 긴 내를 굽어보고 있으며, 동쪽에는 사방으로 통하는 큰길이 있고
앞쪽에는 나루터가 가까이에 있다. ○ 고려 안진(安震)의 기문은 다음과 같다.
“내가 15세가 되어 학문을 시작하고부터 세상을 모른 지가 10여 년이었는데, 지난 정사년(1317, 충숙왕 4) 가을에 중
국으로 과거에 응시하러 가면서 도중에 평양에 들러 처음 부벽루(浮碧樓)를 보게 되었다.
그 후 5년 뒤에 진양(晉陽 진주)의 수령으로 나와서 또 장원루(壯元樓)에 올랐는데, 평생 본 남북의 절경 가운데 이 두 누
각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혼자 생각하였다. 그러다 작년에 나랏일 때문에 강양(江陽 합천)을 가려는 도중에 한 누각을 보
게 되었는데, 처마와 기둥이 춤추며 나는 듯하고 단청이 현란하여 마치 봉(鳳)이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내가 객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저 누각은 어느 때에 지었는가?’ 하니,
객이 답하기를 ‘지금 태수가 새로 지은 것이다.’ 하였다.
내가 듣고 기쁜 마음에 바로 배를 띄워 강을 건너서
난간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그 강산의 면모와 형세가 자못 전날의 두 누각보다 못하지 않았고 단청의 기이함과 교묘함은 더 훌륭하였다.
아, 이 고을이 생긴 이래로 이 강산이 있었으니, 옛날 영웅호걸 가운데 이 고을에 수령으로 온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도 푸른 석벽을 파고 맑은 시내에 임하여 누각을 세운 자는 없었다.
오직 지금 군이 비로소 해냈으니 이 어찌 하늘이 만든 것을 땅이 감추어 두었다가 적임자에게 준 것이 아니겠는가.
이에 잔을 들고 노래하였으니,
그 노래에,
흰 구름이 나는데 산은 푸르르고 / 白雲飛兮山蒼蒼
밝은 달 떴는데 물은 넘실대누나 / 明月出兮水泱泱
누각 위의 사시 풍경 다 보아도 부족하거니 / 樓上四時看不足
아득한 이내 회포여, 하늘 저편을 그리도다 / 緲緲予懷天一方
산이 무너지고 물 또한 말라 버린들 / 山其崩兮水亦渴
사또의 은덕은 잊을 수 없으리라 / 使君之德不可忘
하였다.
객이 나에게 말하기를 ‘이 노래를 써서 이 누각의 기문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 하므로 나는 곧 붓을 가져다 그것을 썼다. 누
각을 함벽루라고 칭한 이는 누구인가? 태수가 직접 이름한 것이다. 태수는 누구인가? 여러 대의 공신인 상락공(上洛公)의 맏
아드님 김군(金君)이다.”
매월루(梅月樓) : 객관 동쪽에 있다. 본조 성종 때 군수 김영추(金永錘)가 세웠는데, 앞에 네모진 못을 파고 연을 심었다.
김일손(金馹孫)의 기문이 있다.
○ 본조 조위(曺偉)의 시에,
강과 산은 마치 그림 속에 펼쳐진 듯하고 / 江山如在畫中開
굽은 난간 아로새긴 난간엔 티끌 한 점 없네 / 曲檻雕欄絶點埃
달을 향해 둥글고 이지러짐 따지지 말라 / 莫向纖阿問圓缺
이미 성긴 그림자가 그윽한 향기 가져왔으니 / 已將疎影暗香來
하였다.
봉수(烽燧)
미숭산 봉수(美崇山烽燧) : 남쪽으로 초계군 미타산(彌陀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고령현 망산(望山)에 응한다.
소현 봉수(所峴烽燧) : 군 서쪽 49리에 있다. 남쪽으로 삼가현 금성산(金城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거창현 금귀산(金貴山)에 응한다.
우역(郵驛)
금양역(金陽驛) : 군 북쪽 7리에 있다.
권빈역(勸賓驛) : 군 서쪽 35리에 있다.
남강원(南江院) : 군 남쪽 5리에 있다.
정양원(正陽院) : 군 남쪽 6리에 있다.
지현원(知峴院) : 군 북쪽 19리에 있다.
아현원(阿峴院) : 군 남쪽 22리에 있다.
두현원(頭峴院) : 군 서쪽 22리에 있다.
관량(關梁)
무릉교(武陵橋) : 홍류동 입구에 있다.
