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 불교를 만나다.] 문희옥의 ‘평행선’
사랑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원인은 자아(自我)에 있다
서로 만날 수 없는 거리
언제부턴가 유튜브에 들어가면 ‘평행선’이란 제목의 영상이 자주 올라오곤 했다.
주로 조정민이나 설하윤 등 젊은 트로트 가수들이 부른 영상이었다.
처음에는 잘 모르는 곡이라 그냥 지나쳤는데, 자주 눈에 띄어서 호기심에 클릭해 보았다.
무척 신나고 경쾌한 곡이었다.
처음 듣는 데도, 마치 오래 전에 알고 있는 것처럼 익숙하게 다가왔다.
알고 보니 문희옥이 부른 원곡을 여러 가수들이 리메이크한 노래였다.
수백만의 조회 수를 기록한 것들도 많았다.
특히 문희옥이 등장하는 어느 영상은 800만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많은 대중이 좋아하는 노래였던 것이다.
가사를 음미하면서 들어보았다.
서로를 바라보며 사랑하고 싶은데, 다가서지 못하고 각자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제목대로 평행선을 걷고 있는 남녀 간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였다.
연인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친구 관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노래에도 등장하는 것처럼 너는 너밖에 모르고 나는 나밖에 몰라서 생긴 당연한 결과였다.
순간 붓다가 강조한 무아(無我)가 떠올랐다.
무아에 담긴 인문학적 메시지를 이해한다면,
둘 사이의 간극을 좁히고 사랑이 이루어질 것 같았다.
과연 무아를 통해 평행선을 걷던 연인은 서로 만나서 사랑할 수 있을까?
이 노래를 부른 가수 문희옥은 조금은 낯설고 색다른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왔다.
고등학교 시절 ‘8도 사투리 메들리’를 통해 데뷔했던 것이다.
앳된 모습의 여고생이 구수한 사투리를 섞어가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많은 대중에게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하였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당시 이 음반은 360만 장이 팔렸다고 한다.
가수 문희옥의 노래가 얼마나 많은 인기를 끌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성공적인 데뷔를 마친 그녀는 꾸준한 활동을 하면서 기반을 다지기 시작한다.
1989년에는 ‘문희옥’ 하면 떠오르는 ‘사랑의 거리’를 발표하여 많은 사랑을 받게 된다.
원래 이 노래는 가수 정재은이 1984년 발표한 곡인데,
문희옥이 리메이크하여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듬해 발표된 ‘강남 멋쟁이’에 이어 1991년에는 정통 트로트곡인 ‘성은 김이요’를 발표하는데,
모두 큰 히트를 하게 된다. 이처럼 연이은 히트곡을 내면서
문희옥은 트로트 가수로서 입지를 더욱 굳힐 수 있었다.
1970~80년대 가요계가 포크나 트로트 중심이었다면,
1990년대는 록이나 댄스 음악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트로트 음악은 설 자리가 좁아져만 갔다.
그녀 역시 활동 범위가 조금씩 줄어들었고 특히 결을 하면서 공백기를 가져야만 했다.
어쩌면 대중들로부터 잊히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문희옥은 1998년 ‘정 때문에’를 발표하며 가요계에 다시 복귀한다.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던 그녀의 존재를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시키는 곡이 등장하는데,
바로 2019년 발표한 ‘평행선’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노래는 사랑하는 남녀가 각자 살아온 방식만을 고집하면서
둘 사이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평행선을 걷는다는 내용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가수는 일명 ‘짝짝이 바지’를 입고 무대에 등장한다.
한쪽은 반바지를, 다른 쪽은 긴바지를 입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한 사람이 옷을 입고 있는데도 함께하지 못하는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왜 둘은 평행선을 걷고 있으며, 이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 글의 근원적인 문제의식이다.
이 곡은 오늘에도 여러 후배 가수들에 의해 다양한 버전으로 리메이크되고 있다.
밝고 경쾌하면서도 익숙한 멜로디 덕분에 대중들이 많이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다.
이 노래가 인기를 얻으면서 문희옥의 활동도 매우 많아졌다.
올 초에는 ‘복면가왕’ 프로그램에 출현하여 여전히 녹슬지 않은 노래 실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녀를 제 2의 전성기로 이끌고 있는 ‘평행선’의 노랫말이다.
“나는 나밖에 모르고 / 너는 너밖에 모르고 /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길을 걷지 평행선 /
나는 나밖에 몰랐지 / 너는 너밖에 몰랐지 / 그래서 우리는 만날 수 없는 거야 평행선 /
아직 사랑하고 있는데 / 서로 바라보고 싶은데 / 나는 다가서지 못하고 다른 길을 가고 있어 /
우리 서로 다시 만날 수 없는가 / 캄캄한 미로를 헤매이네 / 우리 서로 사랑할 수는 없는가 /
끝없는 평행선 걷고 있네”
무아, 너에게 가는 길
가수가 노래한 것처럼 그들이 평행선을 걸으면서 다가서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밖에 몰랐기 때문이다.
