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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알렉시오 (1775~ 1801)
1. 출생과 성장
황사영은 교회 창설 초기 지도적 신도중의 하나이며 순교자이다.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정치적으로 남인(南人) 명문가 출신이다. 1775년 부친 황석범(黃錫範)과 모친 이씨(李氏) 사이에서 유복자로 한양 아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정5품 승문원 부정자를을 역임한 바 있으며, 모친은 이동욱(李東郁)과 8촌간인 이동운(李東運)의 딸이다. 황사영은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아들의 역량과 자질을 잘 아는 어머니 이씨는 유복자 황사영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 온 사력을 다하였다. 황사영의 세례명은 알렉시오(Alexis)이다. 아명은 시복이고 관명은 사영이며 자는 덕소(德紹)로, 이는 스승이며 처삼촌이 되는 정약종 아우구스티노가 손수 지어 준 것으로, ‘다른 이를 덕에 주선하고 얽히라’라는 뜻이다. 과연 황사영은 그 이름대로 하느님과 진리에 닫힌 조선사회와 사람들을 천주께 인도하고 주선하고 큰 덕에 얽힌 사람이 되었다.
2. 입교와 세례
황사영의 입교는 정씨 가문과의 만남과 관계로 이루어졌다. 황사영은 외가로 이승훈 베드로와는 10촌 친척이 된다. 정난주와 혼인하면서 이벽은 처 외삼촌, 그리고 정약전·정약종·정약용은 처삼촌 관계가 된다. 이들은 모두 조선천주교회 창립의 주역들이다. 이들중 황사영에게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동지이며 스승이었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이다. 황사영은 입신양명을 위한 과거시험 합격 전후인 1790년 사이에 정약종과 만남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세권은 그의 소설 ‘피의 증거’에서 황사영이 당시 조정과 한양에 풍문을 던지는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고 정약용을 만나러 갔다고 하지만 이 기록은 신빙성이 허약하다. 황사영은 나이14~16세 무렵 당사자는 물론 유복자로 잘 키운 그의 어머니의 최대 심을 과거시험 합격이었을 것이다. 사영의 시험 준비와 학문은 일취월장하였지만, 결정적 합격을 도와줄 그런 독선생이 필요했을 것이고, 문벌상 당시 한양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던 정약용을 지목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약용은 1789년 이미 대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정치활동 중이었다. 이런 그가 황사영의 과거시험을 위한 독선생이나 허락할 입장이 결코 아니었다. 정약전도 과거시험과 한양을 기반으로 출사의 길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약종은 출세와 성공에는 전연 뜻이 없이 그러나 학문적 기량으로는 정약전과 정약용을 넘어서는 큰 학자이며 선비였다. 사영의 그릇을 알아본 정약용은 고향에 은거하는 자신의 셋째 형 약종을 추천하였고 이렇게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이 성사되었으리라고 예측된다. 정약종은 1801년 의금부 공초기록에 의하면, 자신은 1786년경 둘째 형 정약전에게 교리를 배웠고 권철신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가성직체제에서의 세례였으리라고 사료된다. 정약종은 천주교 입교에 대한 자신의 처지가, 참 된 진리를 찾아 방황하고 망설이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입장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여 이 위대한 학자를 주보 성인으로 모셨다. 그러나 일단 입교한 후에는 천주실의와 칠극등 교리서와 신심서를 홀로 탐독하며 천주교의 가르침에 깊이 심취되고 있을 때였다. 정약종은 자신의 모든 학문적 기량을 총명하기 짝이 없는 제자 황사영을 위해 아낌없이 쏟았다. 사영은 스승으로부터 학문을 사사받으며 정약종의 학문의 경지,고결한 인품, 신비로운 진리와 신앙에 투신하고 빠져있는 정약종에게 매혹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계기는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천주학에 대한 관심과 가르침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을 것이다. 또한 외가로 먼 친척이 되며 동시에 정난주와 혼인으로 처고모부가 되는 이승훈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사제 영입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므로, 세례는 사제의 입국 후 봉헌된 그 해 첫 미사 부활대축일에 정식으로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받았을 터였다.
