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이즘 ( Dadaism )
제1차 세계대전(1914~18) 말엽부터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예술운동이다. 다다(dada)라고도 한다. 조형예술(造形藝術)뿐만 아니라 넓게 문학·음악의 영역까지 포함한다. 다다란 본래 프랑스어(語)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木馬)를 가리키는 말이나, 이것은 다다이즘의 본질에 뿌리를 둔 ‘무의미함의 의미’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슬라브어의 긍정사(다 da,다 da)의 형태와 다다 dada라는 말의 형태가 어원상 유사성이 있다고 짐작할수 있다.
*다다라는 말이 사전을 펼치는 도중에 우연히 발견 되었다고 한다.
*다다는 프랑스어로 장난감 목마를 뜻한다.
*루마니아어로 예,예-그래,그래의 뜻이 있다.
*독어의 유모차와 생식의 기쁨간의 관념의 연상에서 나온 말이라고도 한다.
*당시 신문에서는 아프리카의 크루족이 제물론 바쳐진 암소꼬리를 다다라 부른다고 보도했다.
*이탈리아의 어느지방에서는 주사워나 어머니가 다다로 불리워진다.
산업혁명이후 급속히 변화한 물질과 인간과의 관계속에서 합리적이라 여겨졌던 문명이 1차대전을 야기하게되자 물질 문명의 결과로서 노출된 인간이 자기 위치에 회의를 인식하게 되었는데 예술적 조류들에 의해서 만이 아니라 시민 사회에서 발전되어나온 制度藝術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게 된다.
다다라는 용어를 누가 처음 사용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누구라고 명확하게 가려내기가 어렵지만, 그것이 탄생된 장소는 반박의 여지없이 취리히이다. 1차대전이 한창일때 이 도시에는 몇몇 독일인들이 피신해 잇었고 그 중에는 시인 휴고 발과 그의 애인 에미 헤닝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1916년 2월 5일 카바레 볼테르라고 하는 문학적이고예술적인 카바레를 열었다. 며칠후 휴고 발과 그의 동향인 리하르트 휄젠벡, 루마니아에서 이민온 트리스탕 짜라와 마르셀 얀코, 알자스인인 쟝 아르프등이 모여 다다를 탄생시켰다. 다다라는 단어는 휴고 발이 <카바레 볼테르>라는 제목으로 취리히에서 발간하던 "문학 및 예술에 관한 글 모음"에 1916년 5월 처음으로 인쇄되어 발표되었다. 역시 1916년에는 트리스탕 짜라의 <안티피린씨의 최초의 천상 여행>과 쟝 아르프가 삽화를 그린 휄젠벡의 <환상적인기도> 등 두권의 책을 펴냄으로써 다다 총서도 시작되었다. 이어서 1917년 3월에는 다다 화랑이 취리히에 문을 열었다. 짜라는 다다운동 진행에 큰역할을 했다. 그는 1918년에 <다다 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그 이론적 배경을 제시했으며, 1919년 파리로 이주한 이후로는 국제적인 아방가르드
무대에서 다다가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였다. 물론 스캔들과 논쟁을 도발시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다는 전통에 반대하고, 합리적인 것에 반대하며, 제도에 반대하고, 모든 것에 반대한다. 그 기본적 원칙은 부정이다. 마르셀 뒤샹의 성상 파괴적인 예술관도 다다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전쟁은 허다한 젊은 미술가들과 시인들의 불만에 새로운 근거와 긴박성을 부채질하였다. 전쟁은 탐욕과 물질주의에 입각한 사회의 단발마적인 고통이었다. 그들은 다다를 이 사회를 위한 진혼곡으로 이해했으며 새로운 사회의 원초적 출발로 보았다. 미술가외 시인은 유산 계급 자본주의와 교묘하게 밀착되어 예술은 문자그대로나 비유적으로나 상거래 행위가 되어버렸고 미술가는 정신적 용병이고 시인들은 언어의 은행가가 되어버렸다. 예술가로서 다다이스트는 당연히 그 파멸해가는 사회에 속한 자신들의 모습에서 그 예술의 파괴를 시도한다.
"無에의 정신"은 다다이스트 들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원시 부족예술에 눈을 돌리게 하였으며 초현실주의에 와서는 다다의 예술 부정에 대한 대안으로 인식하의 세계 즉 잠재적 무의식의 세계를 비 합리적 방법으로 표현하려고 시도 하였는 데 이것은 쾌락원리와 현실원리를 화해하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는 원시인들의 2원적 세계관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슴을 알 수있다.
