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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벽천 선생의 인품과 생애
① 가계(家系)와 탄생(誕生)
예천을 푸르게 하겠다는 뜻에서 선생은 벽천(碧泉)이라 자호(自號)하니 휘(諱)는
석희(碩熙)요 자(字)는 태익(泰益)이다. 경주 김씨(慶州金氏)로서 계림군(溪林君, 諡號 齊肅公)을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창의(倡義)하여 민족의 정기를 드높인 호조 참의(戶曹參議), 호 신재(愼齋), 휘 영수(永壽)의 후예로 정언 경림 선생(正言敬林先生, 諱 守燮)이 비로소 예천에 옮겨 살았으며, 고(考)의 휘는 형집(瀅集)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요 부인 숙부인(婦人淑夫人)은 함종 어씨(咸從魚氏)니 한말(韓末)의 풍운(風雲)이 급박하던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의 소용돌이 속에 1885년(고종 22) 음력 3월 26일 예천 일우(一隅)에서 이 고장의 앞날을 밝힐 대선각자(大先覺者)로 태어나신 분이다.
② 인품(人品)
당당한 풍채와 준수(俊秀)한 용모에 능변(能辯)을 겸하고 독실한 신불자(信佛者)로 품성(稟性)이 인자하여 진실로 선풍도골(仙風道骨)의 기상을 지니고 뭇사람의 추앙을 받았다. 그리고 자립심이 강하여 손수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여 자수성가(自手成家)로 경제력을 쌓고 모든 일을 이치에 맞게 처리하며 높은 인화력(人和力)으로 20대 후반에는 벌써 향토 사회의 중진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위선심(爲善心)과 목족심(睦族心) 또한 남달리 돈독하여 누대 선조(累代先祖)의 위전(位田)과 석물(石物) 등을 소홀함이 없이 마련하였고 외조상(外祖上)에게서까지 위토(位土)를 빠짐없이 마련해 주었으니 참으로 추원보본(追遠報本)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1945년 회갑(回甲)을 맞은 선생은 가난한 종족(宗族)들에게 골고루 농토를 나누어 주고 "근검하고 절약하며 부단히 노력하여 인간답게 살아가라"고 했다.
또 정의감(正義感)과 의협심(義俠心)이 강하여 각종 사회사업과 향토 개발에는 항상 자진(自進)해서 거액을 기부하면서 늘 앞장을 섰고 시비(是非)에 대한 판단이
정확하여 늘 불의(不義)를 멀리 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누가 광복의 기쁨이 없었으랴마는 좌우익(左右翼)의 대립이 극심했던 혼란기에도 겨레의 앞날을 내다보며 민족진영의 선봉이 되어 민주 국가 건설의 초석을 다졌으며 흐트러진 사회 질서를 바로 잡기에 온 힘을 기울였다.
더욱이 장년기(壯年期)인 1935년 이후 영남명덕회(嶺南明德會) 예천군지부장을 역임하면서 도의 앙양을 위해 온 정성을 쏟으시고 예천향교(醴泉鄕校)의 장의(掌議)와 직원(直員) 및 유도회장(儒道會長) 등으로 활약하면서 쇠퇴해 가는 예천향교의 석전 경비(釋典經費)를 자담(自擔)하여 향사(享祀)를 치루고 향교의 면목을 일신(一新)시켜 민족정신 수호의 구심점(求心点)으로 삼으려 했다. 그리고 불우한 친척과 친지(親知)들의 생계 보조 및 경제 사정이 어려운 학생들의 학비 조달 등 갚음을 바라지 아니하는 공덕을 베푼 일들은 이루 매거(梅擧)할 수 없으며 후덕(厚德)한 인품은 지금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다.
③ 사회 활동(社會活動)
또 이 밖의 사회활동면을 살펴보면 27세인 1912년 3월에 선생은 예천청년회(醴泉靑年會)를 조직하여 그 부회장으로 나라 잃은 젊은이들의 앞길을 밝히는 길잡이가 되고 그 해 11월에 예천면 협의원(醴泉面協議員)에 피선(被選)되고 또 그 해 12월에는 국유대지소작조합장(國有垈地小作組合長)이 되어 일제에게 압박당하는 백성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섰다.