3. 진사 합격 & 결혼
황사영은 1790년 증광시 진사시에 16세의 최연소자로 합격하는 쾌거를 날렸다. 진사는 성균관 입학 자격을 주는 과거시험이다. 지혜롭고 역량있는 인재를 아끼고 중용하던 임금 정조는, 사영을 따로 불러 치하하며, 20세가 되면 벼슬을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과거에 합격한 같은 해, 황사영은 정약현의 딸 정난주와 결혼하였다. 진사 합격과 결혼으로, 정약종과 황사영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스승 정약종은 지상의 과거시험뿐 아니라 천상의 과거시험 합격까지 가르치는 관계로 발전한 것이다. 황사영은 애초에 입신양명을 위한 길을 찾았는데, 하느님은 정약종을 통해 무한한 진리와 은총의 세계로 그를 초대한 것이다. 임금과 권력의 입신양명은 편안하고 보장된 세상의 길이었다. 그 반면 낯설고 새로운 천주님과 신앙의 길은 고통과 십자가의 길이 될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정약종과 황사영은 각자, 그리고 서로에 이후 삶에 대해, 크나큰 번민과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천주의 부르심을 선택했다. 약종은 자신이 앞서 공부했듯이 사영에게 교리서 ‘천주실의’를 내주었다. 약종은 임금이 하사한 오른 손목의 비단 대신 신앙의 붉은 비단을, 소과 대신 세례의 급제를, 대과 대신 견진성사에 급제하고 복음 전파의 열혈 신앙인의 문관이 되며 성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쳐 투쟁하는 무관을 겸할 것을 권고하였다. 두 사람은 이 길에서 마주할 십자가에 대한 각오를 나누었다. 이로써 장차 성교회의 든든한 군사로서 큰일을 할 큰 재목이 나타난 것이다.
4. 1791년 진산 사건
1791년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 바오로가 자신의 어머니 장례를 맞아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와 절을 폐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연루자 윤지충과 권상연은 그 일로 교수형에 처하는 순교를 하였다. 이 사건은 당연히 당시 조선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정적들을 타도하는 더할 나위 없는 빌미를 제공하며 정치적 종교적 박해로 번졌다. 윤지충은 정 씨 형제들과는 외사촌이 된다. 위협과 두려움을 자각한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 이승훈은 배교를 선언하고 이후 천주교와 상당한 거리를 두었다. 권일신이 유배 길에 올랐다가 순교하였다. 그러나 정약종은 두 형제의 배교의 몫에 자신의 증거의 몫을 더해 오히려 더 깊이 하느님과 교회를 위한 길로 들어섰다. 진산사건은 정약종을 깊이 흠모하는 황사영에게 천주교에 대한 관심과 투신을 증폭시켰을 것이다. 이 무렵 한양의 교회 지도자들은 조선 교회를 이끌어 갈 사제영입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운동에 황사영이 함께한다면 엄청난 탄력을 받을 것이었다. 정약종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황사영을 소개하였다.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 윤유일 바오로, 강완숙 골롬바 등 교회 지도자들에게 황사영의 존재는 천군만마를 얻는 듯한 기쁨이었다. 황사영은 스승 정약종과 함께 교회 운영과 발전에 눈부신 활약을 시작하였다.
5. 세례 & 첫 사제(주문모 야고보) 입국
1788~1789년경부터 전개된 조선 천주교회의 사제영입 운동은 천신만고의 노정 끝에 성사될 수 있었다. 중국인 주문모 야보고 신부는 1795년 1월 한양에 있는 역관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여 사목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비록 중국인 신분이나 조선천주교 역사상 최초의 신부이다. 황사영은 1795년 부활대축일에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더욱 본격적인 핵심 지도자로서 맹활약하기 시작하였다. 황사영은 조선 교회와 주문모 신부와 지도자들에게 천군만마와 존재였다.
6. 1795년 북산北山 사건
주문모 야고보 신부는 최인길 마티아의 집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미사 집전과 세례 그리고 신자 상담 등의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배교자 한영익의 밀고로 6월 27일에 체포령이 떨어졌다. 최인길의 집이 북악산 자락 북촌에 있었기에 북산사건이라도 한다. 포졸들이 역관 최인길의 집을 덮쳤지만, 중국어에 능통한 역관 출신 최인길이 사제로 위장하고 윤유일 지황 등이 협조하여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주문모는 강완숙 골롬바의 집으로 도피하였다. 이후 강완숙 골롬바 자택에서 지극한 보호와 사목의 협조를 받았으며, 소수의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교회 지도자들의 동반으로 안정과 자신감을 얻어 지방으로도 전교를 확대하였다. 그 결과 사제 입국 5년 만에 신자 수가 4천여 명에서 1만 명으로 증가하는 쾌거를 올렸다.
