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물 받는 여자
“큰애야 세탁기가 물이 안 빠진다. 담요를 세탁해서 넣었는데….”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보니 혼자서 쩔쩔매고 계시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일흔이 넘으신 어머니는 쓸고 닦고 치우시는 일이 하루의 일과였다.
요즈음 비는 산성비라서 좋지 않으니 수돗물로 세탁을 하시라고 해도
“빗물이 얼마나 때가 잘 빠지는데”
하시면서 받아둔 빗물을 아까운 듯 버리시곤 하셨다.
집안일도 줄이고 조금은 편하게 생활하시라고 어머니가 사용하시기에 좋게 이불까지 세탁할 수 있는 전자동 세탁기를 구입해 드렸다.
공연히 돈만 축냈다며 세탁기는 처음 놓았던 그 자리에 모셔놓고 습관처럼 비누질하고 방망이질해서 헹구어 햇볕에 말리시는 옛 방법을 고집하셨다. 지난번 담요를 세탁했는데 날이 흐려서 탈수만 해서 잠깐 동안 말려서 저녁에 사용했었다. 어머니는 혹시라도 탈수과정에서 천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이리저리 한참을 살펴보셨다.
며칠 전 비가오자 어머니는 빗물을 또 받으셨고 그냥 버리기가 아쉬워 더럽지도 않은 담요를 세탁했다. 물 먹은 담요가 얼마나 무거운가. 그것을 혼자서 옥상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쉽지 않아서 지난번 담요처럼 탈수를 하려고 세탁기에 담으셨다.
한 시간 동안을 이 버튼 저 버튼 작동시켜도 물이 빠지지 않는다며 고장을 낸 것 같다고 하셨다. 전화기를 들고서 세탁기 사용방법을 머리에 그리며 어머니와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10분쯤 지나자 어머니는 “큰애야 물이 잘 빠진다.” 반가운 목소리가 들어왔다. 전원스위치도 켜지 않은 채 작동을 하신다고 다른 스위치를 만졌으니 사용할 수가 없었고 잘못 만져 공연히 고장만 내었다고 속 타는 어머니의 마음과는 달리 나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어머니의 빗물받기는 아주 어려서부터 보아왔다. 물자가 귀했던 시절 물도 흔하지 않아서 먼 곳까지 길어다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엌문을 열면 처마가 보이고 빗물받이가 있었다. 비만 오면 그곳에서 양말도 빨고 걸레도 빨며 빗물로 세수를 하였다. 어머니는 커다란 통을 바쳐놓고서 빈항아리마다 빗물을 채웠다. 그리고 빨래를 할 때면 받아놓은 빗물로 세탁을 하셨다. 빗물이 떨어지면 집안에 우물이 있는데도 커다란 함지박에 빨랫감을 담아서 집에서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개울가에 자주 가셨다. 집안에서만 생활하는 어머니의 공식적인 나들이길 이었다.
어머니는 집에서 만든 비누로 거품을 내면서 방망이로 펑펑 두드려서 깨끗하게 세탁을 하시고는 흘러가는 물에 우리 머리를 감겨 주셨는데 아무리 헹구어도 매끌매끌했다. 얼마나 매끄러운지 우리들은 기름 물이라고 불렀었다. 개울가에는 언제나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물도 깊지 않고 참 매끄러웠다. 꼭 빗물 같았다. 가끔은 풀까지 먹여서 말려가지고 오는 날은 붉게 물든 석양을 뒤로하고 노래도 부르며 고추잠자리를 잡는 일이 재미있었다. 고향을 떠나 온지 오래 되었고 지금은 고향에도 개울이 없어져 버렸다. 그래도 우리들의 마음에는 항상 그 맑은 물의 개울이 흐른다. 어머니는 새색시 고운 시절 개울에서 빨래하시던 추억을 가슴 속에 담아두고 계신다. 지난번 집안 결혼식을 다녀오시더니 개울가는 다 없어지고 복개도로가 되어있고 일부는 주차장이 되었다며 서운해 하셨다.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 어머니의 빗물받기는 그치신줄 알았다. 빗물받이도 없고 받을 곳도 없으므로 한동안 잊고 살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로 우산을 가지고 텃밭으로 나갔더니 비를 맞으시며 빈 그릇은 죄다 내어 놓고서 빗물을 받고 계셨다. 빗물을 어디에다 쓸려고 받느냐며 언성을 높였더니 가득가득 채워 놓았다가 가뭄 때 채소에게 준다는 것이다.
오늘도 비가 온다. 어머니는 또 빈 그릇들을 모두 내어놓고 빗물을 받으시겠지. 사람은 항상 부지런하며 옷은 냄새나지 않게 자주 빨아 입고 살 나오지 않게 기워 입고 음식은 아무거나 가리지 말고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먹고 잠자리에 들기 전 까지는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라는 당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어머니!
세탁기는 요즈음 젊은이들에게는 필수품이지만 어머니에게는 덩치만 커다란 기계에 지나질 않는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 가루비누 넣고 빙 잡아 돌리더라. 그래가지고 때가 가냐, 비눗물이 제대로 빠지냐? 쯧쯧.”
첫댓글 컴 청소하고 부팅이 빨리 잘되나 실험해 보려고 또 들어와 잠시 보고 갑니다. 역시 빠르군요. 예 맞아요.저도 어린 시절에 냇가에 얼음장 깨고 고무장갑도 없이 손이 너무 시렷 빨갛게 달아오른 손으로 동생 기저귀며 이불홑이불이며 빨았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그래도 그리 아끼고 살았던 시절이 좋았었던것 같아요..
오랫만에 들어와서 옛날의 고향맛을 가득 느끼고 갑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했던 개울가며, 여름방학이면 매미 잡으러 곤충채집 나갔던 그 시절이 너무나 그립읍니다. 일상생활속의 아름다움이 가슴에 깊이 묻혀 옵니다. 항상 건강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