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연수회 모임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동인활동을 하는 데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과 같은 모임은 동인활동발전에 좋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도 지금은 하고 있지 않지만 전에는 <반시>라는 동인으로 활동을 했었습니다. 1973년에 대한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문단에 얼굴을 내밀기 전까지 저는 1972년 춘천에서 군대생활을 했고, 경희대 국문과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서울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당시 현대문학, 자유문학 문예지가 있었는데, 용돈을 아껴가면서 헌책 10원, 15원을 주고 열심히 사서 읽곤 하던 기억이 납니다. 읽으면서도 소설이 무척 재미있었어요. 특히 소설 속의 어른들의 세계가 무척이나 재미있었지요. 기억나는 부분으로, 어느 창녀가 눈 내리는 날 손님을 기다리는데 손님이 안 오니까 첫 독백으로 하는 말이 "다들 불알이 얼어붙었나" 하는 재미난 말도 생각납니다. 평론에 눈을 뜨게 되면서, 고등학생들의 문예활동에 관해서 쓴, 한 백 매 정도의 평론이 당선되었는데 그 덕분으로 경희대에 문예특기자로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1년 동안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 이후에는 문단에 등단해야만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지요.
2학년때부터는 등록금이 없어 군대에 지원입대하게 되었어요. 춘천에 있는 야전공병당에서 근무를 했는데, 군대 안에서도 시를 쓰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제일 마음의 여유가 있는 곳이 군종사병인 것 같아, 군목한테 찾아가 군종사병으로 써달라고 부탁했더니 다행히 채용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한 2년 정도 근무하면서 열심히 시를 썼습니다. 한국일보에 동시가 당선되었고, 학교에서 장학금을 못 받을 것 같아 다시 열심히 시를 썼습니다. 그때 첨성대라는 제목으로 다시 당선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마치 고시공부하기 위한 목적의식이 뚜렷한 사람처럼 문학을 했던 것 같습니다. 장학금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를 썼던 것이죠.
다행히 문예장학생으로 4년 동안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지만, 당시 70년대 한국의 문학적 풍토는 아주 쓸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처음으로 등단했던 대한일보라는 신문이 없어져 버리는 바람에 저는 졸지에 고아가 되버린 심정이었지요. 그럴 때 동인을 결성했습니다. 1973년 그해에 등단한 시인, 소설가들이 모여서 모임을 만들었지요. 소설가는 드물었지만 박범신, 이경자씨 등이 참여했고, 시인으로는 저와 김명희, 서강대 김승희, 김명수, 하종호씨 등이 참여했습니다.
<1973>이란 그룹을 만들어 한해동안 거의 주일에 한번씩 만나면서 굉장히 친하게 지냈습니다. 70년대는 20대 초반에 등단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20대 초반에 당선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요. 모여서 인사동, 낙지골목, 무교동에서 재미나는 얘기도 나누고, 덕수궁 돌담 쪽에서 시화전도 개최했던 기억이 납니다. 『1973』이란 동인지도 내었지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는 장르의 차이 작품세계의 차이로 서로의 성격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향이 비슷한 시인들끼리 모여서 다시 <반시>라는 동인을 결성하게 됐습니다.
자비로 직접 1년에 한 번씩 동인지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예전 이상이 경영했던 광화문 교보빌딩가의 귀거래 다방이 우리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였습니다. "60년대 현대시 동인들, 신춘시 동인들의 시들은 너무 어렵다, 현대시의 난해성을 보이는 부분이 너무 많다, 우리의 일상의 쉬운 언어로 우리의 삶에 보다 더 깊은 뿌리를 내리는 시를 쓰자"는 생각으로, 또 문학적인 이념의 대립인 순수와 참여가 있었다면 참여쪽에 마음의 닻을 내리면서 동인을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반시> 동인지는 10년 동안 10집까지 만들어 내었지요.