주문모 신부는 교리 연구회인 명도회(明道會)를 만들어 정약종을 회장에 임명하였다. 황사영도 주요 회원으로 자신의 집을 모임장소로 제공하며, 남송로, 최태산, 손인원, 조신행, 이재신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가운데 남송로는 몰락한 양반가문 출신이었나, 나머지는 평민 이하계층의 신분이었다. 황사영은 진리의 가르침대로 평등사상을 실천하며 양반의 특권의식을 버리고 여러 계층의 교우들과 함께 교리연구와 전교에 힘썼다. 또한 정약종이 지은 ‘주교 요지’ 교리서 필사를 통해 전교 활동을 도왔고, 애오개와 북촌 등지에서 신자 청소년들에게 글과 교리를 가르쳤으며, 한문으로 된 교회 서적을 번역하였다. 특히 황사영은 교리교육을 맡아 열변을 토하였고 진실한 말과 따듯한 인품으로 가는 곳마다 교우들이 따랐다.
7. 정국의 변화
조선의 천주교회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후 만든 신앙모임을 통해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신앙을 싹 틔우고 교회를 발족시켜 성장했다. 이렇게 전해진 천주학은 조선 후기 진보적인 남인 학자들에게 전해졌다. 그들은 천주학을 조선 사회를 건강하게 발전시킬 사회 방책으로 인식하여 탐구하고 심취하였다. 이런 조선의 교회는 명례방 사건(1785), 반회 사건(1787), 신해 박해(1791), 을묘 박해(1795)를 거치며 탄압의 강도가 점차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세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했다.
조선 중기 영조 임금은 노론의 세력을 배경으로 왕권을 계승할 수 있었다. 영조의 계비가 된 정순왕후는 노론계의 여인으로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를 죽음(1762년)으로 몰아가는 데 앞장섰으며 권력을 지속을 위해 정조의 왕위를 반대했다. 그러나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의 폐위를 도모하는 일련의 사건에 연루된 그녀의 집안은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1787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가 유배지에서 사망하자 정조와는 원수지간이 되었다. 정조는 집권 세력인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위해서 남인을 중용하였고 천주교에 대해서 관대했다. 1801년 갑작스러운 정조 임금의 사망 직후에 섭정을 맡은 정순왕후는 노론을 중용하는 노골적인 인사를 단행하여 천주교인들이 연루된 남인들에게 시련과 박해가 시작되었다.
8. 1801년 대박해
권력은 잡은 정순왕후는 1801년 순조 임금 원년 정월 10일, '사학엄금' 언문교서와 '오가작통법'이라는, 다섯가구를 한 통으로 묶어 신자들을 잔인하게 색출하는 방법으로 100여 명의 순교자를 냈다. “천주교 신자는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을 믿는 자들이고, 인륜을 위협하는 금수와도 같은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돌아서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극형으로 처벌하라”라는 명분 아래 천주교 신자들인 남인계 정적들을 박멸하기 위한 피바람의 박해를 시작한 것이다.
9. 박해의 광풍
정약종의 ‘책궤 사건’이 1801년 1월 19일에 발생하였다. 정약종은 박해의 광풍이 불어오자, 자신이 보관하던 교회 성물과 서적, 주문모 신부와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를 하인 임대인 토마스를 시켜 궤짝에 담아 안전한 곳으로 옮기던 중에 발각되었다. 정약종은 1801년 2월 11일 체포되었고 잔인하고 극심한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정약종은 연루자들을 발설하지 않았으며 혼자 한 일이라고 자처하였으며 “모진 형벌을 받아 죽더라도 천주 믿은 일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시종일관 당당하게 증언하였다. 그는 2월 26일 서소문 형장에서 자형 이승훈과 함께 참수당하였다.
