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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신흠 (申欽)
1566년(명종 21) - 1628년(인조 6)
조선 중기에, 예조참판, 자헌대부,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 · 상촌(象村) · 현옹(玄翁) · 방옹(放翁). 증판서 신세경(申世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참찬 신영(申瑛)이고, 아버지는 개성도사 신승서(申承緖)이다. 어머니는 은진송씨(恩津宋氏)로 송기수(宋麒壽)의 딸이다. 송인수(宋麟壽)와 이제민(李濟民)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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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전당집 제13권 / 행장(行狀)
선부군 영의정 문정공 행장(先府君領議政文貞公行狀)
부군의 휘는 흠(欽), 자는 경숙(敬叔)이다. 신씨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에서 나왔다. 태사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에 이르러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삼한(三韓)을 통일하는 일을 도와 원훈(元勲)이 되었는데, 끝내 태조를 대신해 순절하자 태조가 평산(平山)을 관향으로 내려 주었으므로, 그 후손들은 평산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후손들이 대대로 벼슬자리에 나아갔는데, 본조에 들어와서 휘 효(曉)라는 분이 약관(弱冠)의 나이에 대과에 장원 급제하여 사간원 우정언이 되었다. 그러나 간언(諫言)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행주(幸州)로 물러나 거처하면서 서호산인(西湖散人)이라 자호(自號)하고 도성 문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는데,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큰 형인 인재공(寅齋公) 개(槩)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 독실하게 논하는 사람들은 공이 본래부터 인재공보다 뛰어났다고 일컬으니, 이 분이 바로 부군의 5대조이다. 고조 자계(自繼)는 전생서 주부로서 이조 참판에 증직(贈職)되었다.
증조 세경(世卿)은 내면에 덕이 있어 기묘명현(己卯名賢)들로부터 추중(推重)을 받았는데 처음에 왕자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가 사직서 영으로 관직 생활을 마쳤으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조부 영(瑛)은 의정부 우참찬으로서 이간공(夷簡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부군이 재상의 반열에 들자 좌찬성으로 더 증직되었는데, 어려서부터 명성을 떨치고 두루 성부(省部)를 거쳐 재상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부친 휘 승서(承緖)는 학문과 행실이 모두 뛰어나 일찍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낭서(郞署)를 거쳐 구례 현감(求禮縣監)으로 나갔다. 은혜로운 정사를 많이 베푼 까닭에 고을 사람들이 사모하여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고 지금까지도 사모하는 마음이 시들지 않고 있다.
개성부 도사로 생을 마쳤는데, 만력(萬曆) 임인년(1602, 선조35)에 부군이 아경(亞卿)의 반열에 오르면서 이조 참판으로 추증되었고, 을사년(1605), 부군이 정경(正卿)의 반열에 오르면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부군이 선무 정난 원종공신(宣武靖難原從功臣)에 1등으로 책훈(策勳)되면서 여러 차례 올라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모친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는데, 의정부 좌참찬 기수(麒壽)의 따님이다. 정숙한 덕과 훌륭한 범절을 지녀 세상에서 여자 중의 선비라고 일컬었다. 대부인(大夫人)이 밤에 큰 별이 가슴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다음 날 한성부(漢城府) 북부(北部) 창의동(彰義洞) 집에서 부군을 낳았는데, 이때가 가정(嘉靖) 병인년(1566, 명종 21) 정월 28일 경신일이었다.
부군은 태어나면서부터 모습이 남달랐는데, 이마가 넓고 귀가 컸으며 눈은 샛별 같았고 오른쪽 뺨에 탄환(彈丸) 모양의 빨간 사마귀가 있었다. 어린 시절에 놀 때에도 범상치 않았으며, 행동거지가 단정하고 무게가 있었다. 7세에 대부인이 송도(松都) 임소(任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부군이 장례 행렬을 따라 수백 리를 걸어가면서도 눈에 싫어하는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실의한 채 슬피 울자 길가의 사람들이 찬탄하였다. 얼마 후에 의정공(議政公)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자 슬픔과 그리움이 갑절이나 되었다.
외조부 참찬공(參贊公 송기수(宋麒壽))이 부군을 데려다 키웠는데, 8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글을 배웠다. 참찬공이 손자들을 모아놓고 ‘춘(春)’을 제목으로 하여 한 구절씩 만들어 보라고 하였는데, 부군이 입으로 응수하여, “천지 만물 가운데 봄이 맏이입니다.”라고 하자, 참찬공이 감탄하고 칭찬하며 큰 인물이 될 것이라 기대하였다. 몇 권의 책을 배우고 나서 문의(文義)가 크게 통달하여 더 이상 스승의 가르침이 필요치 않게 되었다.
기억력이 남달라 10세 때에 《논어》와 〈이소(離騷)〉를 몇 번 읽고는 바로 배송(背誦)하여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는데, 참찬공이 놀라고 기특하게 여기며 상자 속에서 새로 장정한 《논어》 한 질을 꺼내어 공에게 주었다. 13세에 경(經), 사(史), 자(子), 집(集)을 두루 보고는 유려한 글솜씨로 능숙하게 글을 지었는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부군의 글솜씨를 기특하게 여겨 찾아와보기도 하였다.
14세에 염락제현(㾾洛諸賢)이 남긴 글을 모두 섭렵하였으며, 불가(佛家)나 노장(老莊)에까지 관심을 쏟아 궁구하여 그 뜻을 이해하였다. 참찬공의 집에는 장서가 많아 서적이 몇 칸을 가득 채우고 있었으므로, 부군이 늘 그 안에 들어가 문을 닫고 책을 보면서 침식을 잊기까지 하였는데, 상위(象緯 천문), 감여(堪輿 지리), 율력(律歷), 산수(算數), 음양(陰陽), 기황(岐黃 의학)의 글에 대해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경진년(1580),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 공의 문에 납채(納采)를 들였다. 청강공은 《주역》에 통달하였다고 이름이 났으므로 부군이 배움을 청하였는데, 청강공이 〈전(傳)〉 몇 편을 강하고 나서는 갑자기 스승의 자리를 사양하며 말하기를, “이미 대의(大意)를 터득했으니, 더 이상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하였다.
계미년(1583), 삼사(三司)가 이율곡(李栗谷)을 오만하다고 논핵 하였는데, 이때 대사간이었던 송응개(宋應漑)는 바로 공의 큰 외삼촌이다. 조회에서 돌아와 소매에서 탄핵문을 꺼내 부군에게 보여주면서 말하기를, “너의 뜻에는 어떠하냐?”하였다.
부군이 탄핵문을 내용 중에 ‘아무개는 일개 치곤(緇髠 승려) 이다.’라는 말을 보고는 다 읽고 나서 천천히 대답하기를, “이이(李珥)는 당세의 중망(重望)을 지고 계신 분인데, 치곤 등의 말은 너무 심한 듯합니다.”하였다. 대사간은 잠자코 있었으나 여러 종자제(從子弟)들이 이미 부군이 율곡을 편든다고 떠들어대어 비방하는 논의가 크게 번져갔다. 부군이 군소배(群小輩)에게 배척을 받게 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을유년(1585), 생원시에 제8명(第八名)으로 합격하고, 진사시(進士試)에 제3명(第三名)으로 합격하였다. 병술년(1586),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조정의 의론이 한창 당파를 만들어 자기와 다른 편은 배척하였는데, 부군은 축출되어 성균관 권지에 소속되어 있다가 경주(慶州)의 훈도(訓導)로 나갔고, 다시 광주(廣州)로 옮겨졌다.
무자년(1588), 사재감 참봉에 임명되었다. 어떤 일로 파직된 뒤에 책을 끼고 동호(東湖)에 나가 거처하면서 강학하며 유유자적하게 보내었다. 기축년(1589) 겨울, 사관(史館)으로 뽑혀 들어왔으나 병 때문에 응강(應講)하지 못하였다. 경인년(1590),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고 차례에 따라 승진하여 봉교에 이르렀다.
신묘년(1591), 규례에 따라 사헌부 감찰로 전직(轉職)되었으며, 천거를 받아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어떤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임진년(1592), 왜적이 승승장구하여 도성 부근까지 육박했을 때 부군은 서용되어 양재 찰방(良才察訪)에 임명되었다.
이는 권신(權臣)이 부군을 사지(死地)에 몰아넣으려고 그렇게 한 것이다. 부군은 그날 즉시 조정을 하직하고 임지로 달려갔는데, 전쟁이 일어나 역사(驛舍)가 모두 텅텅 비어 있었다.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이 평소 용맹스럽고 위엄이 있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며 감히 어찌할 수가 없었는데, 부군이 들어가 신립을 보고서 태연하게 피폐해진 상황을 설명하니, 신립도 공경하는 태도로 대하면서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다.
부군이 신립을 따라 조령(鳥嶺)으로 가서 앞에다 진(陣)을 쳤는데, 신립이 패하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하여 서울이 큰 혼란에 휩싸였다. 부군이 뒤따라 행재소(行在所)로 가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서 갈 수가 없어서 우회하여 골짜기 속으로 들어갔다. 가을에 샛길로 빠져나가 배를 타고 강도(江都)로 내려갔는데, 이는 곧장 행재소로 가기 위함이었다.
상국 정철(鄭澈)이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와서 편의(便宜)대로 일을 행하고 있었는데, 불러서 종사관으로 삼았다. 부군이 사양하고 나오지 않자, 상국이 말하기를, “조정의 명령이 아니라서 그러는 것인가.” 하고, 마침내 사유를 갖추어 조정에 아뢰자, 부군이 그제야 부름에 응하였다.
체찰사를 따라 누선(樓船)을 타고 바다로 내려가 호서(湖西)에 이르렀는데, 상국이 부군의 재주를 인정하여 삼남(三南) 지방의 기무(機務)를 일체 부군에게 위임하였다. 부군이 일에 민첩하고 법을 잘 아는 관리 십여 명을 불러들여 부첩(簿牒)을 나누어 주고는 일제히 그에 대해 아뢰게 하고, 또 군민(軍民)으로 하여금 불편한 정상을 아뢰게 하였다.
수많은 문서와 분잡한 소송을 부군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묻고 손으로 판결하였는데, 이리저리 분란하게 처리하는데도 어느 것 하나 사리에 합당하지 않음이 없어 막부(幕府)의 융사(戎事)가 모두 그 자리에서 해결되었다. 또 글을 지어 조정의 덕의(德意)를 선포하였는데, 말뜻이 지극히 간절하여 듣는 자들 중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관군과 의병이 틈이 벌어져 장차 분쟁이 일어날 근심이 생기자 부군이 또 글을 지어 타일렀는데, 각 진영의 장사(將士)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태도를 바꾸었다. 겨울에 사헌부 지평으로 영유(永柔)의 행궁에 입조(入朝)하였다. 당시는 대적(大賊)이 도성을 점거하고 나머지 왜적이 팔도에 가득 차 있는 상황에서 명나라 군대가 출병한 터라, 급히 전하는 격문이 빗발치듯하였다.
응대하고 수작하는 일을 이호민(李好閔) 공이 관장하다가 상을 당해 떠나자 그 일을 모두 부군에게 맡겼다. 처리해야 할 각종 외교문서가 밤낮으로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에 특별히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이라는 직책을 두어 부군을 임명하였는데, 혹 교리와 참교의 직임으로 그 일을 늘 겸대하였고, 또 지제교를 겸대하였다.
계사년(1593) 5월,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대가(大駕)를 호종하여 도성으로 돌아왔다. 행인(行人) 사헌(司憲)이 황제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국경에 이르자, 원접사 이항복(李恒福) 공이 부군을 종사관으로 삼았다. 갑오년(1594) 정월, 이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송유진(宋儒眞)의 역모가 발각되자, 임금이 친국(親鞫)하면서 부군을 문사낭청(問事郞廳)으로 삼았다. 지극히 상세하게 안문(按問)하고 정밀하면서도 민첩하게 응대하자 상께서 자주 눈길을 주고, 부군의 나이를 물어보았다. 옥사가 완결되자 명을 내려 사복시 첨정으로 승진시켰으며, 곧이어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다.
조정이 명(明)나라 본병(本兵 병부)의 의견에 쫓긴 나머지 사신을 보내 기미책(羈縻策)을 청하자, 부군이 차자를 올려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하였다. 상국 정철(鄭澈)이 당시에 모함을 받았었는데, 죽은 뒤에도 여전히 정권을 잡은 자들이 물고 늘어져 그의 관작을 추탈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정엽(鄭曄) 공이 옥당에 있는 것을 꺼린 나머지 먼저 그를 공격해 제거하려 하면서 올바르지 못한 말을 하였는데, 이는 실로 한 시대의 사류(士流)를 내쫓으려는 의도였다. 부군이 사실을 모아서 스스로 탄핵하여 마침내 사헌부의 직책에서 체차되었으며, 성균관 사성에 임명되어 서장관으로 중국 경사(京師)에 갔다.
을미년(1595) 3월, 복명한 뒤에 장악원 첨정, 군기시 정, 성균관 사성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세상과 서로 어긋나 산직(散職)에만 머물고 명을 받아 사방으로 돌아다녔다. 순안 어사(巡按御史)로 함경도에 갔는데, 조행(操行)이 엄정하고 출척(黜陟)이 분명하였기에 사나운 장수와 탐관오리들이 많이 인끈을 풀고 떠나갔다.
감사 홍여순(洪汝諄)은 본래 성격이 거세고 거만하여 남에게 굽히지 않았는데, 부군을 보고는 바로 자신을 낮추어 대하였다. 부군은 험난함을 꺼리지 않고 직접 시골 마을들을 찾아다녔으며, 백성의 질고를 조목별로 진달하여 견감시켜 주었으므로 북쪽의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있다.
병신년(1596), 의정부 사인에 임명되었다가 장악원 정으로 도로 자리를 옮겼으며, 도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있다가 서반직(西班職)의 부호군에 서용되었고, 다시 사성(司成)으로 자리를 옮겼다. 역적 이몽학(李夢鶴)이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켜 잇따라 몇 개 고을을 함락시키자, 원수(元帥)가 변고를 듣고 군대를 진격시켰는데, 적을 사로잡은 뒤 조정에서 수괴만 다스리고 나머지 패거리 수천 명은 원수가 처리하도록 하였다.
원수가 모두 죽이려고 하자, 부군이 원수에게 말하기를, “남의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는 그 죄를 다스리지 않는 것이 왕의 정치입니다. 적도(賊徒)는 모두 농사를 짓는 백성들인데, 지금 모조리 죽여 버린다면 국가 차원에서도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닙니다.”하였다.
원수가 부군을 보내 사유를 갖추어 조정에 보고하게 하였는데, 임금이 그 청을 윤허하고 이어 부군으로 하여금 원수와 협동하여 조사해 다스리도록 하였다. 부군이 명을 받고 옥사를 처리하면서 우두머리 7명만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경중을 나누어 너그럽게 처결하니, 물정(物情)이 모두 흡족하게 여기고 호서(湖西)가 안정되었다.
정유년(1597), 사섬시 정과 예빈시 정에 임명되었다. 명나라 군문(軍門)인 병부 상서 형개(邢玠)가 군대를 감독하러 나오자, 접반사 신점(申點)의 종사관이 되어 요동(遼東)의 봉황성(鳳凰城)에서 군문을 맞이하였다. 11월에 조정에 돌아와 연이어 평산 부사(平山府使)와 양주 목사(楊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대신이 문서를 전담시켜야 한다는 이유로 아뢰어 머물게 하였다.
무술년(1598), 장악원정 겸 시강원필선으로 있다가 천거되어 홍문관에 들어가 교리가 되고 응교 겸 교서관교리로 승진하였다. 이때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군량이 조달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근신(近臣)을 보내어 독촉하도록 요구하니, 선조께서 부군에게 가도록 명하였다.
부군이 입직소(入直所)에서 하직 인사를 드리고 관서(關西) 지방으로 달려가 무더위와 비바람을 무릅쓰고 해항(海港)을 드나들었는데, 운반한 군량이 모두 17만 곡(斛)이었다. 겨울에 문서를 작성하는 일로 인해 역말을 타고 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체차되었고 전적(典籍)이 되었다가 사옹원 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해년(1599),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가 종부시 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의정부 사인으로 들어갔다가 홍문관 전한으로 승진하였다. 통정대부에 가자되고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어 규례에 따른 직책을 겸직하였으며, 또 승문원 부제조를 겸직하였다.
고사(故事)에 의하면 승지는 승문원 제조를 겸할 수 없는데도 대신이 특별히 아뢰어 그대로 겸대하게 한 것인데, 이로부터 여러 차례 승지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겸대직을 띠고 있었다. 겨울에 체차되어 충좌위 상호군(忠佐衛上護軍)이 되었다가 형조 참의에 임명되고 다시 병조로 자리를 옮겼다.
