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강빈 시비(詩碑)에 맑은 시혼(詩魂)을 담다
소천 4주년을 맞아 사정공원 중앙에 우뚝 선 석비(石碑)
한용운 박용래 김관식 최원규 시비에 이은 문단의 경사
임강빈 시 조형물 건립 추진위원회(위원장 최원규 시인)는 고(故) 우봉(又峰) 임강빈(任剛彬) 시인을 기리는 ‘시 조형물’을 2020년 7월 16일 오후 3시, 대전광역시 중구 보문산 사정공원에 건립하고 기념식을 가졌다. 사정공원에는 한용운 시비, 박용래 시비, 김관식 시비, 최원규 시비 등에 이어 다섯 번째로 임강빈 시비가 건립되었다. 임강빈 시비는 서울대 명예교수 최종태 조각가가 디자인하였다.
한 수 시인의 사회로 순국선열과 작고 문인을 추모하는 묵념 후, 추진위원회 최원규 위원장의 인사말씀, 리헌석 문학평론가의 ‘임강빈 시인의 약력’ 보고, 사무국장 황희순 시인의 ‘경과’ 보고가 진행되었다. 이어 한국시인협회 나태주 회장의 축사, 대전문인협회 조남익 1대 회장의 축사, 현대시인협회 김용재 이사장의 축사, 조형물을 디자인한 최종태(예술원 회원) 조각가의 ‘디자인 컨셉’이 이어졌다. 시비의 전면에는 임강빈 시 [마을]과 최종태 선생의 조각이, 후면에는 최종태 조각가의 ‘비문(碑文)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옹기종기
노랗게 살아가는 마을이 있다
기웃거리지 마라
곧게 자라라
가볍게
더 가벼워져라
서로가 다독거리며 사는
민들레라는 따스한 마을이 있다
―임강빈 시 「마을」 전문
<임강빈 선생은 섬세하고 날카로우나 모나지 아니하며 일상의 평범한 말 속에서 시어를 찾았다. 세속에 물듦이 없는 맑은 영혼과 안분지족의 선비정신으로 오늘을 살고, 순수 무구한 시정(詩情)을 구도의 언어로 다듬었다. 그리하여 고귀한 여백의 미를 그려내었다. 사랑하는 시인이여, 당신을 아끼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담아 여기에 비를 세우니 만세를 기억하며 함께할 것이다.(2019.7.최종태)
건립 기념식은 식순에 의해 진행되었다. 책임 추진위원 박헌오 시조시인의 건립 소감, 고인의 동창인 임성숙 시인의 시 낭독, 대전문인협회장을 역임한 최송석 시인의 시 낭독, 수원시인협회장을 역임한 김준기 시인의 시 낭독 등이 이어졌다. 끝으로 정진채 가수가 임강빈 시를 직접 작곡한 노래 [마을] [연가] 가창이 박수 속에 진행되었다.
기념식은 가족대표 임창우 장남의 ‘감사 인사’와 일부 가족 소개로 맺었다. 이날 참석한 가족은 사모님 이석희 여사, 장녀 임창숙과 가족들, 장남 임창우와 가족들, 차남 임창준과 가족들, 그리고 고인의 형제들과 친지들이 참석하여 시비 건립을 축하하며 감사하였다. 손자와 손녀가 고인의 유고 저서 ‘임강빈 시전집’과 유고시집 ‘나는 왜 눈물이 없을까’를 증정하고, 시비에 새겨진 시를 디자인한 손수건을 참석자에게 드렸다.
식후에, 사회자 한 수 시인이 ‘참석한 문인 소개’를 청하여, 문학사랑협의회 리헌석 이사장이 오신 분들을 소개하였다. 진행 순서에 소개되지 않은 문인들을 중심으로, 기억에 의존하여 가나다 순으로 적시하면, 강임구 시조시인, 김규나 시인, 김명수 시인, 김명아 시인, 김성숙 시조시인, 김영수 시조시인, 김영훈 소설가, 김지숙 시인, 김춘경 시인, 김현정 문학평론가, 류 환 시인, 박봉주 시조시인, 박종국 수필가, 박진용 아동문학가, 배인환 시인 부부, 배정태 시인, 손종호 시인, 손혁건 시인, 양태의 시인, 엄기창 시인, 우순남 아동문학가, 이강산 시인, 이돈주 시인, 임세실리아 수녀시인, 조남명 시인 등이 우봉 임강빈 시인의 문학혼을 기렸다.
참고 자료1.
시비를 제작한 최종태 선생은 ‘제작자 디자인 컨셉’을 이렇게 발표하였다. <시인 임강빈의 인품과 시세계가 소박하고 고요하고 단정하여 ‘고귀한 단순’으로 보였다. 그것을 상징화하기 위해서 가장 한국적인 화강석을 최재키로 하였고, 돌의 물질성을 극대하게 살리면서 시인의 이미지를 ‘기도하는 사람’으로 형상화해 돌에 새기기로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소박 강직한 화강석 덩어리로 하여금 영원히 여성적인 것으로 승화시켜서 품격을 더하여 여백의 미를 구현코자 한다. 이 헌정의 기념물이 임강빈 시인의 시정신을 만세가 기리도록 정성을 다할 것이다.>(2019년 7월 제작자 최종태)
참고 자료2.
충남 보령 출신의 이문구 소설가는 ‘문단의 外燈’에서 우봉 선생을 아래와 같이 기록한 바 있다. <(임강빈) 선생의 시업(詩業)이야말로 선생의 고절한 영혼이자 어쩌다가 하나씩 있는 문단의 외등이 아니었던가. (……) 나는 변두리의 어둡고 외진 난민촌의 외등처럼 늘 먼 데서도 뚜렷한 선생의 모습을 볼 때마다 진흙탕 속에서도 지축(地軸)을 딛고 있는 것처럼 든든한 위안을 받았다. 세상에는 소인도 많고 묵객도 많다. (……) 하지만 그 인구가 죄다 등으로 빛나는 것은 아니다. 또 저마다 등을 자처해도 거의가 실내등에 불과하다는 것은 서로가 먼저 앞을 다투어서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임강빈) 선생은 춘풍추우(春風秋雨) 40 성상에 오로지 하나의 외등으로서 우뚝하였다. 선생은 시인의 고전(古典)이었다.>(『채우기와 비우기』(1996)에 수록된 글 중에서 발췌)
---사진 제공-강임구 김춘경 류 환 황희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