정약종의 동생 정약용 요한은 형보다 빠른 2월 8일에 전격 체포되어 의금부 감옥에 갇혔다. 2월 10일에는 천주교 지도자로 지목되어 체포된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에 대한 취조가 시작되었다. 이때 정약용을 심문하던 중, 정약종의 책궤 안에서 조카 사위 황사영과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가 문제가 되었다. 정약용은 2월 13일에는 다시 취조받는 과정에 천주교 지도자 최창현을 고발했으며, 조카사위 황사영은 신앙과 믿음에 죽어도 변치 않을 인물로 자기 원수라고 하였다. 정약용은 2월 15일, 17일에도 연이어 끌려 나와 추국을 당했다. 심문장에서 정약용은 자신이 알고 있는, 천주교 중요한 정보들을 실토하였다. 권철신과 황사영등 핵심 인물들을 지목했고, 천주교 신자를 색출하려면, 믿음이 약한 노비나 학동을 신문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으며 체포 방법까지 일러주었다. 심지어 주문모 신부의 거처까지도 알려주었다. 이 일로 정약용은 심문관들에게 일말의 신뢰와 동정을 살 수 있었으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약용과 정약전 두 형제는 감옥 안에 갇혀, 혈육과 친인척 지인들이 죽어 나가는 소식을 들어야 하는 극심한 심신의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2월 21일에 권철신이 고문 끝의 옥사당하였다. 2월 26일에는 이가환이 고문 끝에 옥사했다. 같은 날, 서소문 형장에서 자형 이승훈과 자신의 친형제인 정약종이 참수당하였다. 그리고 최필공, 최창현, 홍교만, 홍낙민의 참수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정약전과 정약용 두 형제는 극적으로 죽음을 피해 유배형으로 감형되어, 2월 27일 새벽에 감옥에서 풀려났다. 정약용은 배교와 검거 협조의 댓가로 목숨을 건져, 경상도 장기현으로, 정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가 결정되었다. 2월 29일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지로 떠났다.
10. 피신
현계흠에게서 정약종이 붙잡히고 권철신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은 황사영의 심정은 아득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월 19일에 발생한 책궤 사건은 천주교 박해에 더욱 불을 지폈다. 황사영도 더 이상 한양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몇 군데 천주교인의 집으로 피신을 전전하다 장기간 도피 장소를 찾았다. 이 무렵 제천 배론에서 옹기 장사를 하는 김귀동이라는 신자가 있었다. “배론은 지세가 험하고 대부분 교우들이라 몸을 숨기기에 적당한 장소이고, 배론의 교우들에게도 든든한 지도자가 생기면 좋으니 불안한 때에 몸을 숨겨 내일을 준비하고 주님의 크신 뜻을 펼치자”라고 하여 배론으로 도피처가 정해졌다. 황사영은 양반의 위엄을 드러내는 수염을 깎고 최설애라는 나이 많은 여교우가 지어준 상복을 입고, 이름도 ‘이상주‘로 바꾸어 한양을 탈출하였다. 때는 1801년 2월 15일경이었다. 하필 왜 이름이 이상주일까? 그는 다른 지도자들보다는 조금 더 늦도록 살아남아 멸교지화를 당하는 교회의 남은 상주역활을 해야 한 것일까?, 그리고 이 비극적인 역사를 정리하고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야 하는 커다란 사명을 받았던 것일까?
믿음과 인격의 심지가 강한 황사영이었지만 그동안 유복자인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온 뒷바라지 해 온 어머니와, 두 살 난 아들 어린 아들 경헌과 아내 난주를 두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도피를 그 마음이 오죽하였을까? 세상 인심이란 바람과 같다. 더구나 서슬퍼런 권력의 칼 날 앞에서는. 지체 높고 학식과 덕망 높은 정씨 집안이었으나, 큰 환란과 박해의 광풍이 일어나자 가까운 형제들과 친척들은 대놓고 냉대하였다. 도리와 인정으로 감싸다가 같이 불벼락을 맞을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다. 난주와 어머니 이씨는 마재 약현의 집에 거처를 정하였으나 그들의 냉대도 마찬가지였다. 딸이고 사위의 일이었지만 생명과 가산이 몰수되는 박해의 위험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모습들이었다.