경자년(1600), 호군을 거쳐 정원의 우부승지로 들어갔다가 순서에 따라 전임되어 우승지에 이르렀고, 체차되어 사직(司直)이 되었다. 여름에 예조 참의와 사간원 대사간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체차되어 호군이 되었다. 가을에 병조 참지에서 이조 참의로 자리를 옮겼다.
신축년(1601) 2월,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임금이 옥당에 명하여 《고경주역(古經周易)》을 등사(謄寫)하도록 하니, 부군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정무를 보시고 난 여가에 더욱더 학문에 힘쓰시어 초연히 홀로 복희씨(伏羲氏)와 문왕(文王)의 신묘한 이치에 융합하고 계시니, 하늘과 땅을 두루 에워싸고 만물의 뜻을 통하여 천하의 사무를 성취시키려는 그 뜻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정(貞)과 원(元)의 덕이 모이고 비(否)와 태(泰)가 교차되는 때이니, 또한 전하께서 영원한 천명을 기원할 일대 계기입니다. 이 마음을 미루어 나간다면 어찌 정치가 넓게 펼쳐지지 못하고 교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역》이란 책은 사성(四聖)을 거쳐 대의(大義)가 밝혀졌고, 삼현(三賢)을 거쳐 은미한 뜻이 드러났습니다. 이에 괘효(卦爻)의 강유(剛柔), 상수(象數)의 변역(變易), 유명(幽明)의 현상, 귀신의 실정, 삼극(三極)의 도리가 환하게 나타나고 숨김없이 망라되어 길흉(吉凶)과 회린(悔吝)의 도가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쉽게 이해되어 의심스러운 것이 해결되고 머뭇거리던 것이 결정되어 사람들이 비로소 미혹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현(顯)과 미(微)에 간격이 없고, 체(體)와 용(用)의 근원이 하나이다.’는 말은 그 말이 오묘하고 그 뜻이 심원하며 그 변화가 무궁합니다. 그러니 성인의 마음을 보고서 올바른 의리를 터득한 자가 아니면, 다른 길로 빠져들지 않는 자가 드뭅니다.
그러므로 그 수(數)를 훔친 자는 점서(占筮)를 전문으로 하고, 그 비술(秘術)을 도적질한 자는 단약(丹藥) 만드는 것을 제일로 치게 된 결과, 경방(京房)과 위백양(魏伯陽) 같은 무리들이 가득 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과거에 정자와 주자가 각각 《역전(易傳)》과 《주역본의(周易本義)》를 저술하지 않았던들 그 속에 온축되어 있던 정결(淨潔)하고 정미한 도가 묻혀버릴 뻔 했습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선천(先天)의 학문은 심(心)을 근본으로 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선천도(先天圖)야 말로 심학(心學)이다.’ 하였습니다. 주염계(周濂溪)의 〈태극도(太極圖)〉에 이르러서는 중정인의(中正仁義)로 단안을 내리면서 이 도리에 따라 닦아나가면 길하게 되고 이에 어긋나게 하면 흉하게 된다고 경계하였는데, 〈계사전(繫辭傳)〉을 보면 ‘성인이 이것을 가지고 마음을 닦아 그 의식(意識)의 비밀스러운 곳에 보관해 둔다.’ 하였습니다.
따라서 《주역》을 공부한다고 하면서 이를 먼저 마음에 적용하지 않으면 《주역》을 배우면 배울수록 더 배우지 못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아! 선(善)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은 양(陽)이 움직여서 복(復)이 되었고, 악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은 음(陰)이 싹터서 구(姤)가 되었습니다.
한 번 구(姤)가 되고 한 번 복(復)이 됨에 따라서 혹 곤(坤)의 위태로움에 처하게 될 수도 있고, 혹 건(乾)의 강명(剛明)한 덕과 짝할 수도 있으니, 그 차이가 현격합니다. 사람이라면 그 누가 또한 저쪽을 버리고 이쪽으로 나아오려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천리(天理)는 기르기는 어려운 반면 잃기는 쉽고, 인욕(人慾)은 빠져들기는 쉬운 반면 막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이에 대해서 대처할 방도를 알지 못하게 되면 가려진 자는 더욱 가려지고 어두운 자는 더욱 어두워지게 되어 음의 기운이 끝까지 치고 올라가 양을 모두 떨어뜨려 천지가 막히고 말 것입니다. 《주역》에서 말한 ‘적연부동(寂然不動)’은 곧 자사자(子思子)가 말한 ‘미발지중(未發之中)’이고 《주역》에서 말한 ‘감이수통(感而遂通)’은 곧 자사자가 말한 ‘발이중절(發而中節)’이니, 한 가지 이치일 뿐, 애초 두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나의 심체(心體)로 하여금 적연부동한 가운데에서 천기(天機)가 어두워지지 않도록 하고 감응할 때에 본원(本源)이 늘 깨끗해지게 하여 외물(外物)이 내 앞에 교차되어도 같이 휩쓸리지 않고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티끌만큼도 오염되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신령스러움과 밝음이 내 몸에 있게 되고 열리고 닫히는 것이 자신으로부터 나올 것이니, 상(象)을 관찰하고 점(占)을 음미하는 것은 단지 여사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천도(天道)는 원(元)에 기초하여 만물을 낳고 인주(人主)는 그 원을 체득하여 만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니, 임금의 도는 하늘과 똑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천도는 꾸준하여 쉬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오는데 그 순서가 문란하지 않고, 어둠과 밝음이 교체되는데 그 운행에 착오가 없으니, 한 번이라도 쉬는 일이 있게 되면 만물을 내는 공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마땅히 본받아야 할 점은 《주역》에 있어서 건(乾)의 꾸준함이 아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구두(句讀)와 문의(文義)에 집착하지 마시고, 다른 부문의 잗단 학설에도 얽매이지 마시고, 오직 중정인의(中正仁義)로 방향을 정하셔서 만물을 곡진히 이루어주는 묘한 이치를 탐구하도록 하소서. 비(否)의 극한 상황에 당하면 그 상황을 전환시킬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하시고, 규(睽)의 극한 상황에 당하면 모여 합하게 할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하시고, 손(損)의 때를 당하면 아랫사람들에게 더해 줄 계책을 생각하시고, 박(剝)의 때를 당하면 군자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소서.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의 괘 하나의 효를 만날 때마다 모두 그 시의(時義)를 궁구하여 각각 쓰임에 맞게 하면 쉽고 간명하게 되어 천하의 이치를 터득하게 될 것이니, 영원히 지속될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 것 또한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아! 양수(陽數)는 1이고 음수(陰數)는 2인 관계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잘 다스려진 때는 항상 적었고, 어지러운 때가 늘 많았습니다. 이 점을 성인이 걱정하시어 소장(消長)과 관련된 절목에 대해서는 일찍이 근실하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시대에 따라 응하면서 변통해 그 기준에 합치되게 함으로써 이 세상을 대유(大有)의 성세(盛世)에 올려놓고 미제(未濟)의 어려움을 면할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절실히 성명께 바라는 점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요즈음 천재(天災)와 지이(地異)가 잇달아 닥치고 거듭 나타나 백성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정사가 피폐해지는 상황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세도가 무너지고 기강이 허물어져 마치 끝도 한도 없이 큰 강을 건너는 것 같기만 하니, 신들이 믿는 것은 오직 전하께서 천덕(天德)으로 임하시어 시행해 조치하시는 것뿐입니다.” 하니, 선조께서 후한 비답을 내렸다.
또 《춘추》 좌씨(左氏), 호씨(胡氏), 정씨(程氏) 등 삼가(三家)의 전(傳)을 모아 한 책으로 만들도록 명하였는데, 책이 완성되자 또 차자를 올려 복수(復讐)를 중하게 여기는 《춘추》의 의리를 거듭 말하였는데, 그 대략에, “《춘추》 한 책이야말로 성인의 대용(大用)이며, 오경(五經)의 단안(斷案)입니다.
왕자(王者)를 높이고 패자(伯者)를 물리치며, 명분을 바르게 하고 분수를 정하며, 시비를 분별하고 선악을 분명하게 판별하여 이미 지나간 2백 년 동안의 자취를 가지고 천세 만세 미래의 계책과 교훈으로 삼았으니, 그 뜻이 은미하고 그 의리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이 점에 대해서 또한 부득이한 면이 있었습니다.
가령 주(周)나라 왕실이 동천(東遷)하지 않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교화가 없어지지 않아 공자(孔子)의 도가 당시에 행해질 수 있었더라면, 《춘추》 한 부의 글은 그 당대에 바로 시행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을 것이니, 어찌 앞으로 올 세상을 가르치는 정도로 그치고 말았겠습니까. 성인의 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고 성인의 정치를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습니다.
성인의 말씀이 높고 위대하여 따르기 어렵다고 하지 마시고, 옛날의 도가 오활하고 시대에 동떨어져 시행하기 어렵다고 하지 마소서.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은 반드시 천리(天理)의 바름에 근본을 두고 인욕(人慾)의 사사로움이 끼어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며, 일을 행하실 때에는 반드시 왕도(王道)의 표준에 맞도록 궁구하고 치우친 패도(伯道)의 술수에 빠져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크게는 나라를 경륜하고 다스리는 일, 작게는 갖가지 일에 응수하는 일, 은미하게는 아무도 보지 않는 방에 혼자 있을 경우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덕(天德)을 지니게 되면 백왕(百王)이 바꿀 수 없는 대법을 어찌 오늘날에 시행할 수 없겠습니까. 더구나 《춘추》에 기록된 것은 난신적자에 대해서 그렇게 엄할 수가 없고,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분별하는데 그렇게 삼갈 수가 없으며, 복수의 의리에 대해서는 더욱 크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씨(胡氏)의 전(傳)을 보면 이 점에 대해 간절하게 이야기하면서 후세를 위해 경계를 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애석하게도 그 말이 쓰이지 않은 채 남쪽으로 건너간 뒤로는 안일함만 탐하다가 날로 쇠퇴해져 끝내는 오랑캐가 중하(中夏)에 들어와 주인 노릇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는 꼭 이러한 의리가 밝혀지지 않아서 그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아!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면 금석(金石)도 뚫을 수 있습니다. 군신 상하가 힘을 합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진실로 복수의 의리를 가슴 속에 가득 지녀 한 세상의 이목을 진작 면려하여 시원히 옛날의 모습을 바꾸면 전하께서 이 책을 존숭하고 믿으신 실지의 효과를 더욱 보게 될 것입니다.” 하니, 선조께서 하교하여 장려하고 특별히 가선대부로 가자하였다.
그리고 이 차자들을 두 책의 첫머리에 아울러 싣도록 하였다. 임인년(1602) 2월,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체차되어 호군에 임명 되었다. 4월에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겸하고, 겨울에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명을 받아 명나라 장사(將士)의 동정(東征)기록 몇 권을 지어 올리고, 또 왕비 김씨(金氏)의 책문(册文)을 지었는데, 그 공으로 모두 구마(廐馬)를 하사받았다.
계묘년(1603) 정월, 예조와 병조 두 기관의 참판을 역임하고 예문관 제학을 겸하였는데, 이 해에 세 차례 부제학 겸 세자우부빈객에 임명되었다. 선조께서 비서(秘書)와 옥당(玉堂)에 소장된 우리나라의 시문(詩文) 1천여 권을 부군에게 맡겨 산정(刪定)하도록 명하였는데, 부군이 편집을 하고 나서 문한(文翰)을 맡은 신하들과 함께 검증하기를 청하여 일을 마치고 바치니, 구마(廐馬)를 하사하여 위로하였다. 겨울에 예조 참판으로 자리를 옮겼다.
갑진년(1604) 여름, 부제학 겸 세자좌부빈객으로 있다가 체차되어 상호군(上護軍)이 되었으며, 성균관 대사성 동지춘추관사로 자리를 옮겼다. 선조께서 한창 《주역》을 강하면서 기관을 설치해 교정하려고 경전에 밝은 사람들을 선발하였는데, 부군도 그 속에 있었다. 가을에 병조 참판이 되고 겨울에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을사년(1605) 정월,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되어 규례에 따른 직책을 겸직하였다. 여름에 체차되어 호군이 되었고, 곧바로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0월에 또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11월에 발탁되어 자헌대부로 가자되고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다.
병오년(1606) 가을, 예문관 제학에 임명되었다. 명나라 조정의 학사(學士) 주지번(朱之蕃)과 급사중(給事中) 양유년(梁有年)이 원손(元孫)이 탄생했다는 조칙을 반포하기 위해 왔는데, 부군이 의주 영위사(義州迎慰使)가 되었다. 복명한 뒤 특명을 받고 《황화집(皇華集)》 서문을 지었다.
여름에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는데, 무인들의 선발을 공평하게 하여 후임자가 먼저 진급하는 일로 인한 탄식이 없었다. 이때 명나라 군사 중에 탈영병이 많았는데, 이들이 쇄환(刷還)당하게 되자 서로 모여 무리를 이루고는 난동을 부리려고 하였다. 그래서 부군이 장사(壯士)를 뽑아 방편을 써서 그들을 호위해 보내자 다급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체차되어 상호군이 되었으며, 가을에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김계(金稽)라는 자가 상소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선조의 아버지)을 추숭(追崇)할 것을 청하자, 상소를 예조 판서에게 내렸다. 당시에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국정을 쥐고 있었는데, 부제학 이유홍(李惟弘)을 보내 부군의 뜻을 떠보려고 하였다. 그러자 부군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이 일에 대해서는 선유(先儒)의 정론(定論)이 있는데, 어떻게 다른 의론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하니, 유홍이 기가 죽어 돌아갔고, 이로써 의논이 마침내 잠잠해졌다.
정미년(1607), 체차되어 상호군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다. 무신년(1608) 정월, 지중추부사 겸 경기도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개성부 유수에 임명되었다. 2월, 선조께서 승하하자 초상(初喪)에 필요한 물품을 모두 경기(京圻) 지역에 의지해서 마련했는데, 부군이 응용할 물품을 기억해 두었다가 한 권의 책자에 손수 기록해서 담당 관리에게 내주고 미리 대비하도록 하였으므로 장사 지내는 데 군색함이 없었다.
옥책문(玉册文)을 짓는 일로 부름을 받고 예문관 제학이 되어 선조(宣祖)의 애책문(哀册文)을 지었다. 정헌대부에 가자되고 한성부판윤 겸 지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 돈체사(頓遞使)로 호상(護喪)을 하였는데, 일이 끝난 뒤에 구마를 하사받았다. 이때 삼사(三司)가 왕자 임해군(臨海君)이 불궤(不軌)한 일을 도모했다고 고하여 큰 옥사가 일어났는데, 당여(黨與)를 체포해 다스리고 임해군을 해도(海島)에 금고시켰다. 부군은 10일 동안 두 차례나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숙배하지 않았는데, 이때부터 광해군이 좋지 않게 여겼다.
기유년(1609, 광해군1) 봄, 예조 판서와 동지성균관사에 임명되었다. 명나라 조정의 행인(行人) 웅화(熊化)는 조문하고 제사 지내는 일로, 태감(太監) 유용(劉用)은 책봉(册封)하는 일로 함께 조칙을 받들고 오자, 부군을 의주 영위사로 삼았다. 가을에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겨울 12월에 지중추부사로서 세자책봉상사(世子册封上使)에 차임되어 연경으로 갔다.
경술년(1610) 4월, 복명하고 예조판서 겸 지춘추관사에 임명되었다. 책봉에 관한 일을 윤허 받은 일로 노비와 전답을 하사받고 숭정대부에 가자되었다. 좌상 이항복 공이 총재사(總裁使)로 《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감수(監修)하였다. 고사(故事)에 의하면 대제학을 도청(都廳)이라 칭하여 그 일을 주관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이공이 특별히 부군을 천거하여 대제학과 함께 도청의 직임을 맡도록 청하였다. 부군이 전례를 들어 사양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국(史局)에 나아가 총재(總裁)에게 말하기를, “선왕의 수십 년 사초(史草)가 임진년 병란에 사라져서 선대 조정의 아름다운 정치, 훌륭한 신하, 좋은 계책 중에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이는 실로 흠이 되는 일입니다.
먼저 당시 조정의 신하들 중에 옳고 그름이 현저하게 드러나는 자들을 기록하고 나서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보첩(譜牒)과 비지(碑誌)에서 가려내고 그 실제 자취를 한데 모아 연도에 따라 기술하면 빠뜨리거나 의심나는 내용을 보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총재가 이를 옳게 여겼다. 드디어 임금에게 아뢰어 재가를 얻어 일의 단초가 거의 이루어졌는데, 이공과 부군이 모두 파직되어 결국에는 일이 시행되지 못했다.