사랑하면서도 서로 만날 수 없는 원인이 자아(自我)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자아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자기가 자기인 이유이자 본래(本)의 바탕(質)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의자의 자아는 ‘앉는 것’이며, 책상의 본바탕은 ‘책을 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각이 세 개며,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은 삼각형이 삼각형인 이유이자 본질이다.
오늘날 자아, 본질, 정체성, 자기동일성 등 다양한 용어로 쓰고 있지만,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자아는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자기동일성을 유지한다는 특징이 있다.
‘앉는다’는 의자의 정체성은 10년 전이나 오늘이나 동일하며,
서울이 아니라 부산에 있다고 해서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이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일야는 전주에 있거나 대전에 있거나 동일한 인물일 뿐이다.
만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서로 누군지 알아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몇 해 전의 일이다. 대학 졸업 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모자와 안경, 마스크를 쓴 상태에서 그 친구를 만난 적이 있는데,
곧바로 나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얼굴을 가렸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의아해했더니,
보는 순간 한눈에 알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사물이나 사람 모두 자아, 본질을 유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를 부정하고 무아(無我)를 강조한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 자아에 집착하면 자유로운 사유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책상의 자아는 ‘책을 보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것 같지만,
이런 책상의 본질에만 집착하면 그 위에서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 꼭 차는 찻상에서만 마셔야 하며, 밥은 밥상에서만 먹어야 하는가.
모두들 기억하겠지만, 학창시절 책상은 4교시가 끝나면 밥상으로 깜짝 변신을 했다.
공부할 때는 책상이지만, 밥을 먹을 때는 밥상이었던 것이다.
책상에서 밥상을 보고 밥상에서 찻상을 볼 수 있는 자유로운 사유가 바로
무아(無我)에 담긴 인문학적 의미다.
불교에서 무아를 강조하는 또 다른 이유는 자아에 집착하면 사랑을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은 타고난 성향에 따라 이른 아침부터 활동하는 사람이 있고
저녁이 되어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 있다.
흔히 말하는 아침형 인간과 저녁형 인간이 그것이다.
이처럼 신체적 자아와 본질이 다른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문제가 발생하고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가장 많은 이혼 사유로 거론되는
‘성격 차이’는 자아가 서로 달라서 평행선을 걸었다는 고백이 아니던가.
이때 필요한 지혜가 바로 무아적 사유다.
무아는 나의 자아를 잠시 내려놓고 사랑하는 이에게 가는 길이다.
이것이 나의 본질이니, 네가 맞추라고 하는 것은 이기적인 욕심과 집착일 뿐이다.
아무리 저녁형 인간이라도 군대에 가면 일찍 일어나지 않는가.
인간은 의지와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자아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존재다.
특히 사랑한다면 그 에너지는 배가 된다. 무아는 자아를 내려놓고 사랑을 실천하는 원천이다.
이처럼 불교에서 무아를 중시하는 것은 거기에서 자유로운 사유와 사랑이 나오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자아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부정한다.
자아에 집착하면 노래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나는 나밖에 모르고 너는 너밖에 모르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경계하는 것이다.
서로 평행선을 걸으면서 캄캄한 미로를 헤매는 이유다.
그렇다면 평행선을 깨트리고 서로를 향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무아적 사유에 있다 할 것이다.
밥상과 책상은 평행선이 아니라 서로 공존할 수 있으며,
너와 나는 자아만 고집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만나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무아가 우리에게 주는 실존적 메시지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문득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여우와 두루미’가 생각났다.
여우와 두루미는 서로를 초대해놓고
상대가 먹을 수 없는 납작한 접시와 길쭉한 병에 음식을 내놓았다.
서로의 본질인 주둥이에 집착해서 자기밖에 모르는 행동을 한 것이다.
이처럼 자아만 고집하고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으면 언제든 조롱이나 폭력이 될 수 있다.
이 동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우리가 무아에 주목하는 이유도 자기중심적 사유에서 벗어나 상대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원리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관계없지만 아직 사랑이 남아있다면
늦기 전에 자신의 자아를 조금 내려놓고 방향을 돌려 한 걸음 내딛어야 한다.
나는 그대로 걷고 상대가 다가오기를 바라는 것은 이기적 욕심일 뿐이다.
여우와 두루미의 비극을 잊지 말기로 하자. 사랑한다면 말이다.
2023년 7월 18일
이일야 전북불교대학 학장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