11. 배론
황사영은 김한빈과 함께 1201년 2월경 제천 배론 김귀동의 가마터인 토굴로 숨어들었다. 배론이란 이곳 골짜기의 형상이 뱃바닥 같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는 팔송정 도점촌(陶店村)이다. 질 그릇과 오지 그릇 등 옹기를 만든 부락이었음을 말해준다. 1791년 신해박해 이후로 교우들이 드문드문 찾아와서 옹기를 구우며 교우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김귀동은 충청도 지역에 일어난 박해를 피해 이곳에서 신앙을 연명하고 있었다. 한빈과 귀동이 그가 숨어 지낼 토굴을 파고 토굴로 통하는 길은 큰 옹기그릇으로 덮어놓았다. 그래서 한 동네에 살고 있는 신자들조차 황사영이 와있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황사영은 어두운 토굴 속에 두더지처럼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사영 알렉시오는 귀동과 함께 옹기를 구워 팔던 김세귀, 세봉 형제에게 교리를 가르쳐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했으니, 그의 믿음과 활동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체포되기까지 생지옥같은 생활이었으나 그는 믿음으로 인내하며 김한빈을 통해 한양의 박해상황과 교회 사정을 입수할 수 있었다. 김한빈 베드로는 충청도 보령 태생으로 한때 홍주에 살면서 포수생활을 했고, 1800년 가을 한양으로 상경해, 정약종의 집에서 행랑살이를 하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정약종의 인품과 신앙의 모범을 따르며 교회 일을 열성적으로 돌보았다. 그는 황사영 가족을 마재로 인도하고, 동대문의 송재기 집에 기거하며 한양의 교회 박해 소식을 황사영에게 왕래하며 전달하였다.1801년 4월 19일 주문모 신부가 자수한 뒤 새남터에서 참수되었고, 3월 19일 폐궁 은언군 부인 송씨와 그 며느리가 사약을 받아 순교하였다. 4월 2일에는 정약종의 맏아들 정철상이 순교하였다. 김한빈이 전하는 한양의 교회 소식에 황사영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하였다. 그러나 비통한 고통 속에서도 겨레와 이 나라의 개화와 신앙의 자유를 위해 한 목숨을 버려 십자가를 질 결심은 흔들림이 없었다.
12.백서
1801년 8월경 박해를 피해 춘천으로 피신한 황심 토마스가 황사영의 은거지를 듣고 배론 토굴로 찾아왔다. 충청도 덕산 출신인 황심은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4년 12월 주문모 신부를 북경으로부터 조선에 모셔올 때 큰 역할을 했으며, 1795년 북산사건으로 윤유일, 최인길,지황 등이 순교한 이후로는 그가 주로 북경교회와 연락을 취했다. 1800년 7월 연고지를 떠나 한양으로 이사하여 황사영 등 교회 지도자들과 교류하며 활동하였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춘천으로 피신하였는데, 김유산에게서 황사영이 가까운 배론에 피신하여 있음을 알고 그를 찾아간 것이다.
반 년 가까이 서로 다른 곳에 숨어지내다가 가까스로 재회한 두 사람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동안에 일어났던 주문모 신부의 순교와 한양의 교회박해 소식을 나누며, 앞으로의 교회 재건에 대해 의논하였다. 그것은 밀사로 북경교회에 인지도가 있는 황심 토마스의 이름으로, 조선 교회에 닥친 박해 소식과 대안을 기록하여 1801년 겨울 동지사 일행인 마부 옥천희를 통해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려는 것이었다. 명주 천 위에 썼기에 백서라 하였다. 길이 62센티 너비 38센티의 흰 명주를 펴 놓고 글을 쓰기에 앞서 황사영은 기도하였다. 간절한 기도가 끝나자 황사영은 명주에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한 줄에 127자로 95자까지 122줄 모두 13,311자를 깨알같이 잘게 써 나갔다. 온 힘을 다해 쓰는 글이기에 글자마다 황사영의 땀과 피가 스며 있었다. 과연 이 백서는 황사영 자신의 피의 증거가 될 것이었다. 이렇게 쓴 백서 완성의 날은 음력 9월 22일이다. 황심의 체포가 9월 15일(음)이었니 기초에서 완성까지 35일 남짓한 기간이었다. 한 폭의 비단에 13,311자 세필로 글을 쓰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기초에서 정서까지 철두철미 혼자서 고심하며 신앙의 혼과 피눈물로 쓴 것이다. 백서는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품이다.
