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3만 날
이진구
지난 11월19일 유희세 선생의 82회 생신이었다. 오류동에 2일 동생인 나를 찾아와 둘이 생일을 자축했다. 금년 1월 8일은 나의 3만날 동교동에 2일 형인 유희세 선생을 찾아가 조용히 3만 날을 자축했다.
1. 만날 병주거리 :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아버지는 학교 선생이어서 일본 공무원에 속하니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과거보러 다니다가 나라가 망하니 서당 훈장으로 극빈 가정이다. 어머니는 나를 낳았을 때 유종을 앓아 젖이 없고 우유는 구경도 못할 때고 미음을 끓일 쌀 한 줌조차 구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허약 체질에 체격도 작다. 맹장수술도 하고 전쟁 중에 영양실조로 폐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은혜 중에 오늘에 이를 수 있어 감사만만이다.
2. 만날 실패하는 공장장 :
해방이 되자 대부분의 주요 산업기관이 일본인이 운영하던 것이어서 전부 폐허가 되고 새로 조금씩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동양활석 충주 공장장으로 취직이 되었다. 취임 1년 만에 6ㆍ25로 피난 생활을 겪고, 웅크라 자금 15만$로 최신시설을 갖춘 새 공장 건설에 매달렸다. 그것이 끝나자 김이 빠진 듯 허전해서 서울에 와서 가정공업이던 메리야스 바늘공장에 20만$ 독일기계도입 새 공장 시설에 매달렸다. 이것이 끝나자 때마침 미터법이 우리나라에 시행되자 ‘미터법 환산기’를 고안하여 실용신안특허를 받아 제작판매의 사장이 되었다가 팔리지 않아 왕창 망해버렸다.
3. 만날 성서신애 :
해방 직후 송두용 선생님의 ‘영단’지 등사작업을 도와드린 것이 인연이 되어 송 선생님이 장봉으로 들어가신 후 1975년부터는 ‘성서신애’의 주역을 맡았고, 1980년부터는 편집발행인의 명의까지 내 이름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든 일이 내 생각대로 된 것은 없다. 하나님의 은혜 중에 3만 날을 살아왔다. 앞으로의 덤으로 주시는 나날도 감사와, 순종으로 살고지고.(2002.2)
첫댓글 덤으로 주셨던 나날을 정말 감사와 순종으로 사셨던 선생님, 하나님께서 덤을 더 주시면 안 될까 소망합니다. 지금은 병실 침대에 겨우 앉으시고 휠체어로만 움직이시나 봅니다.
늘 주님과 동행을 기원 드립니다.
좋은 글 볼수 있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