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의 공동창업자 원경왕후 민씨
“남편은 혁명동지”…‘왕자의 난’두차례 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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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의 민씨 소녀는 고려 우왕 8년(1382) 두 살 아래의 이방원과 결혼할 때만 해도 자신이 손해라고 여겼다. 방원의 아버지 이성계는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都) 부대를 격퇴시킨 황산대첩(荒山大捷)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기는 했지만, 당시까지는 여진족이 사는 동북면 출신의 시골 무장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그녀의 아버지 민제(閔霽)는 공민왕 8년(1359) 문과에 급제해 우왕 때 지춘주사(知春州事) 등을 역임한 중앙 정계의 중진이었다.
그러나 우왕 14년(1388)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하면서 두 집안의 위상은 완전히 역전됐다. 민씨 부인은 결혼 당시 임시직이었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가 새 왕조를 개창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목도했다. 이 믿을 수 없는 일이 결혼 10년 동안에 일어났다.
결혼 당시나 이성계가 즉위한 직후에나 그녀는 왕비의 꿈을 꾸지 않았다. 손위 시아주버니들이 너무 많았다. 방원도 당초 맏형 방우(芳雨)를 세자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성계가 경처(京妻:서울에서 얻은 부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2남 방석을 세자로 선택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방원을 비롯한 향처(鄕妻:고향에서 얻은 부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들은 크게 반발했다. 당시 방석은 11세에 불과한 반면 방우는 39세였고, 방원도 26세의 장년이었다.
그러나 방원은 더 이상 반발하지 못했다. 그에게 이성계는 넘을 수 없는 거산(巨山)이었다. 그러나 민씨 부인은 달랐다. 큰시아주버니 방우가 세자가 된다면 모르겠지만 방석이라면 문제가 달랐다. 정몽주를 쓰러뜨리고, 우왕의 부인 왕대비 안씨를 강압해 이성계 옹립조서를 내리게 한 인물은 당시 강보에 쌓여 있던 방석이 아니라 남편 방원이었다.
민씨 부인은 쿠데타를 결심했으나 방원이 계속 주저했다. 그러는 사이 정도전(鄭道傳)의 후원을 받는 방석의 자리는 공고해져갔다. 급기야 태조 7년(1398) 정도전은 진법 훈련 강화를 명분으로 각 왕자들이 갖고 있던 사병(私兵)혁파와 무기 반납을 요구했다. 민씨는 방원 몰래 무기를 감추어 훗날에 대비했다.
민씨 부인은 동생 민무질(閔無疾)과 상의해 거사날짜를 잡았다. 이성계가 와병 중이라 방원을 비롯한 여러 왕자들이 근정전에서 자는 날이었다. 민씨 부인은 집사를 방원에게 보내 갑자기 복통이 났다는 이유로 돌아오도록 일렀다. 방원이 오자 민씨 부인과 민무구(閔無咎)·민무질은 감춰둔 무기를 내놓으며 거사를 재촉했다. 이를 수락한 방원은 두 처남과 함께 한밤중에 군사를 일으켜 세자 방석과 정도전과 남은(南誾)을 주살하고, 신덕왕후 강씨의 다른 아들 방번과 딸 경순공주와 남편 이제(李濟)까지 죽여버렸다. 제1차 왕자의 난(1398)이었다.
방원은 일단 생존한 형들 중에 가장 위인 방과(芳果:정종)를 세자로 추대했다. 이성계는 두 달 후인 그 해 9월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정종이 즉위했으나 실권은 왕자의 난을 주도한 방원에게 있었다. 바로 윗형 방간(芳幹:회안대군)이 세자 자리를 노리면서 두 형제 사이에 긴장이 조성되자 민씨의 친정은 ‘사위 임금 만들기’에 적극 나섰다. 민제는 하륜(河崙)을 추천했고, 하륜이 다시 이숙번(李叔蕃)을 추천해 세를 불렸다. 정종 2년(1400) 정월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들은 민무구·무질과 함께 방원편에 가담했다. 이 때 군사 목인해(睦仁海)가 타고 간 말이 홀로 마구간으로 돌아오자 민씨 부인은 패전한 것으로 생각하고 남편과 함께 죽기 위해 싸움터로 향했다. 시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가는 도중 한 노파가 이겼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정종은 사건 발생 다음달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방원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11월에는 왕위마저 물려주었다. 방원의 즉위는 절반 이상이 민씨 부인과 그 친정 덕분이었다. ‘동각잡기’(東閣雜記)는 태종이 세종에게 ‘정사(定社)하는 날에 네 어머니의 도움이 심히 많았고, 또 그 동생들과 더불어 갑옷과 병기를 정비해 기다린 것은 유씨(柳氏)가 고려 태조에게 옷을 입힌 것보다 그 공이 더욱 중하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태종 즉위의 유공자들인 좌명(佐命) 1등 공신 9명 가운데 민무구·무질, 하륜, 이숙번 등은 모두 민씨 친정과 관련있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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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사극 ‘용의 눈물 ’에서 원경왕후 민씨역을 맡은 최명길(왼쪽). 97 년 대선(大選)주자들이 즐겨본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조선일보 DB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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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씨 부인은 태종과 자신을 혁명동지로 생각했고, 둘이 공동으로 정권을 잡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태종의 생각은 달랐다. 일단 즉위한 이상 국왕은 하늘을 대리하는 유일한 인물이고, 부인도 신하의 한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태종의 여성 편력은 왕비 민씨와 많은 마찰을 낳았는데, 그 여파는 엉뚱하게 처남 민무구·무질 형제에게 향했다.