불행하게 황심과 황사영이 체포되고 백서 내용이 밝혀지면서 그는 당시 적대 세력들이 작성한 조선 왕조의 기록에 의해 전대미문의 대역죄인으로 낙인찍힌 채, 그의 숭고한 업적과 명예는 제대로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백서는 정해(正楷)자의 가는 붓으로 쓴 글로, 고운 명주(비단)천에 매줄 127자 또는 95자로 된 모두 122행 13384자이다. 문체는 당시 외교문서에 통용되던 사육병려체(四六騈儷體)이다. 수신인은 북경 교구장으로 있던 프란치스코회 소속 포르투갈인 구베아 주교이다. 백서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785년(정조 9년) 이후의 교회 사정과 박해의 발생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 다음, 신유박해(辛酉迫害)의 상세한 전개 과정과 순교자들의 간단한 약전(略傳)을 적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자수와 그의 죽음에 대해 증언하였다. 끝으로 폐허가 된 조선 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언급하였다. 즉 종주국인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것을 요청하였고, 아니면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 명을 조선에 보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이 백서에 적은 호교론적 다섯 가지 방책은 정쟁의 잔인하기 짝이 없는 보복과 박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병든 조선 사회를 진리와 복음으로 개혁하여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한 앞선 의욕에 지나치게 과격하고 황당한 점도 없다. 그러나 막다른 길목에 처해 달리 방도가 없는 처절한 이의 몸부림이었다. 뒷날 조정은 ‘동서고금을 통해 듣지도 보지도 못한 흉악한 글’, 황사영은 ‘대역무도 죄인’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역적’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며, 겉만 알고 속은 모르는 평가이다. 당시 교회의 참혹한 모습을 당하고 보고 알았다면 우리는 황사영이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 현실의 처지와 고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황사영은 당시 교회 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박해로 쫓긴 죄인들은 흩어진 양 떼와 같아서 혹은 깊은 산으로 도망쳐 숨고, 혹은 길거리에 방황하면서 울음을 마시고 소리를 삼키니, 가슴이 쓰리고 뼛골이 아프옵니다. 하오니 우리를 불쌍이 여겨 이 물과 불에서 건져 주소서...장차 이 나라에는 예수의 이름이 영영 끊어지고 말겠나이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간과 창자가 끊어지나이다.’(3-5행) 이것은 황사영 피로써 쓴, 조선 천주교의 신앙의 자유를 이루기 위해 ‘울음을 마시고 소리를 삼키며’피눈물로 이루어진 탄원이요 진정서였다 실로 애끓는 간절한 진정서였다.
13. 순교
황심이 황사영과 만나 백서의 대책을 의논한 뒤 옥천희를 찾고 있을 때, 옥천희는 1801년 초가을 사은사에 끼어 귀국하던 중 국경에서 신자임이 발각되어 되어 의금부에 갇힌 몸이 되었다. 서슬퍼런 박해 시대이니 황심이 사실을 알리 없었다. 옥천희가 참혹한 고문 중에 황심과의 관계를 실토하여 황심은 9월 15일에 한양에서 체포되었다. 황심 또한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황사영의 존재와 그간에 있었던 일 그리고 그의 은거지 배론을 토설하였다. 황사영은 황심의 입을 통해 9월 29일에 배론의 옹기굴에서 백서와 함께 체포되었다. 한양으로 압송된 황사영은 황심, 옥천희, 김한빈 등의 신앙 동지들과 같이 국청에서 어떤 교우보다 혹독한 심문과 형벌을 받았다. 11월 28일(양력 12월 10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김한빈, 옥천희와 현계흠 등이 참수 치명되어 순교하였다. 같은 날, 황심도 황사영 백서의 모반죄목으로 육시형에 처하는 참혹한 순교를 하였다.
