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모세의 노래 후반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지난 번에 우리는 전분부 20절까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21절부터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만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 오는 중에 애매한 것이 하나 있어서 그것부터 밝히고 지나가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언제의 사건을 두고 말하고 있는 지를 알기가 참으로 힘이 든다는 점입니다. 즉 사건의 시제가 애매하게 느껴진다는 점입니다.14절부터 ‘소의 기름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의 수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우셨다 그런한데 여수룬이 살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지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이 여겼도다’고 했는데 얼핏보면 이 말씀들은 장차 가나안의 생활을 내다보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만 자세히 보면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임이 드러납니다. 14절에 바산 소산의 수양과 염소와 밀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을 정복한 것을 보여 주고 있고 아직도 여전히 요단 동편에 있음을 상기 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겨 하나님의 노를 격발했다는 이야기와 근래에 일어난 새 신을 섬겼다는 이야기도 요단 동편을 점령하기까지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 동안에 살지고 윤택해지고 뚱뚱해진 때가 언제 있었던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런 때도 별로 없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미래의 가나안에서 잘 먹고 살게 되는 때는 말하는 것 같이도 생각이 됩니다만 그러나 요단 동편에 와 있는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을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21절에도 이 사실을 분명히 해 줍니다. ‘그들이 하나님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까지는 히브리어에도 과거시제로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문법적 용어로 말하면 완료형과 완료형 와우 계속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시기나게 하며...’부터는 미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문법으로는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모세의 노래 후반부 끝까지 미래형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므로 20절까지는 지금까지 있었던 과거의 사건을 가지고 말하고 21절부터는 가나안에 들어가서부터 있을 미래 사건을 두고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내용입니다. 내용을 보면 가나안 동편에 오기까지 이스라엘이 잘못했던 죄를 가지고 미래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21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하여 심판하시겠다고 하는 말씀들입니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무서워서 간담이 서늘해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째서 요단 동편까지 오면서 지은 죄악을 가지고 가나안에 들어 가서 징계하시는가 하는 의문에 생깁니다. 하나님이 마치 망령이 든 영감쟁이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징계했으면 되었지 과거의 잘못을 가지고 먼 미래에까지 징계를 하시겠다는 것은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하나님이 징계하기 좋아하며 매를 들고 때리기를 좋아하는 용서할 줄 모르는 비정한 폭군같은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혹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채찍질 하기 좋아하는 폭군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똑 같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거쳐 요단 동편에 오기까지 이스라엘이 했던 행동들을 장차 가나안에 들어가도 또 할 것이라는 것을 내다 보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광야를 거쳐 요단 동편에 이르면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신했던 그 인간이나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게 될 때의 그 인간이나 변함이 없는 똑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똑 같은 죄인이요 죄성을 가진 자로서 광야에서 하던 그 짓을 가나안에서도 또 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이 미래에도 징계하시는 것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징계는 미래에도 인간이 여전히 죄인이라서 똑 같은 죄를 지을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이 징계하기를 좋아하는 비정한 분이 아니라 인간이 그만큼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오래 믿고 세월이 가고 역사가 흐르면 인간이 진화되어 나아지고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역하는 똑 같은 죄를 반복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말입니다.기분이 나빠도 이것이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오래 믿어 좀 나아졌으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대단한 사람들이 되었으리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나아진 것이 없는 똑 같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요단 동편에 오기까지의 이스라엘의 죄인 됨은 미래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스라엘의 과거와 현재는 미래를 말해 줍니다. 그래서 모세는 미래를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그들은 모략이 없는 국민이라 그 중에 지식이 없도다’(28)고 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종말을 깨닫지 못하는 지혜없는 사람들입니다(29). 그들의 지식없음과 지혜없음에 대하여 30절부터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모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모르고 있습니다. 28절에 ‘모략이 없는 국민이라’는 말은 ‘계획을 파괴하는 국민’이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파괴하는 국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을 때는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계획을 조상 아브라함의 선택에서 밝혔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온 세상이 복을 받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계획을 두고 선택하셨으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30절의 말씀처럼 한 사람이 천을 당하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하게 하시는 것을 보았을 때는 자기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실 놀라운 비밀이 있는가보다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알려고 하면서 믿고 따랐어야 할 것인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눈치를 전혀 채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저 현재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여서 불평불만하면서 배역하고 반대할 생각만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우리들을 선택하여서 인도하여 오신 것은 놀라운 계획이 있기 때문이로구나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불평불만하는 오늘날의 우리와 똑 같습니다. 