광해군이 새로 법궁(法宮 정전(正殿))으로 나아갈 때에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에게 경(經)을 외우며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게 하려 하자, 부군이 말하기를, “임금이 법궁에 나아가는 것은 해가 하늘 가운데에 있는 것과 같은데, 어찌 불경한 일을 행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일을 후세에 보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는데, 모두 세 차례를 아뢴 끝에 윤허를 받았다.
신해년(1611) 여름, 동지경연사를 겸직하고, 겨울에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임자년(1612) 여름,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직하였다.
계축년(1613) 4월, 사형수 박응서(朴應犀)가 이이첨(李爾瞻)과 이창후(李昌後)의 사주를 받고 옥중에서 상소하여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끼고 반역을 도모했다고 고하였다.
그 말에 조정 관리들까지 연루되자 광해군이 김제남을 하옥시켜 사사(賜死)하고 교묘하게 얽어 옥사를 일으켰다. 이에 앞서 선조께서 재신(宰臣) 일곱 명에게 유교(遺敎)를 내려 이르기를, “내가 왕위에 있으면서 신하와 백성에게 죄를 졌으므로 깊은 골짜기와 못 속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심정이었는데, 지금 갑자기 중병을 얻게 되었다.
수명의 길고 짧음은 운수가 있고, 죽고 사는 것은 명이 있어 마치 밤과 낮을 어길 수 없는 것과 같아 성현(聖賢)도 피하지 못하는 것이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다만 대군(大君)이 어려서 장성한 모습을 미처 보지 못하니, 이 점이 마음에 걸릴 뿐이다.
내가 죽은 뒤 사람들의 마음을 예측하기가 어려우니 만일 사설(邪說)이 일어나면, 여러 공들이 아껴주고 감싸주어 보살펴 주었으면 한다. 감히 이 일을 부탁한다.” 하였으니, 아마도 선조께서는 마음속으로 뒷날 이런 변고가 일어날 줄을 알았던 것이다.
이에 이르러 간사한 무리들이 권간(權奸)의 뜻을 받들어 일곱 명의 대신이 그에 대해 즉시 변명하지 않았다고 논하여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여 마치 선왕의 유교를 거짓으로 꾸며낸 것처럼 만들어 버렸다. 얼마 후 정협(鄭浹)이란 자가 몰래 사주를 받고 사람들을 마구 끌어대어 공경들이 차례로 하옥되었는데, 부군도 심문을 받고 풀려나와 방귀전리(放歸田里)의 형벌을 받았다.
김포(金浦) 의정공의 묘소 아래로 돌아갔는데, 한 칸짜리 초가집이 거처하기에는 너무 비좁았으나 부군은 느긋하게 지내면서 ‘하루암(何陋菴)’이라는 편액을 내걸어 자신의 뜻을 나타내었다. 갑인년(1614), 산기슭에 집을 지어 못을 파고 나무를 심고는 그 거처를 ‘감지와(坎止窩)’라고 명명한 뒤 깊이 들어앉아 나오지 않은 채 초연히 물외(物外)에 노닐면서 도서(圖書)를 좌우에 두고 깊은 이치를 탐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하루는 《성리대전(性理大全)》에 수록된 소자(邵子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를 가져다 몇 번 보고서 갑자기 깨닫고는 마침내 상수(象數)를 궁구하여 《선천규관(先天窺管)》을 저술하였다. 그 후에 《소자전서(邵子全書)》를 연경의 저잣거리에서 사서 비교해 보니, 서로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병진년(1616) 가을, 광해군이 대비(大妃)를 폐하려고 김제남(金悌男)에게 추형(追刑)을 가하여 시신을 저잣거리에 내걸었다. 대사헌 정근(鄭瑾), 대사간 정조(鄭造), 부제학 유숙(柳潚) 등이 부군의 죄상을 날조하여 먼 곳으로 내치기를 청하여 부군이 춘천(春川)에 유배되었다.
부군은 몇 칸 되는 띳집을 지어 놓고 ‘여암(旅庵)’이라 이름 하였다. 5년간의 유배기간 동안 문밖을 나서지 않고 오직 옛 전적을 보고 즐기면서 고향 떠나 구속되어 있는 신세를 잊었다. 신유년(1621) 봄, 사면을 받아 전리(田里)로 돌아왔다.
계해년(1623) 봄, 주상이 의리를 내세워 반정(反正)하여 무신년(1608) 이후의 죄적(罪籍)을 말끔히 씻어주었는데, 부군은 입조(入朝)하던 그날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곧이어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성균관사를 겸직하였다.
반정 초기에 내외 관료 대부분이 거의 바뀌었는데, 부군이 물의(物議)를 널리 채집하여 전형(銓衡)하고 주의(注擬)하는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였으며, 임금도 공을 굳게 의지하여 첫 번째로 의망(擬望)된 자들을 모두 등용하였는데, 이렇게 해서 조정이 일신되었다.
7월, 승진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부군을 재상에 임명하는 날 고변(告變)한 자가 있어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상황이었는데, 임금이 부군을 기용하여 하루에 세 차례나 명을 내렸으므로 부군이 어쩔 수 없이 명에 응하였다.
임금이 즉시 인견(引見)하고 옥사에 대해서 자문을 구하니, 부군이 ‘새로운 교화를 펴는 마당에 억울한 사람이 있게 해서는 안 되니 덕의(德意)를 앞세우고 형정(刑政)을 뒤로 돌려야 한다.’고 강력히 진달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임금이 이 때문에 얼굴빛을 고쳤다. 옥사에 과연 실제 정상이 없어 모두 용서하라는 명을 내리자 도성 백성이 모두 환호하며 경축하였다.
다음 날 용서받은 자들이 부군의 집 문 앞에 모두 몰려와서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해 하자, 부군은 이를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나라를 위해 그렇게 했을 뿐이다. 어찌 너희들에게 사정(私情)을 둔 것이겠는가.”하였다.
겨울에 재이(災異)로 인하여 자문을 구하자, 부군이 차자를 올려 시무를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치도(治道)에는 대본(大本)과 대경(大經)이 있고 정치에는 대요(大要)가 있습니다. 대본이 확립된 뒤에야 성덕(盛德)과 대업(大業)이 드러나고, 대경이 닦여진 뒤에야 집안의 틀과 국가의 법도가 세워지며, 대요를 얻은 다음에야 시행하고 배치하는 일이 제대로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천지(天地)의 중정(中正)한 기운을 받고 태어나므로 마음의 본체(本體)가 허명(虛明)하고 순일(純一)하여 애당초 선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외물(外物)에 감응되는 것이 한결같지 않아서 선과 악이 나뉘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큰 것이 확립되면 작은 것은 대적할 수가 없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이 말하는 대본(大本)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종사하는 바가 있되 잊지도 않고 억지로 조장(助長)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에 따라 체험하면서 동요되거나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글을 통해 찾아보면서 이치를 끝까지 궁구해낼 수 있겠습니까. 강론을 통해 탐색하면서 선(善)을 택해 굳게 지킬 수 있겠습니까. 인애(仁愛)를 체(體)로 삼으면서 지성(至誠)으로 견지할 수 있겠습니까.
분노를 징계하고 욕심을 막으면서 다른 곳에 화풀이하거나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삼가하며 싹트기 전에 제어할 수 있겠습니까. 넓고 텅 빈 대공(大公)의 마음으로 외물(外物)이 올 때 순응할 수 있겠습니까.
지극히 위태로운 것이 임금의 자리이고 지극히 어려운 것이 임금의 자리이니, 하늘이 명철함을 명할지 길흉을 명할지는 처음의 정사에 달려 있습니다. 지극히 크지 않고서는 사람들을 규합할 수 없고, 지극히 바르지 않고서는 사람들의 모범이 될 수 없습니다.
한번 발을 떼면 아랫사람들이 엿보고 명이 한번 내려지면 사방에서 말을 전합니다. 기뻐하면 그것을 빙자하여 은혜를 파는 자가 나오게 되고, 화를 내면 그것을 이용해 위세를 부리는 자가 생기게 되고, 사랑하면 그 틈에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려는 자가 나타나게 되고, 미워하면 그것을 핑계대고 원망을 키우는 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의리가 정립되지 않으면 많은 말을 듣고 쉽게 미혹되고, 뜻을 확고하게 수립하지 않으면 선을 지키다가 혹 다른 길로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 이것이 근본을 세우는 데 있어 삼가야 할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인군(人君)이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마땅히 집안을 다스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집이 다스려지지 않으면 나라가 어떻게 다스려질 수 있겠습니까.
성주(成周)의 제도는 빈어(嬪御), 시위(侍衛), 음식, 의복, 재화를 담당하는 관원들 모두가 천관(天官)의 통솔을 받아 설어(褻御)와 복종(僕從)에 바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므로, 임금이 윗자리에 있으면서 자기 몸만 삼가하고 아무 하는 일이 없어도 정치의 교화가 널리 퍼졌던 것입니다.
폐조(廢朝) 때에 집안의 다스림이 먼저 어지러워지자 참언이 이를 통해 들어오고, 뇌물이 이를 통해 들어오고, 사사로이 바치는 것이 이를 통해 들어와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벼슬을 주는 권한이 모두 이를 통해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인척이 그 일을 하고, 중간에는 무변(武弁)과 음관(蔭官)이 그 일을 하고, 나중에는 사대부 중에 이름이 있다고 하는 자들까지도 모두 그런 일을 하다가 나라를 망치고 나서야 그치게 되었습니다.
아! 처음에 그런 일을 할 때에야 또한 어찌 끝내 이 지경에 이를 줄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저 사대부들도 어찌 모두가 탐욕에 눈이 먼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까. 다만 발신(發身)하는 길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온 세상이 다 그런 짓을 한 것입니다. 둑에 터진 구멍 하나가 엄청난 홍수의 재앙을 가져오고, 처음에 싹을 잘라버리지 않으면 결국에는 도끼자루를 들어야 하는 법이니, 이것은 거울로 삼아야할 지난 일들입니다.
성명(聖明)께서 임어(臨御)하신 것이 해가 중천에 뜬 것과 같으니, 조금 운무(雲霧)가 끼는 일은 다시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생각의 차이에 따라 성(聖)과 광(狂)이 판가름 나니, 삼가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요전(堯典)〉을 상고해보면 ‘큰 덕을 밝혀 구족(九族)을 친목하게 하였다.’ 하였고, 《예기》에 이르기를, ‘성인이 남면(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릴 때 우선적으로 행한 일이 다섯 가지인데, 그 첫째가 친족을 다스리는 일이다.’ 하였으니, 이는 어찌 친족을 친하게 대하고 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나서 사물을 아끼는 것이 본래 선후의 순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난 폐조(廢朝) 때에는 간신(奸臣)이 권력을 장악하고 시기와 의심으로 유도하여 종척(宗戚) 중에 멸망한 자가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의구심을 품고 내외의 마음이 이탈된 것 모두가 이 때문에 빚어진 것입니다. 다행히 창성한 조정을 만나 윤리가 다시 밝혀지고 사람들마다 제자리를 얻고 시달리던 사람들이 소생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성명의 큰 교화가 아니겠습니까. 편안하게 감싸주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또한 당연히 힘써야 할 가법(家法) 중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이상이 신이 말한 대경(大經)입니다.
정치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인 만큼 한 마디 말로 갑자기 성취하기는 본래 어렵습니다. 그리고 큰 난리를 겪은 후에는 민심이 쉽게 동요하는 법입니다. 재생(裁省)의 제도는 본래 목적이 폐단을 바로잡기 위한 것인데 완악한 백성들은 원망하고, 대동법(大同法)은 본래 목적이 부역을 고르게 하기 위한 것인데 세력 있는 백성들은 원망합니다.
널리 탕척(蕩滌)해주지 않는 것이 아닌데도 만족할 줄 모르고, 병사를 징발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인데도 고달프게 여기니, 이는 법이 나빠서가 아니라 백성의 습성을 변화시키기 어려워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백성이 원망한다고 한다면 완악한 백성이나 세력 있는 백성을 논할 것 없이 모두 국가의 근심거리가 됩니다.
도성 백성의 기쁨과 슬픔은 탁지(度支 호조)에 달려 있고 외방 백성의 기쁨과 슬픔은 수령에게 달려 있으니, 백성의 원망이 사라지게 하려면 백성의 호오(好惡)를 살피기만 하면 됩니다. 섣불리 바꾸려고 하면 이루어진 법이 무너질 것이고, 지나치게 각박하게 하면 슬퍼하며 탄식하는 소리가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 만약 광무제(光武帝)가 중흥했던 것처럼 하려 한다면 옛 법도를 모두 일소한 뒤 한 시대의 제도를 새로 제정해야 할 것이고, 서한(西漢)의 소제(昭帝)나 선제(宣帝)처럼 조종(祖宗)의 법도를 계술(繼述)하려고 한다면 너무 심한 것들을 제거하고 미비한 점만 보충하면 될 것이요, 완급에 중도를 얻어 각박한 것만 없애면 될 것입니다.
무릇 개혁 할 때에 반드시 먼저 백성들의 실상을 살핀 뒤에 시행할 발판을 마련하고, 변통할 때에 반드시 처음과 끝을 잘 계획하고 생각해서 영구히 지속되도록 도모한다면 수원(水原)에서 물이 흐르듯이 명령이 내려져 따르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을 쓸 때에는 행실이 올바른 자를 먼저 등용하고 풍속을 권장할 때에는 근본이 충실해지도록 노력하며, 예양(禮讓)을 숭상하고 경쟁을 중지시키고, 염치를 기르고 부박한 행동을 억제시켜 차라리 형식보다는 내용을 따르게 하고 명분보다는 실질을 앞세우게 한다면, 세도(世道)를 혹 만회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몇 년 동안 행하여 백성의 뜻이 안정되고 국가의 체모가 확립되면 시의(時宜)를 살피고 헤아려 조종의 전범(典範)을 본받아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말한 대요(大要)입니다. 치병(治兵)에 관한 한 가지 일이야말로 오늘날 가장 시급한 일이라 제때에 진작시키지 않으면 갑작스러운 변고에 대처할 수가 없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수신(帥臣)과 병무를 잘 아는 여러 숙장(宿將)들에게 하문하여 일찍 계책을 세우도록 하셨으면 합니다.
수령이 많기는 하나 고을마다 적임자를 얻기는 어려우며, 수령들을 현부(賢否)에 따라 출척(黜陟)하는 권한은 전적으로 감사(監司)에게 있는데, 성격이 유약해서 결정을 짓지 못하고 주저하는 자는 그런 일을 처리하는 데 방해만 되고, 한창 나이에 예리한 기세를 지닌 자라야 충분한 위의와 풍모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시험해보지 않으면 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신은 바라건대, 종신(從臣)이나 낭서(郞署) 중에서도 만일 그런 자질을 소유한 자가 있으면 잘 살펴 발탁해서 지방관의 중책을 맡겨 보았으면 합니다. 관료가 자주 바뀌는 바람에 아전들이 권세를 행사하고 있는데, 관사의 일이 자질구레하고 번잡해지는 이유는 모두 이 때문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육조의 낭료와 각사의 관원들에 대해 일체 법전에 실려 있는 임기 만료제를 적용하고 지레 옮기는 일이 없게 했으면 합니다. 관직을 맡아 제대로 일하지 못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소속 육조에서 늘 규찰하고 적발하여 정부(政府)에 보고한다면 육조와 서사가 모두 통제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관서(關西) 일로(一路)에 병제(兵制)를 세우려 할 경우, 강령(綱領)을 총괄하여 다스리는 일은 비록 원융(元戎)에게 있으나 명을 받들어 봉행하고 지휘하는 데 있어서는 수령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니, 멀리서 헤아리는 것이 직접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고, 미리 추산하는 것이 상황에 부딪쳐 처리하는 것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도원수(都元帥) 및 양서(兩西)의 관찰사에게 하유(下諭)하여 그 도에 소속된 수령의 현부(賢否)를 한 번 상세히 조사하여 조목별로 위로 보고토록 하여 이웃 고을마다 모두 실제로 재능이 있는 자를 보내어 공효를 이루도록 책임을 지웠으면 합니다.