다다의 메세지는 유럽적 가치관은 이미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또한 그것은 지금까지 용인된 모든 취미와 이성의 원칙을 거부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즉흥적으로 실행하는 의지의 표시이기도 했다. 다다와 더불어 새로운 현상이 도래하게되었다. 생은 소음, 색채, 정신적인 리듬이 다다예술에 그대로 수용되어 거리낌없는 일상적인 정신상태에서 터져나오는 감각적인 아우성과 열병 그리고 모든 잔인한 현실과 아무렇게난 뒤죽박죽 되어버린 것으로 나타난다.
인간존재의 모든 가치가 발휘되고 또 각개의 사물 생각의 배후에서 밑바닥에서 반대쪽에서 한가운데에서 존재하는 것을 알아내기 위하여 각각의 사물, 생각이 전도되고 조롱되고 교체되는 일이 그 속에서 벌어지는 자유의 강렬한 물결을 효율적으로 표현한 것이 다다였다.
복잡한 아이러니 속에 그들은 사회와 그 예술의 파괴는 곧 미술가인 자신들의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에 다다는 어느 의미로서 그 자신을 파괴하기위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자기 파괴적인 몸짓은 결국 새로운 예술의 부활을 위한 몸부림으로 보여진다. 그들은 파괴하는 아픔을 겪더라도 다시 출발하고 싶어했다. 어린아이가 최초로 한다는 다다라는 말로 그들의 모든것을 설명하려 한것은 이러한 의미로써 설득력을 가진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예술가는 이미 설명적·상징적인 복제(複製)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돌이나 나무나 쇠로[鐵]로 직접 창조한다. 특급기관차(特急機關車)와 같은 새로운 예술가의 유기체(有機體)는 순간적인 감동을 싣고 모든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예술은 죽었다라는 말을 서슴치 않고 내뱉던 그들은 예술의 파괴를 시도한다. 그것은 곧 허무주의로 연결된다. 그들에게는 일과된 양식이 없었다. 즉 다다이스트들에게는 진정한 합일점이 없었다. 다다는 상이한 지역에서 다소 다른 특성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다다안의 두 강조점을 찾아낼 수가 있다. 하나는 낡아 빠지고 부적절한 유미주의에 대신할 새로운 미술을 추구하는 계통이다. 또다른 하나는 차라나 피카비아 같이 조소를 파괴의 수단으로 삼고 예술가로서 그들의 사회적 동일성에 대해 공중을 희롱함으로써 그들 위치의 아이러니를 이용하려는 유파다.
여기에 오늘날 말하는 자유분방한 오브제(objet)가 등장하는데 그것들은 문자 그대로 중립(中立)을 선언하면서 스위스에 모인 망명자들의, 밖에서의 참혹한 살육을 의식한 발언이며, 그들은 종래의 예술작품이 외적(外的) 폭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는가를 전쟁 체험을 통하여 느끼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잡지 《다다》가 발간되고 우연을 이용한 추상시·음향시가 발표되는 등 이 취리히 다다는 1920년까지 계속되었다. 독일에 있어서의 다다이즘은 베를린·하노버·쾰른 등 세 곳의 중심점을 가지고 있다. 베를린에서는 R.하우스만, G.그로스, W.메링 등이 주된 예술가였는데, 여류인 H.헤히도 여기에 가담하였다. 취리히와는 달리 베를린은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하였으므로 다다이즘도 혁명적 요소를 갖추고 하우스만의 아상블뢰즈(assambleuse:여러 가지 오브제 모음)나 헤히의 포토몽타주(2장 이상의 사진을 붙여 중복인화·중복노출 등으로 새로운 시각효과를 노림. 고안자는 J.하트필드라고도 한다) 이외에 그로스의 격렬한 반전(反戰) 시리즈인 《이 사람을 보라》 등을 탄생시키고 있다. 《이 사람을 보라》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의 군부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전후의 황폐, 그리고 다시 권력자로 변해가고 있는 사회 상층계급에 대한 공격을 내포하는 무산계급의 옹호를 그 특색으로 한, 예리한 시각의 소묘집(素描集)이다. 베를린에서의 다다이즘은 대전이 끝난 18년부터 33년까지 계속되었다.
하노버에서의 중심 인물은 K.슈비터스였다. 슈비터스도 시와 조형(造形)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나타내어 23~32년 잡지 《메르츠》를 간행하고 있었는데 주목되는 작품은 《메르츠바우》이다. 이것은 길에서 주운 널조각과 잡동사니를 소재로 하여 만든 기둥인데 조각에서 표현한 콜라주(collage)의 선구적 예(例)이기도 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콜라주는 다다이즘의 유력한 무기인데, 일찍이 입체주의(큐비즘)의 P.코레에서도 같은 종류의 경향을 볼 수 있다. 다만 다다이즘의 경우에는 응용하는 소재를 신문지·우표 등에서 우모(羽毛)·철사·성냥개비·화폐 등으로 더욱 넓히고 있으므로 작품 효과는 입체주의 시대의 것과는 현저하게 달라졌다.
