始祖 宋惟翊 - 2세 叔文 - 3세 希稙 - 4세 松禮 - 5세 玢 - 6세 璘 - 7세 郊 - 8세 禧 - 9세 繼性 - 10세 復元 - 11세 玹壽
1) 出生 1342年(고려 충혜왕 복위 3년) 壬午
卒 1425年(조선 세종 7년) 乙巳 (조선 1392年부터)
2) 官 ①嘉靖大夫 ②工曺典書 (가정대부 공조전서)
① 가정대부 : 조선시대 종2품 상계(上階) 문관의 품계. 고려시대의 영록대부에 해당한다. 1392년(태조 1) 7월 새로이 관제를 제정할 때 설치되었다.『생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② 공조(工曹) : 고려·조선 시대 산림·소택(沼澤)·공장(工匠)·건축·도요공(陶窯工)·야금(冶金)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본 중앙관청.
조선시대에는 1392년(太祖 1) 설치되어 소속부서로는 토목공사를 맡은 영조사(營造司), 공예품의 제작·도량형을 관리하는 공야사(攻冶司), 산림·소택·목재·궁궐의 정원·교통사무·필묵·칠기를 맡은 산택사(山澤司)가 있었으며, 소속관청으로는 상의원(尙衣院)·선공감(繕工監)·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전연사(典涓司)·장원서(掌苑署)·조지서(造紙署)·와서(瓦署) 등이 있었다. 관원으로는 판서(정2품) 1명, 참판(종2품) 1명, 참의(정3품) 1명, 정랑(정5품) 3명, 좌랑(정6품) 3명이 있었다. 1894년(고종 31) 공무아문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이듬해 다시 농상아문과 합하여 농상공부로 개편되었다.
조선 초기까지 6조의 장관을 전서라고 했지만, 중앙관청의 장이 정3품이라 국사에 깊이 참여하지 못해서 6조의 역할이 약해지자, 태종 5년 전서를 판서로 고치면서 정2품으로 올려서 실권을 맡게 합니다.
3) 墓 失傳
✼ 祭壇碑 : 영운재(永雲齋) 전북 정읍시 산내면 매죽리 산 213, 산622
4) 配 義星金氏 父 三重大匡 義城君 光佰 (의성금씨 父 삼중대광 의성군 광백)
生沒年代未詳
墓 失傳
5) 時享 五月 첫째주 日曜日
6) 子 二男一女 長男 宋繼性 (官 兵判) 次男 宋繼陽 (官 戶判) 女 郭益儀
7) 太宗至相 相與圍棋 以老➀乞骸 歸古阜➁田舍 命有司 營大第 爲➂杖屨之所
태종지상 상여위기 이노 걸해 귀고부 전사 명유사 영대제 위 장구지소
上이 臨朝에 每謂 ➃朝臣 曰 宋禧는 在朝而負➄伊呂之補하고 在野而有➅巢許之趣하니
상이 임조에 매위조신 왈 송희는 재조이부 이여지보 재야이유 소허지취
進退之節 實有得於中 思其賢而 名里優德 公感恩扁其亭 曰 ➆感恩
진퇴지절 실유득어중 사기현이 명리우덕 공감은편기정 왈 감은
以壽 終於閭舍 上極加➇嗟嘆 特遺禮官➈致祭 後因爲➉禮葬於本郡
이수 종어여사 상극가 차탄 특유예관 치제 후인위 예장어본군
〖태종과 친분이 두터워 가끔 더불어 바둑을 즐기는 사이였다. 만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고부(전북 정읍)의 전사(고향집)로 돌아오니 왕이 관원에게 명하여 큰 집을 짓고 장구소로 쓰게 하고, 왕은 조회 때면 번번이 조신들에게 “송공은 조정에 있어서는 이윤과 여상의 보필을 하였고, 시골에 있어서는 소부와 허유의 지조가 있었으니 나아가고 물러가는 절조를 그 가운데서 얻으신 분이시다.” 하고 치하하였으며, 그 어짊을 생각하여 공의 마을을 ‘우덕리’ 라 명명하여 하사하였고 공도 성은에 감격하여 그 집(정자)을 감은정이라고 하였다. 천수를 다하고 고향집에서 운명하시니 왕이 슬퍼하고 탄식하였으며 특히 예관을 보내어 치제케 하고, 본군에 예장하였다.〗【1989년 대동보 1권 93, 96쪽】
➀ 걸해 : 나이 많은 관원이 사직을 주청(奏請)하는 것. 자신의 뼈를 가져다 고향에 묻겠다는 뜻.
➁ 전사 : 관직을 그만두고 물러가 사는 고향집이나 지방의 전지(田地) 등을 관리하기 위한 곳.
➂ 장구(杖屨) : 지팡이와 짚신을 아울러 이르는 말. 이름난 사람이 머물러 있던 자취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➃ 조신(朝臣) :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는 신하.