원자(元子)의 나이가 이미 12세나 되었으니, 국본(國本)을 세우는 일을 참으로 제때에 맞게 해야 함은 물론 올바로 인도하는 방도 역시 대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신은 바라건대, 예관(禮官)에게 세자 책봉하는 전례를 여쭈어 시행하게 명하시어 원자가 일찍 사부(師傅)와 빈료(賓僚)를 가까이하여 덕을 기르는 바탕으로 삼도록 했으면 합니다.”하고, 〈원춘사잠(元春四箴)〉을 지어서 바쳤는데, 〈임조잠(臨朝 箴) 〉, 〈연거잠(燕居箴)〉, 〈진학잠(進學箴)〉, 〈체건잠(體乾箴)〉이다. 임금이 가납하고는 술을 내리고 표피(豹皮)를 하사하셨다.
갑자년(1624) 봄, 부원수 이괄(李适)과 순변사 한명련(韓明璉)이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려 할 적에 부군에게 자전(慈殿)을 호위하여 강도(江都)로 나누어 들어갈 것을 명하였다. 떠나려 할 즈음에 공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주상께서 자전과 분조(分朝)해서는 안 됩니다.”하니, 임금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양궁(兩宮)이 마침내 함께 떠나 공주(公州)에 머물렀다.
얼마 후에 이괄이 부하에게 죽음을 당해 그 수급이 조정에 바쳐지자 예관(禮官)이 진하(陳賀)할 것을 청하니, 부군이 논의하기를, “반역한 신하가 서울을 함락시켜 어가(御駕)가 몽진(蒙塵)하였으니, 이것만으로도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데, 어떻게 축하드릴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임금이 도성으로 돌아올 때에 공은 선비들에게 시험을 치르고 합격자를 발표하라는 명을 받고 며칠 공산(公山 공주)에 머물렀다가 올라와 복명하였다. 임금이 호종한 신하들을 책훈(策勳)하려 하였는데, 부군이 또 불가하다고 극력히 말하자 중지하였다.
사헌부가 어떤 일로 자전(慈殿)의 하인을 붙잡아 가두자 임금이 진노하여 사헌부의 관원들을 모조리 체차시켰는데, 부군이 차자를 올려 너그럽게 용납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따랐다. 인성군(仁城君) 공(珙)이 누차 역적의 공초(供招)에서 언급되어서 당시 의론이 유배시켜 화의 근본을 없애버리려고 하였다.
임금이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자, 부군이 동료 재상에게 말하기를, “법대로 집행하려는 조정의 의논이 안 될 것은 없지만 지친을 용서하는 것 또한 임금의 성덕에 관련된 일입니다.”하였다. 우찬성 이귀(李貴)가 그 말을 듣고 조정에서 부군을 욕보이자 부군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아래 관원이 대신(大臣)을 욕보였으니, 이는 국가의 체모를 허물어뜨리는 일입니다.”하고, 이어 사직소를 올리며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 이광정(李光庭)과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장만(張晩)을 불러 이귀가 조정에서 부군을 욕보인 정황을 하문하였는데, 이광정과 장만이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임금이 크게 진노하여 엄지(嚴旨)를 내려 몹시 질책하고 세 사람을 모두 파직시키는 한편 누차 사신을 보내 부군을 위로하여 머물게 하니, 부군이 차자를 올려 세 신하에 대한 견책을 관대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대사헌 최명길(崔鳴吉)이 능원군(綾原君) 보(俌)가 법을 어긴 정상을 논하니, 임금이 진노하면서 지극히 준엄하게 분부를 내렸는데, 부군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대각(臺閣)을 예우하고 사기(士氣)를 진작시켜 영원히 하늘에서 명을 받을 수 있도록 도모하소서.”하니, 임금이 후한 비답을 내렸다.
옥당이 대사헌 남이공(南以恭)을 탄핵하자, 임금이 박정(朴炡) 등이 편당(偏黨)을 지었다는 이유로 외직에 보임할 것을 명했는데, 부군이 차자를 올려 구제하였다. 그런데 이귀(李貴)가 또 경연에서 박정 등의 일을 논하며 매우 중도에 어긋난 말을 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박정과 나만갑(羅萬甲) 등을 유배 보내라고 명하자, 부군이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아침에 경연에 입시했을 때에 이귀의 진언(進言)으로 인하여 신(臣) 역시 소회를 진달하려 하였으나, 이귀의 말이 계속 이어져 끊이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하고 나가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입을 다물고 물러 나와서 마음속으로, ‘두 원훈(元勳)이 이처럼 맞버티고 있는 것도 국가의 복이 아닌데, 하물며 이귀가 김류(金瑬)에 대해 논한 것은 대부분 중도를 잃은 것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고는 혼자 지붕만 쳐다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교를 보니, 박정과 나만갑(羅萬甲)을 멀리 유배 보낸다고 하는데, 이것이 어찌 분열의 실마리를 깊이 걱정하여 그 근원을 막으려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박정과 나만갑의 중도에 벗어난 소행에 있어서는 이미 견책의 벌을 시행하였습니다. 이귀가 오늘 연석에서 그런 말을 할 줄 박정과 나만갑이 미리 알았을 리가 없으니, 그들이 범한 죄는 이미 견책을 받았던 전날의 일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귀의 일로 인해 갑자기 중한 법률로 다스리면 아마도 정당한 형정(刑政)이 아닌 듯합니다.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신의 말을 곡진히 살피시어 속히 성명(成命)을 중지하소서. 신이 이 일에 어찌 감히 편드는 것이 있겠습니까. 신(臣)의 구구한 마음은 성상께서 혹시라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하였다.
천재(天災)로 인해 언로(言路)를 열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극력히 진언하였는데, “성인은 천하의 뜻을 제대로 통하게 해주기 때문에 천하의 일을 제대로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라도 통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면 마치 사람이 답답한 증세가 생겨 위아래가 통하지 않고 막혀서 그대로 난치병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임금이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 인조의 부친)의 외숙인 김공량(金公諒)에게 관직을 내려주려고 하자, 승지 김덕함(金德諴)이 불가하다고 극력히 주장하였으나 임금이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부군이 아뢰기를, “김공량은 선대 임금 때에 궁중에 연줄을 대서 누를 끼친 일이 많습니다. 성상께서 사사로운 은혜로 인해 그를 고위 관원의 반열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하니, 임금이 마지못해 부군의 논의를 따랐다.
을축년(1625),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 구씨(具氏)가 세상을 떠났다. 예관이 상례(喪禮)를 의논하면서 임금에게 기년복(朞年服)을 입도록 하였다. 임금이 삼년상을 행하려 하자, 부군이 동료 재상과 함께 궐내를 지키면서 강력히 간쟁하니, 임금이 마침내 기년복을 입었다. 임금이 직접 상주(喪主) 역할을 수행하려 하자, 부군이 백관을 이끌고 아뢰기를, “상(喪)에는 반드시 주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예문(禮文)에 처음부터 끝까지 상주를 세운다는 글이 있습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상주가 없는 상이 있겠습니까. 지금 계운궁(啓運宮)의 상에 능원군(綾原君) 보(俌)로 상주를 삼도록 청한 것은 성명(聖明)께서 종묘(宗廟)의 주인이 되셨기에 사친(私親)을 위해서는 상주 역할을 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명의 복제(服制)를 이미 낮추었으니,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이 복제를 낮추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청컨대 예관(禮官)의 말에 따라 속히 거행하소서.”하였는데, 누차 아뢰고 나서야 비로소 윤허하였다. 임금이 대원군의 묘호를 원(園)으로 칭하고자 하였는데, 부군이 논의하기를, “‘원(園)’이라는 것은 곧 ‘능(陵)’의 다른 이름입니다. 옛 사람의 문자에 ‘원릉(園陵)’이니 ‘원침(園寢)’이니 하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천자와 제후를 통틀어 말한 것이지 ‘능’ 자 아래나 ‘묘’ 자 위에 별도로 ‘원’ 자 하나를 붙여서 높이거나 내리는 절차로 삼아 ‘능’이니 ‘원’이니 한 것은 아닙니다.”하였다.
예관(禮官)이 공성(孔聖)의 호(號)를 개정하고 아울러 종사(從祀)하는 선유(先儒)들의 승출(陞黜)까지 의논할 것을 청하자, 부군이 논의하였는데, 그 대략에,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홍무(洪武) 15년(1382)에 문묘(文廟)를 지었는데, 그 당시 천하의 악독(嶽瀆)과 성황(城隍), 전대(前代) 충신열사의 봉호(封號)를 모두 바로잡으면서도 문선왕(文宣王)의 묘호(廟號)와 종향(從享)의 봉작(封爵)만은 그대로 하였으니, 지금 가벼이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하니,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이 철산(鐵山)의 가도(椵島)에 진을 설치한 뒤 위로 명나라 조정을 속여 강제로 군량을 조달시키고 스스로 봉작을 부여하면서 본국에 폐해를 끼쳤으므로 하나의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 강왈광(姜曰廣)과 왕몽윤(王夢尹) 두 조사(詔使)가 원자(元子)가 탄생한 일로 본국에 조칙을 반포하고 아울러 모문룡의 병력을 사열하였다.
그런데 모문룡이 조사에게 이롭지 못한 짓을 행하려 한다는 유언(流言)이 있었으므로 조정의 의논이 흉흉해져 대신(大臣) 이하가 궐에 모여 변보(變報)를 기다렸다. 조정의 논의에서 어떤 이는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자고 청하기도 하였는데, 부군이 홀로 아뢰기를, “모문룡이 교활하여 예측하기가 어려우나 감히 조사를 해치지는 못할 것입니다.”하였다.
서쪽에서 보고가 들어 왔는데, 모문룡이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조사를 대우하였다고 하자 사람들이 부군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병인년(1626) 가을, 부군이 전시(殿試) 독권관(讀卷官)으로 시험을 관장하였는데, 합격자 명단을 개봉하고 보니 아들 익전(翊全)과 손자 면(冕)이 모두 그 속에 있었다.
이에 사헌부가 먼저 시관이 사정(私情)을 따른 것을 논하면서 파방(罷榜)과 아울러 시관을 파직할 것을 청하였다. 부군이 강가에 나가 대죄하면서 차자를 올려 의금부에 나아가 신문받기를 청하니, 임금이 비답을 내려 위로하고 타일렀다. 부군이 재차 시원(試院)의 곡절을 진달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고 또 비답을 내리기를, “차자를 보고 시말을 모두 알았다.
답안지를 추후에 다시 받아들인 것은 조박(趙璞)이 한 짓이지 경의 잘못이 아니다. 전날 사간원의 계사는 사실이 아니었으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경은 나의 뜻을 받아들여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고 즉시 들어와 나의 서운한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라.”하였다. 그때 마침 임금이 원(園)에 참배하려 하면서 명을 내려 부군을 불러 도성에 머물도록 하였으므로 부군이 마지못해 부름에 나아갔다.
임금이 고관(考官) 조박(趙璞)이 추후에 시험 답안지를 받아들여 그 아들을 합격자 명단에 넣었다는 이유로 하옥하여 국문하도록 하였는데, 부군이 세 차례 차자를 올려 사직하면서 진언하기를, “추후로 다섯 축(軸)을 받아들인 것은 여러 시관(試官)이 공동으로 회의하여 나온 것이고, 조전소(趙全素)의 글 또한 여러 시관이 공동으로 살펴보고 뽑은 것인데, 조박만 신문을 받고 있으니 신이 어떻게 편안히 조정에 설 수 있겠습니까.”하고, 이어 사직소를 올리니 임금이 승지를 보내 손수 비답을 내려 유시(諭示)하기를, “경이 조정에 있던 40년 동안 한 점의 잘못도 없었으니, 경의 명성은 나도 들은 지가 오래이다.
이번에 억울하기 짝이 없는 말이 뜻밖에 나오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으니, 이는 경의 불행일 뿐 아니라 국가의 불행이기도 하다. 설령 이번 일에 공정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하더라도 과거 허균(許筠)의 간사한 짓을 예로 들자면 그때 상신(相臣)은 눈치를 채지도 못했다.
더구나 경은 이번 일에 대해 가부를 말하지 않았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지난날 상신이 그 일 때문에 물러나지는 않았으니, 오늘날 또한 근거로 삼을 전규(前規)가 있다 하겠다. 그리고 승출(陞黜)하고 고하(高下)를 매길 때에 경은 참여하지도 않았으니, 시관이 파직당하고 조박이 국문을 받는다고 해서 경이 편안치 못하게 여길 것이 뭐가 있겠는가. 경은 나의 뜻을 받아들여 고사하지 말고 속히 출사하여 여러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하였다.
재차 승지를 보내 비답하기를, “경의 말을 보건대 감히 나갈 수 없는 세 가지 이유를 말하였으니, 아! 경이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저 고관(考官)들이 파직당한 것은 취사(取捨)를 불공정하게 했기 때문인데, 가부(可否)를 결정하지도 않은 상신(相臣)이 저들에게 무슨 혐의가 있단 말인가.
지난날 대간이 잘 알지 못하여 전시(殿試)에 명관(命官)이 없는 규정을 몰랐다고 하니, 그때 논한 것도 실제로 경을 직접 언급해서 공격한 것이 아니었다. 논하여 아뢰었던 뜻이 일단 이와 같고, 국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더욱 염려할 바가 아니니, 만약 경의 뜻에 부응해 준다면 사람들이 내가 경을 의심한다고 말할 것이고, 경이 시종일관 물러나기를 구한다면 사람들이 경이 나에 대해 유감을 갖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전부터 경을 믿고 의지해 오던 것과 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충성을 바치려 했던 것 모두가 거의 허사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경의 거취는 국가의 안위에 관계될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사세 또한 이러하니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은 나의 뜻을 속히 받아들여 빨리 나와 공무를 행하도록 하라.”하였다.
정언 김광혁(金光爀)이 파방이 마땅한지의 여부에 대해 논의하자 부군이 더욱 강력하게 물러가기를 요청하니, 임금이 또 사관을 보내 유시하기를, “지난번 전시(殿試)에 경이 참여하지 않았고, 근래에 국사(國事)가 날이 갈수록 점점 염려스러워지고 있기 때문에 나의 생각으로는, 고관(考官)이 비록 파직되고 하옥되었지만 상신(相臣)은 그 당시에 일을 담당하지 않았으니, 국사를 위하여 애써 나오는 것도 의리에 해될 것이 없고, 재상의 자리가 모두 비어 있어 대신이 불안해 하니, 출사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내가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에도 해될 것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여러 번 근신(近臣)을 보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깨닫도록 하였다. 그런데 어제 의외의 논의가 있어, 나를 일러 진실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았다 하고, 경을 배척하여 그러한 재상을 어디에 쓰겠느냐고 하여 나의 마음을 억누르고 경이 운신에 낭패를 보게 하였으니, 실로 그 의도를 모를 일이다.
또 신하가 대신을 칭찬하는 것은 왕법에 있어 매우 엄중하지 않은가. 지금 경은 남들의 칭송과 배척을 심하게 받았으니 필시 출사하기가 불안할 것이고, 나도 끝내 형식만 숭상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으니 지금 우선 경의 요청을 따라 경의 뜻을 편안히 하고자 한다.”하고, 정승의 직위를 해임하고 판중추부사에 임명하였다.
부군이 마침내 당세(當世)에 뜻이 없어 벼슬을 그만두고 시골에 돌아가 여생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 정묘년(1627) 정월, 또 차자를 올려 마음속의 뜻을 진언하였는데, 윤허를 받지 못하자 잇따라 계속 상소를 올려 기필코 윤허를 받고자 하였다. 그런데 노적(奴賊)이 침입하여 의주(義州)를 습격하여 함락시키고 한 달 사이에 관서(關西) 지역을 유린하였다.
그러자 부군을 기용하여 좌의정 겸 세자부에 임명하고는 특별히 명을 내려 세자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도록 하였다. 24일 모갑(某甲)에 길을 나섰는데, 수원(水原)에 머무를 때는 차자를 올려 호남의 병력을 가지고 적을 토벌하라고 청하였고, 전주(全州)에 머무를 때 적이 조약을 체결한 뒤에도 사방으로 군사를 풀어 약탈을 자행한다는 말을 듣고 또 차자를 올려 적이 조약을 위반한 일을 힐난하라고 청하자, 모두 비답이 내렸다.
부군이 남도(南道)에 있으면서 성심으로 세자를 보호하고 일에 따라 규계(規戒)를 올렸는데, 도움이 되는 일이 매우 많았고 노고도 아울러 드러났다. 무군사(撫軍司)를 설치하여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 공과 마음을 합해 계책을 세운 뒤 병력을 조달하고 군량을 운송하여 대조(大朝 임금)에 조달해 주었으며, 군민(軍民)의 고초를 조목별로 위에 아뢰어 감면시켜주었다.