슈비터스는 콜라주의 뛰어난 작가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쾰른에 있어서의 다다이즘은 M.에른스트와 J.T.바르겔트로 대표된다. 바르겔트는 잡지 《선풍기(扇風機)》의 창간자이기도 하며, 에른스트와 공동으로 제작을 시도한 일도 있는 화가로서 아상블뢰즈를 잘하였다.
에른스트의 기법(技法)은 콜라주이며, 1920년 파리에서 열린 콜라주전(展)은 이제까지의 회화개념(繪畵槪念)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그는 1924년에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하여 독특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타주(frottage)에 새로운 면을 개척했는데, 그것을 보면 다다이즘에서 초현실주의에 이르는 과정은 종이 한 장 차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파리에 있어서의 다다이즘 운동은 1919년에 이루어졌다. 자살한 23세의 시인 J.바셰 외에 ‘검은 유모어’의 A.브르통 등도 다다이즘의 선봉으로서 빼놓을 수 없으며, P.엘뤼아르, B.페레, L.아라공 등도 여기에 포함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전람회에 출품된 M.뒤샹의 《계단을 내려가는 나체(裸體)》는 사진가 A.스티그리츠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요소로서의 광채(光彩)라고까지 절찬한 브르통을 포함해서 미국 전람회 역사상 보기 드문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 작품은 순전히 메커니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데도, 마치 고속사진(高速寫眞)의 한 장면과 같이 역동적이며, 미래파(未來派) 작품에 호응하여 사진과 예술의 새로운 결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 후 뒤샹은 기성품(旣成品)을 곁들인 레디 메이드(ready made)를 발표하여, 다다이즘이라고 하면 M.레이의 《선물》(1921)이냐 뒤샹의 《샘[泉]》(1917)이라고 할 정도로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또한 F.피카비아, H.알프, 실험영화로 유명한 H.리히터도 빼놓을 수는 없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의 아방가르드 운동들은 일치된 미학적 실제나 통리된 전망을 보여주지 않았으며 여태껏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형태의 예술 세례를 퍼부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비평이라기 보다는 반응에 가까운 차원으로 이루어 졌다. 유럽 아방가르드들의 급진적인 예술들은 단순히 놀라게 하거나 독특한 것을 하려거나 새로운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겉모습으로 비추어졌던 결과를 낳은 데에는 충분히 납득가는 이유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 전위예술가들이 예술에 대해 가한 공격은 예술의 허상을 드러나게 하였다. 아방가르드의 공격적 시도로 인하여, 실생활과 떨어진 것으로서의 자율적 예술의 위치가 시민사회내에서 '제도적'인 것이었음이 노출되게 되었다. 진정한 아방가르드는 현실과 예술에 대하여 끊임없이 비판하는 기능을 하는자에게만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옳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감지하기 위하여 언제나 '깨어있는'자일 때에만 그 예술은 새로울 수 있으며, 진보로 향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의 「공격」혹은 다양한 폭력적 형태의 목적과 방법은 「반대」이고 「부정」이며, 관례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그것은 「단절」이다. 아방가르드는 급작스러운 불연속성과 불시에 일어나는 운동 및 분열을 나타낸다. 그 정신은 가입과 예속과 참여를 거부한다. 사람들은 비트족의 운동을 「단절」과「거부」,「비동맹」 등으로 말해왔다. 그러나 다양한 용어로 표현되는 이러한 요소들은 격렬한 도덕적 분노나 거대한「혐오」또는「두려움」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처럼 보이는 아방가르드의 전통 속에서 다시 주기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아방가르드는 현대적인 의식의 일차적인 반응인 무소속감과 반순응주의도 이미 예상할 수 있었던 낭만적 개인주의의 특징들인 무소속·고집·계급탈락·「방랑」등「단절」의 양상들을 재현·강화한 것이다."
다다는 아주 다양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오로지 모더니즘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것과 미술이란 어떤것이어야 한다는 기존관념에 도전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졌다는 것이다. 즉 미술작품이 성립되는 것은 형태, 재료, 내용, 범주, 기술 등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술가가 그것을 미술이라고 간주한다는 사실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다다는 일상세계의 모든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결국은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했다. 그리고 이것은 악순환으로 빠져버려 그곳으로부터 탈피해야만 되었다. 결국 새로운 질서에의 요구가 일고 다다이즘은 막을 내리게된다. 그래서 초현실주의는 다다가 남긴 폐허 속에서 건설을 시작하려는 긍정적인 행동의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다다이즘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네오 다다’라는 명칭으로 부활되었고 부활의 배경은 전후 고조되고 있던 기계문명·인간소외 등의 이유에서였다.
