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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나고 싶었습니다 - 대담 / 본지 편집주간 임 애 월
마음의 야생지대, 母川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안 도 현 시인
雨水가 막 지난 2월 하순 무렵
대한민국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안도현 선생님을 만나러 예천엘 다녀왔다.
조용한 카페에서 만난 시인님은
소년처럼 맑은 미소로 소탈하게 반겨주셨다.
임애월 : 안도현 선생님, 안녕하세요?
여러 가지로 많이 바쁘실 텐데 이렇게 귀한 시간 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안도현 :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인데 예천에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임애월 : 그러게요. 오늘도 바람이 많이 부네요. 지난겨울은 유난히 더 추웠다고 생각하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지내셨는지 요즘 근황 좀 알려 주세요.
안도현 : 전주에서 40년을 살았고 2020년 2월에 고향 예천으로 와서 겨울을 세 번 넘겼습니다. 이번 겨울은 눈이 많이 와서 이백 미터 넘는 마을 입구 도로의 눈을 몇 번이나 밀었지요. 귀향해서 예천산천이라는 계간지를 내고 있는데 해마다 적자여서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나 궁리하면서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임애월 : 아, 계간지를 발행하고 계시는군요. 혹시 예천군에서는 지원하지 않나요? 예천산천인데 당연히 지원받아야 할 것 같아서요.
안도현 : 3년 동안 지자체의 지원을 한 푼도 받지 않고 내려고 하다 보니 운영이 벅차네요. 아주 작은 고을 예천의 문화와 역사를 외부에 알린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습니다. 잡지에 대한 반응은 아주 좋은데 살림이 시원찮습니다. 올해부터는 뭔가 새로운 모색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임애월 : 네, 좋은 일 하시는데 예천군에서 많이 도와드리면 좋겠습니다. 이곳 예천에서 출생하셨는데 어린 시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들려주세요. 대한민국 최고의 팬덤을 갖고 계신 안도현 시인님의 어린 시절이 무척 궁금해집니다.
안도현 : 예천에서 태어나 여기서 가까운 안동 풍산에서 초등학교 6학년까지 다녔어요. 저는 가겟집 아이였지요. 방학이나 명절 때는 예천에 있는 큰집이나 외갓집에 와서 살다시피 했고요. 제가 태어난 마을 가까이에 내성천이라는 낙동강 지류가 흐르고 있어요. 저는 어릴 때 여름이면 하루 내내 그 넓고 하얀 내성천 모래사장에 나가 놀았어요. 그 아름답던 내성천이 상류에 영주댐이 생긴 이후 황폐한 풀밭으로 변해가고 있어요. 그걸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지요.
임애월 : 4대강에 보가 생긴 이후로 강물이 썩어간다는 뉴스는 이제 뉴스도 아니지만 탁해진 강물을 볼 때마다 저도 참 답답합니다.
고향 오신 지 3년쯤 되셨으면 고향만이 주는 어떤 특별한 편안함 같은 게 있으실까요?
안도현 : 고향의 산골짜기, 산모롱이, 산 능선을 바라볼 때마다 떠오르는 시간과 사람들이 있지요. 오래 멀리 떠났다가 돌아온 고향에서 더 낮추고 더 들여다보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고향에 와서 시도 더 많이 쓰고 있으니 잘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임애월 : 역시 고향만이 주는 에너지가 있긴 있나 봅니다.
중·고등학교는 대구로 유학을 하셨다고요. 당시 대구 지역 중·고등학생들이 문학에 대한 관심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안도현 : 70년대 후반 대구에서의 고등학교 문예반 활동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치열하고 진지했어요. 시화전 개최, 동인지 출간, 백일장 참가 등이 아주 자율적으로 이루어졌고 거기서 파생되는 소소한 연애와 토론과 일탈의 꿈이 시를 쓰게 만든 원동력이었어요.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을 일찌감치 경험했다는 점에서 저에게는 행운이었지요.
임애월 : 젊은 열정들이 대단했었군요. 그때 선생님과 같이 문학공부를 했던 친구들 중에 현재 문단에서 만나는 분들도 계시겠네요?