3월, 세자를 모시고 강도(江都)에 들어가 복명하자 임금이 술을 내리고 호피(虎皮)와 구마(廐馬)를 하사하였다. 간관(諫官) 중에 상소하여 대신을 비난하는 자가 있었는데, 부군이 동료 재상과 함께 차자를 올려 물러날 것을 청하자 임금이 위로하고 타이르며 허락하지 않았다.
4월, 어가(御駕)가 도성으로 돌아왔다. 영의정이 사직하여 체차되었으므로 부군이 좌의정으로 그 직책을 수행하였다. 이때 나머지 적들이 몽고병(蒙古兵)을 거느리고 청천강(淸川江) 서쪽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겉으로는 우호를 맺었으나 출몰하여 노략질하며 철수해 돌아갈 뜻이 없었다. 부군이 건의하기를, “적이 우리 경내에 있는데 장사(將士)가 머뭇거리고 있으니, 부원수(副元帥) 이하를 책려하여 군대를 엄히 단속해서 뒤를 치게 하소서.”하였다.
정충신(鄭忠信)이 남북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와 정주(定州)에 나가 주둔하면서 간사(間使)를 보내 약조를 위반했다고 질책하니, 적이 마침내 철수하여 돌아갔다. 적이 물러간 뒤에 유민들 중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부군이 곡식을 옮겨서 구휼해 주고 곡식 종자와 밭갈 소를 나누어 줌으로써 생업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영장(營將)을 팔도 전역에 설치해 군사에 관한 일을 분할하여 전적으로 조련을 담당하게 하는 한편, 안주(安州)의 성과 해자를 증수하고 군량을 비축하고 병장기를 수선하였으며, 명을 내려 본도의 병사(兵使)를 황주(黃州)에 남겨 지키게 하고, 성곽을 축조하여 수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 의논하는 자들은 자못 의견을 달리 했으나 부군의 뜻이 확고부동하여 그 공사를 결국 끝마쳤다.
7월, 영의정 겸 세자사로 승진하여 규례에 따른 직책을 겸직하였다. 차자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임금이 너그럽게 권면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겨울에 도제조로 세자의 가례(嘉禮)를 주관하였는데, 번거로운 형식과 헛된 비용을 생략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따랐다.
무진년(1628) 봄, 유효립(柳孝立) 등이 모반을 꾀하여 난을 일으키려 하였는데, 허적(許𥛚)이 그 모의를 알고서 재신인 홍서봉(洪瑞鳳)에게 편지를 보냈다. 홍서봉이 미처 발설하기도 전에 도하(都下)가 흉흉해지자, 부군이 그 정상에 대해 대략 듣고는 묘당에 앉아 급히 대장 신경진(申景禛)과 이서(李曙)를 부른 뒤 군대를 출동시켜 병기를 싣고 오는 적들을 체포하게 하는 한편, 홍서봉을 재촉해 허적의 편지를 발설하게 하였다.
얼마 뒤 허선(許選) 등이 고변하여 적도를 모두 잡아들였는데, 전후로 복주(伏誅)된 자가 50인에 이르렀다. 잡혀온 자들 중에 조금이라도 사실과 다른 점이 있으면 그 때마다 죄인을 살리려는 의논을 내어 임금께 아뢰어 모두 용서받게 하였다.
유효립의 옥사는 아주 복잡하였는데 은밀한 모의와 간교한 계책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안으로는 궁인(宮人), 환수(宦竪), 액정(掖庭)의 하리(下吏)와 결탁하고, 밖으로는 죄를 받았거나 뜻대로 안 되어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들과 연결하여 거사할 날짜까지 잡아 재앙의 기미가 드리운 상황이었는데, 부군은 기미를 알아차리고 난리를 평정하였다.
밤낮으로 옥사를 다스리느라 몇 십 일씩 나오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 여러 죄수들의 공초가 실타래처럼 엉키고 구름처럼 쌓였어도 허실을 판별하면서 마치 촛불로 비추고 셈하듯이 하여 한 사람도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없었다. 옥사(獄事)가 완결되자 임금이 상변(上變)한 사람 및 추관(推官)까지 모두 녹공(錄功)할 것을 명했으나, 부군은 동료 재상과 함께 극력 사양하여 그 공을 차지하지 않았고 단지 하사한 안마(鞍馬)만 받았다.
정묘년(1627) 여름, 혜성(彗星)이 북방에 나타났는데 태복(太僕)의 주마관(主馬官)이 죽는다는 점사(占辭)가 나왔고, 금년 봄에는 토성(土星)이 태성(台星)에 들어갔는데, 이는 상상(上相)에게 재앙이 있을 조짐이라고 태사(太史)가 아뢰었다. 부군이 상상(上相)으로 태복시의 제조를 겸하여 오래도록 마정(馬政)을 주관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걱정하였는데, 6월 11일에 이르러 어깨뼈 주위에 악창이 생겼다.
이때 크게 가뭄이 들었으므로 차자를 올려 자신에게 책임을 돌렸으며, 임금이 남쪽 교외에서 친히 기도드릴 때에도 부군은 병 때문에 따라가지 못하였다. 또 차자를 올려 해직을 청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경의 차자를 보니 내가 몹시 걱정스럽다. 경이 완쾌되기만을 기다릴 것이니, 경은 안심하고 조리하라.”하고, 어의(御醫)를 보내 어약(御藥)을 가지고 가서 병을 살피게 하였으며, 어찬(御饌)을 마련하여 대궐 안의 사람을 보내 여러 차례 병문안을 하도록 하였다.
왕세자 역시 세 차례나 궁관(宮官)을 보내 문후(問侯)하였는데, 이 달 29일 무오일에 마침내 일어나지 못했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영의정이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으로서 정성을 다해 나라를 도왔는데, 국가의 운수가 불행하여 이렇게 훌륭한 신하를 잃었으니, 내가 너무나도 애통하다.
상례와 장례에 필요한 물품들을 담당 관서로 하여금 전례에 따라 보내도록 상가(喪家)에 보내어 부족함으로 인해 생기는 근심이 없게 하라.”하였다. 임금이 중사(中使) 및 예관(禮官)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고 궁궐에서 별도의 부의(賻儀)를 내렸으며 특별히 도승지를 보내어 상주를 조문하게 하였다.
자전(慈殿)도 중사를 보내 고자를 조문하게 하고 궁궐에서 부의를 내렸다. 왕세자는 부음을 듣고는 그날 즉시 궁료(宮僚)를 이끌고 외당(外堂)에서 곡(哭)을 하였고, 7월 13일에 직접 영연(靈筵)에 나아가 조문하여 곡을 하며 슬퍼하고 남아있는 자제들을 위로하였다. 또 내외(內外)에서 보내온 별도의 부의가 모두 넉넉했는데, 이는 실로 세상에서 보기 드문 특별한 은전(恩典)이었다.
부군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라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학문할 줄 알았다. 성동(成童)의 나이에 이미 나아갈 방향을 알았으며, 명예를 구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스승과 제자 사이를 자랑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으며, 성현의 글 속에서 스승을 얻었다.
평소 엄숙한 자세를 견지하면서 장중하게 자신을 다스렸으며, 한결같이 경(敬)을 주장하고 화락하고 화평하게 지냈으며,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입신의 근본으로 삼았다. 성명(性命)의 근원을 보고서 빨리 정통한데에 나아갔으며, 속유(俗儒)의 형태에 구애받지 않았고 법도가 고아하고 올곧았다.
선유(先儒)가 이치를 강론한 책에 대해서는 끝까지 깊이 들어가 탐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근대 학자들의 설에 대해서도 모두 익숙하게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정백자(程伯子 정호(程顥))와 소요부(邵堯夫 소옹(邵雍))를 더욱 좋아하여 늘 말하기를, “백자는 성인의 자질을 지녔고, 요부는 성인의 재주를 가졌다.”하였다.
전원으로 돌아온 뒤로는 세상일을 떨쳐버리고 마음을 고명한 경지에 두었는데, 이를 사람에게 말한 적이 없었으며, 마치 스스로 알지 못하는 듯하였다.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가묘(家廟)를 배알한 뒤 물러 나와서는 향을 피우고 단정히 앉아 종일토록 엄숙한 자세를 견지하였는데, 비속한 언어를 입에 내놓지 않았고 나태한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제사 때에는 반드시 미리 재계(齋戒)하여 성찰하고 정결히 하였으며, 마련하고 진설(陳設)하는 일 등을 모두 직접 하였다.
형제들과 우애 있게 지내며 종당(宗黨)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부군의 천성에 근본을 둔 것이나 높이고 낮추는 데에 절도가 있었다. 홀로 된 누님과 30년 동안 같이 살면서 어머니처럼 모셨고, 의지할 곳 없는 조카딸 몇 사람을 집에 데려다 입혀주고 먹여주었다. 문에는 사적인 청탁이 들어온 적이 없었으며 내외의 구분이 엄격하였다.
집이 본래 가난하여 부족한 것을 빌려 썼는데, 밭 한 고랑 늘린 것이 없고 하인 하나 불어난 것이 없었다. 집의 거실이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가인(家人)이 수리하자고 청하니, 부군이 말하기를, “나랏일이 아직 안정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집안일을 하겠는가.”하였다.
거처하는 방에는 책상과 의자만 놓여 있을 뿐이었으며, 임종하던 날에는 의금(衣衾)에 여벌이 없었고, 쌀독도 비어 제사에 올릴 음식도 남에게 의지하여 마련하였다. 선조께서 조정의 신하들 중에 청렴하고 근실한 자를 선발하여 정표(旌表)하라고 명하니 조정의 의론이 모두 부군에게 귀결되었는데, 부군이 대신에게 극력 말하여 중지시켰다.
일찍부터 병을 앓아서 벼슬길에 있어서도 대부분 한산한 곳을 청해 거처하였다. 남과 어울려 남의 집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여러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길을 다닌 적이 없었으며, 오직 임금이 시키는 대로 따라 쉽고 험난한 것을 피하지 않으면서 임명을 받으면 곧바로 떠나곤 하였다.
선조(宣祖) 말년에 이르러 매우 융숭한 대우를 받았는데, 오래도록 서액(西掖 경연)에 있으면서 진강할 때마다 세세히 분석하고 정미한 의리를 요약해서 진달했으므로 선조께서 그 때문에 경청하였다. 여러 차례 승정원의 수장을 지내며 백사(百司)의 기강을 바로잡았으며, 사리에 맞게 진언(進言)하여 옛사람이 납언(納言)하던 풍도가 있었다. 육경(六卿)의 지위에 이르러서는 정사의 대체(大體)를 지키는 데 힘쓰고 일을 잘 다스렸다.
성명(聖明)을 만나고 나서는 아무리 어렵고 걱정스러운 일을 당해도 확고하게 소신을 지키면서 치우침이 없이 자신의 입장을 내세웠으며, 여러 의견을 종합하되 헛된 의논에 흔들리지 않았고, 충성스럽고 유익한 일을 확장하면서도 요점을 가려내었다. 충성되고 진실한 마음으로 잠규(箴規)를 올려 요약해서 말씀드리는 도리를 다하였고 주밀하게 원대한 계획을 내고서 공을 모두 윗사람에게 돌렸다.
진달한 것이나 주의(注擬)하고 조치한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남들에게 말한 적이 없어서 비록 자제들이라 하더라도 듣지 못하였다. 인재를 아껴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였으며 후진을 권장해 이끌어 기필코 성취시켜 주었다. 늘 말하기를, “전한(前漢)이 융성했던 것은 풍속이 돈후하여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이었다.”하였다.
이익을 따라가고 명예를 좇으며 속된 일을 경영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 몸까지 더러워지는 것처럼 여겼으며, 늘 후배들이 대부분 방종하고 장중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치도(治道)를 논함에 있어서는 어수선하게 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말하기를, “조종(祖宗)을 본받기만 해도 다스리기에 충분하다.”하였다.
조정의 잘못된 처사를 보면 그날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고, 한 가지 좋은 계책을 얻으면 반드시 건의하여 시행하곤 하였다. 기염을 토하며 이야기하는 자와는 같이 따지지 않았으나 실제로 일에 당해서는 끝내 가차 없이 대하였다. 낭서(郞署)의 낮은 관리를 만나면 신신당부하며 가르쳐 단속시켰고 잘못하는 것이 있어도 반드시 덮어주었다. 조정의 청이 있을 때면 반드시 백관들보다 앞서 나섰는데, 죽을 때까지 이런 일을 태만히하지 않았다.
정묘년(1627) 여름부터 국가에 일이 많아 비국(備局)이 회좌(會坐)하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일찍 출근해 늦게 퇴근하곤 하였다. 아무리 피곤해도 억지로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나라의 상황이 위급하니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의리를 극진히 해야 마땅하다.”하였다.
금년 여름에 오랑캐의 사신이 우리 경내(境內)에 들어왔는데 그들이 요구하는 몇 개 조목 모두가 득실에 크게 관계되는 것들이었다. 부군이 그때 벌써 악창을 앓고 있었으면서도 병을 무릅쓰고 관아로 나갔으며, 그 뒤 병이 위독해졌을 때에도 깊이 염려하며 그 일을 팽개치지 않았다.
비국의 낭관(郞官)이 임금의 분부를 받고 논의를 수합하러 오자 부군이 입으로 몇 줄을 불러 주면서 시자(侍者)에게 받아쓰게 하다가 힘에 부쳐 그만두었는데, 열이 나서 기(氣)가 끊어지려 하고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오랑캐의 사신이 돌아갔는지의 여부를 물어보았으며, 또 말하기를, “가뭄의 재해가 이와 같으니 백성이 어떻게 살아나겠는가. 하늘이 재해를 내린 것은 우리들의 죄 때문이다. 내가 죽어 하늘이 비를 내려 주신다면 유감이 없겠다.”하였다.
부군은 감식안이 탁월하고 일을 미리 잘 헤아려 국가의 중요한 일과 인물의 종시(終始)에 대해 헤아린 것이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벗과 한 번 친교를 맺으면 흰 머리가 될 때까지 변함이 없었는데, 추포(秋浦) 황신(黃愼)과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상(喪) 때에는 신위(神位)를 만들어놓고 곡하였으며, 시간이 갈수록 더욱 마음 아파하였다.
평소 절도 있게 말을 하고 행동에 일정한 법도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 앞에서 오만하게 하거나 장난을 치지 못했는데, 공의 모습을 멀리서 보고 달아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미리 경계를 설정해두지 않고 가슴을 활짝 열어놓았으며,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흔연히 같이 어울려 간혹 점잖은 해학으로 응대하였는데, 사기(辭氣) 사이에 봄 날씨와 같은 따뜻한 기운이 흘러 넘쳤다.
아! 부군은 병인년(1626)에 무함을 당한 뒤로는 조정에 있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비록 외적의 침입으로 다시 출사하였지만 사직소를 준비해 늘 주머니 속에 차고 다녔다. 유효립의 옥사가 마무리되자 부군이 사직소를 꺼내 불초한 나에게 보여주면서 말하기를, “이런 때라면 은혜를 청해도 되지 않겠는가.”하였다.
얼마 뒤에 좌상 오공(吳公)이 벌써 사직을 청했다는 소식을 들은 데다 그냥 놔둘 수 없는 변방의 일이 있어 마침내 책상 위에 말아두고 수심에 차 그날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가 한 달을 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나셨다. 아! 하늘이여! 어찌 이리도 혹독한 재앙을 내린단 말입니까.
부군은 젊었을 때 호(號)를 경당(敬堂)이라 하였고, 또 백졸(百拙)이라고 하였으며, 어떤 때는 남고(南皐)라 하기도 하고, 현헌(玄軒)으로 바꿔 부르기도 하였다. 별업(別業)이 김포(金浦) 상두산(象頭山) 아래에 있어 상촌거사(象村居士)라는 호를 쓰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호를 현옹(玄翁)이라고 하였으며, 시골에 돌아가 있을 때는 방옹(放翁)으로 일컬었고, 유배 생활 중에는 여암(旅菴)이라고 편액(扁額)을 걸었다. 백사(白沙)의 부음을 듣고는 세상에 자기를 알아주는 이가 없음을 슬퍼하며 부질없이 〈현옹자서(玄翁自敍)〉를 지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현옹이란 자는 어떤 사람인가. 글로 세상에 이름났어도 옹(翁)은 글을 일삼지 않았고, 조정의 높은 관직을 역임했어도 옹은 관직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죄를 받아 외방에 유배되었어도 옹은 그 죄 때문에 동요되지 않았다.