○ 본조 김종직의 시에,
그림 같은 무지개다리 놀란 물결에 잠겼는데 / 虹橋如畫蘸驚波
다리 위에 오가는 이들 조심스레 지나네만 / 橋上遊人側足過
옷을 걷고 건너갈 나를 그대들은 웃지 마 / 소我欲揭之君莫笑
고운 선생이 어찌 위태로운 길 밟으시었던가 / 孤雲寧蹈畏途麽
하였다.
사묘(祠廟)
사직단(社稷壇) :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군 동쪽 8리에 있다.
여단(厲壇) : 군 북쪽에 있다.
사찰(寺刹)
해인사(海印寺) : 가야산 서쪽에 있다. 신라 애장왕(哀莊王)이 지었다. 신라의 승려 순응(順應), 이정(利貞), 희랑(希朗)의 유상(遺像)이
있다. 고려 때 《대장경》을 판각하고 서각(書閣)을 지어 보관하였으며, 역대의 실록도 이 절에 아울러 보관하였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가야산은 형세가 천하에 으뜸이고 지덕(地德 땅의 은택)은 우리나라에서 으뜸이라 참으로 정밀
하게 수련할 만한 땅이다.” 하였다. 또 최치원의 서암(書巖)과 기각(棋閣)이 있다.
○ 고려 염정수(廉廷秀)의 시(詩)에,
맑게 갠 봄날 산사에 한 점 티끌도 없으니 / 山寺春晴絶點埃
도심(道心)과 시상(詩想) 끝없어 추스르기 어렵네 / 道情詩思渺難裁
골짜기 안에 꽃 빛은 비단을 편 듯하고 / 洞中花色如鋪錦
다리 아래 시내 소린 우레가 지나는 듯 / 橋下溪聲似轉雷
이끼 덮인 기각에는 옛 글자 남아 있고 / 棋閣苔封餘古字
월봉의 노송 옆엔 거친 대 하나 있네 / 月峯松老有荒臺
고운 선생 떠난 지 지금 어언 천년 세월인데 / 孤雲一去今千載
선인의 자취 마주하고 술 마시기 부끄러워라 / 羞對仙蹤倒酒盃
하였다.
본조 소경왕(昭敬王 선조) 24년(1591)에 절의 불상과 경판(經板)에 땀이 나서 줄줄 흘렀고, 효종 10년(1659)에도 그
런 일이 있었다.
청량사(淸涼寺) : 월류봉(月留峯) 아래에 있다. 최치원이 일찍이 이곳에서 노닐었다.
용계사(龍溪寺) : 가점산에 있다.
안계사(安溪寺) : 사두산 북쪽에 있다.
월광사(月光寺) : 야로현 북쪽 5리에 있다. 세상에서 대가야의 태자 월광(月光)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내원사(內院寺) : 해인사 북쪽 5리에 있다. 절에 조현당(釣賢堂), 나월헌(蘿月軒), 득검지(得劍池)가 있는데, 득검지는 승려 옥명(玉明)이
절을 지을 때 못을 파다가 옛 검을 얻었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소리암(蘇利菴) : 가야산에 있다.
고적(古蹟)
야로폐현(冶爐廢縣) : 군 북쪽 30리에 있다. 본래 신라 적화현(赤火縣)인데, 경덕왕 때 야로로 고치고 고령군 영현으로 삼았다.
현종 때 편입시켰다.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미숭산성(美崇山城) : 돌로 쌓은 고성(古城)이 있다. 둘레가 1643자이고, 안에 못 1개와 우물 6개가 있다.
갈점성(葛岾城) : 돌로 쌓은 고성이 있다. 둘레가 2219자이다.
제시석(題詩石) : 가야산 해인사의 골짜기를 홍류동이라 하는데, 골 입구에 들어가서 무릉교를 건너 절 쪽으로 5, 6리쯤 가면 최치원이 시
를 지어 써넣은 돌이 있다.
그 시(詩)에,
층층 바위 사이로 미친 듯 내뿜고 첩첩 산을 울리니 / 狂噴疊石吼重巒
사람 말소리는 지척 간에도 분간하기 어려워라 / 人語難分咫尺間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까 항상 두려워 / 常恐是非聲到耳
일부러 계곡물로 산을 온통 두르게 했네 / 故敎流水盡籠山
하였다.
후인들이 이로 인하여 그 돌을 이름하여 치원대(致遠臺)라고 하였다.
독서당(讀書堂) : 세상에서 전하기를 “최치원이 가야산에 은거하다가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집을 나가서 갓과 신을 숲 속에 버려두었는
데,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해인사 승려가 그날을 기일로 삼아 명복을 빌고 유상(遺像)을 독서당에 남겨 두었다.” 한다.
