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이 공부해야 하는 까닭 -이연학 신부-
오래전 공동체 형제들과 함께 지리산 불일폭포 윗자락에서 야영하던 때 일이다. 물가에서 설거지하다, 인근 오두막에 혼자 지내던 중년 남성을 만나 수인사를 나누었다. 뭐 하시는 분인지 조심스레 여쭈었다. “공부 좀 하느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법고시 공부 따위를 연상하고 ‘저 나이까지 저러고 있구나.’ 하며 안쓰럽게 여겼다. 며칠 후 함께 식사하는 자리가 생겨 더 깊은 대화를 나누다 비로소 알았다. 그 ‘공부’가 그 공부가 아니란 사실을. 그는 지리산 자락에 스며들어 한반도에서 고래로 전해 온 방식으로 정진하는 수행자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공부(工夫 혹은 功夫)는 우리말에서 내적 수양 혹은 영적 수행이란 뜻으로도 많이 쓰여 왔다. 지금도 절집에서는 주로 그런 의미로 쓰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머리만 쓰는 일이 아니라 온몸과 인격 전체가 가담하는 배움의 행위다. 상응하는 서양말로는 물론 제일 먼저 영단어 study(그리고 그 출처인 라틴어 studium)가 떠오른다. (「옥스퍼드영어사전」에는, 1697년 이전까지 이 말이 애정, 친근함, 욕망, 즐거움이나 관심 따위를 두루 뜻했다고 적혔다.) 그러나 더 가까운 말마디는 아무래도 고대 그리스어 askesis일 것이다. 훈련, 수련 혹은 연습을 뜻하는 이 말은 몸의 가담 정도가 훨씬 무겁다. 바로 이 말이 그리스 교부들을 통해 교회로 들어와 ‘수행’(혹은 수덕, asceticism)이란 뜻으로 정착되었다. 이 단어를 빼면 그리스도교 수도승 전통도 도무지 설명될 수 없을 정도.
세상을 떠받치는 세 기둥
방대한 탈무드 중 ‘피르케이 아보트’(Pirqei Avot, ‘선조들의 어록’) 부분에, 기원전 3세기경 인물 ‘의인 시메온’의 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세상을 떠받치는 세 기둥이 있다. 첫째는 토라(오경) 공부요 둘째는 예배(avoda)이며 셋째는 자비 실천이다.”이 말씀을 처음 접했을 때 눈이 번쩍 띄는 듯했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리한 10개 ‘범주’(kategoria)를 능가하는 준거로 보였다. 과연 공부(지혜)-기도(좁은 의미의 영성)-사회적 실천, 이 세 가지는 내게 지금껏 신앙생활뿐 아니라(신구약성경 주요 대목들은 빠짐없이 이 세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생 전체를 바라보고 살아가게 돕는 소중한 기준점이 되고 있다.
셋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를 놓고 유명한 라삐 아키바(50-135년)와 라삐 타르폰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사제 가문 출신 타르폰은 하느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봤다. 반면 아키바는 토라 공부가 제일 중요하다고 여겼다. 둘의 논쟁이 팽팽해지자 유다교 ‘시노드’(70년 얌니아 회의)에 모여든 다른 라삐들이 의논 끝에 내린 결론은 이랬다. “두 분 다 옳습니다만 우리는 라삐 아키바의 의견을 따르렵니다. 예배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는 것이 바로 토라 연구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라는 기둥
시대와 상황마다 더 중요하게 부각되는 기둥이 있다. 오늘은 어떤 기둥이 가장 중요할까? 역시 공부라고 믿는다.
첫째 이유는, 구술 문화에서 문자 문화를 거쳐 전자 문화 시대의 정점에 도달한 인류가 시나브로 인공지능이 열어젖히고 있는 신세계의 문턱에 서 있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혹시 이것이 ‘끝의 시작’은 아닌지 우려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인공지능은 말 그대로, ‘지혜’(sapientia)가 아니라 ‘지능’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폐해는 지혜가 아니라면 어찌 손을 써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둘째는, 좁은 의미의 ‘영성’과 (사회적) 실천의 통합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청되기 때문이다. 과장을 보태 표현하자면, 기도에만 전념하는 (듯 보이는) 수도자들도(타종교 구도자들도 포함), 사회적 실천에만 투신한 활동가들도 오늘날 저마다 모종의 위기에 시달리는 듯하다. 협의의 영성만으로도, 그리고 사회적 투신만으로도 메꿀 수 없는 거대한 결핍을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절실히 느낀다. 이 두 영역의 통합을 추구하는 이들도 우후죽순 늘고 있다. 이런 추세 배후에도 ‘지혜’가 있다고 느낀다. 지혜는 늘 통합 혹은 회통(會通)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셋째는, 교회 안팎으로 적지 않은 이른바 ‘영성가’(교회 밖의 경우 ‘깨달은’ 이)들의 추문과 일탈 현상 때문이다. 성 추문뿐 아니다. 높은 수준의 영적 통찰과 체험을 갖추고도 의식은 정치적으로 미숙하고 위험한 상태에 고착되어 버린(예컨대 스즈키 다이세츠 같은 옛 일본 선지식들) 경우도 필경 ‘공부’가 부족했을 터. 온전한(holistic) 영성은, 좁은 의미의 ‘영적’ 영역뿐 아니라 심리, 문화, 정치, 세계관을 포함해서 인간 정신의 온 분야가 원만히 성숙하고 통합될 때 드러난다는 켄 윌버의 전망에 공감한다.
영적 여정으로서의 공부
걸출한 지성이요 신비가였던 생빅토르의 후고(1096?-1141년)가 당대 학인(신학 입문자)들을 위해 쓴 「디다스칼리콘」(Didascalicon)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혜야말로 추구해야 할(혹은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것 가운데 으뜸이며 … 지혜는 사람을 비추어 자기 자신을 알아보게 한다(ut seipsum agnoscat).”
‘인식하다’ 혹은 ‘알아보다’라는 뜻의 agnoscere 동사는 성 레오 대교황(390-461년)의 유명한 성탄 설교에도 비슷한 문맥에서 등장한다(「디다스칼리콘」 첫 부분 출전 중 하나이리라). “그리스도인이여, 그대 자신의 품위를 알아보시오(agnosce).”
여기서 말하는 품위는 인격의 고귀한 품위 정도가 아니다. 깨달으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신성에 한몫을 얻은”(divinae consors factus naturae) 자아의 ‘신적 품위’이다(「설교」, 21,3). ‘지혜’가 이끄는 ‘공부’가 도달하는 지점은 대개 이런 종류의 자기(‘참나’) 인식이다. 공부 여정이 영적 여정과 다르지 않다.
“아침에 진리를 (알아)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 「논어」, 里仁편). 심상찮은 시대를 사는 예수님 후학으로 공자님 말씀에 감히 토를 하나 달고 싶어진다. 굳이 저녁까지 기다리랴, 곧 죽어도 여한이 없지 않으랴(卽死可矣).
2023년 9월호 경향잡지 게재 글 복사함
첫댓글 공부, 전례)예배, 실천은 트라이앵글이다. 공부를 해야 왜 예배를 하고 실천을 해야하는지 알게 된다. 실천없는 공부는 죽은 공부이다. 실천할 때 공부는 비로서 완성된다. 예배 없는 공부와 실천은 무신적 휴머니즘이다. 그런 공부와 실천은 한계가 있고 심지어 위험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