안도현 : 제가 다니던 대건고등학교에 서정윤, 박덕규, 하응백과 같은 선배들이 있었고 이정하, 김완준 등의 후배들이 있었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 대전의 윤대녕, 부산의 이산하와도 연락을 하고 지냈지요.
임애월 : 아, 대구의 대건고등학교가 한국문단의 단단한 문인들을 배출한 명문인가 봅니다.
벌써 40년 전이네요. 1984년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어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었지요. 함께 읽어볼게요.
눈 내리는 만경(萬頃)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琫準)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 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 「서울로 가는 전봉준」 전문
임애월 : 1980년대는 시대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지요. 이인환 시인은 ‘역사의 주인은 소수 엘리트 계층이 아니라 민중이라는 자각이 일던 시대에, 녹두장군 전봉준을 통해 민중의식을 시로 형상화했다’고 하셨는데 녹두장군과 짚신, 들꽃, 풀뿌리, 흰 무명띠 등이 주는 저항적인 이미지와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에서 통증으로 남는 자책 때문에 지금 읽어도 가슴 한쪽이 찌르르합니다. 피투성이가 될 게 뻔한 질곡의 역사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시인의 당당한 발걸음이 보이기도 하고요.
안도현 : 1980년에 저는 스무 살이었고, 그때 광주항쟁을 경험했고, 광주에서 벌어진 참혹한 시간들에 대해서 침묵을 강요당하면서 이십대를 보내고 있었어요. 그 무렵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을 책으로 만나게 되었지요. 동학농민군의 좌절과 광주의 현실을 오버랩해서 한 편의 시를 써보고 싶었는데 이 시가 바로 그거예요. 시인이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시로 형상화해야 하나 고민하던 저에게 운 좋게 혁명에 실패하고 끌려가던 전봉준이 와준 거지요.
임애월 :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재능이 탁월한 거지요.
이후에 도종환 시인 등과 함께 해직교사 시집도 출간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안도현 : 대학 졸업 후에 교사로 있다가 1989년 전교조에 가입하면서 해직되었고 그후 4년 반 동안 해직교사로 살았습니다. 제 삶의 전체 중에서 가장 뜨겁게 ‘나 아닌 것들’ , 다시 말하면 공동체의 현재와 시의 접점을 모색하던 때였습니다.
임애월 : 사회적으로 참 어려운 시기였지요. 의식 있는 분들이 고생도 참 많으셨고요.
1981년에 《대구매일》에 당선된 「낙동강」과 1984년 《동아일보》의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지역감정이 심하던 시절에는 쉽지 않은 조합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물론 대한민국의 좁은 땅에서 지역감정이라는 말조차 사실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요. 경북에서 태어나시고 전북에서 오래 생활하시며 몸소 살아내신 선생님께서는 그 부분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으실 것도 같습니다.
안도현 : 지역마다 삶의 모양과 특색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만 지역감정이라는 건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허상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경상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고등어구이를 자주 먹었는데 스무 살 이후에는 조기구이를 더 자주 먹었어요. 음식에 감정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임애월 : 하하, 네. 알겠습니다.
「연어」는 1990년대 이후를 휩쓴 스테디셀러였는데, 저도 그때 친구들에게 부지런히 선물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꾸준히 팔리는 필독서로 100만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이기도 하고, 또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해외에서도 출판된 대단한 작품이지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예천으로 귀향하여 살고 계신다고 들었을 때 저는 맨 먼저 「연어」 생각이 났어요.(웃음) 좀 이상한 질문이긴 한데요. 회귀하는 연어의 마음이 다시 느껴지셨을까요?
안도현 : 예천에 와서 여기 사는 분들과 사회적협동조합을 하나 만들었어요. 그 이름이 ‘모천’입니다. 어머니의 강이라는 뜻이지요. 모천은 예천의 전통적인 문화를 어떻게 하면 요즘 사람들에게 압축해서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단체입니다. 미디어와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문화생태계를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고쳐보자는 욕심도 있고요.
임애월 : 아하, ‘모천’에서 이제 산란하실 일만 남은 건가요. 고향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조합을 만드셨으니 지역주민들의 기대도 클 것 같습니다.
