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봉할배, 그 뜨거운 외침을 듣다
-제14회 의병의 날 기산충의원에서
(2024년 6월 1일
권 옥 희
'호국보훈의 달' 유월이다. 예전 같으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죽어간 병사들의 혼인 양 담장마다 덩굴장미가 만발할 때인데 성급하게 핀 장미들이 어느새 시들어가면서 6월을 맞았다. 봄은 어디로 가고 성큼 여름으로 들어서면서 굳이 6ㆍ25 전쟁으로 인한 동족상잔의 피 흘린 상처를 떠올리지 않아도 저절로 경건해지는 때가 6월이다.
1년에 한 달쯤은 느슨해진 정신을 담금질하며 우리나라가 처해있는 현실과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고 마음을 가다듬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전쟁 후에 지독히도 가난했던 시절을 거쳐 모든 게 풍족해진 지금 나라가 국민을 잘 살게 한 건지, 국민이 나라를 잘 살게 한 건지 나라와 국민이 똘똘 뭉쳐 오늘의 번영을 이뤄내기까지 참 눈물겨운 시절을 지나왔다.
6월 1일 국가 지정 기념일인 '의병의 날'을 맞아 오늘 우리 고향 임동에서는 아기산 자락에 위치한 수곡동(무실)의
기산충의원에서 뜻깊은 기념식이 열린다. 침략자들의 발길에 짓밟혀가는 위기의 나라를 구하고자 아버지와 삼촌뿐만 아니라 다섯 형제까지 자발적으로 의병에 참여했던 일은 어느 나라, 어느 역사에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선조들의 넋을 기리고 선비정신인 우국충절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하는 기념식에 나도 기꺼이 참여하게 됐다.
시인들끼리 정동진 바다 부챗길로 시를 찾아가는 모임과 일정이 겹쳐서 갈등도 겪었지만 발길을 고향으로 돌리게 된 것은 무엇보다 의병이나 독립투사들을 유독 많이 배출한 내 고향 임동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곳인지 직접 피부로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지난 4월 임동초등학교
총동창체육대회에 왔을 때 안동에서 일찍 출발한 우리 동기들은 학교 운동장으로 가기 전에 먼저 말로만 듣던 기산충의원에 들리게 됐다. 고즈넉한 가운데 임하호를 바라보며 의병활동을 했다는 말만 들었지 이곳에 위패를 모신 어른들은 어떤 분일까? 많이 궁금했었다.
전국에 많은 호국 성지가 있지만 이곳이 호국의 성지로 우뚝 서길 희망하는 사단법인 기산충의원은 해마다 6월 1일 의병의 날을 맞으면 안동시에서 주최를 하고 전주(무실)류씨 화수회가 주축이 되어 기념행사를 주관한다고 한다. 어느새 14회가 되었다니 우리 고향에 이런 행사가 있는지 나는 까맣게 몰랐었다. 2016년 10월에 건립된 기산충의원은 국민들이 낸 세금으로 기봉 류복기 의병장과 그 가족들의 위국충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설되었기 때문에 굳이 류가만 참석하는 게 아니라 권가 이가 김가 박가 등 전 국민 누구나 참석이 가능한 일인데도 지금까지는 류가만 참석해 온 듯하다.
시대가 변했으니 기념행사도 넓게 내다보면서 올해는 고향 살리기로 임동을 우선에 두고 임하호(臨河湖) 주변에 '호국둘레길' 조성이 목표인 것이 더 뜻깊다. 류가 종원들과 타성받이가 몇 안 되는 인원을 태운 버스가 남쪽으로 달려가는 길엔 초록 물결 사이 곳곳에 노란 금계국이 만발하다. 산우회 6월 산행 대신 향우회 선ㆍ후배들과 함께해서 우리 임동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행사인데도 충의원에 위패가 모셔진 7의사 자체가 무실 류가 입향시조인 탓에 화수회의 행사로만 비쳐온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향우들의 호응도가 그리 높지 않은 게 많이 아쉽다.
아산 현충사에 이순신 장군 후손들만 가는 게 아니고 행주산성에 권율 장군 후손들만 가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기산충의원도 역사체험장으로 누구나 찾을 수 있는 곳이고 그 넋을 기릴 수 있는 곳이다. 충의원에 모셔진 7의사의 후손들은 약 500여 년 전부터 무실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을 했기에 어쩌면 류가는 물론이고 우리 임동인 모두가 섬겨야 할 영원한 임동의 자랑인 것이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고 요즘은 한 목소리로 외쳐야 뭔가 뜻이 알려지고 이루어지는 시대이다. 화수회 사무국 일을 맡아보는 탁기 동생이 기봉할배의 뜻을 기리며 왜 '임하호 호국 둘레길'을 만들어야 하는지, 그러기 위해 비단 류가뿐만 아니라 우리 임동인들이 왜 하나로 뭉쳐야 하는지 밴드나 단톡방에 거의 매일 홍보를 하다시피 하는데도 예전 같지 않게 고향을 향한 관심이 많이 퇴색되었다.