여러분은 사는 것이 힘이 들어도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을 잊고 사는 사람을 지식이 없다고 합니다. 이해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해해 보려는 관심이 아예 없다는 말로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그들은 대적들도 알고 있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수들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고 있습니다. 그 큰 계획에 대하여 눈치를 채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얼마나 미련합니까? 이것이 선택된 자들의 모습입니다.그리고 그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귀의 하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32-33).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종말이 어떠할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곧 후회하실 것입니다.36절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인하여 후회하시리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자기 백성이란 ‘언약이 있는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자기의 약속을 두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하는 중에서도 그 약속에 충실한 사람들을 남겨 두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이런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또는 그 종들이란 이런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참으로 주의 백성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불신앙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합니다. 심판을 받고 잡혀가고 이방 땅에서 수난을 당합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이 없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배역한 백성들을 심판하시고 원수를 갚으실 때는 이렇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의로운 자기 백성들을 기억하셔서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킬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실 것입니다. 이 때는 열방들도 이스라엘에 참여하여 함께 즐거워 하게 될 것입니다. 43절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너희 열방은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에게 보수하시고 자기 땅과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사죄와 속죄가 이스라엘에 베풀어질 것이며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피를 원수들에게 갚으실 것을 말씀합니다. 이 사건들은 궁극적으로 오실 분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두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이 이스라엘의 종말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이란 죄악에 대한 심판이 있고 억울하게 죽은 자들에게 대한 보수가 있으며 열방이 이스라엘에 참여하는 일이 일어 날 것입니다. 따라서 종말이란 육신적인 이스라엘의 종말입니다. 육신적 이스라엘이 끝이 나고 신령한 이스라엘이 일어날 때가 종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그들의 종말을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조상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의 말씀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약속을 따라 약속된 미래를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망하고 말 인생들에게 약속된 사죄의 미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과거로 돌아가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저는 텔레비전에서 고향을 떠나서 온 세계에 흩어져서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위성방송 1주년 기념 방송 프로그램이었는데 고국을 떠나 외국에서 살면서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그리워 하는 것은 고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타향살이 몇 해든고’하는 노래나 ‘나의 살던 고향은’과 같은 노래를 즐겨 불렀습니다. 저는 나에게도 질물을 해 보았습니다. ‘나도 저렇게 될 것인가? 몇 년 후면 나도 50을 넘어서고 할아버지 소리를 듣기 싫어도 듣게 될 나이가 될 것인데 그 때에 가서 저 사람들과 같이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타향살이를 부르면서 향수를 달래는 사람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그러나 저는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뒤돌아 볼 고향이 아니라 앞으로 달려가야만 할 본향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앞으로 달려가다가 가게 될 본향이 저 앞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내가 떠나 온 육신의 고향은 영원히 돌아 갈 본향이 아니라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그러니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지 살다가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 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더욱 정신을 차리고 헌신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 신자들에게는 뒤돌아 갈 땅의 본향은 없습니다. 하늘에 있는 본향 뿐입니다. 예수께서 길을 닦아 주셨고 모든 준비를 마쳐 놓았습니다.그러므로 신자는 이 본향에 갈 것만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 신자의 삶은 이 곳을 바라보고 사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자기의 종말을 알고 그것을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종말을 생각하고 살기 때문에 예수를 생각하면서 살게 됩니다. 자기의 종말이 예수 안에서 이미 실현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땅의 것들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땅의 것들을 벗어나서 종말을 생각하며 예수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면서 예수를 바라보면서 사십시오. 예수는 여러분의 종말을 실현시켜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에게서 자기의 종말을 확인하고 사는 지혜로운 자라는 것을 되새기십시오. 이러한 되새김은 이 세상을 극복하도록 하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