또 1922년에는 대창학원(大昌學院)을 창설하는 외에 그 해 3월 4군 연합 중요물산품평회(四郡聯合重要物産品評會) 곧 공진회(共進會)의 고문(顧問)과 농협 특별 평의원(農協特別評議員)에 피선되고 그 해 9월에는 10여 년을 이끌어 오던 청년회를 후진들에게 물려주고 고문이 되더니 이듬해인 1923년 9월에는 예천번영회(醴泉繁榮會) 부회장이 되고 10월에는 불교 유일학원 원장(佛敎唯一學院院長)에 피임되어 불교계(佛敎界)의 정화와 발전을 도모하고 그 해 11월에는 공익조합(公益組合)을 설립하여 그 감사(監事)가 되고 또 이 무렵 옛 관아(官衙)의 객사(客舍)를 옮겨 노상동 1번지지금의 자리에 지어 대창학원(大昌學院)의 독립 교사(獨立校舍)로 마련하니 1동(棟) 110평이며 6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위용(偉容)을 자랑한다.
또 1928년 사방공사 보호 조합장(砂防工事保護組合長)이 되고 상공회장(商工會長)과 삼업조합장(蔘業組合長)을 맡고 1932년에는 예천산업조합(醴泉産業組合)을 구성하였으며 다시 1935년 1월에 예천금융조합장(醴泉金融組合長)과 그 해 9월에 소득조사위원(所得調査委員)이 되고 또 경북도회 의원(慶北道會議員)으로 활동했으니 그 자취 어느 하나도 이 곳의 권리 증진을 위한 것 아님이 없다.
④ 교육에 바친 집념
평생 모든 전 재산을 바쳐 재단(財團)을 구성하여 대창학원(大昌學園)이라 이름하고 대창중학교(大昌中學校)를 설립하고 그것이 발전하여 오늘의 대창중고등학교(大昌中高等學校)가 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며 그 모체(母體)인 사설 대창학원(私設大昌學院)을 1922년 이 송대 동산(松臺東山)에서 문을 연 이래 향토 문화의 산실(産室)이요 요람(搖籃)이 되게 했으니 그 공은 해와 달처럼 빛난다 할 것이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아니한 몇 가지를 여기 소개해 본다. 1929년 예천공립보통학교(醴泉公立普通學校) 장학회장(獎學會長)을 비롯하여 군내의 각 교육 조직을 도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1923년에는 불교 유일학원장(佛敎唯一學院長)에 취임하셨고, 1932년 6월 김천고보 설립후원회 고문(金泉高普設立後援會顧問)으로서 김천고등학교(金泉高等學校)의 전신(前身)인 김천고보의 설립에도 깊이 간여했으며 광복 후에는 대창중학교(大昌中學校)로의 승격을 위한 재단(財團) 설립을 위해 애쓰시는 한편 1946년 8월에는 예천중학교 기성회장(醴泉中學校期成會長)으로 추대되어 향토의 공립중등(公立中等) 교육 진흥에도 진심(盡心)했으니 선생의 평생 이력이 육영(育英)에 바탕한 것임을 알겠다.
그리고 1922년 2월 15일은 우리 교육계(敎育界)에 자못 큰 의의(意義)를 가지게 하는 날이다.
이 땅에서 민족의 자각이 굳어져 삼일독립운동(三一獨立運動)으로 승화(昇華)되고 그 여세(餘勢)가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교육 구국(敎育救國)으로 귀결(歸結)될 때, 먼 앞날을 내다본 선생은 여기 소백산맥의 명지(名地)인 송대(松臺)에 배움터를 마련하니 문맹(文盲)의 늪으로 빠져들던 당시의 이 고장에 새문화가 싹트기 시작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날 선생이 이끌던 청년회(靑年會)가 주동이 되고 유도회(儒道會)의 후원으로 예천향교(醴泉鄕校)의 명륜당(明倫堂)과 풍영루(諷詠樓)를 교실로 하여 문을 여니 예천을 중심으로 문경, 상주, 영주, 봉화, 안동, 의성 등 일곱 군(郡)에서 운집(雲集)한 학생들로 붐볐었으니 당시의 시대상을 눈으로 보는 듯하다.
그리고 이로부터 광복까지는 일제가 퍼붓는 갖은 탄압과 박해 속에서 모질게 견디어야만 했던 사반세기(四半世紀)의 오랜 세월이었다. 그 질곡(桎梏)을 극복한 의지야말로 선생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그러한 선생의 신념에 공명(共鳴)하여 일제 말까지 대창학원(大昌學院)을 수호한 고사(高士)들의 맑은 절개도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찬양한다.