70년대 시 동인활동에서 <반시>는 빼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80년 중반에 시와 경제라는 시 동인지가 나올 무렵까지 반시 동인지가 존재하고 있었고, <반시>는 단순히 동인들의 시만 싣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젊은 시인들의 작품도 게재하며, 아프리카 아메리카 민요시 등을 번역해서 실었습니다. 70년대 시 경향 등에 관한 김우창 선생님의 세미나 등도 개최하여 보다 폭 넓은 내용을 게재하고, 점점 다양한 비평이나 서평, 시전문지적인 성격을 띠는 동인지가 되었습니다.
20대에 모여 10년 동안 같이 지내면서 30대가 되고 보니 각기 저마다 개인사에 큰 변화가 생겼어요. 집들이, 돌잔치, 경조사 등에 다니며 기쁨을 함께 나누었고 집안의 어려운 일이 생기면 다 같이 모여서 서로 위로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에 같이 마음들을 나누었던 것이지요. 70년대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지만 누구 하나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던 시절이었지만 열심히 동인활동을 하자 비로소 우리들을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했습니다. 문학과 지성 리뷰란에서 우리들의 시를 리뷰, 평하는 계기가 생기면서, 문단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죠.
1979년 어느 고마운 분이 출판비용을 지원해 주셔서 창작과 비평사에서 첫 시집을 내었습니다. 제가 창작과 비평사에서 시집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동인활동을 통해 저의 작품이 그들에게 전달됐기 때문이었지요. 우리 스스로 작품을 발표할 기회의 장을 만들고 서로 외로움도 나누면서 우리는 단단하고 고형화된 문단의 벽을 뚫어나가면서 시집도 내고 성장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동인활동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봅니다.
여러분들, 각 삶의 터전에서 문학을 사랑하시는 분들, 거기에서 이루어진 문학적인 가치가 얼마나 가치있는 일이고 기쁨을 창조하는 일인가 하는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에 제가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중반까지 <반시>라는 동인활동을 하지 않았으면 오늘의 내가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30년 동안 시와 함께 살아올 수 있었을까. 처음에 등단했지만 아무도 쳐다봐 주지 않았을 때 그때 동인활동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 서로 형제처럼 아껴주면서, 보고 싶어서 전화해서 만날 때도 있었던, 그런 마음들이 오늘의 저를 만들고 나이가 들면서까지 문학활동의 본질적인 외로움조차도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것 같습니다.
저는 시를 쓰는 사람이어서 어쩔 수 없이 시에 관한 평소의 생각들에 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시가 없었으면 삶에 대해서 튼튼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인간의 삶을 이해하려는 밑거름이 형성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시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 제 아버지는 지금 83세이신데, 아버지의 노년을 지켜보면서 한때 은행원이었던 아버지가 점점 노인이 되면서 60대 중후반부터 아버지는 별로 할 일이 없어 보였습니다. 아버지의 하루, 일년을 생각해 보면 특별한 사회적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퇴임후 20년 동안 아버지가 특별하게 일할 수 있는 부분이 없어, 아버지의 하루가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노인이 되어서 할 일이 없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같은 것이죠. 그런데 저를 생각하면 혹시 내가 건강이 좋아져서 노년을 맞이한다면 '나는 할 일이 있구나, 하고 싶은 일이 있구나, 하는 그 일을 통해서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인생의 큰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너무 기뻤습니다.