인구 절벽의 시대에 백 년이 넘은 학교가 입학할 아이들이 없어 폐교 명단에 올라가 있는 고향, 수몰의 한을 품고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운동장을 가득 채우는 내 고향을 살리기 위한 노력은 그냥 말을 앞세운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뜻에 따른 행동이 함께할 때 가능해진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위기에 처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때에도 때가 되면 누가 보지 않아도 풀꽃은 어김없이 피었을 테지만 늘 북한의 전쟁위협에 시달리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을 노래하고 반쪽의 평화를 노래하는 지금에도 노란 물결을 이루는 길가의 금계국 꽃들은 예쁘기만 하다.
11시에 시작된 기념행사는 충의사에 위패가 모셔진 7의사께 제를 지내는 향사로 시작되었다. 충의원의 이사장을 맡고 계신 우리 류필휴 회장님은 붉은색 도포를 입고 계시고 초헌관인 정동호 전 안동시장님이 먼저 손을 씻고 들어가서 절을 하고 다음은 아헌관으로 권석환 안동문화원장님이, 종헌관으로 안중환 경상북도 안동교육청 교육장님이 술을 따르고 절을 했다. 다음은 분헌관으로 다섯 아들의 종손들이 역시 도포를 입고 제를 지냈다. 붓글씨도 잘 쓰시고 굵직한 목소리로 제를 지내는 순서를 불러주는 류창석 선배님이 참 멋져 보였다.
오늘 버스 한 대로 내려온 우리 말고도 먼 곳에서 와준 내빈들과 류성번, 김형동 국회의원, 김의승 전 서울시부시장님도 계셔서 놀랐다. 어렸을 때 보고 오랜만에 우리 전통 향사를 보는 것에 나도 엎드려 절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는데 옆을 보니 김형동 의원도 절을 하고 있었다. 유림의 고장 출신이라는 긍지는 다 똑같은지 도포에 갓만 쓰고 있어도 왠지 근엄해 보이고 조선시대의 선비정신이 살아 나오는 듯했다. 인륜과 도덕이 바닥까지 떨어진 지금, 시대를 초월한 기봉할배 같은 참 선비가 다시 세상에 나와서 이 나라의 근본인 충과 효가 선비정신으로 살아 났으면 하고 바라본다.
향사가 끝나고 강당에서 기념식을 하기 전에 충의원 뜨락을 둘러보니 박성수 임동향우회 회장님과 화수회 수석부회장이기도 한 연진 동생은 미리 와 있었고 진성이씨면서 우리를 보겠다고 식혜를 들고 찾아온 은덕이 동생도 있고 오래도록 얼굴 보지 못했던 제천 사는 류 현 동생과 반가운 해후도 했다. 멀리 대구에서도 오고 안동 사는 동기들도 많이 와서 오늘 행사가 낯설지 않게 내 어깨가 든든했다. 이렇게 친구들도 많이 왔는데 가족여행 때문에 오지 못한 은희랑 함께 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옆구리를 허전하게 했다.
또한 류점숙 영남대 명예교수님과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마침 의병의 날을 맞아 일간 아시아 투데이紙에 '이익을 보면 의리를 먼저 생각하고 위급함을 보면 목숨을 던진다'는 '見利思義 見危授命의 정신을 기린다!'는 칼럼을 써서 게재하기도 한 칼럼니스트 류석호(前조선일보 영국특파원-영남취재본부장)선배님과 수필가 류외순 님도 만났다. 그러고 보니 무실류씨는 유독 문필가를 많이 배출한 것 같다. 영남 선비 가문 중 120여 분이나 문집을 낼 정도로 가장 많이 문집을 낸 문중이기도 하다니 안동의 대표적 문필가로 우리 임동초등학교 선배님이기도 한 류안진 시인, 영원한 제국을 쓴 소설가 류철균(필명 이인화)님이 있다. 그밖에도 많은 독립운동가와 학자들을 배출했고, 정치가로 故류승번 의원과 류성걸 국회의원도 배출할 만큼 무실 류씨가 명문 가문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우리 고모할매가 무실로 시집오셨고 무실의 고모와 아재들이 우리 아버지와 외사촌간이니 나도 조금은 무실 류가와 인연이 닿아있지 않을까? 수몰되기 전에 내가 살았던 새들도 좋았지만 고택이 많고 키가 큰 아름드리 소나무가 마을 한가운데 군락을 이루고 있던 무실도 내 기억엔 참 좋았다. '이중쑤'라고 불린 소나무 숲은 기봉할배 살아생전에 심은 소나무라고 했는데 150여 호가 넘는 큰 마을에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