당의 유지가 절 서쪽에 있다.
거덕사(擧德寺) : 유지가 해인사 서쪽 5리에 있다. 최치원이 지은〈석순응전(釋順應傳)〉에 “그 서쪽 산의 두 줄기 시내가 서로 만나는 지
점의 물가에 거덕사라는 절이 있으니, 옛날 대가야의 태자 월광이 인연을 맺은 곳이다. …… ” 하였다.
반야사(般若寺) : 가야산 아래에 있다. 절이 폐사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고려 추밀원 지주사 김부일(金富佾)이 비문을 지은 원경화상(元景
和尙)의 비가 있다.
명환(名宦)
신라
종정(宗貞) : 무열왕 8년(661)에 압독주(押督州)를 대야(大耶)에 옮기고 아찬(阿飡) 종정을 도독으로 삼았다.
[고려]
임원후(任元厚) : 인종조에 지합주사(知陜州事)가 되었는데, 근검하고 청백하였으며 은혜로운 정사가 백성들에게 미쳤다.
전원균(田元均) : 지합주사가 되었는데 청렴하여 뇌물을 받지 않았고, 잔약한 백성을 돌보면서는 굽어살피고 불쌍히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
다. 그러나 교활한 아전을 검속하면서는 매우 엄하게 죄악을 가려 다스리고 은폐된 간악한 행위를 귀신처럼 적발해 내었으
므로 온 고을에서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옥사를 처결하면서는 더욱 자세히 살폈으므로 비록 형장을 받은 자들이라도 모두 “전 사또가 처결한 것이다.”라고 하였
다.
이조년(李兆年) : 충렬왕조에 예빈시 내급사(禮賓寺內給事)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와 지합주사가 되었다.
[본조]
권진(權軫) : 지합천군사(知陜川郡事)가 되었다. 훌륭한 정사를 행하여서 백성들이 노래 지어 부르기를 “권진 이전에도 권진 같은 원님 없
었고, 권진 이후에도 권진 같은 원님 없으리라.〔權軫之前無權軫, 權軫之後亦無權軫.〕” 하였다.
조오(趙峿) : 합천 군수가 되었는데, 비할 데 없이 청렴하고 지절(志節)이 있었다. 일찍이 군에 재임할 때 왕래하는 아들과 사위, 노복들에
게 모두 개인 양식을 가져오게 하였고, 또 군에서 은구어(銀口魚)가 산출되었는데 처자에게는 먹지 못하도록 하였다.
조상치(曺尙治) : 모순(牟恂) 모두 지합천군사가 되었다.
권득경(權得經) : 정이우(鄭而虞) 모두 합천 군수가 되었다.
유호인(兪好仁) : 강정왕조(康靖王朝 성종조)에 사헌부 장령이 되었는데, 어버이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외직으로 나와 합천 군수
가 되었다. 재임 중에 죽었다.
이증영(李增榮) : 공헌왕조(恭憲王朝 명종조)에 합천 군수가 되었다. 유애비(遺愛碑)가 남아 있으니, 조식(曺植)이 비문을 지었다.
유우(流寓)
최치원(崔致遠) : 신라 경주 사람이다. 당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진성왕 때 시무(時務) 12조(條)를 진달하니 왕이 아찬(阿飡)으로 삼았
다. 당시 세상이 혼란스러웠으므로 때를 잘못 만난 데 대해 스스로 상심하여 더 이상 관직에 나갈 뜻이 없었다.
이에 산수 간을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며 완상하고 시를 읊었다. 뒤에 고려 태조가 장차 나라를 일으키려는 것을 알고
글을 올렸으니, “계림은 누런 잎이요, 곡령은 푸른 솔이다.〔鷄林黃葉, 鵠嶺靑松.〕”라고 하였다.
신라 왕이 이를 알고 그를 미워하자, 최치원은 즉시 가족을 끌고 가야산에 은거하여 모형(母兄 동복형)인 승려 현준(賢俊)
및 정현 선사(定玄禪師)와 속세를 초월한 교분을 맺고서 여생을 보냈다.
박소(朴紹) : 본조 나주(羅州) 사람이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남동생과 누이와 함께 외가를 따라 군의 야로현에 옮겨 살았다. 젊어서부
터 도를 구하는 뜻이 있어서《근사록(近思錄)》등의 서책을 가지고 가야산에 들어가 깊이 몰두하여 침식을 잊을 정도로 궁구
하였다.