오랫동안 잡지 기자생활을 하다가, 1991년에 직장을 그만 두었는데, 41세 때, 월간조선, 주부생활, 여성조선, 월간조선에서 8,9년 정도 직장생활을 하다 마흔이 넘어 차장으로 승진되었습니다. 그때 생활은 정말 바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잡지 만드는 대지작업, 마감 때는 사무실 안을 쫓아다니고, 남보다 한 달 먼저 살면서, 봉급은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문학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바른 삶이 아니다, 시간의 낭비다, 인생이 뭐냐, 인생은 물리적인 시간이다, 그 물리적인 시간을 절대화할 수 있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이 소중한 사십대를 내가 하고 싶은 일이나 하고 죽자' 하는 마음으로 사표를 냈습니다. 그리고 조그만 작업실을 마련해서 혼자 출근해서 책도 읽고 글을 쓰며 지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작업실로 혼자 출근해서, 책 읽고, 글쓰고 공부하는 일은 굉장히 외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답답해지기도 했지요. 그러나 지금 다시 그런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시간이 얼마나 감사한 시간인가를 지난 삼 년 동안 느끼게 되었습니다. 한 3년 전부터 현대문학 북스라는 출판사를 위탁경영식으로 맡아서 해보았는데 지금은 역시 정리단계에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았을 때 우리 글쓰는 사람들이 혼자 고요하게 주어지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문학은 그냥 우연히 우리들 곁에 찾아온 것은 아닙니다. 내 삶의 어머니처럼 운명처럼 찾아온 것이지요.
(중간휴식)
50대 들어서면서 마음이 혼탁해지는 느낌이 드는 요즘입니다. 50대 중년 남자의 추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는 때도 있지요. 시인의 기본적인 맑은 영혼을 갖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물질적 욕망에 허덕이는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왜 그런가, 제 가슴, 여러분 가슴 속에 있는 사람을 죽인 게 아닌가, 가슴속에 있는 소년 정호승을 내버려 둔 것이 아닌가, 이미 시체가 된 소년 정호승을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 다시 살려서 앞으로 남은 삶을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할 수 있을까, 소년의 마음은 우리를 구원해 줄 무언가가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평소 동시라면 나이가 들어서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근래 들어서 동시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올 봄에는 어른이 읽는 동시집 {풀잎에는 상처가 있다}를 내기도 했는데, 저는 동시를 통해서 시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는 큰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준비한 동시들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시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어디서 비롯되는가를 말하고자 합니다.
하루는 퇴근을 해서 집에 갔더니 아내가 무지개떡을 내놓았습니다. 무지개떡을 맛있게 먹다가 얼핏 '무지개떡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붕어빵에는 붕어가 들어 있듯이, 무지개떡 속에서 무지개가 들어 있을까, 무지개를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공간이나 관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일상의 도처에 산재해 있지요. 떡을 다 먹고 나서 3행짜리 <무지개떡>이라는 시로 짧게 써보았습니다.
엄마가 사오신 무지개떡을 먹었다.
떡은 먹고 무지개는 남겨 놓았다.
북한산에 무지개가 걸리었다.
15년전 어느 일요일 쌍무지개가 떴던 것을 보고 기뻐한 이후 무지개를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시는 일상의 작은 데에서 찾아내서 무지개를 뜨게 하는 상상력의 힘을 갖고 있지요.
이 시를 쓰고 나니까 마음이 무척 좋았습니다. 떡 먹으면서도 무지개를 생각할 수 있는 경지가 되었으니 이제 동시를 쓸 때가 되었구나, 소년 정호승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고 시를 쓸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종이학>이라는 시는 큰아이가 군에 입대하게 되었을 무렵 쓴 시입니다. 아들이 군에 입대하기 전날 종이학이 천 마리 든 유리항아리를 갖고 들어왔습니다. 제게 종이학을 잘 간직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아들이 입대한 후, 아들의 방을 들어갈 때마다 유리항아리 속에 들어있는 종이학을 보면서 답답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 집에서 기르는 유리항아리 안의 금붕어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생각하면서 종이학을 날리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으로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종이학이 날아간다, 종이학이 남쪽을 향해서 날아간다.' 남쪽으로 날아가는 종이학 천 마리를 보면서 이왕이면 좋은 데로 그러면 종이학을 웅대한 장대한 지리산으로 날려보낸다, '종이학이 날아간다, 지리산으로 날아간다, 지리산으로 날아가기 시작한 종이학' 보고 있다가 한 가지 걱정이 들었습니다. 문득 비가 오면 어쩌지, 누구는 총 맞아 죽으면 어쩔까(웃음)하는데 폭우가 쏟아지면 어떻게 하나, 추락해서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에 '비가 오면 종이는 슬쩍 남겨 두고 날아간다'라고 썼습니다.