➄ 이윤(伊尹) : BC 1630년 추정 ~ BC 1550년 추정
공상(空桑) 사람으로 이름은 이(伊),혹은 지(摯)이고, 아이 때 이름은 아형이다. 하말상초(夏末商初) 시기의 정치가이자 군사가, 사상가, 요리사이다. 윤(尹)은 우상(右相)의 벼슬을 뜻한다. BC 1600년경에 그는 탕(湯) 임금을 보좌하여 하(夏)나라를 멸망시키고, 상(商)나라를 건립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승상이 되어 관리를 다스리고 민정을 잘 살펴서 경제를 부흥시켜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었다. 일설에는 처음에 이윤이 탕 임금을 만날 길이 없자 탕 임금의 처인 유신씨(有莘氏) 집의 요리사가 된 뒤, 솥과 도마를 등에 지고 탕왕을 만나 음식으로써 천하의 도리를 비유해 설명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그를 중국요리의 창시자로 받들고 있다. 탕 임금이 죽은 뒤에도 아들인 외병(外丙)과 중임(中壬)을 보좌했고, 그 뒤 탕 임금의 적장손인 태갑(太甲)도 보좌했는데 태갑이 포학하게 굴자 동궁(桐宮)으로 축출했다가 그가 개과천선하자 3년 뒤에 다시 영입하여 복위시켰다고 한다. 또 뒤이어 태갑의 아들 옥정(沃丁) 밑에서도 벼슬을 했다.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여상(呂尙) : 주나라 때 동해(東海) 사람. 성은 강(姜)이고, 이름은 상(尙)이며, 자는 자아(子牙)다. 집안이 가난해 위수(渭水) 강가에서 낚시를 하다가 문왕(文王)을 만났다. 문왕이 이야기를 나눠보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우리 태공이 그대를 기다린지 오래입니다.(吾太公望子久矣)”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태공망(太公望) 또는 강태공(姜太公), 여망(呂望)이라고도 부른다. 문왕과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나라를 치고 주나라를 세운 공으로 제(齊)나라의 제후에 봉해졌다. 무왕은 그를 높여 사상보(師尙父)라 했다. 도읍을 영구(榮丘)에 두었는데, 제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정치를 잘해 많은 사람들이 귀의했다. 주나라에 머물면서 태사(太師)가 되었고, 오후구백(五侯九伯)을 정벌할 권한을 가졌다. 병서(兵書) 『육도(六韜)』는 그가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 1. 20. 이회문화사】
➅ 소보(巢父) : 요 임금이 천하를 소보에게 넘겨주려 하자 이를 거절했다. 요 임금이 이번에는 허유를 九州의 장으로 임명하자 허유는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며 영수(穎水)라는 강가로 도망쳐 귀를 씻었다. 그런데 이때 마침 소보가 송아지를 끌고 와 그곳에서 물을 먹이려다 귀를 씻고 있는 허유를 보고는, 쓸데없이 떠다니며 명예를 낚으려는 행동은 옳지 않다고 나무란 뒤, 이곳에서 귀를 씻었으니 송아지 입이 더러워지겠다며 상류로 송아지를 끌고 가서 물을 먹였다고 한다.
소보나 허유나 모두 속세의 권력이나 명예에는 관심이 없는 은자들이었다. 특히 소보는 귀를 씻은 허유의 행동조차 명예를 염두에 둔 행동이라며 나무랐다. 모두 도가 계통의 인물로서 추앙을 받고 있다.
소보에 관한 내용은 동한시대 왕부가 지은 『잠부론』이란 책에 보인다.
허유(許由) : 고대 전설 속에 나오는 은자이다. 허요라고도 하며 소보와 같은 시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요 임금이 만년에 이르러 자신의 자리를 허유에게 양보하려 하자 그는 한사코 거절한 다음 기산(箕山, 허난성 태강 북쪽) 아래로 도망쳐 몸소 밭을 갈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후에 요 임금이 다시 그를 불러 구주의 우두머리로 임명하려 하자, 허유는 어지러운 소리를 너무 많이 들었다며 영수(穎水, 허난성 동부 및 안후이성 서북부)로 가서 자신의 귀를 씻어 자신의 고결함을 보였다고 한다.
허유나 소보는 모두 전설시대 은자들로 부귀와 권력을 뜬구름처럼 여겼다. 이들에 관한 이런 기록들은 사마천의 『사기』를 제외하고는 『장자』, 『회남자』, 『잠부론(潛夫論)』 등 대개가 도가 계통의 서적들이다.
➆ 감은(感恩) : 은혜를 고맙게 여김.
송공 감은정 유지비 (宋公 感恩亭 遺址碑)
➇ 차탄(嗟歎·嗟嘆) : 한숨을 지으며 탄식함.➈ 치제(致祭) : 임금이(국가가) 공신(功臣)이 죽었을 때 제물과 제문(祭文)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는 일을 이르던 말. 또는 그 제사를 이르던 말.
➉ 예장(禮葬) : 예식을 갖추어 치르는 장사(葬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