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역사탐방은 조선왕조의 왕릉인 헌인릉을 탐방합니다.
전문 해설사와 함께하는 사색의향기 역사탐방은 회원님들께 특별한 인문학 체험이 되실 것입니다.
+ 탐방일시 : 2015년 5월 20일(수요일) 오후 2시
+ 만남시간 및 장소 : 2015년 5월 20일 오후 1시 50분
- 3호선 양재역 9번 출구 전 실내
+ 운영진 : 회장 장남기 010-5218-0001
총무 박영순 010-7321-8446
사무국 : 02-489-5100
+ 회비 : ₩5,000원(사회공헌금, 탐방일체 비용)
- 회비는 현장에서 받습니다.
+ 탐방일정
- 13:50 지하철 3호선 양재역 9번 출구 나오기 전 실내
- 13:50~14:10 헌인릉으로 이동
- 14:10~17:10 헌인릉 탐방
- 17:10 해산
+ 참가 인원 : 20명
+ 탐방해설 : 김숙희 왕릉해설가
+ 탐방지 소개
헌인릉은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어 있는 헌릉(獻陵)과 인릉(仁陵)을 아울러 부르는 말이다.
헌인릉 입구를 들어서면서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능이 인릉이다. 인릉은 조선조 제23대 국왕 순조와 그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합장릉이다. 순조(재위 1800~1834)는 정조의 차남으로 수빈 박씨 소생이며, 1790년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다. 정조에게는 수빈 박씨 외에 효의왕후 김씨와 성빈 성씨가 있었으나 김씨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성씨는 장남인 문효세자를 낳았지만 일찍 죽어 차남인 순조가 정조 24년(1800)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만 이루어진 소박한 능이다. 언뜻 보아 단릉으로 보이지만 순조와 순원왕후를 함께 모신 합장릉이다.
어린 순조가 등극하자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영조의 계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정순왕후 김씨는 당시 벽파의 실세였던 김귀주의 누이로, 이때부터 벽파정권이 수립되어 세도정치의 서막을 열게 된다. 그후 1804년 순조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거두어지고, 1년 뒤 대왕대비가 세상을 뜨면서 비로소 순조의 친정이 이루어지는 듯했으나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이 벽파가 물러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안동 김씨의 폭정으로 공평한 인사제도인 과거제도가 문란해지고 매관매직이 성행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부패로 말미암아 정치 기강이 무너지면서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세도정권의 성립 초기부터 시작된 농민에 대한 수탈로 피폐해진 농민층의 항거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마침내 순조 11년(1811) 조선 후기의 붕괴를 가속화시킨 홍경래의 난을 겪어야 했다.
원래 인릉은 1835년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인조의 능인 장릉(長陵) 곁에 모셨으나 풍수상 능지가 불길하다고 하여 철종 7년(1856)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왕과 왕비를 함께 모신 합장릉이지만 상설은 단릉과 같은 형식이라 단출하다. 다만 비각 안의 표석(標石)은 천릉(遷陵)을 했기 때문에 구표석과 신표석 2기가 있다. 흔히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보이고 있는 망주석(望柱石) 세호(細虎)의 무늬가 왼쪽은 올라가고 오른쪽은 내려오는 좌상우하의 원칙에 맞게 선명하게 남아 있기도 하다.
인릉의 정자각 오른쪽 숲길 끝에는 헌릉이 있다. 이 길은 헌릉을 옆으로 진입하는 길인데 정면 홍살문 건너편은 막혀 있어 통행이 불가능하다. 헌릉은 조선의 3대 임금 태종과 그의 비 원경왕후 민씨의 쌍봉릉이다.
태종과 그의 비 원경왕후 민씨의 쌍릉으로,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고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제를 이룩한 왕답게 위풍당당함이 느껴진다.
태종(1367~1422)은 태조와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의 5남으로 함흥 귀주동 사저에서 태어나 조선 왕조의 개국에 큰 공을 세워 정안군(靖安君)으로 봉해졌다.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방석의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은 그는 두 차례에 걸쳐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며 정종의 뒤를 이어 1400년 개경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른다. 재위 18년 기간 동안 그는 군사제도를 혁신하고 관제와 조세제도를 개혁, 정비하였으며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새로운 왕조의 기초를 다지는 업적을 남겼다. 1418년 충녕대군(세종)에게 양위(讓位)하고 4년간 상왕으로 머물다가 세종 4년(1422) 56세에 승하하여 헌릉의 왕후 옆에 묻혔다.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1365~1420)는 여흥부원군 민제(閔霽)의 딸로 1382년에 가례를 올렸으며, 1392년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후에는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해졌다. 태종이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의 칭호를 받는다. 태종과의 사이에 양녕, 효녕, 충녕, 성녕 등 4남과 정순, 경정, 경안, 정선 등 4녀를 두었으며, 1420년 56세를 일기로 수강궁(지금의 창경궁)에서 승하하여 이곳 헌릉에 잠들었다.
헌릉에서는 힘이 곧 정의였을 태종의 강한 위세가 느껴질 만큼 아직도 생기가 넘친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각 봉분에 병풍석을 두르고 난간석을 터서 연결한 쌍봉릉의 규모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의 석물은 조선 왕릉에 배치된 석물의 평균보다 두 배가 넘는다. 곡장(曲墻) 안에 놓인 석양(石羊)과 석호(石虎)만도 무려 16점이고 문·무인석과 석마(石馬)가 각각 8점씩 놓였으며, 망주석 1쌍을 제외하고는 각 봉분에 혼유석(魂遊石)과 장명등까지 따로따로 놓여 있어 넓은 공간이 가득 찬 느낌이다. 병풍석은 화려한 문양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우석(隅石: 소맷돌)에는 영저(靈杵)·영탁(靈鐸)을 넣었고, 면석(面石)에는 소용돌이치는 구름 속에 수관인신(獸官人身), 즉 짐승 머리에 사람 몸을 한 12지상이 선명하며, 우석과 면석의 하단에는 영지가 조각돼 있다. 문인석의 경우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한 편이고, 무인석은 워낙 조각이 깊고 섬세하여 전투용이 아닌 의식용 갑옷을 착용한 용맹스러운 무사의 모습이 화려하게 남아 있다.
사초지 아래 시설물 중 비각 안에는 용무늬의 비머리를 얹은 태종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종2품 이상 사대부의 묘에만 세우도록 원칙이 정해진다. 그러나 그런 원칙이 정례화되기 전인 국초에는 국왕의 능에도 신도비를 세웠으니, 태조와 태종 그리고 세종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 뒤로는 왕릉에 신도비를 세운 일이 없으니 여기 헌릉의 신도비는 희귀한 예에 든다고 하겠다. 헌인릉은 주변으로 개발의 손길이 아직은 심각하지 않아 다른 능에 비해 환경이 조용한 편이다.
[역사탐방 규정]
(1) 역사탐방 중 안전 책임은 회원 본인에게 있습니다.
(2) 참가 자격은 12세 이상으로 제한합니다.
(3) 회비는 투명하게 집행하고 운영위원회에 공지합니다.
(4) 잉여금은 동호회 기금으로 적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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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규정에 의거하여 운영진으로 함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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