드디어 조국 광복을 맞이하여 국가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한 인재 양성(人材養成)이라는 대명제(大命題) 아래 학원(學院)을 다시 정비하여 중학교 설립을 전제로
선생은 전 재산을 희사(喜捨)하여 교명(校名)을 대창공민학교(大昌公民學校), 다시 대창공민중학교(大昌公民中學校), 대창고등공민학교(大昌高等公民學校), 대창중학원(大昌中學院) 등으로 발전시켜 초창기에 길러낸 제자들인 박철구(朴哲九), 김경한(金慶漢) 두 분을 앞세워서 재단법인 인허가(財團法人認許可)와 중학교 설립 인가를 맡기까지 끈기있게 활동한 결과 1949년 1월 17일에 재단법인 대창학원(財團法人大昌學園)과 대창초급중학교(大昌初級中學校) 설립 인가를 얻어 학원 창설(學院創設) 27주년 기념일인 1949년 2월 15일 개교하기에 이르러 사설 대창학원(私設大昌學院)을 제25회 졸업을 끝으로 총 2,362명(여학생 148명 포함)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학원기(學院期)는 발전적 종언을 고했다.
그리고 이 무렵은 9월이 학년 초였고 학제가 자주 바뀌던 시기여서 중학 과정이 3년제에서 4년제로, 4년제에서 다시 3년제로 바뀌고 또 9월 신학년이 7월, 4월, 3월등으로 변하던 때이다. 이때 대창중학원(大昌中學院) 학생을 편입시켜 대창초급중학교(大昌初級中學校)로 개교하고 선생이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셨으니 오늘이 있기까지의 공로는 여천지무궁(與天地無窮)이란 말이나 합당할까 한다. 팽창하는 교세(校勢)는 자연 교사 증축(校舍增築)을 요하게 되어 선생은 1950년 6월 24일 교사 증축을 위한 자재를 구입하고자 상경했다가 한국전쟁을 만나고 간신 만고(艱辛萬苦)하여 예천으로 돌아오니 8월 중순이라 거처하던 집은 폭격에 불탔으나 학교가 안존(安存)한 것을 보고 다행으로 여겨 안도했더니 이 어찌 뜻하였으랴. 8월 23일(음력 7月 10日) 잔혹한 공산도배에 의하여 순직했으니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이란 이런 일을 두고 한 말인가 보다. 이 고장의 큰 별은 이렇게 떨어졌다. 수(壽) 66세를 누리고 대창(大昌)을 이끌기 29년이었다. 사의(思義)와 시혜(施惠)로 일관된 선생의 끼친 뜻은 후생들 가슴에 맥맥히 살아 숨쉬나니 대창중고(大昌中高)와 함께 영원히 빛날 것이다.
⑤ 마무리
선생이 어릴 때 사숙(私塾)에서 수학(修學) 중 지은 글 귀 몇 줄을 여기 적어 선생의 기상과 도량을 살펴보고 끝맺으련다.
"청천명월고(靑天明月高)"라고 읊어서 할달한 기상과 남다른 총명을 보여서 주위의 촉망을 한몸에 받았으며 지감(知鑑)있는 이는 그 포부가 원대(遠大)하고 비범(非凡)함을 일찍부터 짐작했으며 또, "만수상전락 구월국화향(萬樹霜前落 九月菊花香)"이라는 글을 지어 도량이 넓고 의지가 굳음을 글 속에 나타내었다. 선생이시여! 명명(冥冥) 중에서도 굽어 살피시어 발전과 전진만 있는 대창이 되게 하소서. 선생은 온 정성과 전 재산과 일생을 다 바쳐서 후진을 양성하여 우리 고장 예천 문화의 터전을 가꾸셨으니 선생의 짧은 생애는 대창을 통해 영원할 것을 확신합니다.
5) 식사(式辭, 碧泉先生追慕記念事業會 會長 玄錫虎)
오늘 여러분이 공사간(公私間) 바쁘신 중에도 원근을 불구하고 오셔서 이처럼 성황을 이루어 주시니 대단히 고맙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모인 이 자리는 우리 예천의 새로운 문화가 싹트기 시작한 곳이요, 그 씨앗을 뿌린 벽천 김석희(碧泉金碩熙) 선생의 숨결이 서려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유서깊은 송대(松臺) 언덕에 오늘 우리 선생님의 송덕비(頌德碑)를 세우고 제막식(除幕式)을 봉행(奉行)하게 되어 감개(感慨)가 자못 깊습니다.
