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와 더불어"
가족 중 영광스럽게 영세 1호가 되었고 세례는 수녀원 입회로 이어졌다. 가족에 대한 감사와 배려를 담은 나의 기도로 무엇이 가장 좋을까? 고민하였다. 그것은 단연 모든 가족이 하느님 품으로 귀의하여, 혈육, 정신, 영으로 더 굳건한 신앙의 가족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도 주제와 설정은 자못 대견스러운 것이었다. 초입에 소소한 응답이 있었다. 순박하고 선한 나의 막내 여동생,손 위 언니,어머니께서 차례대로 신자가 되었다. 그리곤 ‘뚝’이었다. 결혼한 오빠와 그 가족들만 해도 다섯인데 말이다. 기도는 계속되었고 어느 순간 희미한 하느님의 응답과 축복에 버럭 화를 냈다. 아니 내가 부귀영화를 바란 것도 출세를 청한 것도 아니고, 그저 아주 가까운 가족들의 영세를 원해 기도했는데, 그것은 주님과 나 서로에게도 참으로 바람직한것인데 왜 풍성히 안 들어 주시냐고?
입회하고 십여년 세월이 지나 97년 초 여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이미 쓰러지신 전적이 있으셨다. 그런데 잘 관리하지 못하시고 다시 두 번째 쓰러지셨고 반신불수가 되시어 한 2년 누워계시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으신 것이다. 아버지는 입원 생활 중 원목 신부님께 요셉이라는 세례명으로 신자가 되셨다. 생전에 당신 두 발로 성당에 다니시지는 못했지만 당당 세례 교인이라 소속 본당 교우들의 정성스런 연도를 받으셨다. 그리고 돌아가시고서야 비로서 사람들에 의해 운구되어 장례미사를 받으셨다.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는 참으로 오묘하시다. 사실 내 아버지는 어떤 그리스도인 보다 더 훌륭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시기도 하였다. 부고를 전달받은 그때, 나는 초임 본당 수녀로 일하고 있었다. 본당 신부님이 공지하셨다. “단체장들과 교우들은 아주 많이 가서 기도해주고 오라”라고. 대구에서 충주 간 비포장도로를 대중교통과 자가 운전으로 수많은 본당 교우들이 오셔서 기도해주셨다. 충주시 초입에 있는 우리 동네는 번화한 시내도 외딴 시외도 아닌 어정쩡한 동네였는데, 동네 초상집치곤 역대 최고의 문상객들로 붐볐다는 후문이고 동네 사람들과 우리 가족이 모두 놀랐고 감동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장례 후 오빠 내외와 자녀들, 손 위 언니의 두 딸이 연이어 그득하게 입교했다.
97년 아버지의 귀천 후 불과 2년이 지난 99년 연초, 건강했던 오빠가 뇌출혈로 쓰러지고 이내 하느님 품에 안겼다. 참으로 황당하고 가슴 아픈 사건이었다. 그때는 대전의 모 본당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도 수많은 교우들이 와서 젊은 오빠의 죽음을 함께 안타까워해주고 기도해주었다. 어떤 교우는 365일간 오빠를 위해 기도해주셨다고 마지막 날 와서 조용히 고백하셨다. 세상에나! 그 자매는 나와 우리 가족에게 감사하기 짝이 없는 신앙의 가족이셨다. 심지어 오빠에겐 누이동생인 나보다 더한. 이쯤 되니 하느님 안에 모든 이가 형제자매여서 남자분을 호칭할 때는 ’형제님‘ 하고 여자분을 호칭할 때 ’자매님‘이라고 부르라는 교회 방침이 절절히 이해되었다. 오빠의 귀천 이후 조카들의 배우자와 그의 자녀들 나에겐 손주들의 세례가 이어졌다.
하느님 품으로 아버지와 오빠 두 분을 보내드리며 몇 가지를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세상적으로도 신앙적으로도 비교 불가한 가장 소중하고 더 할 수 없이 귀한 것을 청했던 것이다. 이 점 두고두고 스스로 기특하다. 그리고 하느님도 당신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주셨다. “ 우리 가족의 하느님께 감사!” 최고의 청원은 내가 했지만 이루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셨다. 그리고 그 청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수많은 교우들의 정성스런 땀과 기도가 동참했다. 하느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 구원은, 한 개인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대구에서 충주로, 또 한 번은 대전에서 충주로, 돈과 시간과 발걸음을 내어 와 주신 수많은 교우들의 정성스러운 방문과 기도는 하느님을 감천시키고 내 가족들을 감동시켜 하느님을 찾게 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구원은 주님과 사람들의 ’홀로‘와 ’더불어‘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요한복음 ’카나의 혼인 잔치 기적‘(요한2,1-12)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거긴 카나라는 지역의 잔칫집, 예수님,성모님,혼주와 신랑·신부 그리고 양가 부모님과 친척들, 과방장, 동네 사람들, 빈 물독 항아리 6개,물(H2O), 주님이신 예수님도 조언자 성모님의 한 말씀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즉각적인 행동을 개시한 물 퍼 나른 일꾼들, 쾌청한 태양과 공기, 꽃 그리고 그 외 모두가 자기 소명과 역할에 정성을 다해 이룬 결과였다.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인연으로 만난 소중한 두 분의 번제 사건. 하느님은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받으시고 그보다 더 소중하고 값진 것을 주시는 분이셨다. 이것은 전능하신 하느님이 무슨 희생 제물이 필요해서 사람과 주고받는 거래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유한한 인간이 겪어야 하는 생자필멸의 한 과정으로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우둔한 신앙과 진리를 생생하게 깨치는 계기가 된다.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의 소중한 어떤 것을 잃거나, 어떤 사람을 떠나보내고야 비로소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가까이 곁에 함께 있고 누릴 때 알아차렸더라면 참으로 은혜로울 것을.
그러나 그 옛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달랐다. 외아들 이사악을 주실 때는 언제고 다시 번제물로 바치라는 황당을 넘어 잔인한 하느님의 계시, 그도 울분과 좌절을 겪었겠지만, 아브라함은 특별하고 비범하게 처신하였다. 자식을 향한 자신의 부성을 뛰어넘어,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믿음과 신앙을 통찰하고 선택했다. 그 결과 그는 이사악만의 아버지가 아닌 모든 믿는이들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창세22,1-24) 감히 그 어른 아브라함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잃고서라고 한 조각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으니 그 또한 은혜이고 감사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