특별히 즐기거나 좋아하는 것도 없고 경영하는 것도 없었으며 가난해도 부유하게 여겼고, 풍요한 환경에 처해도 부족했던 때처럼 지내었다. 사람과 교제할 때에는 다른 사람이 친소(親疏)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고, 외물(外物)과 접할 때에는 외물이 구속시킬 수가 없었다.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고 제자(諸子)에 널리 통했으며 조금 근원에 이르렀으나 아직 완전한 귀결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만년에 《주역》을 좋아하여 소옹(邵雍)의 천지 만물의 도수(度數)에 회통(會通)한 바가 있었으나 이것 역시 그 대략적인 면을 통했을 뿐이었다. 책이라면 보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서적을 보는 외에는 종일토록 초연하게 지냈으므로 속물(俗物)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였다.
한 시대의 뛰어난 인물과 모두 교우를 맺어 옹을 아는 자가 많았는데, 혹 그의 글을 알아주기도 하고 혹 그의 행한 일을 알아주기도 하였다. 백사옹(白沙翁)이 옹과 이웃에 살면서 옹의 흥취를 알아주었는데, 옹도 마찬가지로 백사를 인정하였다. 그런데 백사가 바른 말을 하다가 죄를 얻어 북쪽 변방에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자 옹이 지기(知己)를 잃은 탄식을 금하지 못하면서 세상에 대한 뜻이 없어졌다.”하였다.
부군의 문장 작법은 육경(六經)에 기초하고 있는데, 어려서는 창려(昌黎 한유(韓愈))를 좋아하였고, 장년이 되어서는 고문(古文)을 모두 가져다 읽었으며, 만년에는 마침내 스스로 깊은 경지를 열었다. 단지《좌전(左傳)》, 《사기(史記)》, 《장자(莊子)》, 〈이소(離騷)〉, 《예기(禮記)》, 고악부(古樂府), 《문선(文選)》과 시(詩)는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당(唐)나라 제가(諸家)의 작품을 취하여 좌우에 두고 애송하였고, 명나라 제가들의 문체도 자못 좋아하였다. 서법(書法)도 힘이 있고 아름다웠으나 계해년(1623) 이후로는 문묵(文墨)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퇴궐해서는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저술한 시문(詩文)으로는 《상촌고(象村稿)》 전집(前集) 10책, 후집(後集) 2책, 속집(續集) 4책, 별집(別集) 6책, 여집(餘集) 3책, 내집(內集) 1책, 만집(漫集) 6책, 《선천규관(先天窺管)》 1책, 《구정록(求正錄)》 1책, 《화도시(和陶詩)》 3책이 있다.
아! 부군이 조정에 있던 40년 동안 영광과 오욕의 세월을 두루 겪었으며 그 자취는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분명히 남아 있으니, 불초한 내가 혼자서 사사로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혹독한 화를 만나 경황이 없어 글에 조리가 없기에 감히 입언하는 군자들에게 질정하노니 행여 돌아가신 분에게 글을 지어주기를 바라노라. <끝>
[註解]
[주01] 선부군 …… 행장 : 이 글은 작자의 부친인 신흠(申欽, 1566~1628)에 대한 행장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ㆍ상촌(象村)ㆍ현옹(玄翁)ㆍ방옹(放翁)이다.
[주02] 성부(省部) : 옛날 상서성(尙書省)이나 이부(吏部)와 같은 관청으로 조선의 육조(六曹) 따위를 이른다.
[주03] 염락제현(㾾洛諸賢) :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등 송(宋)나라 때의 성리학자(性理
學者)를 가리킨다.
[주04] 영유(永柔) : 평안도 영변(寧邊)의 속현(屬縣)으로, 선조가 의주(義州)로 파천할 때 이곳에 임시 행재소(行在所)를 두었다.
[주05] 송유진(宋儒眞)의 역모 : 송유진은 임진왜란 이후 혼란으로 인해 흩어진 병사들과 기근으로 말미암아 떠도는 백성들 2,000여 명을
거느리고 천안(天安)과 직산(稷山) 등지에 출몰하면서 노략질을 하였다.
도성의 경비가 허술하다는 것을 알고는 의병대장이라 칭하면서 반란을 일으켜 서울로 진격하려고 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직산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宣祖修正實錄 27年 1月 1日》
[주06] 조정이 …… 청하자 : 기미책(羈縻策)은 왜적과의 화친을 의미한다. 왜적의 기세가 강해지자 1594년 가을에 명나라가 왜(倭)와 화
친하고 풍신수길(豐臣秀吉)을 일본 국왕(日本國王)으로 봉해 주는 조건 가운데 하나로 조선에서 완전히 철군할 것을 요구하며, 우
리나라 조정에도 화친에 따를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1595년 여름에 심유경(沈惟敬)으로 하여금 조선에 있는 왜군의 철군을 감시하게 하였고, 아울러 조선에는 적당 배신(的
當陪臣)을 차출하여 심유경 등을 따라 왜영(倭營)에 가서 철군을 감시하도록 하라는 칙명을 내렸는데, 화의(和議)에 반대하던 황신
이 적당 배신에 차임되었다. 《燃藜室記述 卷17 宣祖朝故事本末》
[주07] 정(貞)과 원(元)의 덕 : 원형이정(元亨利貞)을 건(乾)의 사덕(四德)이라 하는데,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 “원(元)은
선(善)의 으뜸이고, 정(貞)은 일의 줄기이다.” 하였다.
[주08] 비(否)와 …… 때이니 : 비(否)와 태(泰)는 《주역》의 괘 이름으로, 비는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어서 천지가 서로 막히는
상이고, 태는 하늘이 아래에 있고 땅이 위에 있어서 천지가 서로 교섭하는 상이다. 여기에서 비태가 서로 교차한다는 것은 막힌 운수
인 비에서 트인 운수인 태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주09] 사성(四聖)을 …… 드러났습니다 : 사성은 복희, 주 문왕, 주공, 공자이다. 복희는 괘(卦)를 그었고, 문왕은 단사(彖辭)를 붙였고,
주공은 효사(爻辭)를 지었으며, 공자는 십익(十翼)을 지었다. 삼현은 송(宋)나라의 주돈이(周敦頤), 정이(程頤), 주희(朱熹)이다. 주돈이는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정이는 《역전(易傳)》을, 주희는 《주역본의(周易本義)》를 지었다.
[주10] 괘효(卦爻)의 강유(剛柔) : 괘효는 역(易)의 괘와 효로 한 괘에 각각 3효를 음양으로 나누어서 8괘가 되게 하고 그것이 거듭하여
64괘가 된다. 64괘는 한 괘가 6효로 이루어지고, 효는 양효(陽爻)와 음효(陰爻)로 나누어지는데, 양은 강, 음은 유라 한다.
[주11] 삼극(三極) : 삼극은 천(天), 지(地), 인(人)으로, 삼재(三才)라고도 한다.
[주12] 경방(京房)과 위백양(魏伯陽) : 경방은 후한(後漢) 원제(元帝) 때 사람으로, 초연수(焦延壽)에게 역(易)을 배워 《역전(易傳)》을
지었는데, 이를 《경씨역전(京氏易傳)》이라 한다. 술수(術數)로는 초연수와 함께 초경(焦京)으로 불린다. 위백양은 한(漢)나라 사
람으로, 도술(道術)을 좋아하여 제자 3인과 산에 들어가서 신단(神丹)을 만들었다. 《참동계(參同契)》, 《오행상류(五行相類)》 등
의 책을 지었다.
[주13] 선유(先儒)가 …… 심학(心學)이다 : 송(宋)의 학자 소옹(邵雍)이 진단(陳摶)의 학문을 터득하여 복희선천괘위도(伏羲先天卦位
圖)를 작성하였는데, 여기에서 말한 선유는 소옹을 지칭한다. 소옹은 선천상수학(先天象數學)을 주장하였다.
[주14] 선(善)으로 …… 되었습니다 : 복괘(復卦)와 구괘(姤卦)의 생성을 들어 음양의 순환하는 원리를 말한 것이다. 복괘는 전체 음효(陰
爻)에서 양효(陽爻)가 처음 하나 생긴 상태이고, 구괘는 전체 양효에서 음효가 처음 하나 생긴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음효 하나로
시작하여 전체가 음이 되는 경우와, 양효 하나로 시작하여 전체가 양이 되는 경우를 말한 것이다.
[주15] 곤(坤)의 위태로움 : 《주역》 〈곤괘(坤卦) 초육(初六)〉에 “서리를 밟게 되면 두꺼운 얼음이 곧 얼게 된다.[履霜堅氷至]”라고 한 내
용을 말한다.
[주16] 비(否)의 …… 생각하소서 : 모든 일을 그때그때 시의(時義)에 맞게 할 것을 괘상(卦象)을 들어 설명한 것이다. 즉 음과 양이 각기
제 위치에 있어 교감되지 않아 통하지 않는 비괘(否卦), 모두 어긋난 상을 지닌 규괘(睽卦), 아래를 감하여 위에다 보태는 상을 지닌
손괘(損卦), 소인이 성하고 군자가 없는 상을 지닌 박괘(剝卦) 등과 같은 경우를 당하면 그때마다 적절한 방도로 대처하라는 말이
다.
[주17] 대유(大有)의 …… 것 : 백성들로 하여금 불이 하늘 위에서 널리 비추는 대유(大有)의 괘상(卦象)처럼 성대하고 풍부한 생활을 누
리게 하고, 불이 위에 있고 물이 밑에 있어서 일이 성취되지 못하는 미제(未濟)의 괘상처럼 어려운 일이 없도록 정사를 하는 것을 말
한다.
[주18] 남쪽으로 건너간 뒤로는 : 송나라 제8대 임금 휘종(徽宗)과 9대 흠종(欽宗)이 금(金)나라로 잡혀간 사건이 있은 뒤 제10대 고종
(高宗)이 양자강을 건너 남쪽의 임안(臨安)에 도읍한 것을 말하는데, 이를 남송(南宋)이라 한다. 《宋史 卷24 高宗紀》
[주19]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 구씨(具氏) : 인조의 생모로,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定遠君)과 혼인하여 연주군부인(連珠君夫人)으로 봉해졌다가,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부부인(府夫人)에 진봉(進
封)되고 궁호(宮號)를 계운궁(啓運宮)이라 하였다.
[주20] 허균(許筠)의 간사한 짓 : 허균이 전시(殿試) 대독관(對讀官)으로서 제멋대로 사정(私情)을 써서 아들, 사위, 동생, 조카를 과거에
합격시킨 일을 말한다. 《光海君日記 2年 11月 22日》
[주21] 나를 …… 하여 : 《인조실록》 4년 9월 19일 기사에, 정언 김광혁이 파방이 불가하다고 하면서 우의정 신흠을 신구하는 부분에 자
세한 내용이 보인다.
[주22] 간사(間使) : 적지에서 정보나 상황을 몰래 수집하는 사자를 말한다.[주-D023] 유효립(柳孝立) …… 꾀하여 : 인조반정으로 인해
제천(堤川)에 유배되어 있던 유효립이 몰락한 대북(大北)의 잔당들과 제휴하여 광해군을 상왕(上王)으로 모시고 선조의 다섯째 아
들인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민 사건을 말한다. 《仁祖實錄 6年 1月 3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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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先府君領議政文貞公行狀.
