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밍웨이를 통해 본 노년의 행복 조건 》
헤밍웨이는 자신이 늙는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노인취급을 당하는 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킬리만자로 등 아프리카를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고.
카리브해에서 며칠씩 파도와 싸우며 대어낚시에 열중하기도 했다.
그는 경비행기 사고로 세 번이나 죽을 뻔했다.
그의 일생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처럼 도전과 모험의 연속이었다.
‘노인과 바다’에서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대어를 낚는 데는 성공하지만 상어 공격으로 그 대어를 육지로 끌고오는 데는 실패한다.
뼈대만 남은 물고기를 끌고 오게 되었지만
'산티아고' 노인은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어도 정복될 수는 없다.” 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헤밍웨이는 늙은 어부 '산티아고'의 입을 통해 자신은 다른 사람들처럼 목숨만 유지하는 노인생활은 하지 않을 것이고,
끝까지 용기와 도전을 통해 남성적 가치를 보여주겠다는 의지를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정신과 육체는 서로 다른 속도로 쇠퇴한다.
정신은 젊은이지만
육체는 급속도로 노화된다.
나이 들어 거울을 들여다보면
‘이게 정말 나인가?'
의심되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헤밍웨이는 비행기 추락사로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글을 쓰기 어려워지고 침대에 들어눕게 되자 총으로 자살해 버렸다.
그의 나이 불과 62세였다.
요즘 헤밍웨이의 자살원인이 무엇인가가 재조명되고 있는데 우울증 때문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많다.
헤밍웨이는 말년에 가장 친한 친구들인 윌리엄 예이츠, 스콧 피츠제럴드,
제임스 조이스를 잃은 데다가
특히 자기 저서의 편집자로 낚시와 사냥을 함께 하던 '맥스 퍼킨스'를 잃은 데 대한 슬픔이 지나쳐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젊었을 때는 여성을 좋아했지만
나이 들어서는 남자 친구들에게 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친구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나기 때문에
결국 외톨이가 되기 마련이다.
나이 들면 새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데
이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함께 고민하는 친구가 없다면 누구든 고독한 말년을 보낼 각오를 해야한다.
돈과 건강을 가졌다고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인의 행복요소는 돈과 건강이라고 생각하지만
노인에게는 친구가 돈과 건강 못지않은 행복의 요소다.
우리는 지금껏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출세하는 법, 돈버는 법에만 열중하고,
친구 사귀는 법은 등한시했다.
친구는 배우자와는 또 다른 인생 반려자다.
배우자에게 의논할 수 없는 이야기가 너무나 많은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려움에 뜨거운 눈물 한 방울 흘려줄 수 있는 참다운 친구가 한 명이라도 곁에 있다면 당신의 노년인생은 성공한 셈이다.'
괴테가 그렇게 말했다.
'인생말년에 행복해지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재테크보다 우(友)테크를 잘하시라!'
< 좋은 글 중에서 >
🔵 어느 학생이 나이가 지긋이 드신, 신앙심이 깊은 교수님을 찾아가 내세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물었습니다.
잠시 숙고한 후에 교수님은 몇 분 정도면 충분하다는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자신에게 앞으로 남은 수십 년의 세월을 만끽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것에 동의하였습니다.
잠시 후 학생이 방을 나가려고 할 때 교수님은 갑자기 학생에게 그가 언제쯤 죽게 될 것인지를 아는지 물었습니다.
모른다는 학생의 대답에 교수님은 조용히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부터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지 않을까?”
-펌-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마태 13,36-43)
일찍이 그리스 시인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하길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는 데 필요한 세 가지 필수 요소는 ‘약탈하고, 거짓말하고, 굽신거리는 것’이라 했고,
초기 사막교부 실바누스는 ‘가진 재능보다 더 큰 명성을 누리면 너희는 불행하다.’고 경고했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성공지향적이고, 거대지향적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돋보이고 인정받고 찬사를 듣기 위해 세상에 영합하는 길을 걷게 되고, ‘그저 너 자신이 되라’는 말은 평범한 말, 별 볼일 없는 말처럼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위험성을 토마스 머튼은 직설적으로 경고합니다.
“그대가 되고 싶은 대로 무엇이든 되어라. 미치광이, 주정뱅이, 온갖 부류의 잡놈 등 무엇이 되어도 좋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되어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성공한 사람이다.”
본능인 욕망도 태우게 되면 한줌 재로 남을 뿐입니다. 집착해야 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는 하느님께 속한 존재들입니다. 하느님을 부정하게 하는 모든 가라지는 하느님께서 모두 태워 없애실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언제나 집중해야 할 것은 가라지가 아니라 주님께서 뿌리신 좋은 씨앗입니다.
가라지의 헛된 가치를 쫓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신앙의 씨앗을 더하는 행복한 하루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사랑합니다!
마지막 희망은 오직 주님께 두어야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울부짖음이 섞인 하소연은 마치 오늘 우리의 고달픈 현실을 대변하는듯 합니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녀 딸 내 백성이 몹시 얻어맞아 너무도 참혹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들에 나가면 칼에 맞아 죽은 자들뿐이요 성읍에 들어가면 굶주림으로 병든 자들뿐이다. 정녕 예언자도 사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라 안을 헤매고 다닌다. 당신께서 완전히 유다를 버리셨습니까?"
우리네 인생이 언제나 만사형통하고 가화만사성하며, 하루 온종일 웃음꽃이 만발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호시절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결코 원치 않은 고통이 줄줄이 찾아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이 혹독한 시련에 괴로워하고, 사랑하는 딸이 눈물로 밤을 지새웁니다. 멀쩡하던 내가 갑자기 쓰러져 비참한 몰골로 변해갑니다.
우리가 이토록 참혹한 괴로움 속에서 울며 부르짖는데도 그 누구하나 도움의 손길을 건네지 않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주님은 대체 어디 계시냐? 우리를 아주 잊으셨냐?며 외치지만, 그분께서는 그저 묵묵부답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현실이요,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 앞에서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진리가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시간과 우리 인간의 시간은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보폭과 주님의 보폭은 천지차이입니다. 우리의 천년이 주님께는 하루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지극히 사소한 고통 앞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때로 희망이 없어 보여도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해야 하겠습니다. 그 마지막 희망은 오직 주님께 두어야 하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살레시오회)
7월30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마태오 13,36-43
밀이 될 것인지, 가라지가 될 것인지는 이것 하나로 결정된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마지막 때에 밀은 의인으로 인정받고 하늘에서 별처럼 빛날 것이지만, 가라지는 불붙는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안타깝지만, 진리입니다.
지옥이 없다느니, 상태를 말한다느니 하며 진리를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지옥에 어떻게 가지 않아야 하는지가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의 힌트가 있습니다. 가라지는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왜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을 죄짓게 할까요? 그들을 이용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모파상의 ‘비곗덩어리’란 소설은 진정한 인간의 가치는 인간이 평가하는 기준과는 다를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프랑스의 루앙시를 프러시아군이 점령하고 있을 때 몇 명의 귀족, 정치인, 부자, 종교인이 함께 탈출을 감행합니다.
그중에 비곗덩어리로 불리는 창녀 한 명도 끼어 있었는데 조금 뚱뚱하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