쮜리히 Dada :
시위와 시낭송, 소음연주회, 미술 연주회, 저술 등을 통하여 서구 예술과 문학이 지니고 있던 전통과 편견을 공격한 선도자들이었다. 쮜리히에서 우연히 서로 만나게 된 이러한 청년들과 스위스의 화가이자 디자이너로써 후에 아르프와 결혼한 소피토버 같은 여성들은 전쟁중 세계에 번지고 있던 병적인 흥분과 광기에 대한 오직 부정적이고 무 정부주의적이며 파괴적인 의미를 담은 형태로 표현했다. 다다이스트들은 부르조아자를 격분시키려는 시시한 욕망을 뛰어넘는 의도의 진지함 그리고 새로운 상상력과 내용에 대한 추구를 보여 주었다. 쮜리히 다다이스트들은 전 역사를 통하여 예술창조를 이끌어 왔던 전통, 전제, 규칙, 논리적 근거와 심지어 질서, 조화, 미개념들까지도 재 검토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다이스트들은 이성과 논리가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을 불러 일으켰으며, 유일한 구원의 길은 정치적 무정부 상태, 본연의 감정, 직관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 등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다다의 중요성은 하나의 양식이나 유파로서의 중요성이 아니라 정신상태로서의 중요성이었기 때문이다 쮜리히 다다이스크들은 일관성있는 한 그룹의 양식적 공통요소를 표현하는 예술상의 그 어떤 조직화된 강령이나 운동에도 열렬히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창조적 노력을 구체화하는 세가지 요소가 있었다. 이것들은 동시성, 우연성, 소음주의, 여기에서 소음주의는 소음음악회의 소음에서 유래한 소음음악을 의미한다. 소음주의는 미래주의로부터, 동시성은 큐비즘에서 미래주의를 경유하여 유래된 것이긴 하나 다다이스크들은 이 요소들을 부정적, 파괴적인 힘으로 생각하고 있다.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쮜리히 다다는 종말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처음의 열정은 시들해 졌고 참여자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있었다.
1918년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 피카비아가 쮜리히에 도착함으로서 뉴욕과 바르셀로나에서 일어나고 있던 유사한 운동들과의 접촉이 시작되었다. 피카비아는 전쟁이 끝나자 파리로 돌아와 전후 독일과 프랑스 다다이스트들을 연결하는 매개자가 되었다. 장아르프 : 알사스인인 장아르프는 쮜리히 다다가 배출한 중요한 미술가의 한 사람이다. 그는 1908년에서 1910년까지 스위스의 여러 작은 마을에서 사색을 하며 새월을 보냈다. 스위스의 풍경은 그에게 깊은 감명을 준것처럼 여겨진다.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게 되었던 추상은 자연과 살아있는 유기체의 형상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아르프는 자신의 예술적 방향을 정립하는데 유달리 긴 시간을 소모했다. 그는 큐비즘에 기초한 기하학적 추상을 실험하였고, 1915년 경에는 쮜리히에서 손길이 돌아가는 한 한껏 빨리 드로잉과 콜라주를 제작하고 있었다.
"이 그림들은 의미나 지적인 의도 없이 그 자체가 실체이다. 우리는 본성과 자발성이 완전히 자유롭게 반응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는 이 그림에서 평면의 배치와 비율, 색체등이 온통 우연에 의존하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에 이 작품들이 자연처럼 우연의 법칙에 따라 배열되었다고 선언하였다. 나에게 있어 우연이란 불가사의한 존재이유, 즉 그 전체성에 접근할 수 없는 어떤 질서중의 한정된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 이 무렵에는 사물들과 생명 자체의 형이상학적 실재성, 즉 하등과 고등 동식물 모두에 속한 어떤 공통적 속성 같은것에 대한 작가의 확신도 나타나고 있었다. 아르프를 회화에서 콜라쥬, 부조, 환조 작업으로 이끌어간 것은 아마도 유기적 추상같은 혹은 유기적 응결같은 가능한한 구체적인 언어로 자신의 심재성을 표현하려던 정렬이었을 것이다.