박영(朴英)이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배웠는데, 박영이 말하기를 “자네는 내 스승이지 내 벗이 아
니다.” 하였다. 김안국(金安國)이 영남의 관찰사로 있을 때 항상 공경하고 중히 여겨 매사를 반드시 그에게 자문하였다. 공희
왕조(恭僖王朝 중종조)에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누차 승진하여 이조 정랑,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김안로(金安老)의 간악함을 논핵하려고 하던 중에 김안로의 계략에 걸려 파직되고, 합천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고 강독하면
서 스스로 즐기며 살다가 마침내 고향에서 죽었다. 호는 야천(冶川)이다.
인물(人物)
[신라]
죽죽(竹竹) : 대야주(大耶州) 사람이다. 찬간(撰干) 학세(郝勢)의 아들이다. 선덕왕 때에 사지(舍知)가 되어 본주 도독 김품석(金品釋) 휘
하에서 보좌하였다.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주성(州城)을 공격해 왔는데, 김품석이 성을 지킬 수 없
게 되자 자결하였다.
이에 죽죽이 남은 병사를 거두어 성문을 닫고 항거하였다. 사지 용석(龍石)이 죽죽에게 말하기를 “지금 전세가 이와 같으니
항복하고 살아남아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낫겠다.” 하니, 답하기를 “내 아버지가 내 이름을 죽죽이라고 지은 것은 내가 세한
(歲寒)에도 시들지 않고 꺾일지언정 굽히지는 말도록 한 것인데,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살기를 구하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힘써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어 용석과 함께 죽었다. 왕이 듣고 슬프고 가슴 아파하며 죽죽에게는 급찬(級飡)을 증직하
고 용석에게는 대내마(大奈麻)를 증직하였다. 거인(巨仁) 진성여주(眞聖女主)가 음행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여 나라의 기강
이 무너지고 해이해졌다.
어떤 자가 시정(時政)을 비방하는 내용으로 조정 앞 도로에 방을 써 붙였다. 왕이 수색을 명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는데, 혹자가
고하기를 “이는 필시 대야주에 숨어 사는 거인의 소행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거인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라고 명하였
다. 장차 형을 집행하려는데, 거인이 분하고 억울하여 옥 벽에 시를 썼다.
그 시에,
우공이 통곡하니 삼 년 동안 가물었고 / 于公慟哭三年旱
추연이 슬퍼하니 오월에도 서리가 내렸다네 / 鄒衍含悲五月霜
지금 나의 깊은 시름도 옛사람과 비슷한데 / 今我幽愁還似古
황천은 말이 없고 그저 창창할 뿐이네 / 皇天無語但蒼蒼
하였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리니, 왕이 두려워하여 그를 풀어 주었다.
[고려]
이순목(李淳牧) : 젊어서 주 아전이 되었는데,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을 잘 지어 매번 문회(文會)에서 능히 운자에 따라 즉시 글을 지어 냈
다. 과거에 급제하여 금성(錦城 나주)의 관기(管記)에 조용되었고, 누차 승진하여 보문각 대제에 이르렀으며 판비서성사
에 올랐다.
[본조]
방유령(方有寧) : 문과에 급제하고 중종조에 관직이 참판에 이르렀다.
이요(李瑤) : 여러 관직을 거쳐 정헌대부에 이르렀다. 효행이 있어 모친상을 당하고 3년 동안 여묘하였다. 일이 알려져서 정려하였다.
송희규(宋希奎) : 과거에 급제하여 현풍(玄風)과 상주(尙州) 등 5개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강명(剛明)하게 다스렸으므로 아전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명종 초에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
당시 수렴(垂簾) 정치가 행해지고 있었는데, 윤원형(尹元衡)과 이기(李芑)가 밀지로 대간을 협박하여 장차 사림에게 화
를 입히려고 하자, 송희규는 정의를 지켜 굽히지 않으며 말하기를 “원형이 국구(國舅)로서 임금을 의로 인도하지 못하고
도리어 은밀히 국모를 사주하여 충량한 신하들을 해치려 하는가.” 하고, 마침내 백인걸(白仁傑), 유희춘(柳希春) 등과 함
께 유배되었다.
뒤에 전리로 돌아와 죽었다. 자호는 야계산옹(倻溪散翁)이다. 송희규는 어려서 도형(都衡)에게서 수학하여 아침에 갔다
가 저녁에 돌아오고는 하였다. 하루는 도중에 한 노파가 공의 이름을 부르며 와서 장난치는데 얼굴이 커져서 솔숲에 꽉 찼
으니 바로 요괴였다.