또한 오늘은 스승의 날이며 벽천(碧泉) 선생의 탄신 100주년인 음력 3월 26일이기도 합니다. 본인은 60여 년 전의 사설 대창학원(私設大昌學院) 보통과 1회 졸업생임을 영광스럽게 여기며 평생을 살고 있습니다. 이제 전통에 빛나는 대창(大昌)의 그때와 오늘을 살펴서 벽천(碧泉) 선생의 끼치신 거룩한 덕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지금부터 64년 전인 1922년 대창학원이 설립될 무렵의 사회 정세는 3.1운동 직후이므로 민족의 울분이 극에 달하고 한편으로는 민족의 각성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던 때입니다. 독립만세를 목이 터지도록 외쳤지만 박해만 가중될 뿐이고 독립이 이룩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때 우리 민족은 먼저 우리의 힘을 길러야 되겠다는 각성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일제의 압박을 받는 것이 일찍이 개화하지 못한 데 기인된 것이라고 자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무렵 각처에서 민족 각성의 교육 열기가 솟아올랐습니다. 우리 대창학교도 당시의 그러한 사회 정세에 발맞추어 그 때의 예천청년회(醴泉靑年會)의 벽천(碧泉) 선생을 기점으로 하여 유도회(儒道會)의 후원을 얻어서 예천향교(醴泉鄕校)의 동서재(東.西齋)와 명륜당(明倫堂)을 교실로 사용하여 창설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 대창학교는 지방 청년 유지와 유림(儒林)의 협조로 문을 열었습니다. 그 때는 초등 과정인 보통과와 중등 과정인 고등과가 있었는데 본인은 17세로 보통과 2학년에 편입했습니다. 그때의 학생들은 일찍이 보통학교(普通學校)에 들어가지 않고 서당(書堂)에서 한문 공부를 하던 사람들이 모였으므로 나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본인은 자신도 만학(晩學)이었으나 그래도 아주 나이 어린 축이었습니다. 심지어 38세의 고령자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학생들의 실력은 대개가 한문의 기초가 넉넉하였기 때문에 공부하는 진도가 매우 빨랐습니다. 1년만 공부하면 보통학교에서 2.3년 공부한 정도는 비교도 안될 만큼 실력이 충실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졸업생들은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상급학교로 진학하고 그 밖의 대부분은 가정에서 혹은 관계 실업계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읍내의 학생들보다 면부(面部)의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낙후된 농촌의 계몽과 농촌 문화를 개발하는데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으므로 대창의 숨은 공로는 대단히 컸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식민 치하의 대창 4반세기는 참으로 험난한 가시밭길이었습니다. 초창기에는 넘치는 정열과 주위의 협력으로 활기를 띠고 번창하는 대창학원이었습니다만 세월이 흐르면서 여건이 점차로 불리해지고 중일전쟁(中日戰爭)에 연이은 태평양전쟁의 시대를 맞으면서 학교 운영은 날로 어려워지기만 하였습니다. 우리 대창과 때를 같이하여 세워졌던 수많은 사립 학원들이 광복 전의 이런 악조건들에 못 이기어 거의가 학교 간판을 내리고 말았습니다만 우리 대창학교는 창설의 주역인 벽천(碧泉) 선생의 지극한 정성으로 문을 닫지 않고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경북도내에서는 유일하게 3.1정신을 계승한 학교로 살아남아서 오늘의 이 우람한 대창중고등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대창학교가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역사의 중단없이 64년의 연면(連綿)한 여정(旅程)을 걸어 온 것은 참으로 향토 예천의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벽천(碧泉) 선생의 교육 구국이라는 깊은 신념의 결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광복 후에는 민족진영의 선두에 서서 혼란한 우리 고장을 바르게 인도하였을 뿐 아니라 전 재산을 희사하여 재단을 구성하고 오늘의 대창중고등학교로 발전시키는 기틀을 마련하였으니, 선생은 우리 고장의 교육과 사회의 양면에서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오늘 이 제막식(除幕式) 석상에 서서 이 웅대한 학교 시설을 바라보노라니 진실로 격세의 감이 있고 창업보다 수성(守城)이 어렵다고 한 옛말이 문득 생각납니다.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의 명실상부(名實相符)한 명문 대창(名門大昌)을 이룩한 것은 오로지 벽천(碧泉) 선생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개인적 영달이나 출세를 다 버리고 정성과 합리를 바탕으로 선대의 업적을 계승하여 온 김교용(金敎容) 교장의 탁월한 능력과 성실한 인격과 부단한 노력의 결과입니다. 우리 기념사업회 일동의 이름으로 치하(致賀)하는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벽천(碧泉) 선생의 거룩한 뜻을 영원히 전하는 길은 이 학교에서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것입니다. 훌륭한 인간이란 훌륭한 인격을 갖춘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 지식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도 물론 소중한 것입니다만 훌륭한 인간 품성의 토대 위에 지식을 쌓아가게 하는 교육이 참된 교육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 모교 대창이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전통으로 훌륭한 인간을 양성하는 학교로서 크게 발전을 하여 벽천(碧泉) 선생의 고귀한 정신이 영원히 꽃피도록 기원합니다.
끝으로 예천을 아끼고 가꾸어 주신 벽천(碧泉) 선생의 은혜와 모교 대창을 세우고 키워 주신 공덕에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리고 식사에 가름합니다.
一九八五年 五月 十五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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