수선화, 원색같은 형태의 유래는 직선적인 형태는 드물고 이따금씩 완만하게 곡선을 이룬것들 뿐이다. 이윤곽선들은 살아있는 유기체가 가진 불규칙성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유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프는 몇몇 다다 동료들 보다는 그룹의 발표활동에 덜 적극적이었지만 1916년과 1919년 사이에 나온 다다의 간행물에 계속 소묘와 시를 기고하는 한편, 자기 나름의 추상적인 유기체적 환상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아르프는 유기적 추상형태와 임의적, 비 묘사적 색채를 사용하여 가시적 세계 너머의 환상적 세계를 창조하는 또다른 분파의 선구자이다.
뉴욕 Dada :
제 1차 세계대전중의 뉴욕 다다는 우연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뉴욕에 있어서의 다다이즘은 취리히와 그 모습을 같이하고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중 또는 대전 전부터 전위적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필시 1913년에 개최된 사진과 회화의 모던 아트전(展) 아모리 쇼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마르샬 뒤샹과 프란시스 피카비아가 뉴욕으로 와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전이적인 화랑에서 동지적 분위기를 발견했던 것이 바로 그 우연적인 사건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스티글리츠는 베를린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그가 열중한 최초의 대상인 사진을 발견하였다. 그 후 그는 순수예술로서의 사진을 개척한 선구자가 되었다. 쮜리히의 다다운동보다 연대적으로 앞선 필요할만한 사상이 뉴욕의 한 응집력이 있는 그룹속에서 독립적으로 발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두 유럽인 이외에 그룹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들은 미국작가 만레이와 모틴 샴바그, 그리고 미술품 수집가인 윌리 아렌스비그였다.
마르셀 뒤샹 ( Marcel Duchamp 1887.7.28 ~ 1968.10.2 ) :
프랑스 블랭빌 출생. 입체파 조각가 R.D.비용, 화가 J.비용의 아우이다. 파리의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공부하면서 P.세잔의 영향을 받았고, 뒤이어 1911년에 큐비즘의 1파인 섹시옹 도르에 참가했다. 1911년 파리에서, 1912년 뉴욕의 애머리 쇼에서 동시성을 표시한 회화 《계단을 내리는 나체》를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13년부터 다다의 선구로 보이는 반예술적 작품발표를 시작, 1915년 도미하자 이듬해 뉴욕에 독립미술협회를 결성하여 반예술운동을 일으켰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에 돌아와 쉬르리얼리즘에 협력, 1941년 A.브르통과 함께 뉴욕에서 쉬르리얼리즘전을 열었다. 뒤샹이 1915년 뉴욕에 도착했을 때 화가로써의 그의 이력은 사실상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큐비즘이 장식적 형식주의로 나아가는데 대한 환멸때문이었고 예술의 근본적인 유효성에 관하여 보다 큰 의문때문이었다. 뒤샹의 의문은 큐비즘의 단면화 작업과 동시성을 형식적인 목적보다도 표현적인 목적에 사용한 작품이다. 그들의 역동주의 '기계적 미감'은 새로운 기계적 세계나 즉 속도, 비상, 효율성과 또 이러한 말들로써 책정되는 진보 등에 대한 낙관적이고 비 해학적인 찬사였다. 뒤샹 작품의 원천은 다다와
초현실주의와 마찬가지로 미술보다는 문학작품이었다.
다다주의의 대표적 작가로 불리는 뒤샹이 변기에 어떤 손질도 하지 않고‘샘’이라는 제목을 붙였던 사건은 미술사에서 대단히 유명한 일화이다. 뒤샹의 이작품은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데 우선 과연 미술작품이란 무엇이냐 하는 의문을 품게하였다. 기성품인 변기를 그대로 전시장에 옮겨 놓아도 그것이 작품으로 사람들에게받아들여진다면 과연 작품의 속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반문은 작품이 어떤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술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시장이라는 제도 안에 들어옴으로써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는 부조리한 상황과 마주치게 한다. 이들의 지독한 냉소주의와 신랄한 비판정신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이 사실이다. 또 한 가지, 뒤샹의 작품은 더 이상 손으로 그리거나 직접 물건을 만드는 수공적인 작업에서 미술의 의미를 찾기는 어려워졌다는 충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뒤샹은 ‘샘’을 통해 화가란 아이디어를 다루는 사람이고 그 아이디어를 사람들에게제시하는 방식에 대해서 고민하는 철학자와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다다이스트들은 작품의 영구불변하고 기념비적인 특성보다는 작품이 대중들과 만나면서 생기는 교감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즉흥적이고 일회적인 성격이 강한 퍼포먼스나 이벤트를 자주 행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반예술을 표방하며 기존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자 했던 이 다다이스트들의 작품이 대단히 값비싼 미술품으로 거래되고 있으니 이것 또한 현대미술사의 아이러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