시는 어디에 들어 있는가, '비가 오면 종이는 슬쩍 남겨 두고 날아간다'에 들어 있습니다. 시를 어디에서 발견했습니까, 작은 소소한 일상에서 발견합니다. 시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잔잔한 일상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발견을 못하는 것뿐이지요.
집에서 지금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막내 아들이 생일선물로 강아지를 사달라고 해서 아파트에서 강아지를 키울 수 없는 10가지 이유를 대며 사주지 않았더니 아들은 "아빠는 나쁜 아빠야!"라며 울음을 터트리더라구요. 제 기억에 저도 어렸을 적 세발 자전거를 사달라며 안 사주던 아버지에게 울며 매달린 기억이 있는데 나중에 성장해서 아버지한테 물어보았더니 기억을 못하십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무시해 버린 기억이 있어 어린 아들에게 강아지를 사주었습니다. 강아지를 키우다 보니 곧 정이 들고, 벌써 기른 지 8,9년이 되었습니다. 그냥 흔한 이름으로 바둑이라고 지었다가 요즘은 좀 미안해서 정바둑이라고 부릅니다. 강아지의 배변문제 때문에 매일 산책을 나갔는데, 하루는 지나다가 개똥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개똥을 새가 맛있게 쪼아먹는 걸 보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되냐면, 개똥이 깨끗한가 보다, 그러니까 새가 쪼아먹지, 동시에 사람 똥인 내 똥은? 새가 내 똥을 쪼아먹을까? 그것을 무심하게 놓치지 않고 정리해서 <개똥에 대하여>라는 시를 썼습니다.
개똥은 깨끗하다.
사람 똥은 새들이 날아와
쪼아먹지 않아도
개똥은 새들이 날아와
맛있게
몇날 며칠
쪼아먹는다.
이 시에 백창우씨가 곡을 붙여 노래로도 부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강아지랑 산책하면서 새들이 개똥을 쪼아먹는 것을 보고 저 새들은 돌았나봐 하는 생각을 한다면 시도 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노래도 부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발견하는 일이 굉장히 소중합니다. 마음의 눈을 잃고 사는 것, 우리의 삶의 터전이 기계화되어 있고 항상 긴장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요. 하지만 마음속의 어린이의 마음을 회복했을 때에는 우리의 삶이 좀더 여유로워지고 고요가 생깁니다. 정바둑이는 사료를 먹지 않고, 우리가 먹는 그대로 밥을 먹습니다. 한 번은 밥을 먹다가 바둑이 밥그릇에 제가 먹다 남긴 밥을 주었더니 배고팠던지 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밥이 없는데 혀를 그릇에 갖다대고 자꾸 핥어가며 계속해서 먹었습니다. '바둑이는 그릇의 밑바닥까지 핥아먹는다, 바둑이는 그릇의 밑바닥에 어리는 햇살을 핥는구나, 나는 언제 한 번 개가 먹다 남긴 것을 먹게 되는가,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먹는다,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먹어 보았나.....' 거기에서 시가 발견되고 비롯됩니다. 강아지한테 밥을 주면서 개의 밥 먹는 모습을 무심히 지나치면 결코 시를 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일상의 잔잔한 것들을 얼마나 많이 놓쳐 버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얼마전부터 초등학생들 동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놀라운 것은 아이들이 동시를 너무 잘 쓴다는 점입니다. 어린이문학의 소중한 자료가 될까 싶어 몇 달 전에 초등학생이 쓴 동시집을 출판했습니다.
석가탄신일이다
즉 부처님이 오신 날이다
엄마와 같이 절에 가서 절도 드렸다
기뻤다
부처님 오래오래 사십시오
--김영수의 <석가탄신일>
이 시를 읽고 부처님이 이 어린이를 얼마나 축복했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봅니다. 저는 시노래 모임인 나팔꽃동인들과 언젠가 여름 지리산 캠프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온 초등학생들에게 동시를 쓰라고 하여 마지막날 상을 주기도 했는데, 어느 아이의 시입니다.