황사영의 처삼촌 정약용이 의금부에 끌려와 혹독한 고문과 취조를 받는 중에 조카사위 황사영은 신앙과 믿음에 죽어도 변치 않을 인물로 자신의 원수라고 한 말은 만고불변의 진실이었다. (취조 관리들은 백서 작성 주동자와 배후 인물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다. 1801년 10월 13일, 홍희운과 신구조가 올린 상소 등에 따라, 황사영의 배후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이미 귀양에 처해 있던 정약전과 약용 형제를 한양으로 다시 불러 올려 의금부에 가두고 심문하였다. 황사영은 매번 "단독으로 혼자하였다"라고 일관되게 답변하였다. 원망을 품고 거짓된 정황을 꾸며댔다면 정약용의 목숨도 부지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처삼촌인 정약용은 이런 황사영을 두고, "날마다 여러차례 고문을 받아도 결코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고, 이가환은 "죽더라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을 인물"이라고 하였다. 황사영은 이렇게 천주 신앙이 확고한 순교자였다.)
전세권은 그의 소설 “피의 증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801년, 조선왕조 의금부의 백서 작성 추국 심문 중, 황사영 알렉시오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이 몸이 볼 때 천주학은 나라와 백성에게 해가 없는데, 다만 조선의 왕가에서 엄금嚴禁하므로..., 이 몸이 힘을 다하여 천주학을 금하지 못하게 할 계교로 한 짓이올시다.” 천주학의 사상과 이념은 궁극적으로 이상 세계 즉 하느님 나라의 회복이다. 황사영은 사색당파의 파벌로 오직 소수만의 일방적 권력과 삶만을 도모하고 향유하려는 자들의 폭정이 지속되는 피폐한 당시 사회를, 천주교의 이념으로 개혁하고 이상적 왕조와 세상을 도모한 것외 다른 것이 아니다. 조금 더, 황사영이 자신이 취조 과정에서 밝히는 백서를 쓴 자세한 '목적과 정당성'은 다음과 같다. “우리 거룩한 교회와 백성들은 천하 만방에 널리, 또한 자유롭게 번성해 있는 같은 동포요 같은 지체이기 때문에, 권력만을 믿고 애매한 백성을 무참히 죽이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호소하려고 한 것이 제가 백서를 쓴 첫째 목적입니다. 또한 큰 군함에 군사만을 태우고 와달라고 요청한 것은 얼핏 보면 만고의 역적 행위요, 백번 죽어도 그 죄가 남을 것으로, 제가 어찌 제 나라를 쳐서 망하게 하려고 하겠습니까? 다만 권력만을 무리하게 행사해서 제 백성도 못 알아보는 위정자들에게 한바탕 위세를 보여줌으로써 그 잘못을 깨닫도록 해 달라는 취지에서였습니다. 이것이 그 두 번째 목적입니다.” 사영은 계속해서 우리나라는 중국에 예속되어 임금과 위정자들이 사대사상에 급급한 나머지 자주적으로 국정을 펴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이런 처지에 종주국을 속여 가면서까지 온갖 불법을 감행하고 만만한 제 백성에게는 없는 잘못을 뒤집어 씌워 죽이는 것만 장한 일로 알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우리 임금의 성은과 보살핌 아래 살아보려고 부득이 종주국에 대해서 우리 조정에 경고하고 감시해달라고 호소한 것이 백서를 쓴 세 번째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조선의 거룩한 교회는 아직 중국 북경교구에 속해있기 때문에 서로 연락을 신속하게 하기 위해서 변문에다 비밀 연락인을 배치하자는 것이 네 번째 목적이고, 우리 교회는 세계적인 종교라서 로마 교황의 통치하에 움직이는 만큼 우리 교황성하께서 중국 황제에게 서신으로라도 조선의 이 참혹한 현상을 잘 살펴 시정토록 해주십사, 호소한 것이 그 다섯 번째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사영은 선정을 베풀어줄 것을 조정에 호소했다. “여기 다섯 가지 호소에 대해 우리 위정자들은 조선 천주교인들의 안타깝고, 달리 모면할 수 없는 가련한 처지를 넉넉히 헤아리시어,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대역부도로 다루지 마시고, 선하고 올바른 정치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랄 뿐이옵니다.”
