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4장 1-31절
찬송가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오늘 본문은 유다를 심판 하시겠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1~4절까지는 심판을 말씀 하시면서도 회개를 촉구하고 있고, 5~18절까지는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고, 19~31절까지는 반복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유다에 재앙이 임한다는 내용입니다.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이 말씀에는 하나님을 떠났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언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습니까? 최초의 인간 아담이 하나님을 떠난 장소는 에덴동산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기 전, 그때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지상낙원인 에덴동산을 만드신 하나님은 그곳에 아담을 살게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영원히 살 수도 있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처럼 살았습니다. 단지 하나님과 차이가 있었다면 그것은 선악과를 먹지 못한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선악과는 하나님과 아담을 구분짓는 유일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갖지 못한 것, 선악과 마저 소유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갖게 되었을 때, 다시말해서 더이상 아담에게 부족한 것이 없게 되었을때, 성경은 그것이 죄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부족함을 느낄 때, 하나님께 내 부족함을 채워달라고 기도부터합니다. 그러나 그 부족함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내게 있는 부족함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3~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선포하면서, 두 가지 비유를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농사에 관한 비유입니다. 즉 농부가 기경하지 않은 땅에는 씨앗을 뿌리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도 회개치 않는 마음에는 은혜의 씨앗을 뿌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할례에 관한 비유입니다. 유대인의 할례는 선민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언약의 징표입니다. 그러나 몸에 하는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합니다. 내적인 변화 없이 외적인 신앙의 고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게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 할례를 행했습니다. 할례는 언약의 표징입니다. 하나님과 선택받은 백성 사이에 언약을 맺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았고, 그 분이 자신을 선민으로 택하셨으며, 서로 언약을 맺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언약을 맺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약속은 지키기 위해서 맺는 것인데, 유다 백성들은 약속을 맺고도 그 약속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분노가 불같이 일어난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 결과, 5~18절에서는 심판이 임박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7절입니다.
“사자가 그 수풀에서 올라왔으며 나라들을 멸하는 자가 나아 왔으되 네 땅을 황폐하게 하려고 이미 그의 처소를 떠났은즉 네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게 되리니”
유다를 멸하는 자를 수풀에서 나온 사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배부른 사자는 사냥하지 않습니다. 배고픈 사자가 사냥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자가 수풀에서 나왔다는 것은 배고픈 사자가 사냥을 하기 위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사자가 다시 수풀로 돌아가겠습니까? 배고픔을 해결한 다음입니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전까지 사자는 다시 수풀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비유는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치 수풀을 나온 사자가 배고픔을 해결하기 전까지 그냥 돌아갈 수 없듯이, 이제 하나님의 진노는 멈출 수 없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면서 뜻밖의 말씀을 합니다.
10절입니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진실로 이 백성과 예루살렘을 크게 속이셨나이다 이르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하시더니 칼이 생명에 이르렀나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을 크게 속이셨다고 말합니다. 속인 자가 있다면 속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속인 자는 하나님, 속은 자는 유다 백성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에 특별히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다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지만,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속이셨다고 말합니다. 평강을 주시겠다고 하고는 갑자기 멸망 시키겠다고 심판의 경고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신칭의’ 교리에 따라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게 아니기에,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도 그 행위는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한, 우리의 삶은 성화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단지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면, 욕심과 욕망의 자리, 죄악의 자리에 머물 수 밖에 없습니다. 죄악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한, 하나님의 진노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번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안심이다’ 생각하며 살다가는 언젠가 예레미야가 말한 것처럼, 크게 속았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11절입니다.
“그 때에 이 백성과 예루살렘에 전할 자가 있어서 뜨거운 바람이 광야에 있는 헐벗은 산에서 내 딸 백성에게 불어온다 하리라 이는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하게 하려 함도 아니며”
하나님의 심판은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하게 하려 함도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알곡과 껍데기를 구분하기 위한 키질도 아니고, 연단을 목적으로 주시는 시험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노 중에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14절입니다.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
유다는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회개하는 자에게 기회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은 하나님의 주권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궁극적인 이유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아주 사소한 일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사인을 주십니다.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세신바 되신 분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데, 우리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면 그 사건이 하나님 모르게 일어난 일이겠습니까? 우리의 시선으로 보면 우연처럼 보이는 일이,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실은 필연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인을 깨닫지 못하는 백성을 향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22절입니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하나님의 사인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지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지각이 없는 사람은 항체가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몸에 항체가 있는 사람은 바이러스가 몸에 침투해 들어왔을 때, 넉넉이 이겨 건강을 유지하지만, 항체가 없는 사람은 바이러스로 인해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지각하면, 미움 다툼 시기 질투가 우리 안에 들어올 때 그것을 물리칠 수 있지만,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지각이 없으면, 죄악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지각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제 19~31절까지는 반복되는 경고에서 회개하지 않는 유다에 재앙이 임한다는 말씀입니다.
23~28절입니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보라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길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어두울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
회개하지 않는 유다에 재앙이 임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이 빛을 잃었습니다. 산들은 진동하고 요동하여 새들이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온 땅이 황폐해 질 것입니다. 그러나 진멸하지는 않겠다고 하십니다. 노아의 시대도 그랬고, 소돔과 고모라 시대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그 땅이 완전히 황폐해 졌습니다. 그러나 진멸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구원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때로는 경고하시고 징계하시고 심판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멸하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럴때만 죄악으로 우리를 스스로 무너뜨리지 아니하며, 말씀으로 우리를 지어갈 수 있습니다.
기도
지금도 우리에게 돌아오라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깨서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옵소서.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 세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않게 해 주옵소서. 아주 사소한 일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사인을 보내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늘 기억하게 해 주옵소서. 오늘 하루도 말씀으로 지어져 가게 하시고, 우리 각자에게 주신 재능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게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부활을 기리는 사순절 넷째 주간이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