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프란치스코와 성 마리아 막달레나가 함께 있는 피에타
안니발레 카라치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1560-1609)는 볼로냐 출신이다.
그는 동생 아고스티노와 사촌 루도비코와 함께
볼로냐에서부터 카라치 가문의 예술적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카라치 형제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진보적인 미술가로 규정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이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름의 미술학교를 개설했다.
그들이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것은
매너리즘 화가들이 보여준 퇴행적인 동작이나 과장된 표현을 자제하고,
정확한 형식미를 갖춘 라파엘로의 이상적인 미학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피렌체의 구도우선주의와 베네치아의 채색주의를 융합시킴으로써
바로크라는 새로운 시대사조를 구현하였다.
또한 이들의 정신은 가톨릭종교개혁 정서가 최고조에 달했던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종교적 정서와 일치하였다.
로마의 대중들은 미켈란젤로가 <피에타>와 <다윗>과 같은 초기 조각에서 보여준
사실주의를 갖춘 아름다움을 다시 그리워하게 되었고,
부드럽고 우아했던 라파엘로의 그림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볼로냐 출신의 카라치 형제들은 “제2의 라파엘로”로 로마화단에 등장했고,
그 유명한 파르네세 궁전의 천장 프레스코를 완성하여 명성을 날렸으며,
이 천장화는 다음 세대에 그려질 모든 천장화의 기준의 되었다.
안니발레 카라치는 생전에 여러 점의 피에타를 그렸고
특히 말년에 집중적으로 제작했다.
그가 그린 <피에타>에서 아들의 시신을 보고 슬퍼하거나 기절하는 성모님의 모습은
바로크 미술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어 바로크 회화의 선구자의 역할을 했고,
가톨릭 종교개혁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가 1602-07년에 그린 <성 프란치스코와 성 마리아 막달레나가 함께 있는 피에타>는
사선구도로 되어 있어 바로크 미술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작품으로
양식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화면의 중앙에는 참회와 보속의 색인 자색 옷을 입은 성모님은
오른손으로 아들의 머리를 바치고 왼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있고,
성모님의 무릎에는 죽은 그리스도가 편안히 잠들어 있다.
죽었지만 단단하고 야무진 예수님의 몸은 르네상스 화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스 조각상에 피부색만 입혀 놓은 것처럼 이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애도하는 나머지 성모님과 성인들의 손짓이나 몸짓은 지극히 감상적이다.
왼쪽에는 성 프란치스코가 두 손을 가슴에 포개고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고 있고,
성 프란치스코의 발과 양손에 또렷한 상처는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 성 프란체스코는 초기 르네상스 시절에 활동하던 성인이므로
이 장면에 함께할 수 없지만,
오상을 받은 성인을 화가의 상상력으로 천 년 전의 인물로 만들어 버렸다.
오른쪽에는 붉은 옷에 긴 금발머리를 한 마리아 막달레나가
머리카락과 가슴을 여미며 콘트라포스트(Contraposto) 자세로 서서 슬퍼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여인으로,
예수님께서 승천한 뒤에는 광야를 떠돌며 선교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간의 허영과 사치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머리카락이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두고,
그것으로 옷을 대신했다는 전설에 따라 주로 긴 머리칼이 그녀를 상징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한때는 창녀였으나
예수님을 직접 찾아와 그분의 발에 향유를 바르고
그 죄를 회개했다고 해서 향유 병을 함께 그려 넣기도 한다.
이전의 피에타가 상하층의 구조로 되어 있었다면,
이 작품에서는 위에 자리했던 천사의 무리가 사라지고,
대신에 두 천사가 땅으로 내려와 그리스도의 상처를 가리키며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통에 동참할 것을 유도하고 있다.
어린 천사들의 비통한 표정이 예수님을 잃은 슬픔을 더욱 느끼게 한다.
충혈 된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약간 벌리고 죽어 가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망연자실하고 있는 성모마리아와 성인들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비탄에 집중되어 있다.
이전의 작품들이 중재자가 화면을 바라보며 그림으로 초대하는 손짓을 통해
관객이 그림을 보도록 인도했다면
이 작품에서는 중재자의 역할을 천사로 축소시키고
관람자 스스로 그림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바닥에 있는 피 묻은 못과 가시관은 예수님의 고통을 느끼게 하는 수난도구이고,
뒤에 자연을 단순화시키고 인물 뒤쪽을 어둡게 처리한 것 역시
관객이 예수님의 수난과 성모님과 성인들의 슬픔에 몰입하게 하는 장치이다.
이 작품은 1797년에 나폴레옹의 전리품이 되어 프랑스로 건너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게 되었다.