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茶山) 정약용의 장기 유배생활
다산과 유배이야기
다산의 장기 유배생활
다산 정약용은 1801년 1월 19일에 터진 신유박해 사건에 연루되어 1801년
2월 27일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다. 다산은 그 다음날 유배 길을 떠나
3월 9일 장기에 도착하여 마현리 구석골 성선봉(成善封)의 집을 배소로 지정
받았다. 다산은 황사영 백서사건 연루 의혹으로 그해 10월 20일 다시 서울로
압송되기까지 7개월 10일(220일)동안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장기에 온 다산은 틈나는 대로 장기읍성의 동문에 올라 해돋이를 구경하거나 가까운 신창리 앞바다에 나가 어부들이 고기 잡는 걸 구경하기도 했다.
마을사람들이 보리타작 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 담배농사를 짓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바닷가에 갔을 때는 처음으로 해녀의 물질을 구경했으며, 오징어와 물고기를 보고 험한 정계에 뛰어 들어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간신히 모숨을 부지해 살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처지를 우화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장기천을 따라 신창리 바다쪽으로 녹음벽수의 장기숲이 펼쳐저있었다. 다산은 그 숲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시를 통해 표출하기도 했다.
다산의 창작활동과 애민사상
다산은 비록 유배자의 신분으로 장기에 머물었지만, 결코 유배지의 한을 좌절과 절망으로 보내지 않았다. 가장 불행한 역경을 불굴의 투지와 학문연구, 시작에 전념하여 “기성잡시27수” “ 장기농가10장” 등 60제(題) 130여 수에 달하는 주옥같은 시를 창작했다. 효종이 죽은 해의 효종의 복상문제로 일어난 서인과 남인의 예론(禮論) 시비를 가린 “기해방예변(己亥邦禮辯)” 한자 발달사에 관한 저술인 “삼창고훈” 한자 자전류인 “이아술(爾雅述) 6권, 불쌍한 농어민의 질병치료에 도움을 주는 ”촌병혹치(村炳惑治)“ 등의 저술도 이곳에서 남겼다.
다산은 “장기농가10장”에서 당시 장기고을 농촌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특히 이 시는 장기지역 방언 등을 시어로 쓰는 등 다산의 조선 시론을 구현한 작품이라는 것과 관리의 횡포를 고발하고, 아울러 모든 사람이 일할 것을
권장하는 개로(皆勞)사상까지 고취한 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다산의 저술 중 “촌병혹치” 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병이 들어도 의서와 약제를 알지 못하여 치료하지 못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간단한 치료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지은 것이다. 그 당시 장기의 풍속은 병이 들면 무당을 시켜서 푸닥거리만 하고, 그래도 효험이 없으면 뱀을 먹고, 뱀을 먹고도 효험이 없으면 그냥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런 불쌍한 백성들을 살려내기 위해 본초강목 등을 참고하고 자신의 경험을 종합해 간단한 한방치료책을 지은 것이다.
다산은 이 책을 짓게 된 동기와 내용이 일부 적힌 서문에는 여건상 참고할 의서들이 부족한 탓에 귀양살이가 풀려서 더 많은 의서들을 참고할 수 있다면
“혹”이라는 글자를 뺄 수 있다고 했다. 귀양온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잊고 백성들의 생명구제를 위해 의서를 저술한 그의 뜻은 깊고도 높다.
이 귀중한 책이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옥에 갇혔을 때 분실하고 말았다고 한다.
시와 저서 이외는 장기에서 고향의 아들에게 보낸 3통의 편지가 더 전해진다.
다산은 장기에서 시와 저술활동만 한 게 아니다. 실학자답게 어부들이칡넝쿨을 쪼개 만든 그물로 고기를 놓쳐 버리는 것을 보고 무명과 명주실로 그물을 만들 것을 권고하고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소나무 삶은 물에 그물을 담갔다가 사용할 것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다산의 유배생활
[정약용의 유배지, 장기]
ㅇ 다산은 1801년 1월 19일에 터진 〈책룡사건〉, 즉 신유박해라고도 부르는 천주교 박해사건에 연류돼 장기로 유배되었다.