황사영의 이러한 답변에 전세권은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평가한다. ‘조선의 역사는 왕조실록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그것은 왕조의 정당성에 입각한 기록일 뿐, 민중들의 삶에 대한 기록은 아니다. 조선의 역사 중, 민초들의 삶의 애환을 극명하게 서술한 기록으로 황사영 백서가 있다. 사대부가의 진사 황사영은 벼슬로 얻을 수 있는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민중 편에 섰다. 백서가 비록 천주학쟁들이들의 삶과 죽음을 기록한 백서이나, 이와 같이 절통하고 애절한 백서는 우리 민초들의 바램이요 절규였다. 황사영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천주교를 “조선과 세상을 구할 ‘양약良藥’이며 ‘정도’正道로 인식하고 믿음에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이런 차원에서 그는 도탄과 미망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구하고자 한 진정한 애국자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조광 고려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사람을 사랑하라’ ‘인간은 존엄하다’는 교리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여 책에 있는 그대로 실천했다”며 “‘양반도 상놈도 다 똑같다’며 신분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게 된 신자들을 보고 정부는 탄압 수위를 더욱 올렸다”고 말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황사영과 그의 백서 내용을 비판하는 사람이 적지 않고 그의 참혹한 죽음을 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왕국은 지금의 민주 국가와 사회와는 너무도 다른 세상이었다. 전체 민중의 삶을 위하기보다는 왕조와 일부 지배층의 가렴주구와 착취와 탄압으로 민중이 도탄의 삶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시절이다. 그런 시대의 이름으로 자행된 광적인 폭력 앞에서 오직 종교를 믿을 권리를 요청한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앙의 동지들이 참수의 칼날을 받았던 11월 28일(양력 12월 10일), 황사영은 극악무도한 조선 사회와 왕조의 반역죄로 새남터에서 능지처참 육시형을 받았다. 사형 판결문은 다음과 같다.
“죄인 황사영은 원래 정약종의 조카사위로서 사학에 빠져 주문모 입국한 후에 그를 스승으로 여기고 아비라고 불러 영세하고 교명까지 받았다. 체포 명령이 내린 가운데 틈을 타서 산골 속에 잠복하여 가만히 불궤(不軌), 곧 모반을 꾀해 황심, 옥천희와 더불어 서로 뜻이 같고 배짱이 맞아 백서를 꾸며서 서양인 집으로 보내려 했다. 그 흉서에 말한 것은 글자마다 흉측하고 구절마다 역심(逆心)이어서 위를 범하는 기막힌 말뿐이었고, 나라를 원수로 삼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대역부도죄로 결안한다.”
황사영의 가산은 몰수되고 늙으신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에, 부인 정난주 마리아는 관노비로 제주도로 각각 부처 되었다. 두 살 어린 아들 황경한은 어머니 정난주 마리아의 기지로, 추자도에 버려졌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여 비참한 운명 속에 살아 가야 했다. 숙부 황석필은 함경도 경흥으로 귀양갔다. 심지어 집안의 머슴과 종들도 피해를 입어 종 육손은 갑산, 돌이는 삼수, 여종 판례는 위원, 복덕은 흉양으로 귀양 갔다. 여종 고음연은 단성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 죽었다. 여종의 남편 박삼취는 거창으로 유배되었다. 또한 황사영이 극형을 당한 다음날 그의 집을 헐어 버리고 웅덩이를 파서 물이 고이게 했다. 실로 황사영은 천주 신앙을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피로써 증거한 그 하나 때문에 세상에서 그가 가졌던 것과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모두 번제물로 바친 순교자가 되었다.
참고:
김성태,가톨릭 신학대학 강의록;
소설,전세권, 피의 증거;
소설,성 황석두 루카 서원 황사영;
인터넷:가톨릭계 다수의 자료;
우리 역사넷;
위키백과;
김재용,팝콘뉴스,9월의 역사이야기, 황사영 백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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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22년 9월 20일, 김대건 사제와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들을 기리는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오늘 장하게 치명되신 이름모를 모든 무명의 순교자, 황당하게 희생된 순교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특히 222년 전, 조선 교회와 사회를 교화하여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자 하였으나, 역적으로 몰려 순교한 황사영 알렉시오님을 기리며 여러 자료를 편집한 글을 올립니다. 순교자 성월이고 순교자 대축일이어서 더욱 감회가 뜨겁군요. 교회와 사회를 위한 님의 공은 비할 수 없이 크고 빛나지만, 여전히 공경 받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하루빨리 명예가 회복되고 시복시성 되기를 매일기도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바친 목숨이, 가족이 당한 십자가의 공로가 이 땅의 사람들에게 빛나게 계승되기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