府君諱欽。字敬叔。申氏出於全羅道之谷城縣。至太師壯節公崇謙。翊麗祖合三韓爲元勳。竟以身殉節。賜籍平山。其後遂爲平山人。世襲圭組。入我朝有諱䁱。弱冠魁大科。爲司諫院右正言。言事不合。退居幸州。自號西湖散人。足不跡都門。年八十一而終。伯寅齋公槩相世宗大王。致太平。而篤論者稱公固出寅齋上。寔府君之五代祖也。高祖曰自繼。典牲署主簿。贈吏曹參判。曾祖曰世卿。有潛德。爲己卯諸賢所推重。初授王子師傅。官止社稷署令。贈吏曹判書。祖曰瑛。議政府右參贊。贈諡夷簡公。洎府君入相。加贈左贊成。少振華問。歷踐省部。蔚有公輔之望。考諱承緖。文行俱茂。早登上舍。由郞署出宰求禮。邑人懷之。勒石頌德。至于今不替。卒官開城府都事。萬曆壬寅。府君秩亞卿。贈吏曹參判。乙巳府君躋正卿。贈吏曹判書。府君錄宣武靖難原從勳一等。累贈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觀象監事。妣曰恩津宋氏。贈貞敬夫人。卽議政府左參贊麒壽之女。有淑德懿範。世稱女中士。大夫人夜夢。大星入懷。翌日生府君於漢城府之北部彰義洞第。嘉靖丙寅正月二十八日庚申也。生有異表。廣顙大耳。目如明星。右頰有赤痣如彈丸狀。幼時嬉戲不凡。動止端重。七歲大夫人卒於松都任所。府君隨喪行數百里。目不忤視。纍然悲咷。行路咨嗟。俄而議政公繼逝。毀慕倍之。外王父參贊公提而鞠之。八歲始授書。參贊公聚諸孫。令作句語。以春字爲題。公應口曰。天地萬物。春爲長者。參贊公嘆賞。期以遠到。受書數卷。文義大達。不復師受。強記絶人。十歲讀論語,離騷。數遍卽背誦。不差一字。參贊公驚異之。輟篋中新粧論語一帙與之。十三遍觀經史子集。能摛詞屬文。柳西厓成龍奇其文。爲來訪之。十四悉取濂洛諸賢遺書。旁及佛老。無不推硏。領會其旨。參贊公家多藏書。籤軸滿數楹。府君常入其中。閉戶觀之。至忘寢食。象緯堪輿。律歷算數。陰陽岐黃之書。無不涉獵。庚辰委禽於淸江李公濟臣之門。淸江公號治易。府君請益。淸江公講數傳。遽遜師席曰。已見大義。復奚益焉。癸未三司論李栗谷以驕蹇。大諫宋公應漑。乃府君伯舅也。朝回出袖中彈文示府君曰。於爾意如何。府君見啓稿中有某一緇髡也云云。覽竟徐對曰。李珥負當世重望。緇髡等語。似已甚爾。大諫嘿然。群從子弟已譁然以府君黨栗谷。謗議大行。府君見擯於群小始此。乙酉中生員第八名進士第三名。丙戌捷文科。時朝議方植黨。斥逐異己。黜補成均館權知。出爲慶州訓導。移廣州。戊子除司宰監參奉。以事罷。携書出棲于東湖。講學以自適。己丑冬。選入史館。病不應講。庚寅拜藝文館檢閱。序陞至奉敎。辛卯例轉司憲府監察。薦授兵曹佐郞。坐事罷。壬辰倭寇長驅薄都圻。敍府君爲良才察訪。柄臣欲擠之死地也。卽日辭朝赴馹。兵馬雲興。郵遞皆空。巡邊使申砬素威猛。所至人咸股栗。莫敢何。府君入見砬。從容陳弊。砬亦敬憚。無所責。隨砬赴鳥嶺陣前。砬敗。大駕西狩。京師大亂。府君欲追至行在。路阻不能達。迤往峽中。秋由間路舟下江都。要得便趨朝也。鄭相國澈以都體察使來。便宜行事。辟爲從事。府君辭不赴。相國曰。豈以非朝命耶。遂具聞。府君乃應辟。從體察樓船下海。莅湖西。相國才府君。以三南機務一委之。府君召機警吏習文法者十數輩。分授簿牒。齊聲白之。且令軍民陳不便狀。案牘繁宂。控訴紛囂。府君目覽耳受。口詢手判。縱橫膠轕。莫不中窾。幕府戎事。皆立辦焉。爲文宣布朝廷德意。辭旨懇至。聞者無不感激抆淚。官軍與義兵郤。將有紛爭之患。府君又爲文喩之。各陣將士。咸瞿然改圖。冬以司憲府持平。入朝永柔行宮。時大賊在漢都。餘寇彌滿八路。天兵出援。羽檄旁午。辭令酬酢。李公好閔實掌其事。以憂去。悉以畀府君。咨奏揭啓。晝夜叢萃。爲設承文院校檢以授之。或以校理參校常帶之。又知製敎。癸巳五月。拜吏曹佐郞。冬扈駕還都。行人司憲。擎帝詔涖境。遠接使李公恒福。以府君爲從事。甲午正月。陞本曹正郞。宋儒眞謀叛事覺。上親鞫。以府君爲問事郞。按問詳盡。應對精敏。上數目屬之。詢府君年紀。獄完。命陞敍司僕寺僉正。旋拜司憲府執義。朝廷迫於天朝本兵之議。遣使請羈縻之計。府君上箚斥其非。鄭相國澈見螫於時。旣歿猶爲當路者所齮齕。欲追奪官爵。而忌鄭公曄居玉堂。謀先擊去。其辭不直。實欲擠逐一代士流也。府君摭實自劾。竟遞憲職。授成均館司成。以書狀官赴京。乙未三月復命。拜掌樂院僉正軍器寺正,成均館司成。由是與世相左。虛帶散局。奉使四方。以巡按御史往咸鏡道。操履簡嚴。黜陟明當。悍將墨吏。多解印綬歸。監司洪汝諄素桀驁不下人。見府君輒屈己而待之。府君不憚險阻。躬歷村閻。民所疾苦。條陳蠲免。北氓至今稱之。丙申拜議政府舍人。還掌樂院正。爲都元帥權慄從事官。西敍副護軍。轉司成。逆賊李夢鶴擧兵叛。連陷數邑。元帥聞變進兵。賊已就擒。朝廷拿治巨魁。黨與數千。令元帥鞫之。元帥欲悉誅。府君白元帥曰。脅從罔治。王者之政。賊徒皆鋤耰之民。今若盡誅。非國家之利也。元帥遣府君具聞于朝。上允其請。仍命府君協同元帥驗治。府君受命按獄。秪誅首惡七人。餘皆分輕重疏決。物情翕然。湖中按堵。丁酉司贍禮,賓寺正。天朝軍門兵部尙書郉玠督師出來。以接伴使申點從事。逆軍門于遼東鳳凰城。十一月還朝。連除平山府使楊州牧使。大臣以專管文書啓留之。戊戌以掌樂院正兼侍講院弼善。薦入弘文館爲校理。陞應敎兼校書館校理。楊經理鎬以軍餉不集。令差近臣督之。宣廟命府君行。府君自直廬陛辭。馳往關西。冒暑雨出入海港之間。凡運餉十七萬斛。冬以撰文書驛召。未幾病遞。爲典籍。遷司饔院正。己亥再爲弘文館校理。改宗簿寺正。復入中書舍人。陟弘文館典翰。加階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兼帶如例。又兼承文院副提調。故事承旨不得兼承文提調。而大臣特啓仍帶。自是屢拜承旨。皆不解。冬遞爲忠佐衛上護軍。拜刑曹參議。轉兵曹。庚子由護軍入政院右副承旨。序轉至右。遞爲司直。夏遷禮曹參議司諫院大司諫。遞爲護軍。秋以兵曹參知移吏曹參議。辛丑二月。拜弘文館副提學。上命玉堂謄寫古經周易。寫完。府君進箚子。略曰。殿下乃於宵旰之餘。典學有加。超然獨契於犧文之神理。其範圍天地開物成務之意。可謂至矣。是誠貞元之會。否泰之交。亦殿下祈天永命之一大機也。推是心也。何患乎治之不弘而化之不成也哉。夫易之爲書。經四聖而大義闡。歷三賢而微旨著。卦爻之剛柔。象數之變易。幽明之故。鬼神之情。三極之道。昭晢呈露。搜抉無隱。吉凶悔吝之道。如指諸掌。嫌疑者決。猶豫者定。而人始不迷矣。所謂顯微無間。體用一源。其辭奧其指遠。其變化無窮。苟非有見於聖人之心。得夫義理之正者。鮮不流入於他岐。故竊其數者。專門於占筮。盜其祕者。立幟於爐鼎。若京房伯陽之論。蓋滔滔已。向非程朱傳義。潔淨精微之蘊。幾乎晦矣。先儒有言曰。先天之學。以心爲本。又曰。先天圖乃心學也。至於周氏之太極圖。則斷之以中正仁義。戒之以修吉悖凶。而繫辭之傳曰。聖人以此洗心。退藏于密。治易而不先諸心。愈治而愈不治矣。噫。由善而發者。陽動而復也。由惡而發者。陰萌而姤也。一姤一復。而或至於堅氷有厲。或至於配德乾剛。相去遠矣。人亦孰不欲去彼就此。惟其天理難養而易失。人慾易流而難遏。於是而不知所以制之。則蔽者益蔽。昧者益昧。窮陰剝盡。天地閉塞。易言寂然不動。卽子思子所謂未發之中也。易言感而遂通。卽子思子所謂發而中節也。一以貫之。初無二致。能使吾之心。體寂然之中。天機不昧。感應之際。本源常淨。物交於前而不與俱往。鑑空水止。纖塵莫染。則神明在躬。闔闢由我。觀象玩占。特餘事耳。況天道以元而生萬物。人主體元而理萬民。君人之道。乃一天也。天道健而無息。寒暑迭運。而其序不紊。昏明遞代。而其行不錯。一有所息。則生物之功廢矣。今殿下之所當取則於易。非乾之健乎。伏願殿下。勿泥於口讀文義。勿拘於旁門小說。 唯以中正仁義。爲之定向。以究夫曲成萬物之妙焉。當否之極則思所以傾否者何道。當睽之極則思所以萃合者何道。當損之時則思所以益下之謨。當剝之時則思所以得輿之術。以之而一卦一爻。罔不究其時義。各當其用。則易簡而天下之理得矣。可久可大之業。亦何難於馴致乎。嗚呼。陽數一而陰數二。故從古以來。治日常小。亂日常多。此聖人之所憂。而於消長之節。未嘗不致謹者也。其轉移變通。會其有極。俾斯世躋之大有之盛。而免於未濟之難者。此區區有望於聖明者也。伏見近者天災地異。沓臻層見。民艱政瘼。日滋月甚。壞裂之世道。陵夷之紀綱。若涉大川。浩無津涯。而臣等之所恃。唯在殿下天德有臨。擧而措之爾。宣廟優答之。又命裒春秋左氏胡氏程氏三傳成一書。書成又進箚。申以春秋大復讎之義曰。春秋一書。乃聖人之用而五經之斷案也。尊王黜伯。正名定分。分別是非。明辨善惡。以二百年旣往之事迹。爲千萬世方來之謨訓。其旨微矣。其義大矣。然而聖人之於此。亦有所不得已也。向使周室不東。文武之化未喪。而宣尼之道得行於時。則春秋一部之書。卽當年施措之具。寧止於敎詔來世而已哉。聖人之心。於是而可見。聖人之政。於是而可徵。勿以聖言爲高大而難遵。勿以古道爲迂遠而難遵。存諸中者。必本於天理之正。而不雜以人慾之私。發於事者。必究于王道之極。而不泥於偏伯之數。大而經國制治。小以酬酢百爲。隱而屋漏暗室。莫不秉執天德。則百王不易之大法。豈不可行於今日乎。況春秋所記。莫嚴於亂臣賊子。莫謹於華夷之辨。尤大於復讎之義。故胡氏之傳。未嘗不惓惓於斯。爲後世戒。惜夫言不見用。而南渡偸安。日就陵夷。卒致夷狄入主中夏。未必非此義不明。有以啓之也。噫。精神一到。金石可透。君臣上下。一力齊心。苟以復讎之義。橫在肚裏。有以振勵。一世耳目。噲然改觀。則殿下之崇信是書。愈見其實效矣。宣廟下敎奬之。特加嘉善大夫。乃以箚字弁諸兩書首。壬寅二月。拜禮曹參判。遞授護軍。四月兼五衛都摠府副摠管。冬授同知中樞府事。受命撰天朝將官東征紀實若干卷以進。又撰王妃金氏冊文。俱賜廏馬。癸卯正月。歷禮兵兩曹參判兼藝文館提學。是年三爲副提學兼世子右副賓客。宣廟命以祕書玉堂所藏東國詩文千餘本。屬府君刪定。府君旣撰次。請與文翰之臣證定。投進。賜廏馬以勞之。冬遷禮曹參判。甲辰夏。副提學兼世子左副賓客。遞爲上護軍。轉成均館大司成同知春秋館事。宣廟方講易。設局校正。妙選明經者。府君與焉。秋兵曹參判。冬弘文館副提學。乙巳正月。拜承政院都承旨兼帶如例。夏遞爲護軍。旋拜兵曹參判。十月又受都承旨。十一月擢授資憲大夫漢城府判尹。丙午秋藝文館提學。天朝學士朱之蕃,給事中梁有年齎元孫誕生詔來頒。府君爲義州迎慰使。復命。撰皇華集序。夏兵曹判書。武選公平。無積薪之嘆。時天兵多逋漏者。當刷還。相聚爲群。謀作亂。府君選壯士方便衛送。得無警。遞爲上護軍。秋拜禮曹判書。有金稽者上疏。請追崇德興大院君。疏下宗伯。時首相柳永慶當國。使副提學李惟弘餂府君意。府君正色曰。此事有先儒定論。豈容異議。惟弘色沮去。議遂寢。丁未遞爲上護軍兼五衛都摠府都摠管。戊申正月。知中樞府事兼京幾觀察使兵馬水軍節度使開城府留守。二月宣廟昇遐。初喪之需。皆倚辦京圻。府君能記識應用之需。手抄一卷子。付屬吏預備以待。事無窘歉。以撰玉冊文。徵爲藝文館提學。修宣廟哀冊文。加正憲大夫,拜漢城府判尹兼知義禁府事。以頓遞使護喪。事竣賜廏馬。三司告王子臨海君不軌狀。起大獄。捕治黨與。錮臨海于海島。府君一旬之間。再爲大司憲。俱不拜。光海始不悅。己酉春。拜禮曹判書同知成均館事。天朝行人熊化以弔祭。太監劉用以冊封。俱奉詔來。以府君爲義州迎慰使。秋拜禮曹判書。冬十二月。以知中樞府事。差世子冊封上使赴京。庚戌四月。復命。拜禮曹判書兼知春秋館事。以封典得允。賜臧獲田頃。加階崇政大夫。左相李公恒福以總裁修宣廟實錄。故事以大提學稱都廳主其事。而李公特擧府君。請與大提學同爲都廳。府君援例辭不獲。就史局。謂總裁曰。先王數十年史草。淪喪於壬辰兵燹。先朝美政良弼嘉謨。無一存者。實爲欠典。先籍當時朝紳中淑匿之著見者。括出私藏譜牒碑誌。撮其實蹟。編年紀述。則可備闕疑。總裁韙之。遂經稟裁。幾成頭緖。而李公與府君罷廢。事竟不行。光海新御法宮。欲以童男童女誦經前導。府君以爲人君御法宮。如日中天。豈可作不經事乎。此無以示後。凡三啓始允。辛亥夏。同知經筵。冬知中樞府事。壬子夏兼五衛都摠府都摠管。癸丑四月。死囚朴應犀受李爾瞻,李昌後嗾。從獄中上書。告國舅金悌男挾永昌大君謀逆。辭連縉紳。光海下悌男獄賜死。鍛鍊成獄。先是宣廟遺敎宰臣七人曰。不穀忝位。負罪臣民。若隕淵谷。今忽得重病。翛短有數。死生有命。晝夜之不能違。聖人之所不免。夫復何言。但大君幼稚。未及見長成。以此耿耿耳。我不幸後。人心難測。萬有邪說。願諸公愛護扶持。敢以此託之。蓋聖衷知日後有此變也。至是憸壬承權奸風旨。論以七臣不卽辨明。削去仕版。若以先王遺敎爲矯作也。俄有鄭浹者受陰嗾亂引名。公卿次第就獄。府君亦下吏。蒙釋出。放歸田里。歸金浦議政公墓下。茅茨一間。湫隘不堪居。而府君處之怡然。扁之曰何陋庵。以見志。甲寅築舍於山麓。穿沼種樹。命其居曰坎止窩。深居不出。超然物表。左右圖書。專意探賾。一日取性理大全邵子經世數觀之。忽若開悟。遂窮象數。著先天窺管。後購邵子大全於燕市參合之。不無契者。丙辰秋。光海欲廢大妃。追戮金悌男。肆諸市。大司憲瑾,大司諫造,副提學潚等搆捏罪狀。請遠竄。配春川。府君作苃舍數椽。名之曰旅庵。在謫五年。不履戶庭。唯以墳典自娛。忘其爲羈綰也。辛酉春。獲宥復歸田里。癸亥春。主上殿下擧義反正。湔滌戊申以後罪籍。府君入朝。是日拜吏曹判書。尋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鼎革之初。內外官僚。易置殆盡。府君博採物議。銓注公明。上亦倚府君爲重。悉用首擬者。位著爲之一新。七月進拜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大拜之日。有上變者。逮捕甚繁。上起之一日凡三命。不得已拜命。上卽引見。詢以獄事。府君力陳新化之下。不可使人抱枉。先德意而後刑政。言甚剴切。上爲之改容。獄事果無實狀。悉宥之命下。都下莫不稱慶。翌日被宥者悉詣府君門下叩謝。府君拒之曰。吾爲國耳。豈私若輩耶。冬因災異求言。府君上箚陳時務。略曰。治道有大本大經。爲政有大要。大本立然後盛德大業彰矣。大經修然後家型邦則建矣。大要得然後施措布置立矣。人受天地之中以生。心之本體。虛明純一。初無有不善也。顧其感之者不一。而善惡分矣。先立乎大則小者不能勝矣。此臣之所謂大本也。臣願必有事焉。勿忘勿助可乎。隨事體驗。而不爲撓奪可乎。求之文字。而硏幾極深可乎。索之講論。而擇善固執可乎。仁愛爲體。而至誠持之可乎。懲忿窒慾。而不遷不貳可乎。謹於屋漏。而制於未萌可乎 。廓然大空。而物來順應可乎。至危者天位也。至艱者天位也。命哲命吉凶。在初服矣。非至大。無以合人。非至正。無以式人。一擧足而群下瞯焉。一出令而四方傳焉。喜則有藉而市恩者矣。怒則有藉而駕勢者矣。愛則有藉而濟私者矣。惡則有藉而修怨者矣。義理不定。則多聽而易惑。植志不固。則守善而或移。茲非立本之所當謹者歟。人君爲國。當自家始。家之不齊。國於何有。成周之制。嬪御侍衛。飮食衣服貨賄之官。皆領於天官。䙝御僕從。罔非正人。人君立於上。恭己無爲。而治化旁通矣。廢朝家政先亂。讒譖由是而入。賄賂由是而入。私獻由是而入。生人殺人爵人之權。 皆由於此。初則姻戚爲之。中則武弁蔭官爲之。終則士夫中有名稱者皆爲之。至於喪國而後已。噫。當是時也。