송희규가 몸을 날려 앞으로 나아가 때리려고 하자 그 형체가 점점 사그라들었고, 가면서 돌아보니 얼굴만 숲 위에 걸려 있
을 뿐이었다. 그 용감하기가 이와 같았다. 소경왕조에 효행으로 정려하였다.
[脚註]
[주01] 거창현(居昌縣) :
대본에는 ‘居昌郡’으로 되어 있는데, 본책 〈거창현〉 건치연혁에 근거하여 고쳐 번역하였다.
[주02] 외향(外鄕)이므로 :
현종의 어머니인 경종 비(妃) 황보씨(皇甫氏)의 고향이다.
[주03] 강희맹(姜希孟)의 기문 :
〈합천 함벽루 중신기(陜川涵碧樓重新記)〉이다.《私淑齋集 卷8》
[주04] 이색(李穡)의 시(詩) :
〈동년 사공실의 시에 차운하여 사명을 받들고 가야산으로 가는 권 사관을 전송하다〔次同年司空實韻送權史官奉使伽耶山〕〉이
다.《牧隱藁 詩藁 卷4》
[주05] 고운(孤雲) :
최치원의 호이다.
[주06] 아득한 …… 그리도다 :
소식(蘇軾)의〈전적벽부(前赤壁賦)〉에 “아득한 나의 회포여, 하늘 저 끝에 있는 미인을 그리도다.〔渺渺兮余懷, 望美人兮天一
方.〕”라고 한 구절에서 인용한 듯하다. 여기서는 함벽루의 아름다운 사시사철 풍경을 다 볼 수 없는 아쉬움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
다.
[주07] 상락공(上洛公)의 맏아드님 김군(金君) :
상락공은 충선왕 때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진 김순(金恂)이고, 김군은 김순의 장남인 김영돈(金永暾)이다. 김영돈도 충혜왕 때 상
락부원군에 책봉되었다.
[주08] 김일손(金馹孫)의 기문 :
〈매월루기(梅月樓記)〉이다.《濯纓集 卷3》
[주09] 조위(曺偉)의 시 :
〈매월루(梅月樓)〉 중 제3수이다.《梅溪集 卷1》
[주10] 거창현 :
대본에는 ‘居昌郡’으로 되어 있는데, 본책〈거창현〉건치연혁에 근거하여 고쳐 번역하였다.
[주11] 김종직의 시(詩) :
〈무릉교(武陵橋)〉이다.《佔畢齋集 卷14》
[주12] 월봉(月峯) :
월류봉이다. 가야산의 서쪽 줄기이다.
[주13] 그 시 :
〈가야산 독서당에 제하다〔題伽倻山讀書堂〕〉이다.《孤雲集 卷1》
[주14] 대야(大耶) :
합천의 신라 때 이름인 대야주(大耶州)를 말한다.
[주15] 계림(鷄林)은 …… 솔이다〔鷄林黃葉, 鵠嶺靑松.〕 :
계림은 경주이고 곡령은 개성의 송악(松嶽)으로, 신라와 고려의 흥망을 비유한 말이다.
[주16] 이조 정랑 :
대본에는 ‘吏曹郞’으로 되어 있는데,《사암집(思菴集)》권4〈야천 박공 신도비명(冶川朴公神道碑銘)〉등에 근거하여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주17] 우공(于公)이 …… 가물었고 :
우공은 한(漢)나라 때 관리로, 판관 재임 시 옥송(獄訟)을 공정하게 판결하기로 이름났다. 동해군(東海郡)에 어떤 효부가 있었는데
그의 시어머니가 자살하자 시누이가 효부를 무고하였다. 우공이 효부의 무죄를 극력 간하였으나 태수가 듣지 않으므로 우공은 그 옥
안(獄案)을 안고 통곡하였다. 태수가 끝내 효부를 죽이니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한다.《漢書 于定國傳》
[주18] 추연(鄒衍)이 …… 내렸다네 :
추연은 전국 시대 음양가(陰陽家)이다. 추연이 연나라 혜왕(惠王)을 충성을 다하여 모셨는데, 좌우에서 참소하여 구류를 당하였다.
이에 추연이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자 5월인데도 하늘에서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論衡 感虛》
[주19] 매번 문회(文會)에서 :
대본에는 ‘□’로 되어 있는데,《고려사》권102〈이순목열전〉에 ‘每於文會’라고 한 데 근거하여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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