시 「너에게 묻는다」는 발표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전 국민 애송시인데 유시민 작가는 글쓰기 강의에 이 작품을 인용하기도 했었지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너에게 묻는다」 전문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 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 「연탄 한 장」 전문
이 시들을 읽을 때마다 저는 자꾸 부끄러워집니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저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당당하게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떠밀려 살아온 날들에 대한 참회 같은 게 꾸역꾸역 몰려들거든요. 선생님께서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대를 뜨겁게 살아오셨으니 큰 회한은 없으실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아쉬운 부분이 남아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웃음)
안도현 : 좀 더 문학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문학에 집착하고 좀 더 쓰고 할 걸, 이런 후회는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웃음)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 「우리가 눈발이라면」 전문
임애월 :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이 시가 맨 처음 교과서에 실렸다고 알고 있어요.
학생들이 이 시를 읽고 분명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편지가 되고/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새 살이 되”었을 거예요. 읽고 나면 누구나 그러고 싶어지거든요.(웃음)
안도현 : 지금도 교과서에 실려 있지만 제 마음에 썩 드는 시는 아닙니다. 30대 초반에 쓴 시인데 ‘나’보다 ‘우리’의 이야기를 시에 더 쓰고 싶을 때였지요.
임애월 : 「연어」 말고도 어른을 위한 동화 「남방큰돌고래」를 4년 전에 출간하셨는데 어느 인터뷰에서 “잃어버린 마음의 야생지대”를 복원하고 싶다고 하셨어요. 「연어」나 「남방큰돌고래」 등의 동화를 통해서 물질문명에 훼손된 인간 고유의 순수성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메시지가 보이네요.
안도현 : 제가 살아온 시간은 너무 빠르고 너무 화려하고 너무 커다란 것만을 좇아가는 시대였습니다. 작고 느리고 낡은 것을 돌아보지도 못하고 속도에 휘둘려 여기까지 왔지요. 문학이 반성과 성찰의 양식이라면 우리가 통과하고 있고 즐기고 있는 이 기괴한 문명에 대해 질문을 던져봐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이렇게 사는 게 옳은 건가? 앞으로도 이렇게 살 건가? 이런 질문에 답을 하는 게 문학의 역할이 아닌가 싶어요,
임애월 : 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천박한 이기심을 버리고, 나보다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아름다운 인정이 넘쳐나는 세상을 만드는데 문학이 맨 먼저 앞장서야겠지요.
동시집도 상재하셨는데 “야옹, 하고 소리”를 내면 “아무 것도 두려운 게 없을 거”라는 선생님의 동시 한 구절이 문득 스쳐가네요. 동시를 읽을 때면 순수한 동심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동시를 읽는 시간들이 참 좋거든요. 동시를 쓰실 때도 그런 마음이시겠지요?
안도현 : 그렇습니다. 동시는 시보다 단순해서 실제로 쓸 때는 기분이 좋습니다. 어른으로서 돌아갈 수 없는 아이의 마음을 경험하는 순간이니까요. 올해 동시집을 출간할 계획이 있고, 앞으로도 동시에 좀 더 매달려볼 계획입니다.
임애월 : 네, 올해 동시집이 나온다니 선생님의 동시집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환호하겠습니다.
독자들이 선생님의 시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작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에게 보내는 진정성이 느껴지는 따뜻한 시선이거든요. 너무 현학적이지 않아서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어 더욱 좋고요.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서로 소통하고 보듬어 안는 온기가 흐르는 세상을 꿈꾸게 하거든요. 이번에는 좀 길지만 독자들이 무척 좋아하는 서정적인 시 한 편 읽어보겠습니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쳐다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 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 바다를 건너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바닷가 우체국」 전문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잉크냄새 나는 편지” 등, 미학적 구절들이 주는 서정성으로 바다를 배경으로 “천천히 늙어”가는 우체국이 자연스럽게 연상되고 또한 작중화자와 독자가 하나 되어 작품 속에서 녹아나는 짜릿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안도현 : 감사합니다. 살아가면서 낭만성이라는 건 삶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여기잖아요. 낭만이 돈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빡빡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곳에 없는 어떤 상황을 상상해보는 것도 낭만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서해 변산반도 바닷가 언덕의 낡은 창고에다 우체국 간판을 하나 걸어보고 싶어 쓴 시입니다.