<여름산>--여름산은 초록 브래지어, 엄마가 한 브래지어라는 시구를 보고 깜짝 놀랬습니다. 산의 능선을 보고 엄마의 젖가슴으로 생각하고, 브래지어로 표현하다니 그것도 초록 브래지어. 얼마나 이쁜가,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여름 산을 보면서 초록 브래지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지요.
이오덕 선생님이 상주 지역 초등학교 교장님으로 계셨을 때, 초등학교 아이들의 글을 모아서 출판했는데, 거기에 보면 어느 초등학교 4학년 아이의 동시가 있습니다.
제목은 <내 자지>--
오줌이 누고 싶어서
변소에 갔더니
해바라기가 내 자지를
볼려고 볼려고 볼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는 안 보여줬다
재미있습니다. 오줌을 누다가 창 밖의 해바라기가 보이니까 '해바라기가 자기 고추를 본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거기서 시를 발견하게 되고 '그렇지만 나는 안 보여졌다'는 데에서 시가 결정적으로 승화됩니다. 깜짝 놀라며, 나도 이런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날 후배를 만났는데 자기 아들 자랑을 합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과연 자랑할 만했습니다. 저녁에 고등어를 사러 나갔더니 마침 자기 아들이 창문을 딱 열고 하는 이야기가 '아저씨 고등어 얼굴 예쁜 걸로 주세요', 자기는 지금까지 고등어 사면서 고등어 얼굴 한 번 쳐다본 적인 없는데, 설령 고등어 얼굴 쳐다본다 하더라도 금방 요리할 걸 무슨 상관이 있는가 말입니다. 아들의 그 마음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자기 아들을 자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고등어 얼굴>이라는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어스름이 깔린 저녁
맛좋은 고등어 있어요
눈을 끔뻑끔뻑 하는 싱싱한 고등어 있어요
생선장사 아저씨가 소리치며 골목을 지나간다
부엌에 있던 엄마가 급히 대문을 열고 나가
고등어 한 마리를 산다
나는 내 방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고
고등어 장사 아저씨한테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
고등어 얼굴 예쁜 걸로 주세요
일상 속에서 얼마든지 나만의 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발견의 눈을 더 높이, 더 맑게 떠야 하고, 동시에 사물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고등어 얼굴, 무지개, 종이학, 개똥, 밥그릇 모두 사물의 마음을 읽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사물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시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몇 해 전에 네모난 수박이 출하된 기사를 본 적이 있지요. 아직 일상적으로 먹지는 않고 있지만 네모난 수박 사진을 보니까 정말 네모난 모양입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버리는 것, 실제로 현실 속에서 5년 걸려 네모난 수박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아크릴로 네모나게 틀을 만들어 수박이 탁구공 만해졌을 때 네모난 아크릴 속에 옮겨 심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박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자신은 둥글다고 생각하며 바람, 햇살을 먹으로 자라는데 어느 날 자신이 네모나게 된다, 그럴 때 수박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럽겠는지, 수박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시를 생각하는 마음의 첫 단추가 됩니다.
이야기를 정리하면 문학을 인생의 소중한 그 무엇으로 보물로 간직하고 계신 여러분들이 그 보물을 더 소중하게 간직하고 갈고 닦기 위해서는 이제는 가슴 속에서 죽어 있는 어린이 소년과 소녀를 살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른의 눈, 인간의 눈으로만 바라보는 사물들을 사물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되돌려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시가 무엇일까, 우리들에게 시는 무엇인가, 우리들의 삶에 시가 원동력이 되어 주는 것은 큰 사실입니다. '어머니의 젖, 우리가 먹는 밥과 같은 것이 시가 아닌가, 문학이 아닌가,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듯이,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떻게 문학을 모르고 시를 모르고 배부를 수 있을까, 우리가 사랑을 모르고 어떻게 인간을 알 수 있을까, 인생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것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젊은 학생이, 사랑을 해보니까 너무 고통스러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밥을 먹지 않고 배부르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고통은 당연한 것이고,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랑을 먹기 위해서는 동시에 고통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을 먹기 싫어서 사랑을 먹기 싫어한다면 밥을 먹지 않고 배부르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배가 고픈데 식탁에 빈 그릇만 놓고 밥을 먹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시를 모른다면, 문학을 모른다면, 예술을 모른다면 이런 것과 같지 않을까요. 우리들의 밥그릇들이 비워 있다면 우리 스스로 시의 쌀, 문학의 쌀을 앉혀서 우리 스스로 밥을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이야기가 여러분에게 한 공기의 밥이 되었으면 합니다.
