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저지와(井底之蛙)
우물 정(井), 밑 저(底), ‘정저’라 함은 ‘우물 밑,우물안’을 뜻하고, 어조사 지(之), 개구리 와(蛙), ‘지와’라 함은 ‘~의 개구리 ’를 의미한다. 따라서 ‘정저지와’라 함은 “우물안 개구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정중지와(井中之蛙)라고 하기도 한다.
내가 보는 세상이 가장 크고,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하며, 내가 뛰고 있는 시간이 가장 빠르다고 하는 삶이 있다. 이런 사람은 일명 장자가 말하는 우물안의 개구리이다. 자신이 바라보는 우물 속에서 보는 하늘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진짜 하늘을 설명할 수가 없다. 우물 속에서 바라보는 별은 우물 둘레 만큼만 보일 뿐이다. 광대한 밤하늘의 수많은 별을 바라볼 수가 없다. 옹졸하기 짝이 없다.
장자(莊子)의 추수편(秋水篇)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황하의 신 하백(河伯)이 자신이 다스리는 황하가 물이 불어나서 끝없이 펼쳐진 것을 보고 천하의 아름다움이 모두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황하의 기슭을 벗어나 큰 바다를 보고는 그 광대무변(廣大無邊)함에 자기의 견식이 얼마나 옹졸했는지를 깨달았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했던 생각이 무너진 것이다.
이때 바다를 지키는 신 약(若)은 황하의 신 하백에게 세가지를 충고 해준다.
“우물에 있는 개구리에게는 바다에 대하서 말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개구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다.
(井蛙不可以語海者拘於虛也:정와불가이어해자구어허야 )
여름만 살다가는 곤충에게는 찬 얼음에 대하여 설명해 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곤충은 자신이 사는 시기에만 얽매어 있기 때문이다.
(夏蟲不可以語氷者篤於時也:하충불가이어빙자독어시야)
생각이 굽은 선비에게는 진정한 도에 대해서 말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가르침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다.
(曲士不可以語道者東於敎也:곡사불가이어도자 속어교야)
이상을 요약하면,
우물안의 개구리는 공간에 구속되어 있고, 여름벌레는 시간에 걸려있고, 지식인은 지식의 그물에 걸려있다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을 존귀하게 생각하는 장자에게는 인(仁)이나 예(禮)나 의(義)에 구속되는 유교의 무리와는 더불어 이야기 할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면서 장자는 이 고사를 통해 세가지 집착과 한계를 파괴하라고 충고하고 있다.
첫째, 자신이 속해 있는 공간을 파괴해야 한다.
인간이 사는 지구도 우주공간에서 바라보면 작은 티끌에 불과하다. 넓은 세계로 나가 안목을 활짝 열어야한다. 논어에 공자가 “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게 보인다”고 했다. 이를 ‘등태산 소천하’(登泰山小天下)라고 한다. 높은 산에 오르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다 부질없이 보이는 법이다.
동해바다를 보고 망망대해라고 느끼던 사람은 태평양을 나가보아야 동해가 얼마나 협착(狹窄)한 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시골동네에서 바둑 잘 둔다고 뽐내는 사람도 서울 올라가 프로기사들과 대적해 보면, 자기가 놀던 세계가 얼마나 작은 곳이었는 지를 알게된다.
무릇 좁은 공간을 벗어나야 세상이 어떤 것인 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좁은 공간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되도록 여행을 많이 해야 한다. 경부선을 타던 사람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면 세상이 얼마나 넓은 지를 체감하게 되는 것과 같다.
둘째, 자신이 살아가는 시간을 파괴해야한다.
자기가 살던 시대만 고집해서 고리타분한 얘기를 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다. 설득력도 없다. 흡사 고장난 유성기에서 흘러간 옛노래를 들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시대의 흐름과 세태의 변화를 주시할 필요가 있다.
셋째,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파괴해야한다.
21세기는 지식정보의 시대이다. 하루가 다르게 기존의 지식과 기술이 바뀌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지식만 가지고는 적응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인문계통에서 학위논문을 심사할 때에도 3년이 지난 지식을 인용하는 논문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과학기술계는 변화가 더욱 심하다. 과학기술과 지식은 1년을 버티기가 힘들다고 할 정도로 변화가 심하다. 이런 지식 정보화 시대에는 타인의 의견에 보다 귀를 기울이고, 새로운 지식세계에 동참해야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이 세가지의 그물 (공간과 시간 그리고 기존지식)에 걸려있는 경우가 많다. 출생지역과 출신학교에 얽혀 있는 지연과 학연등의 공간의 그물, 눈 앞의 이익만 생각하고 멀리 내다볼 줄 모르는 시간의 그물, 알량한 학벌과 지식으로 독불장군처럼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지식의 그물, 이 얽힌 그물들을 걷어내지 않는다면 진정한 성공인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가 보는 하늘 만이 옳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보는 하늘도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
어느 지방에 큰 산이 있는데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이 산을 돌산 (石山)이라고 부르고 , 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이 산을 육산(肉山)이라고 부르고 있다.
북쪽에는 햇볕이 들지 않고 나무가 자라지 않아 돌 무더기들만이 즐비한 산이었다. 그래서 석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반면에 남쪽에 사는 주민들은 햇볕이 잘 들고 나무가 무성하여 이 산을 육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같은 산을 두고 위치한 공간에 따라 다르게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산의 정상(頂上)에 올라 산을 전체적으로 둘러보면, 이 산 은 석산도 아니고 육산도 아닌 양자가 혼합된 중성산인 것을 알 수 있다.
연애에 빠져있는 사람에게는 사랑은 달콤하다고 느껴 질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실연한 사람은 사랑은 쓰디쓴 것이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세상의 쓴맛과 단맛을 다본 사람에게 ‘사랑이 어떻드냐’라고 물어보면 ‘사랑은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한 것“이라고 대답할 지도 모른다. 이른바 헤겔의 정반합(正反合)의 원리에 도달하게 된다.
여야가 민생은 뒷전으로 한 채, 자기당의 이익과 정권 쟁취에만 혈안이 되어 쟁투하고 있다. 툭하면 ‘국민의 뜻’이라고 국민의 이름을 판다. 정작 하는 짓은 국민의 이익과는 상반되는 행동을 한다. 이른바 ‘우물안 개구리’ 식으로 옹졸하게 자기내 이익만을 챙기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아무쪼록 계묘년에는 이러한 정저지와(井底之蛙)식의 정치행태를 벗어나기 바란다.(2023.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