임애월 : 우리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던 낭만의 바다도 점점 오염되고 지구환경 오염은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는데, 최근 들어 지구상에서 기습적으로 발생하는 자연재해는 온난화에 따른 이상기후의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거라고 합니다. 현재 지구의 상태가 여러 측면에서 몹시 불안정하다는 이야긴데 이 시점에서 시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안도현 : 모든 시인은 생태주의자여야 합니다. 문학은 삶과 세상의 근본을 묻는 작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임애월 : 네, 짧은 대답 속에 깊은 의미가 내장되어 있군요. 우리가 발 딛고 살고 있고, 우리 아이들이 앞으로 살아갈 지구 생태계에 시인들이 관심을 크게 가져야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식물도감」이라는 시가 제 가슴으로 쑥 들어왔어요. 변산바람꽃, 노루귀, 으아리, 꽃다지, 개불알꽃, 벼룩나물, 산괴불주머니, 제비꽃 등등. 온갖 나무와 풀꽃들의 실명을 하나하나 호명해 주는 시간이 그들에게 얼마나 설레는 감동이었을까요?
안도현 : 삼십 대 중반 무렵부터 식물의 이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이름을 알고 났더니 그 식물의 존재 방식을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이렇게 해서 꽤 많은 식물들을 알게 되고 만났는데, 그건 하나의 지식이나 정보를 더 얻은 차원하고는 다릅니다. 요즘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식물들이 우리 인간과 거의 유사하게 생각하고 활동하는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강해져 갑니다.
임애월 : 물론입니다. 식물들에게도 생각이 있다는 그 말씀이요. 저도 산골에 와서 살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온 산야를 휘저어 다니며 나무들, 풀꽃들과 교감하는 일이거든요. 풍선처럼 부풀었던 욕망들이 모두 꺼지고 마음자락이 무척 고요해졌습니다.(웃음)
안도현 : 언제 시간 되시면 누가 더 많이 식물을 아는지 내기라도 해보십시다.(웃음)
임애월 : 아, 네. 벼락치기라도 야생의 공부를 좀 더해야겠습니다.(웃음)
백석 시인을 너무 사랑해서 『백석 평전』을 쓰시고, 작품 「그리운 여우」는 백석의 문체와 리듬과 어투 등을 오마쥬했다고 들었는데요. 백석을 사랑하는 데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까닭이 있다면요?
안도현 : 일제강점기와 분단을 거치면서 시인들도 이념에 따라 나눠지고, 엄혹한 현실 앞에 무릎을 꿇거나 타협하거나 때로는 맞서기도 했지요. 이 모든 행태와는 다른 어떤 독특한 자리에 백석이 있고 백석의 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백석이 분단 이후에 북쪽에 거주하면서 북한문학과의 불화를 거치면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도 저의 큰 관심 중 하나입니다. 그건 시인에게 주어진 환경을 시인이 어떻게 뚫고 나가느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임애월 : 그렇군요. 아직 신비주의처럼 남아있는 백석 시인만이 지니는 그 어떤 매력에 끌리셨군요.
등단한 지가 이제 40년이 넘으셨네요. 혹시 시를 쓰실 때 혼자만의 습관 같은 게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안도현 : 별로 없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는 것 하나 정도이죠.
임애월 : 《한국시학》 구독자 중에는 회원들뿐만 아니라 시를 공부하는 일반 독자들도 많거든요. 안도현 선생님께 듣고 싶은 이야기 중의 하나가 아마도 ‘어떻게 하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까요?’일 것입니다. 제가 대신 그 질문 드립니다.(웃음)
안도현 : 쓰기의 결과는 읽기에 비례한다고 학생들에게 항상 이야기합니다. 많이 읽는 수밖에 없지 않나요?
임애월 : 네, 백번 옳으신 말씀입니다.