1801년 3월9일 장기에 도착한 다사는 마현리 “구석골” 늙은 장교 성선봉 집에서 기거했다.
그 해 10월 20일까지 7개월10일(220일)동안 장기에 머문 다산은 인간으로는 가장 불행한 귀양살이 기간이었지만 불굴위 투지로 고통과 좌절을 극복하며 학문연구와 시작에 전념했다.
ㅇ [기성잡시27수]에는 장기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눈에 비친 당시 장기의 모습들이 그림 그리듯이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다산은 처음에는 장기의 모습과 풍물들을 묘사하다가 차츰 그들의 삶 속에 있는 풍속과 애환을 그리는 데로 나아갔고, 그 소게서 백성의 가난을 발견하고, 가난의 원인이 당시 사회 체제의 모순에 기인함을 밝히려 애썼다. 그러면서 이곳 사람들의 애환과 관리들의 부패상을 우화적이고 은유적인 시로 표현햇는데, 그 대표적 시가 [장기농가10장]이다.
ㅇ 다산은 또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이를 수오재기(守吾齋記)라는 글로 남겼고, 나아가 자신의 내면에 일어난 회오와 억울함을 드러내기도 하고, 정조와의 끊을 수 없는 그리움에 잠기기도 했다.
다산은 자신보다 126년 전에 장기로 유배 왔던 우암과는 대조적인 귀양살이를 한 것으로 보인다.
다산의 배소에는 주인 외에는 거의 인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에 대한 자취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다산의 유배길]
ㅇ 다산은 석우촌 ~ 사평 ~ 하담 ~ 탄금대 ~ 무교 ~ 조령 ~ 함창 ~ 경주 ~장기로 이어지는 유배 길마다 자신이 보고 느낀 생각과 감회를 시로 남기며 유배지에 도착했다.
ㅇ 당시 장기현 관아는 지금 읍성 안에 장기향교 바로 옆자리 였을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서 하루밤을 보낸 다산은 다음날 저녁 무렵에 관리를 따라 장기읍성 동문으로 나와 마산리 구석골 늙은 장교 성선봉(成善封)집을 거처로 삼았다. 당시 다산은 관리를 따라 나옸던 동문은 지금 장기읍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고, 조해루(朝海樓)라는 문루가 있었다고 전한다.
ㅇ 다산이 관리를 따라 내려온 길은 지금도 거의 남아 있는 상태이다.
장기향교에서 동문을 거쳐 면사무소로 내려가는 길이 바로 그것이다.
ㅈ금도 거러 다닐만한 돌 비탈길이 여전히 남아 있어 다산의 유배 길을 걸어 보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장기 유배
유배 과정
유배 길의 비용은 스스로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고
개인적으로 노비를 거느릴 수 있었다. 유배인은 관직자일 때에는 국가에서
말을 지급하고, 유배 길목 수령들은 말과 음식을 제공하도록 허용했다.
그래서 재산이 넉넉지 못하거나 동료, 친인척이 많지 않은 양반 관료들의 경우에는 큰 부담이 되었다.
선조 24년(1591) 정철이 실각하자 그 일파로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된 홍성민의 경우를 살펴보면 유배지로 떠나기 위해 타고 갈 말 여섯 필과 의식을 장만하는데 가산을 털어야만 했다고 한다.
유배인들은 대개 말을 타고 유배지로 이동하는데, 며칠 만에 유배지에 도착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은 전해지는 바가 없다.
그러나 유배인들의 발배 일정을 추적한 논문에 따르면 조선후기 에는
대략 하루 평균 80~ 90리를 가도록 규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사례는 일률적이지 않았으며 신분 및 위리안치 여부에 따라 거리의 가감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