태종은 재위 6년(1406) 양위를 선언했다가 철회한 적이 있었는데, 1년 후 두 형제는 그때 슬퍼하지 않고 어린 세자를 끼고 정권을 잡으려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이 때문에 두 형제는 제주도로 유배가야 했다. 정사·좌명 1등공신 이무(李茂)가 명나라 사행으로 가면서 “민씨 형제는 사실 아무 죄도 없이 억울하게 유배되었다”라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두 형제는 억울했다. 그러나 이무는 이말 때문에 교살당했고, 민씨 형제 또한 그 여파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태종은 두 처남을 사형시킨 직후 외척경계론을 담은 교지를 발표해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했다. 이 사건으로 왕비 민씨는 폐비의 위기까지 몰렸으나 세자의 생모라는 이유로 겨우 무사했다.
민씨 가문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태종 15년, 3남 민무휼(閔無恤)이 전 황주목사 염치용의 노비 송사사건을 돕기 위해 충녕대군에게 부탁한 것이 도리어 역효과를 낸 것이다. 사건의 불똥은 4남 민무회까지 튀어 두 형제는 귀양 가야 했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이 무렵 ‘왕자 비의 참고(慘苦)’ 사건이 발생했다. 태종이 민씨 집안의 여종 소(素)가 잠시 입궐한 틈에 관계해 낳은 아이가 비였다. 질투심에 불탄 왕비 민씨가 여종과 아이를 죽이려다 실패했는데, 이때 발각된 것이다. 이 사건의 여파는 귀양간 두 형제에게 미쳤다. 두 형제가 세자 양녕에게 ‘무구·무질 형은 무죄’라면서 ‘세자께서는 우리 집에서 자라셨으니 우리 형제들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라고 말한 것이 드러났는데, 태종은 이들에 대한 사형 요구가 빗발치도록 배후에서 조종했다. 두 동생이 사형 위기에 몰리자 왕비 민씨는 식음을 전폐했고 노모 송씨 역시 드러누웠다.
그러나 재위 16년(1416) 태종은 이들의 형을 장모가 사는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집행하는 자체가 장모 송씨를 위하는 것이라며 사형을 명령했다. 그 4년 후 왕비 민씨도 한 많은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2년 전인 세종 즉위년(1418)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이 상왕 태종에 의해 죽는 것까지 목도했으니, 자신의 친정 부모가 고종명(考終命)한 것 자체가 다행이었다고 여겼는지 모른다. 오늘날 태종은 친인척 관리를 가장 잘한 군주로 평가받고 있으니 역사는 그만큼 비정한 것이다.
세종의 장인 심온 / 역모로 몰려 태종에 사형당해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한 심온은 태종 8년(1408) 딸이 충녕군(忠寧君)과 결혼하면서 왕실 인척이 됐다. 그는 1418년 사위 세종의 즉위를 알리기 위한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는데, 이때 그를 전별하는 거마(車馬)가 장안을 뒤덮었던 것이 외척발호를 경계하는 상왕 태종의 심기를 건드렸다.
태종은 심온의 동생 심정이 총제(摠制)로 있으며 ‘금위(禁衛) 군사로 상왕(태종)과 주상(세종) 두 분을 호위하려니 숫자가 적다’며 불평한 것을 역모로 몰아 고문 끝에 심온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심온은 귀국길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사형 당했는데, 이를 좌상 박은(朴誾)의 탓이라고 생각, ‘이후로는 박씨와 혼인하지 말라’고 유언했다. 이 때문에 아직도 청송(靑松) 심씨와 나주(羅州) 박씨 일부는 혼인하지 않는다. 세종비 소헌왕후 심씨도 이 사건으로 폐비의 위기에 몰렸으나 겨우 무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