마지막 질문 드릴게요. 시인이어서 정말 행복하다고 느끼실 때는 언제일지 궁금합니다.
안도현 : 시인으로서 행복을 느낄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시를 쓰고 퇴고하는 그 어떤 순간에 신이 나에게 이런 기회를 주었구나, 하고 생각할 때 그때는 좀 짜릿하지요.
임애월 : 시인으로서 최고의 인지도를 가지고 계시니 그만큼 바쁘기도 하실 텐데, 어쭙잖은 제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안도현 : 별말씀을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사시니 가끔 뵙고 삶을 배우고 싶습니다.
임애월 : 감사합니다. 자리를 함께 해주신 서정문 시인님도 감사합니다.
모천으로 회귀하여
더욱 낮은 자세로 더욱 깊이 들여다보며
삶과 세상의 근본을 묻는 작업을 하시는 안도현 시인님,
그가 하나 하나 호명하는 풀꽃들은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 시인의 자선시
연못 위에 쓰다 외 4편
안 도 현
당신을 병상에 버리고 당신은 유리창 너머로 저를 버리고
저는 밤마다 아무도 읽지 않을 이야기를 썼죠
마당가에 연못을 들였고요
당신이 꽃의 모가지를 따서 한 홉쯤 말려서 소포로 보내주신다면 꽃잎을 물 위에 뿌려놓고 꽃잎이 물속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바라보려 했죠
당신은 오래 죽은 척 가만히 누워 있었죠
발톱을 깎아 달라는 청을 들어주지 못했어요
연못 가에 앉아 제 발등을 바라보는 동안
풀이 시들고 바람이 사나워지고 골짜기 안쪽에서 눈이 몰려왔어요
당신의 장롱과 당신의 옷을 분리하고 당신의 부엌에서 당신의 수저를 떼어내고 면사무소에 가서 이름을 지웠어요
저는 이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어요
문법을 잊고 마음껏 미끄러질 수 있게 되었어요
쨍한 코끝으로 연못 위에 문장을 쓸 수 있게 되었어요
당신이 자신을 결박하고 돌아누워
얼음장을 깔아준 덕분이죠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아서 좋은 단어들
의미 없이 녹아버릴 돌멩이들
연못을 덮은 얼음장 위에 얼음장을 덮은 눈 위에
재테크
한 평 남짓 얼갈이배추 씨를 뿌렸다
스무 날이 지나니 한 뼘 크기의 이파리가 몇 장 펄럭였다
바람이 이파리를 흔든 게 아니었다, 애벌레들이
제 맘대로 길을 내고 똥을 싸고 길가에 깃발을 꽂는 통에 설핏 펄럭이는 것처럼 보였던 것
동네 노인들이 혀를 차며 약을 좀 하라 했으나
그래야지요, 하고는 그만두었다
한 평 남짓 애벌레를 키우기로 작심했던 것
또 스무 날이 지나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나는 한 평 얼갈이배추밭의 주인이자 나비의 주인이 되는 것
그리하여 나비는 머지않아 배추밭 둘레의 허공을 다 차지할 것이고
나비가 날아가는 곳까지가, 나비가 울타리를 치고 돌아오는 그 안쪽까지가
모두 내 소유가 되는 것
유산가(遊山歌)
영양 자작나무 숲 가는 길에 외딴집 한 채를 뵈었다
서쪽으로 어깨가 한 자쯤 기울었다 기우뚱거리는 범선 같았다
뒷마당 돌배나무는
쌀 안치는 소리 같은
꽃을 달고 서 있었다
자신을 밀고 나가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인가 잠시 멈춰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밑바닥이 가라앉기 좋아 보였다
저 빈집을 통장을 털어 살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하다가 흥정이 잘 되면 훤칠한 돌배나무 돛을 공으로 얻을 수 있겠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뻗어나갔다
빈 집은 청승 맞게 허벅지를 긁고 있었고
소유할 때 생기는 오해를 나는 어찌 감당할 것인가 초록을 핑계 삼아 돌파할 수 있는가 근심이 돌배나무 수피에 덕지덕지하였다