亦豈知其終之至於此耶。彼士夫亦豈皆顚冥饕餮者耶。特以發身之路在此。而擧一世而爲之也。涓涓之竇。極於滔天。毫釐不伐。竟用斧柯。前事之鑑也。聖明臨御。如日中天。寸雲尺霧。非復可慮。而一念之差。聖狂攸分。愼而戒之。其不在此歟。若稽堯典。曰克明峻德。以親九族。禮曰聖人南面而治天下。所且先者五。一曰治親。豈不以親親而仁民仁。民而愛物。自有先後之序耶。曩在廢朝。奸臣執權。導以猜疑。宗戚之中。夷滅者多。人懷疑懼。內外離心。莫不以是而致之。幸際昌期。倫彝復明。人人得所。枯喘獲蘇。綏懷敦睦。亦一家法之所當務。此臣之所謂大經也。爲治有漸。固難以片言單辭。馳驟而成之也。大亂之後。民情易以搖動。裁省之制。本以釐弊。而頑民則怨。大同之法。本以均役。而豪民則怨。蕩滌非不廣矣。猶不知足。抄兵所不可已。反以爲苦。非法之不美。民習之難化也。然而苟曰民怨。則無論豪與頑而皆國家之憂也。都民之休戚。繫於度支。外方之休戚。繫於守宰。欲息民怨則察民之所好惡而已。輕爲沿革。則成憲壞矣。過爲刻核。則愁嘆興矣。今若欲如光武之中興。則當盡掃舊章。而新一代之制矣。若欲如西漢之昭宣。而繼述祖宗之軌道。則去太去甚。而補其罅漏已矣。緩急得中。而祛其苛切已矣。凡有更張。必先審下情。以爲注措之地。凡有變通。必謀始慮終。以爲永久之圖。則下令於流水之源。而無有不順矣。用人先行義。勵俗敦本實。崇禮讓而息爭競。長廉恥而抑浮躁。寧質之勝於文。寧名之遜於實。則世道或可挽回。行之數年。而民志定國體立。相時度宜。稽式祖宗之典。而庶幾有爲。此臣所謂大要也。至於治兵一事。今日之所最急者。不及時振勵。則無以應倉卒。臣願下詢帥臣及諸宿將知兵事者。早爲之計焉。守宰之多。難於邑邑得人。黜幽陟明。專在監司。媕婀巽愞者。窒於辦事。盛年鋒銳者。足持風裁。人雖有才。不扣則不鳴。臣願從臣郞署。苟其材也。察而擢之。委之以方面之重焉。官僚數易。吏執其權。百司叢脞。皆以此也。臣願六曹郞僚。各司庶官。一依法典箇滿之制。無徑遷焉。其有當官不治者。則所隷六部。常加糾摘。以報於政府。則六部庶司。有所統屬矣。關西一路。欲建兵制。則總治綱領。縱在元戎。承奉節制。守令尤重。遙度不如目見。預算不如臨機。臣願下諭都元帥及兩西觀察使。將其道守令賢否。一審覈之。條列上聞。使比邑皆畀實才而責其成效焉。元子年已一紀。國本之建。誠宜及時。導迪之方。亦不可不備。臣願下禮官。稟行封典。俾得早親師傅賓僚。以爲毓德之資焉。且獻元春四箴。曰臨朝。曰燕居。曰進學。曰體乾。上嘉納之。宣醞賜豹皮。甲子春。副元帥李适,巡邊使韓明璉擧兵叛。上將南狩。命府君護衛慈殿。分入江都。將發。府君請對。啓曰。主上不可與慈殿分朝。上然之。兩宮遂作一行。次公州。未幾。适爲其下所殺。獻馘于廟。禮官請賀。府君議曰。叛臣陷京。鑾輿蒙塵。此足爲羞。豈可爲賀。上回鑾。府君受試士放榜之命。留公山數日。復命。上欲以扈從諸臣策勳。府君又極言其不可。上乃止。憲府因事囚慈殿下人。上震怒。盡遞憲府官。府君上箚請優容。上從之。仁城君珙。累出賊供。時議欲逬竄。以絶禍本。上久不許。府君謂僚相曰。廷議執法。非不可。而容貸至親。亦上盛德事。右贊成李貴聞其言。廷辱之。府君上箚。以爲下官辱大臣。虧傷國體。仍呈告請退。上召延原府院君李光庭,玉城府院君張晩。問貴廷辱狀。李張不以實對。上大怒。下嚴旨切責。幷罷三人職。屢遣使慰留。府君上箚請寬三人之譴。大司憲崔鳴吉論綾原君俌不法狀。上震怒。辭旨極峻。府君上箚言禮遇臺閣。振勵士氣。以爲祈天永命之圖。上優答之。玉堂劾大司憲南以恭。上以朴炡等偏黨。命補外。府君上箚捄之。李貴又於筵席。論炡等事而語頗失中。上怒命朴炡,羅萬甲等遠竄。府君上箚曰。朝者入侍筵席。因李貴進言。臣亦欲陳所懷。而貴之言縷縷不絶。尋有罷出之命。臣捲舌而退。以心語口曰。兩元勳如是角立。非國家之福也。況貴之論金瑬。多失中者乎。竊自仰屋。卽見下敎。將朴炡,羅萬甲遠竄。此豈非深軫分裂之端。欲杜其源乎。第念炡與萬甲。其所爲不中則已施譴罰矣。貴之今日之言。炡與萬甲未必預知。則其所犯止前日之事而已。以貴之故而遽繩以重律。則恐非刑政之當然。伏願聖明。曲察臣言。亟寢成命。臣之於此。豈敢左右。區區之誠。不願聖上或有失當之擧爾。因天災極陳言路不可不開。有曰。聖人能通天下之志。故能成天下之務。一有不通。則如人之病痞。關膈阻礙。成難療之疾。上欲官大院君之舅金公諒。承旨金德諴力言不可。上不聽。府君言公諒在先朝。夤緣宮掖。貽累多矣。聖上不可以私恩。置之簪紳之列。上勉從之。乙丑連珠府夫人具氏卒。禮官議喪禮。上爲服朞。上欲行三年喪。府君與僚相守闕力爭之。上竟服朞。欲上自主其喪。府君率百官啓曰。喪必有主。故禮文初終有立喪主之文。古今天下。寧有無主之喪乎。今啓運之喪。以綾原君俌請爲喪主者。以聖明爲宗廟之主。而不可爲私親喪主也。聖明服制已降。則與出繼降殺何異。請依禮官言。速爲擧行。屢啓始允。上欲以大院君墓號稱以園。府君議園者。乃陵之異名。古人文字。多園陵園寢之語。通天子諸侯言之。非陵之下墓之上。別著一園字。爲隆降之節。而謂之園謂之陵也。禮官請改孔聖號。從祀先儒陞黜。府君議略曰。太祖高皇帝洪武十五年。作文廟。是時凡天下嶽瀆城隍。前代忠臣烈士封號。罔不釐正。而獨文宣王之廟號及從享封爵如舊。今不可輕議。事遂寢。毛都督文龍設鎭於鐵山之椵島。上欺天朝。剋餉自封。貽弊本國。爲一大患。姜,王兩詔使以元子誕生。頒詔本國。兼閱毛兵。流言毛將將不利於詔使。廷議洶洶。大臣以下就闕下待變。廷議或有請擧兵討之。府君獨曰。毛將狡獪難測。然不敢害詔使也。西報至。毛將待詔使無愆儀。人乃服府君先見。丙寅秋。府君以殿試讀卷官掌試。及拆號。子翊全,孫冕俱與焉。憲府論試官徇私用情。請罷榜。幷罷試官職。府君出江上待罪。上箚請就理對辨。上下御批慰諭之。府君再陳試院曲折。仍乞骸骨。上遣史官。又以御批答之曰。省箚具悉始末。追捧一事。出於趙璞之所作俑。非卿之過也。前日諫院之啓。不無失實之言。豈不非哉。卿體予意。安心勿辭。卽爲入來。慰予缺然之心。適有拜園之擧。命召府君留都。府君黽勉赴召。上以考官趙璞追捧試卷。其子參榜。詔獄鞫問。府君三上箚辭職。陳追捧五軸。出於諸試官公同會議。趙全素之文。諸試官公同考取。而璞被鞫。臣安得晏然立朝乎。仍呈告。上遣承旨。以手批諭之曰。卿立朝四十年。無一點些疵。卿之名聲。予亦聞之久矣。不圖今者無妄之言。出於慮外。非但卿之不幸。抑亦國家之不幸。設或不公。許筠之奸狀。曩時相臣未及覺悟。而況卿之不言可否者乎。昔日相臣不以此引退。則今日之前規。亦有所據矣。陞黜高下。卿不預焉試官之革職。趙璞之被鞫。於卿有何不安之事乎。卿體予至意。須勿固辭。從速出仕。以副輿望。再遣承旨御批曰。見卿之言則以三不敢爲辭。噫。卿未之深思耶。彼考官罷職。以取舍不公。不爲可否之相臣。於彼何嫌頃日臺諫未免生疏不知殿試無命官之規云其時所論。實非侵及卿身也。論啓本意卽如此。國法之半屈半伸。尤非念及之地。其亦何嫌哉。若副卿意則人謂予疑卿。卿若終始求退則人謂卿於予有憾。予之自前倚仗卿之終始願忠。不幾於盡歸虛地耶。卿之去就。非但繫國家安危。今日事勢。亦旣如此。不得不深思也。卿須亟體予意。速出行公。正言金光赫論罷榜當否。府君請去愈力。上又遣史官諭之曰。頃者殿試。卿不預焉。近日國事日漸艱虞。故予意以爲考官雖被罷囚。相臣其時不爲擔當。則爲國事勉出。於義不妨。鼎席俱空。大臣不安其心。勸勉出仕。於予待大臣之道。亦似無害。故屢遣近臣。諭予至意。昨有意外之論。謂予待之不以實。斥卿將焉用彼相。沮抑予心。狼狽卿身。實不曉其意也。且人臣稱譽大臣。時王之律甚嚴。今卿旣被人言。極其抑揚。必不安於出仕。予亦不自甘於終尙文具。今姑勉副卿請。以安卿意。解相授判中樞府事。府君遂無當世意。欲致仕歸田。爲終身計。丁卯正月。又上箚陳情。不允。將連章累牘。期於得請。奴賊入寇。襲義州陷之。旬月之間。蹂躏關西。起府君拜左議政兼世子傅。特命陪世子南下。以二十四日某甲啓行。次水原。上箚請以湖南兵討賊。次全州。聞賊約和後四出放劫。又上箚請詰賊破約。俱報聞。府君在南中。推誠保護。隨事進規。弼翼弘多。劬勤幷著。設撫軍司。與體察使李公元翼。協心經略。調兵運糧。助給大朝。軍民弊瘼。條上蠲除。三月陪世子入江都。復命。上宣醞。賜皐比廏馬。諫官有疏斥大臣者。府君與僚相上箚請退。上慰諭不許。四月上駕還京師。首相辭遞。府君以左揆當軸。時餘寇率蒙古耕種淸川之西。外爲和好。出沒鹵掠。無撤回意。府君建言賊在我境。將士逗遛。請策勵副元帥以下。嚴兵躡後。鄭忠信領南北諸軍。進駐安定。且發間使。責以負約。賊遂捲還。賊退之後。遺民多飢死。府君移粟賑救。分給穀種耕牛。使之安業。設營將於八省。分轄軍務。以專操鍊。增修安州城池。積穀繕甲。命本道兵使留鎭黃州。刱城廊爲必守計。議者頗不同。府君意不撓。其役遂完。七月晉領議政世子師。兼帶如例。上箚辭之。上優奬不允。冬以都提調。掌世子嘉禮。請省繁文浮費。上從之。戊辰春。柳孝立等謀叛將作亂。許𥛚知其謀。貽書于宰臣洪瑞鳳家。瑞鳳未及發。而都下洶洶。府君微聞其狀。坐廟堂。急招大將申景禛,李曙。發卒捕賊之載兵器者。且促洪瑞鳳發許𥛚書。俄而許𥶷等上變。悉捕賊徒。前後伏誅五十人。被引者有絲毫不實。輒傅生議。白上宥之。孝立之獄寔繁。其陰謀詭計。無所不至。內結宮人宦豎掖庭涓史。外聯被罪人若失志怨國之類。剋日擧事。禍機垂發。府君炳幾戡亂。日夜按獄。或連旬不出。諸囚所供。絲棼雲委者。咸能核其虛實。若燭照而數計。無一人枉死者。獄畢。上命錄上變者功。幷錄推官。府君與僚相力辭不居。秪拜鞍馬之賜。丁卯夏。有星孛于太陰。其占曰太僕主馬之官亡。今年春。太史奏土星入台星。上相厄。府君以上相兼提調太僕。久管馬政。人甚憂之。六月十一日。肩胛發疽。時大旱。府君上箚引咎。上躬禱南郊。府君病不能從。又上箚乞解職。下御批曰。省卿箚辭。予甚憂悶。佇待卿勿藥之喜。安心調理。遣御醫齎御藥視疾。撤御廚遣掖庭人。屢問疾。王世子三遣宮官候問。是月二十九日戊午。遂不起。上敎曰。領議政以先朝舊臣。竭誠輔國。邦運不幸。失此良弼。予甚痛悼。喪葬之需。其令該曹依前例輸送。喪家俾無不足之患。上遣中使禮官弔祭。內賜別賻。特遣都承旨弔孤。慈殿遣中使弔孤。內賜賻儀。王世子聞訃。卽率宮僚擧哀于外堂。以七月十三日。親臨靈筵。弔哭盡哀。撫慰遺孤。又致內外別賻俱優等。實曠世之異數也。府君早孤。長於外家。無資受之益。而自知爲學。舞象之年。已知向方。恥於近名。不爲師生詡詡之地。能得師於聖賢書。平居儼然。自治克莊。一於主敬。和樂坦夷。以孝悌忠信爲行身之本。見於性命之源。超詣精通。擺脫拘儒繩尺。而規度雅正。先儒講理之書。無不硏幾極深。近代學者之說。亦皆淹貫渙釋。尤慕程伯子,邵堯夫。常曰。伯子有聖人之質。堯夫有聖人之才。旣歸田間。刊落世故。玩心高明。而未嘗以語人。若不自知也。晨起冠帶謁家廟。退焚香危坐。終日穆如。粗俗之辭。不出於口。惰慢之色。不形於色。祭祀必宿戒。省滌供設。咸親執。友兄弟睦宗黨。根於天性。而隆殺有節。與寡姊同居三十年。事之如母。姪女之無歸者數人。置之家衣食 之。門絶。私謁。內外斬斬。家故貧。往往假貸不給。而無一畝之斥。一指之息。居第寢廡傾塌。家人請修之。曰國事未定。何以家爲。處一室。床榻蕭然。屬纊之日。衣衾無副。甁罌告匱。祭奠賴人而具。宣廟命選朝紳之廉謹者以旌之。廷議歸府君。府君力言大臣止之。夙嬰羸疾。多丐閑處散。不喜與人造請。足不蹋衆趨之途。唯上所使。罔避夷險。拜命輒行。洎宣廟季年。眷遇頗隆。在西掖久。每當進講。毫分縷析。精義造約。宣廟爲之聳聽。屢長銀臺。綱紀百司。獻替惟允。有古納言之風。致位六卿。務持大體。事克修擧。逮遇聖明。値時艱虞。秉節旣確。特立無偏。集衆思而不撓浮議。廣忠益而能擇其要。箴規忠諒。盡納約之道。訏謨密勿。咸歸美於上。凡有陳列注措。未嘗宣言。雖子弟未之聞也。愛惜人才。捨短取長。誘掖後進。期於成就。恒謂前漢之興隆者。在於風流篤厚。恥言人過也。見人有趨利逐名。經營俗務者。若將浼己。常以後輩多尙弛放。不自矜重爲嘆。論治道。不喜紛更曰。法祖宗。亦足治耳。見朝廷失擧。彌日不寧。得一善策。必建請而行之。有盛氣談論者。不與之較。而臨事終不假借。遇郞署小官。申申敎勑。有不能。必掩覆之。凡有朝請。必先百僚。至沒身不懈。自丁卯夏。國家多事。備局坐衙無虛日。早往晏罷。雖甚憊亦強起曰。國勢岌岌。當盡盡瘁之義耳。今年夏。虜使入境。其所要數款。皆關大得失。府君已患疽。力疾赴衙。及疾革。猶深念不置。備局郞以上敎收議。府君口呼數行。令侍者書之。氣乏而止。熱作將絶。聲在喉間。數問虜使還否。且言旱災如此。民何所聊。天災之作。吾輩罪也。吾死而天雨則無憾矣。府君鑑識明悟。揣事懸合。國家機宜。人物始終。籌之無不符者。凡朋游一定交。至白首無貳。黃秋浦,李白沙之喪。爲位而哭。久而愈傷。平生語嘿有節。起居有常。人不敢傲戲於前。有望而却走者。然不設防畛。胸次洞達。遇會心人。輒欣然傾倒。間以雅謔。辭氣之間。藹然若春溫也。噫。府君自丙寅被誣之後。不樂在朝。雖以寇難不免更出。而具一疏常置佩囊中。孝立獄完。府君出疏稿示不肖翊聖曰。此時可以乞恩否。俄報左相吳公已請急矣。又有邊務之不可廢者。遂捲置案上。愀然竟夕。未逾月而遽至於斯。嗚呼天乎。降割之酷也。府君少號敬堂。又號百拙。或曰南皐。易之以玄軒。別業在金浦之象頭山下。一號象村居士。晩號玄翁。歸田稱放翁。在謫扁旅庵。聞白沙之逝。悼世之無知己者。謾爲玄翁自敍曰。玄翁者。何許人也。以文名於世。而翁不以文爲事。以官顯於朝。而翁不以官爲心。以罪竄於外。而翁不以罪爲撓。無所嗜好。無所經營。視貧猶富。處豐如約。與人交。人不得以親疏。接乎物。物不得以拘絆。少志于學。旁通九流。粗涉其源。未竟其歸。晩好羲易。有會於邵氏天地萬物之數。而亦通其崖略而已。書無所不觀。書籍之外。翛然終日。俗物不敢干也。交游盡一時勝流。知翁者多。或知其文。或知其行事。有白沙翁與翁比隣。能知翁趣造。翁亦知白沙。白沙以直言得罪。貶卒於北荒。翁有絶絃之嘆。無意於人世矣。府君爲文章。本於六經。幼嗜昌黎。旣壯悉取古文讀之。晩乃自闢堂奧。秪取左馬莊騷禮記周禮古樂府文選。詩李杜唐諸家寘左右。而頗愛明諸家書法遒媚。然未嘗爲人操筆。癸亥之後。不屑於文墨。公退靜坐而已。所著詩文象村稿前集十筴。後集二筴。續集四筴。別集六筴。餘集三筴。內集一筴。外集一筴。漫集六筴。先天窺管一筴。求正錄一筴。和陶詩三筴。嗚呼。府君立朝四十年。備經顯晦。已迹焯乎在人耳目。非不肖孤所敢私之者。茶毒荒迷。詮次闕遺。敢質于立言之君子。庶有辭于逝者爾。<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