[동인들의 질문 및 답변]
질문--금기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시에서는 기본적으로 금기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쓰느냐에 의해 달라며, 그것을 어떻게 시적으로 승화시키고 성공시킬 수 있는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활동하셨던 반시 동인은 서정시와 어떻게 틀린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반시동인>은 안티는 아니었습니다. 반소설이나 반연극은 아니었고, 기존 우리 60년대 시인들의 난해성과 추상성에 반대입장에 서거나 70년대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반대적 입장에서 '반시'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구마사태 때 학생들 가방 속에 『반시』가 나와 안기부에서 불온서적 조사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너무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시들에 대해서 보다 쉬운 언어로, 일상의 언어로 우리 시대와 역사와 현실을 관통하는, 우리 공통체 삶에 뿌리를 내리는 것을 시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질문--시어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직감으로 쓰는 시, 관념으로 쓰는 시, 직감으로 쓰는 시는 흔히 씹는 맛이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시어에 대해 물어보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시에서는 무엇을 쓰는가가 중요합니다. 점심에 뭘 먹을가를 생각하지 그릇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내용이 결정되면 형식은 자연스럽게 따라오지요. 형식에 치우치다 보면 내용이 부실해지고, 시어라는 토막난 부분, 편협적인 부분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문제에 좀더 관심을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질문--강의에 인용된 시들이 모두 동시여서 질문하는데, 자녀들과의 문학적 교감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 별달리 특별하게 한 것은 없고, 서울에서 태어나 살 수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자연에 대한 경험, 관심을 두게 하려고 좀 노력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제 밑거름은 어릴 때 경험했던 자연환경에서 시작되었거든요. 어릴 때 대구에서 살았는데 어머니가 가꾸던 꽃들, 눈 올때 마당에서 눈사람 만들던 경험, 밭고랑에서 할머니들이 오이도 가꾸고, 도라지도 캐는 경험들, 냇가에서 놀던 것들, 처음 바다를 보았을 때 보았던 충격 등이 밑거름되었습니다.
질문--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나라는 지구상에 우리나라밖에 없다고 하는데 이는 국가적 위상을 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 문단의 평가를 받으면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데, 21세기 문학적 상황에서 글쓰는 사람들이 독자와 호흡을 맞춰 나가면서 출판하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인지 말씀해 주세요
⇒ 왜 우리 나라는 시의 독자가 많은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시집을 많이 읽는다....우리의 민족적 정서 속에 뭔가 마음속에 사무침이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베스트셀러의 문제는 상업성 속에 문학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문학성 속에 상업성과 대중성이 있는 것입니다. 일단 문학성을 높여야만, 상업성과 대중성도 형성되고 따라올 수 있는 것이지요. 먼저 문학성을 제외시켜 버리고 대중성과 상업성을 추구하는 문학이라고 한다면 문제점이 있다고 봅니다. 독자들이 많이 찾는다고 해서 상업성과 대중성을 먼저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스스로 자멸하고 말지요.
저는 항상 시로서의 완성도, 문학성의 높이와 깊이, 넓이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요즘 베스트셀러 목록에 신경림 선생님의 시집이 들어 있는데 그 뿌리는 상업적 시집이 아니며 문학성이라는 힘에 의해 상업성과 대중성이 같이 따라왔다고 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