그나저나 주인의 연락처는 어딜 가서 구한단 말인가
모래무덤
우리가 몸을 섞을 때 정말 짜릿했지
너는 자주 나의 가슴 위로 스르르 미끄러졌어
냇물이 모래톱에 글자를 적다가 떠나면
냇물이 만든 문장을 해가 질 때까지 읽었고
너를 만나면 너를 위하여
발목과 무릎을 떼어 내고 나는
허벅지까지 서늘하게 도려냈지, 그때
부드러운 살을 열어주던 너는
들어가기 딱 좋은 무덤이었지
냇가에서 흰목물떼새의 발자국을 따라가지 못하고……
대처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아이를 낳았지
날개와 날개가 맞닿는 순간의 온도를 체크하고
별안간의 이별과 망각의 농도를 예측하면서
억새와 갈대와 달뿌리풀과 버드나무가 이주해 왔다더군 그들이 몸속에 이상한 정부를 세웠던 거야 너나 나나 어제보다 오늘이 극한상황이라는 거 몰랐어, 정말
너를 만지는 내 손, 이게 도무지 뭐냔 말이다
눈송이를 받을 줄 아는 손바닥이 있어도
허공이 헐거워져 눈이 내리지 않는 겨울,
눈 내리는 소리를 듣고 싶은 귀를 가졌어도
너의 메마른 숨소리 귓가에 쌓이지 않는
모래 속에 몸을 묻을 때
그때 내 무덤까지의 거리를 생각해봐도 좋았으련만
삼겹살을 굽는 일도 싫증이 날 때쯤 술잔을 버리고 새 발자국이 끝나는 곳에 주저앉아 있어 봐도 좋았으련만
자갈은 언제 냇물의 겨드랑이를 간질이며 잘게 부서지나
나는 어느 때쯤 물소리를 팔아 거창하게 한몫 벌게 되나
통각(痛覺)
개복숭아나무는 행색이 초라해서 처마 아래 들지 못하였다
못에 찔린 가지마다 꽃이 필 것이다 눈보라가 다녀가며 수차례 분홍의 안부를 물었던 부위다
한천사(寒天寺) 철불은 손수 광배와 대좌를 치우고 앉아 있었다
왼쪽 어깨를 감고 내리는 옷자락 만져보고 싶어서
불경스러운 일에 마음이 끌려서
꽃을 든 부처를 보고 나는 웃었다
경전을 읽으면 눈알이 뽑혔고, 경전을 입에 올리면 혀가 뽑혔고, 경전을 손에 잡으면 손목이 잘렸고, 경전이 마르는 냄새를 맡으면 코가 잘렸다, 했지마는
성스러운 기둥을 비천하게 어루만지는 눈보라
나는 겨우 방아깨비의 더듬이를 당겨 지팡이로 쓰거나
고양이의 수염을 뽑아 빗자루를 만들 수 없나 궁리했을 뿐
그 빗자루로 내 발자국 지우지 않았다
바짓단을 털었더니
내가 걸어 다닌 길들이 쏟아져 내린다
유리창에 부딪혀 드러누운 눈송이의 날갯죽지 아래
손끝이 시큰거리던 기억, 나는 따뜻하지 않은 뜨뜻한 종말을 만졌던 거다
돌 주우러 골짜기에 들었을 때에도
돌들이 이 세상 아픈 데를 꾹꾹 누르며 문지르고 있는 것
나만 몰랐다, 한 뼘 남짓 평평한 돌을 들어 올릴 때마다
돌 밑의 검은 흙이 울던 것을
한 땀 한 땀 바늘자국을 내며
기러기는 이불을 꿰매고 있는 거다
안도현 시인 약력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198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 그리운 여우』 『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 『북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등을 냈다. 동시집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냠냠』 『기러기는 차갑다』 등과 다수의 동화를 쓰기도 했으며,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는 15개국의 언어로 해외에 번역 출간되었다.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윤동주상, 백석문학상, 임화문학예술상, 석정시문학상 등을 받았다. 현재 단국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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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가슴 뭉클한 삶의 이야기들이 정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